■ 보학/행장.시장(謚狀)

이헌정 유사(李憲靖遺事) - 동생 이상정

야촌(1) 2018. 1. 22. 08:03

이헌정(李憲靖) 유사(遺事) - 동생 이상정 찬

 

■ 중씨유사(仲氏遺事)

 

공의 휘는 헌정(憲靖), 자는 경선(景先), 본관은 한산(韓山)이다.

우리이씨는 목은(牧隱)선생 문정공(文靖公) 휘 색(穡)으로부터 나왔는데, 공은 그의 14대손이다.

 

문정공의 덕이 백세 뒤의 후손에게도 미치므로 우리 형제를 모두 정(靖) 자를 넣어 이름을 지었으니, 이는 근본을 생각하는 뜻을 보인 것이다.

 

고조부는 휘가 홍조(弘祚)로 벼슬은 회인 현감(懷仁縣監)을 지냈다.

호는 수은(睡隱)이며, 맑은 덕과 고상한 풍모를 지녀 당시 사람들에게 존중받았다.

 

외조부 서애(西厓) 유 문충공(柳文忠公)을 좇아 화산(花山)으로 장가들어 그곳에 자리 잡았으며, 병자년(1636, 인조14)의 난리 때는 의병장이 되었다. 증조부는 휘가 효제(孝濟)인데 청한(淸閒)을 좋아하여 벼슬하지 않았다.

 

조부는 휘가 석관(碩觀)으로, 문학과 사장(詞章)에 뛰어나 사우(士友)들의 추앙을 받았으나, 41세에 세상을 떠났다. 모친 이씨는 장악원 주부(掌樂院主簿) 밀암(密菴) 선생 휘 재(栽)의 따님이요 갈암(葛庵) 선생 휘 현일(玄逸)의 손녀로, 차분하고 정숙하여 부녀의 미덕을 지녔다.

 

이분이 17세에 우리 부친에게 시집와서 명릉(明陵) 기축년(1709, 숙종35) 3월 27일에 소호리(蘇湖里)의 집에서 공을 낳았는데, 공은 형제 중의 둘째이다.


공은 어려서부터 단아하고 수려하였으며, 아이들과 어울려 장난하기를 좋아하지 않았고, 또 말과 낯빛을 함부로 하는 일이 없었다. 병신년(1716) 겨울에 모친이 마마에 걸려 세상을 떠났다. 그때 공은 8세였는데, 슬퍼하고 곡읍하는 틈에도 젖먹이 동생을 돌보았고 일어나 측간에 갈 때도 서로 떨어진 적이 없었다.

 

어린 동생도 공을 어머니처럼 여기고 항상 공의 아명(兒名)을 부르면서 따르니, 비복의 어린아이마저도 익히 들었으므로 그 형제들끼리 부르면서도 형의 아명을 불렀다. 한번은 어린 동생이 칼에 손가락을 베여 피가 흐르니, 공이 그를 붙들고 울기를 마치 자기가 아픈 것같이 하였다.

 

음식을 먹을 때는 반드시 동생을 불러 함께 먹었고 물건 하나를 얻으면 반드시 동생에게 먼저 주었으니, 그 독실한 우애가 이와 같았다. 좀 커서는 책 읽기를 좋아하여 온종일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고, 아이들이 곁에서 즐겁게 놀고 있어도 거들떠보지 않았다.

 

공은 약간 노둔한 편으로 그리 예민(銳敏)하지는 않았지만 단정히 앉아서 천천히 책을 읽을 때는 소리가 맑고 낭랑하였고, 반드시 충분히 이해하고 암송하였으므로 처음 배울 때부터 한 번도 회초리를 맞은 적이 없었다.

 

모든 일가 사람들과 친구들이 자제들을 훈계할 때는 반드시 공의 효우(孝友)와 근근(勤謹)을 가지고 말하였고, 자제들끼리 말하면서도 역시 스스로 미치지 못한다고 하였다.


14세 때 외조부에게 가서 배웠다. 외조부는 어린아이를 가르침에 엄격하여 조금이라도 잘못이 있으면 용납하지 않고 매질하고 꾸짖어 조금도 용서하지 않았는데, 공은 3, 4년을 배우면서 한 번도 어긋나는 일이 없었다.

 

사람을 대하는 말과 행동이 가르칠 필요도 없이 순조롭고 온화하여, 마치 어른 같은 풍모가 있었다.

외조부는 늘 “이 아이는 자질이 참으로 아름다우니, 학문을 하게 할만하다.”라고 하였다.

 

이윽고 《소학》, 《대학》과 《논어》를 배웠는데, 마음에 새기고 뜻을 독실하게 하여 잠시도 게을리하지 않았으며, 관솔불을 밝혀 밤에도 책을 읽고 나무 열매를 씹어 허기를 채웠다.

 

교유하는 사람 중에서 혹 힘든 공부와 거친 음식 때문에 일찍 돌아가야겠다는 뜻을 말하면, 공은 그때마다 호강후(胡康侯)가 일컬었던 왕신민(汪信民)의 말로써 대답하였다. 집으로 돌아올 때, 외조부가 손수 경재잠(敬齋箴)지락재명(至樂齋銘)숙흥야매잠(夙興夜寐箴) 등을 써서 공에게 주니, 공이 돌아온 뒤 마음에 새기고 배접(褙接)하여 첩(帖)을 만들어 때때로 자성(自省)하였다.

 

18세에 상락 김씨(上洛金氏) 집안으로 장가들었는데, 장인(丈人) 김윤덕(金胤德)은 권학(勸學)과 글짓기를 잘하는 분이었다. 공이 가르침을 받기를 3년 동안 게을리하지 않으니, 김공이 한번은 “아무개는 성격이 화락하고 돈독하니 진실로 옛사람이 말한 ‘보배 같은 사위〔寶壻〕’이다.”라고 하였다.


신해년(1731, 영조 7) 겨울에 조모 신씨(申氏)가 병이 나서 위독하니, 공이 밤낮으로 옷을 벗지 않고 몇 달 동안 직접 약을 달이고 음식을 떠먹여 드리니 병이 나았다. 그러나 공이 이때부터 몸이 더 수척해졌고, 이듬해 2월에는 전염병에 걸려 점차 고질병이 되니, 약을 먹어도 끝내 효험이 없었다. 7월 23일 묘시(卯時)에 세상을 떠나니, 나이가 24세였다.

 

아, 슬프다. 공의 병이 심해지자, 동생인 나에게 “병을 앓고 있으니 다른 생각은 없고, 단지 남아가 나이 30이 안 되어 갑자기 죽어 불효의 죄를 크게 짓는 것이 걱정이다.”라고 하였다. 나는 그때 위로하면서 “형님은 평소에 강명(剛明)하고 기운이 있으셨으니, 조만간 반드시 쾌유할 터인데 어찌 이런 말씀을 하십니까.”라고 하였다.

 

아, 슬프다. 인자한 우리 형님이 갑자기 이렇게 세상을 떠나실 줄 어찌 알았겠는가.

그해 10월 11일에 안동부 치소(治所) 남쪽에 있는 고암(古巖)의 경향(庚向)을 등진 언덕에 장사 지냈다.

 

공은 2남 1녀를 연이어 낳았으나 모두 키우지 못하였고, 한 아들이 공이 죽기 네 달 전에 출생하였는데, 이 아이의 아명은 윤(潤)이다. 공은 천품이 순수하고 자질이 질실(質實)하였다.

 

집 안에서는 효우를 실천하고 인척들과 사이좋게 지냈으며, 향당(鄕黨)에서는 공손하고 신중하게 처신하고, 교유하는 사람들과는 온화하고 경건하게 대하였다. 어른을 섬길 때는 먼저 마음을 헤아려 따르고 대답을 공손하게 하였으며, 어린아이를 대할 때는 정성과 사랑을 지극히 하고 도리를 다하기에 힘썼다.

 

비복들에게도 험한 말을 하지 않아 어질다는 소문이 인근에 널리 펴졌다. 공의 모습을 보거나 그의 말을 들으면 온화하여 한 사람의 인인(仁人)인 듯하지만, 어떤 일이 닥치거나 중요한 일을 맡아서는 단연 강하고 과감한 장자(長者)의 풍모가 있었다.

 

공은 외가(外家)에 가서 배우면서 옛사람이 말한, 수신(修身)하여 자신을 다스리는 방법을 들었으므로, 항상 여기에 온 힘을 다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일찍 기이한 병이 들어 괴로움과 번거로움에 시달리느라 차분히 능력을 계발하여 성과를 내는 공부를 마음껏 할 수 없었으므로, 그 슬픔과 한탄을 여러 번 말하였다.

 

그러면서도 장차 서너 형제와 함께 조용한 물가에 모여 다시 학문을 연마할 수 있기를 천지 신령에게 빌어 혹시 훗날에라도 이 소망이 이루어지기를 바랐는데, 사람의 일을 알 수 없는 것이 참으로 이와 같다.

 

공의 덕은 직접 보답받지 못하였고 이름도 세상에 알려지지 못하였으며, 아름다운 행실과 훌륭한 법도도 모두 세월이 흐름에 따라 볼 수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공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공을 단아한 한 소년으로 생각할 뿐이요,

 

가깝게 서로 알던 사람 역시 공의 효우(孝友)하고 돈목(敦睦)한 행실과 온화하고 자애로우며 훌륭한 덕에 대해 모두 알 수 없게 되었다. 생각건대 이 동생은 불민하여 공의 덕을 만분의 일이라도 묘사하기에 부족하다.

 

그러나 공의 아들이 훗날 성인(成人)이 되어 공의 뜻과 사업을 계술(繼述)하고자 하더라도, 그가 보고 들을 것이 오늘보다 더욱 못할 것이니, 가물가물하여 아무도 뚜렷하게 밝히지 못할 것 같다.

 

아무래도 나는 공보다 몇 살 아래로 공의 모든 것을 자세히 알고 있으므로, 외람되이 이것을 모으고 편집하여 공의 아들에게 준다. 보이지 않는 일을 밝히고 숨은 사실을 드러내는 선비들이 이 글을 보게 되면 여기에 한마디

 

말을 해 주기를 바라노니, 이 또한 인인(仁人)과 군자가 선(善)을 권하고 미(美)를 이루는 한 방법일 것이다. 계축년(1733, 영조 9) 겨울 11월 경자일(庚子日)에 아우 상정(象靖)이 피눈물을 닦으면서 삼가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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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01]화산(花山) : 안동(安東)의 별칭이다.


[주02]호강후(胡康侯)가 …… 말 : 강후는 북송(北宋)의 학자 호안국(胡安國)의 자이다. 《소학》 〈선행(善行)〉에 있는 “왕신민이 ‘사람이 항상 나물 뿌리를 씹을 수 있으면 어떤 일이라도 할 수 있다.’라고 하였다.〔汪信民嘗言 人常咬得菜根 則百事可做〕”라는 말을 가리킨다.


[주03]경재잠(敬齋箴)과 지락재명(至樂齋銘)과 숙흥야매잠(夙興夜寐箴) : 모두 수신(修身)과 지경(持敬)에 대한 글로, 〈경재잠〉과 〈지락재명〉은 주희(朱熹)가 지은 글이고 〈숙흥야매잠〉은 송나라의 남당(南塘) 진백(陳柏)이 지은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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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仲氏遺事

 

公諱憲靖,字景先,韓山人。我李系出牧隱先生文靖公諱穡,公其十四世孫也。文靖之德裕百世後昆,故吾兄弟皆名以 “靖”,示反本也。高祖諱弘祚,位懷仁縣監,號睡隱,以淸德雅望重一世。從外祖西厓柳文忠公,娶于花山而宅焉,丙子之亂,寔爲義兵將。曾祖諱孝濟,好淸閒不仕。祖諱碩觀,以文學詞章爲士友所推,年四十一而卒。先妣李氏,掌樂院主簿密庵先生諱栽之女,葛庵先生諱玄逸之孫也。幽閒靜一,寔有閨譽,以年十七,歸于我大人,以明陵己丑之三月廿七日,生公于蘇湖之里第,公於次爲二。公幼,端好明秀,不喜隨羣兒戲嬉,亦無妄言色。丙申冬,先妣歿于痘。時公年八歲,悲傷哭泣之暇,撫育乳下弟,起旋如廁,未嘗相離。幼弟亦視之如慈母,常呼小字以隨。婢僕之小兒習聞之,呼其兄弟,亦以兄之小字。幼弟嘗刀割指血流,公持之泣如己痛,臨食必呼與之俱,得一物,必先弟而後己,其篤友類如此。稍長,嗜讀書,終日不離冊,諸兒雖遊嬉在傍,亦不顧也。公少遲鈍,不甚通銳,然端坐緩讀,聲響寥朗,必淹貫成誦。故自始學時,未嘗一受夏楚。凡宗族朋友之訓戒子弟,必以公之孝友勤謹,其子弟之相語,亦自以不及也。年十四,出就外大父學。外大父敎小兒嚴,少有過差,笞責之不小貸。公從之三四年,未嘗有過失。其言爲進對之間,不待勸敎而從容溫雅,有如成人。外大父常曰:“此兒資質洵美,可使問學。”旣而受《小》《大學》、《論語》,刻意篤志,兀兀無懈,供松明以繼晷,嚼樹實而充飢。交遊或以 “攻苦食淡不若早歸”,開其意,則公輒以胡康侯所稱汪信民之言者爲對。及歸,外大父手書《敬齋箴》、《至樂齋銘》、《夙興夜寐箴》等以與之,公歸而服膺,褙紙作帖,以時自省焉。年十八,娶于上洛金氏之門,其外舅德胤好勸學著文,公挾冊受書,三年而不怠。金公嘗曰:“某豈弟淳篤,眞古所謂寶壻者也。”辛亥冬,祖母申氏遇病篤,公晝夜不解衣,親湯藥匕箸數月,病得已。公自是益瘦敗甚,明年二月,遘癘疾輾轉沈痼,服藥竟不效,以七月二十三日卯時下世,得年才二十有四。嗚呼痛哉!公疾旣病,謂其弟象靖曰:“病中無他思,但恐男兒未三十溘逝,重貽不孝之罪。” 象靖輒慰曰:“兄素剛明有氣,朝夕當得蘇快,豈宜出此語?” 嗚呼!豈知吾兄之仁而遽止於是邪?以其年十月十一日,葬于府治南古巖負庚之原。公連生二子一女,皆不育。一子先公歿之前四月而生,其小字曰潤。公天稟純粹,資地質實。居家,篤孝友、敦婣族。處鄕黨,謹以愼;接交遊,和而敬。其事長也,先意承順而唯諾之惟謹;其待幼也,極其誠愛而務盡乎道理。惡言不及於婢僕,仁聞傍被於鄰里。見其容、接其辭,蓋溫乎一仁人,而及遇事臨機務,又斷然有強毅長者之風焉。公旣從遊外庭,得聞古人所謂修身治己之法,蓋欲從事於斯焉。而惜其早抱奇疾,旋奪憂宂,不得大肆其沈潛種績之工,則憂嗟悼歎累發於言色。且將與四三兄弟相從於寂寞之濱,得以更攻互磨,庶幾賴天之靈,或有異時成就之望,而人事之不可知者,奄然如此矣。公德不得食報於躬,名不獲有聞於世,而媺行懿範,又皆日遠而不可見也。則其不知者,不過以公爲端雅一少年,而其親與相知者,亦於其孝友敦睦之行、豈弟慈良之德,有不能盡知之也。顧弟不敏,不足以摸狀公德之萬一。然孤兒異時成立,雖欲繼述其志事,而其見聞又不逮於今日,則恐翳然而莫之徵。且余後於公數歲,得公之始終詳焉,故猥爲之纂輯,以貽其孤。揚潛闡幽之士得而視之,幸賜以一言焉,是亦仁人君子勸善成美之一道也。癸丑冬十一月庚子,叔弟象靖抆血謹狀。<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