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행장.시장(謚狀)

갈암 이현일 선생 행장 - 권두인 친

야촌(1) 2017. 12. 2. 22:23

■ 갈암 이선생 행장(葛庵 李先生行狀)

 

권두인 찬(權斗寅 撰)

 

본관(本貫)은 황해도(黃海道) 재령군(載寧郡)이다.

증조(曾祖)는 은보(殷輔)로 충무위 부사직(忠武衛副司直)을 지냈으며, 통정대부(通政大夫) 승정원좌승지 겸 경연참찬관(承政院左承旨兼經筵參贊官)에 추증되었다. 비(妣)는 영가김씨(永嘉金氏=영가는 안동의 옛 이름))로 숙부인(淑夫人)에 추증되었으며, 계비(繼妣)는 전의이씨(全義李氏)로 숙부인에 추증되었다.

 

조(祖)는 함(涵)으로 통훈대부(通訓大夫) 의령현감(宜寧縣監), 진주진관병마절제도위(晉州鎭管兵馬節制都尉)를 지냈으며, 가선대부(嘉善大夫) 이조참판 겸 동지경연의금부춘추관성균관사 홍문관제학 세자좌부빈객 오위도총부부총관(吏曹參判兼同知經筵義禁府春秋館成均館事弘文館提學世子左副賓客五衛都摠府副摠管)에 추증되었다.

 

비는 진성이씨(眞城李氏)로 정부인(貞夫人)에 추증되었다.

부(父)는 시명(時明)으로 선교랑(宣敎郞) 강릉참봉(康陵參奉)을 지냈으며, 자헌대부(資憲大夫) 이조판서 겸 지의금부사 오위도총부도총관(吏曹判書兼知義禁府事五衛都摠府都摠管)에 추증되었다. 비는 김씨(金氏)로 정부인에 추증되었으며, 계비는 장씨(張氏)로 정부인에 추증되었다.

 

선생의 휘는 현일(玄逸)이고, 자는 익승(翼昇)이며, 성(姓)은 이씨(李氏)이다.

그 선조는 대개 월성(月城)에서 나왔으니, 신라 좌명공신(佐命功臣) 알평(謁平)의 후예이다.

 

승국(勝國-고려를 말함) 때에 휘 우칭(禹偁)이라는 분이 재령군(載寧君)에 봉해지면서 비로소 재령을 관향으로 삼게 되었다.

중세(中世)까지는 밀양(密陽)에서 거주하다가 후에 함안(咸安)의 모곡리(茅谷里)로 이거(移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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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 맹현(孟賢)이라는 분이 있었는데, 혜장(惠莊-世祖의 시호), 강정(康靖-成宗의 시호) 연간에 경학(經學)으로 크게 드러나 경사(京師)에서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부제학에 이르렀다. 선생에게는 5세조가 된다.

 

고조의 휘는 애(璦)로 울진 현령(蔚珍縣令)을 지냈다. 현령공은 영해(寧海)로 장가들었는데, 그곳에서 그대로 살게 되었으므로 자손들이 마침내 영해사람이 되었다. 판서공은 모두 두 번 장가들었는데, 선배(先配)는 광산김씨(光山金氏)로 검열(檢閱) 해(垓)의 따님이고, 후배(後配)는 안동 장씨(安東張氏)로 경당(敬堂) 선생 흥효(興孝)의 따님이다.

 

판서공은 경훈(經訓)으로써 자손들을 가르치면서 배양(培養)하기에 정성을 쏟았고, 장 부인은 유문(儒門)에서 가르침을 받아 엄숙하고 단아하며 학식이 있어 여중군자(女中君子)’라고 일컬어졌다. 천계[天啓-명나라 희종(熹宗)의 연호] 7년 정묘(1627, 인조 5) 1월 11일 인시(寅時)에 영해부(寧海府) 서쪽의 인량리(仁良里) 자택에서 선생이 태어났다. 장 부인이 임신하였을 때 기이한 꿈을 꾸었는데, 낳고 보니 과연 기이한 자질이 있었다.

 

아직 말을 하지 못할 때에 부엌종이 숟가락을 잃어버린 곳을 손으로 가리키니, 사람들이 특이하게 여겼다.  6세 때에 판서공의 곁에 있다가 갑자기 사람의 두 눈썹이 참으로 곤괘(坤卦)의 형상과 흡사하다고 말하니, 판서공이 매우 기특하게 여겨 시를 지어 그것을 기록해 두었다. 아이들과 어울려 놀 때도 단(壇)을 쌓고 공자(孔子)의 신위(神位)를 마련한 뒤, 제기(祭器)를 가지고 예용(禮容)을 익히는 일을 하였다. 7세 때에 비로소 학문을 배웠다. 9세 때에 화왕시(花王詩)를 짓기를,

 

봄바람에 모란꽃이 피어 / 花王發春風
말없이 계단 위에 있네 / 不語堦壇上
많고 많은 저 꽃들이여 / 紛紛百花開
어느 것이 승상이 되려는 고 / 何花爲丞相

하니, 사람들은 이미 그가 훗날 왕을 보도(輔導)할 그릇이라는 것을 알았다.

 

10세 때에 남한산성(南漢山城)이 포위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납매시(臘梅詩)를 읊기를,

창 앞의 네그루 매화나무 / 窓前四梅樹
황혼의 달을 향해 피었네. / 開向黃昏月
꽃 아래에서 음주나 하려 했더니 / 欲飮花下酒
오랑캐가 성궐을 에워쌌다 하는구나. / 奴賊圍城闕

하니, 시절에 감개하고 나라를 근심하는 뜻이 이미 언외(言外)에 넘치고 있었다.

 

일찍이 방원도(方圓圖)를 지어 천지(天地)를 형상하였는데, 선천(先天) 팔괘(八卦)를 나열하여 적고 또 태극(太極)ㆍ양의(兩儀)ㆍ사상(四象)ㆍ팔괘(八卦)ㆍ십육괘(十六卦)ㆍ삼십이괘(三十二卦)ㆍ육십사괘(六十四卦)가 생겨나는 차례를 배열하여 그림으로 그렸다.

 

또 1원(元)ㆍ12회(會)의 수를 추연(推衍)하여 설을 만들어 내니, 식자(識者)들이 경탄하기를, “이 아이는 훗날에 반드시 대유(大儒)가 될 것이다.” 하였다. 14, 5세가 되자 호탕하면서 기이한 기상이 있었다.

 

거처하던 석보촌(石保村)에는 옛날부터 총사(叢祠)가 있었는데, 사람들이 감히 그곳의 나무를 범하지 못하였다. 선생이 그 사당을 불태워 버렸으나 끝내 아무 일도 없었다. 이로부터 문리(文理)가 나고 뜻이 확립되어 제사(諸史)와 백가(百家)의 책에 널리 통하게 되었다.

 

특히 《손오병법(孫吳兵法)》 같은 병법서를 즐겨 보았는데, 북방의 들판으로 군대를 몰고 가려는 뜻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곧 자신의 처지로 볼 때 적절하지 못함을 깨닫고 비로소 생각을 돌려 내면의 공부에 착수하였으며, 오잠(五箴)을 지어 스스로를 경계하였다.

 

선생은 이미 종국(宗國-明나라)의 비상한 변고에 통분하였는데 얼마 못 가서 또 종국이 망하게 되자 하늘을 우러러 크게 통곡하면서 그로 인해 오랫동안 침식을 폐하기도 하였다. 비록 어버이를 위하여 억지로 과거에 응시하기는 하였으나 자신의 뜻은 아니었다.

 

일찍이 두 번 향시(鄕試)에서 합격하였으나 두 번 다 성시(省試)에서 떨어지자 마침내 과거 공부를 그만두었다. 중씨(仲氏) 존재 이휘일(存齋 李徽逸) 선생을 따라 한 결 같이 독서하여 뜻을 구하는 것을 일삼고, 간간이 산중이나 바닷가 작은 마을에 들어가 쌀과 소금을 가져와 어버이를 봉양하였으니, 이미 담담하게 당세에 대한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때때로 무릎을 감싸고 길게 읊조리면서 세상과 시속을 근심하는 뜻을 또한 하루도 잊어 본 적이 없었다. 이보다 앞서 효종대왕(孝宗大王)의 복제(服制)를 의정(擬定)할 때에 송시열(宋時烈)이 참람되이 사종복제(四種服制)에 있는 ‘체이부정(體而不正)’의 설을 끌어대었는데, 견준 것이 경우에 맞지 않은데도 단정하여 국시(國是)로 삼아 버리니, 인심이 분개하고 국론이 흉흉하였다.

 

그러나 한마디라도 입 밖으로 내면 곧 유배(流配)와 금고(禁錮)가 뒤따르니 사람들이 모두 화를 당할까 두려워하여 감히 다시 말하지 못하였다. 병오년 봄에 영남의 유림들이 한목소리로 “때가 늦었다고 해서 논하지 않을 수 없다.”라고 하면서 장차 맞서서 글을 올리고자 하였는데, 선생에게 상소문을 지어 주기를 청하였다.

 

선생은 송시열이 헌의한 것을 죽 열거하고 일일이 공파(攻破)하였는데, 그 대략에, “천자나 제후가 이미 차례를 계승하여 사업을 이었고 조부(祖父)의 후계로서 왕위를 이어받아 신령과 백성을 다스리게 되었다면 계출(系出)의 종지(宗支)나 족서(族序)의 존비(尊卑)는 다시 논해서는 안 됩니다.

 

‘왕위를 장차 이어받는 것[將傳]’과 ‘왕위를 이미 이어받은 것[旣傳’은 사체(事體)가 전혀 다릅니다. 어찌 왕위를 세자자리에 견주고 지존(至尊)을 저이(儲貳)와 같게 보아 적서(嫡庶)를 다투어 따지고 종지(宗支)를 분변해 논함으로써 분분하여 결말이 나지 않는 의심을 생기게 할 수 있단 말입니까.

 

신자(臣子)는 군부(君父)에 대해서 근신과 공경을 다해야 하니, 마땅히 기휘(忌諱)해야 할 바에 대해서는 감히 직서(直書)해서는 안 됩니다. 이런 까닭에 주자(朱子)께서는 일찍이 상 태후(向太后)의 말을 거론하면서 ‘왕(王)들이 모두 서자(庶子)였다.’라는 글귀에 이르러서는 이에 ‘운운(云云)’이라는 글자로 ‘서자’라는 말을 대신하였습니다.

 

단왕(端王)은 사실 신종(神宗)의 서자인데, 일찍이 천하(天下)의 황제가 된 적이 있다는 이유로 감히 이러한 호칭을 글에다 쓸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임금을 높이고 나라의 좋지 않은 일은 감춘다.’라는 의리입니다.

 

지금 우리 효종(孝宗)께서는 차적(次嫡)의 정(正)으로 공경히 왕업을 잇고 삼가 천명에 응하였는데, 송시열이 큰소리로 떠벌려 조금도 거리낌 없이 ‘효종대왕을 인조대왕(仁祖大王)의 서자라고 하는 것이 해될 것이 없다.’라고 하니, 결코 신하 된 자의 말이 아니며 임금을 높이는 도리가 아닙니다.

 

예문(禮文)이 방대하고 해석이 분분하다 보니 옛날의 큰 유학자들도 간혹 고거(考據)의 실수를 면하지 못하였습니다. 만약 송시열이 애초에 틀린 것을 합리화하는 잘못이 없었다면 이른바 ‘군자의 과실은 참으로 해와 달이 바뀌는 것과 같다.’라고 하는 경우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여기에서 벗어날 생각은 하지 않고 왜곡 되이 애매하게 둘러대는 계책을 내었으니, 이것이 임금을 욕되게 하는 죄를 짓고 불경(不敬) 하다는 죄명을 받으면서도 끝내 아무 말로도 스스로 해명하지 못하는 이유입니다.” 하였다.

 

상소(上疏)가 비록 쓰여 지지는 않았지만 목재(木齋) 홍공 여하(洪公汝河)가 그 문장을 보고 극구 칭찬하기를, “기왕의 잘못을 바로잡고 후대의 의혹을 해소하기에 충분하다.” 하고는, 마침내 도의(道義)의 교분을 맺었다.

 

갑인년(1674, 현종 15) 8월에 현종(顯宗)이 승하하고 금상(今上) 숙종(肅宗)이 즉위한 뒤, 선왕의 유지를 잘 계승하여 먼저 나라의 예를 바로잡았다. 이에 선생을 효묘 침랑(孝廟寢郞)에 임명하였다. 이보다 며칠 전에 판서공의 상을 당하여 아직 복을 벗지 않은 상태였는데, 또 사직서 참봉(社稷署參奉)에 제수되었다.

 

정사년(1677, 숙종 3) 여름에 천거해 주는 자가 있어서 장악원주부(掌樂院主簿)에 초수(超授)되자 비로소 나아가 명에 응하였다. 곧 공조 좌랑(工曹佐郞)으로 옮겨졌는데, 어버이가 늙었다는 이유로 정고(呈告)하고 고향으로 내려왔다.

 

문정공(文正公) 허목(許穆)이 상(上)께 진언하기를, “근래에 이모(李某)를 보니, 참으로 유자(儒者)였습니다.

경연(經筵)에 이 사람이 빠져서는 안 됩니다.” 하였다. 그해 겨울에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에 임명되었다.

여러 번 사양하였으나 윤 허 받지 못하여 마침내 직임에 나아갔다.

 

경연의 신하들이 건의하여 경연에 입시하게 할 것을 청하였는데, 재차 사양하였으나 윤허하지 않고 유지를 내려 포유(褒諭)하였다. 어떤 일로 인하여 체직되었다가 곧 공조정랑에 임명되었고 다시 지평이 되었다.

 

글을 올려 고사(固辭)하고 이어서 다섯 조항을 아뢰었는데, 정학(正學)을 밝혀서 대본(大本)을 세우고, 기강(紀綱)을 진작하여 풍속을 면려하고, 공도(公道)를 넓혀 왕법(王法)을 바루고, 충간(忠諫)을 받아들여 막히고 가리 운 것을 제거하고, 민정(民情)을 살펴 실질적인 혜택을 행하라는 내용이다.

 

끝에서는 일욕(逸慾)을 경계하고 신체를 보호해야 한다는 설을 거듭 고하였는데, 상이 새로 큰 병에 걸려 아직 조섭(調攝) 중이었기 때문이다. 그 말이 간절하고 분명하여 임금에게 고할 때의 체례(體例)를 깊이 얻었다. 상이 후한 내용으로 비답을 내리고 이어서 마장(馬粧) 1부를 하사하여 가장(嘉奬)하는 뜻을 보였다.

 

선생은 즉시 소를 올려 사사(辭謝)하고 인하여 경연관(經筵官)에서 해면해 줄 것을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당시에 조신(朝紳) 중에 한 가지 작은 혐의 때문에 서로 비방하고 헐뜯다가 음사(陰私)를 들추어내기까지 한 일이 있었는데, 선생은 ‘이는 장사치나 여자들이 다투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

 

사풍(士風)을 무너뜨리고 조정을 욕보인 것이 크다.’라고 하여 마침내 한(漢)나라 때 어사(御史)가 공승(龔勝)과 하후상(夏侯常)을 탄핵했던 일과 송(宋)나라 때 팽 중승(彭中丞)이 구양수(歐陽脩)를 논박했던 사실을 인용하여 장차 발론(發論)하려고 하였는데, 동료 관원(官員)들의 의론이 일치하지 않았다.

 

이에 인혐(引嫌)하여 체직되었는데, 아직도 경연관의 직임을 맡고 있었으므로 감히 떠난다는 말을 하지는 못하였다. 마침 상의 질병이 완쾌되자 대신들이 종묘(宗廟)에 고하고 진하(陳賀)를 받기를 청하고, 또 종계(宗系)와 관련하여 무고(誣告)를 당한 일로 청(淸)나라에 변무사(辨誣使)를 보내려는 논의를 하였다.

 

선생이 밀소(密疏)를 올렸는데, 그 대략에, “진하받기를 청하는 것은 참으로 신하로서의 지극한 마음에서 나온 것이지만 그것을 겸손히 사양하는 아름다움은 더더욱 받들어 따라야 합니다. 속히 정지하게 하여 사방을 풍동(風動)시키소서.” 하였다.

 

또 아뢰기를, “이번에 변무사를 파견하려고 하는 것은 한갓 뒷날 역사를 기록하는 자들의 의심만 야기하여 종계에 거듭 치욕을 끼치게 될 것입니다. 북쪽 오랑캐는 우리에게는 종묘사직의 원수이며, 우리 명(明)나라 300년의 국운을 끊었습니다.

 

조공(朝貢)으로 섬기면서 적당히 관계를 유지하고 끊어 버리지 않는 까닭은 단지 부득이한 형세 때문일 뿐입니다. 어떻게 깊은 수치를 잊고 큰 치욕을 무릅쓴 채 이렇게 이루어져도 영광이 되지 못하고 이루어지지 않아도 손해될 것이 없는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속히 이익이 없는 사행(使行)을 중지하시어 뒷날의 후회를 남기지 마소서.” 하니, 상이 비답하기를, “하례를 받는 일은 내 생각에도 본래 원하지 않았으니, 즉시 해조(該曹)에 명하여 중지하게 하겠다. 변무하는 일은 반드시 분명하게 해명하고야 말 것이니, 다시 번거롭게 논하지 말라.” 하였다.

 

얼마 안 있어 도로 지평에 제수되었다. 선생은 고사(固辭)하고 인하여 중비(中批)로 관직을 제수하는 잘못에 대해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이어서 정고하고 돌아와 근친(覲親)하였다. 상이 오래도록 경연을 폐하였기 때문에 한 통의 상소를 지어 바치려고 하였는데, 임금을 번독스럽게 한다는 충고가 있어 마침내 중지하고 올리지 않았다. 6월에 또 지평이 되었는데, 여러 번 사양하여 마침내 체직되었다.

 

처음에 상이 유충(幼沖)하신 나이로 보위(寶位)에 올라 발분(發奮)하여 치적을 이루기를 도모하였다. 일찍이 ‘임금이 배라면 백성은 물이다.〔舟水君民〕’라는 비유를 가지고 화공(畫工)에게 명하여 그림으로 그리게 하고 또 친히 그에 대한 설을 지어 나라를 다스리는 방법에 대해 논하였다.

 

그 조목이 다섯이었는데, ‘학문을 좋아 한다’, ‘어진 인재를 등용 한다’, ‘충성스러운 간언을 받아들인다.’, ‘잘못을 지적하는 말을 즐겨 듣는다.’, ‘재물을 천시하고 덕을 귀하게 여긴다.’는 내용이었다. 이때에 이르러 선생이 탄식하기를, “성상의 총명과 예지라면 충분히 큰일을 이루실 수 있는데도 조정이 안정되지 못하고 국사(國事)가 날로 어그러져 가니, 어찌 임금은 있는데 신하가 없어서 이 지경에 이른 것이 아니겠는가.

 

내가 비록 물러나 초야에서 은거하고 있지만 일찍이 시종(侍從)의 반열에 참여하였으니, 어찌 한마디 말로써 근폭(芹曝)의 정성이나마 바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고, 마침내 주수도설(舟水圖說)의 내용과 관련되는 것을 경전(經傳)에서 가려 뽑아 정리하여 6편을 만들고 《어제주수도설발휘(御製舟水圖說發揮)》라 이름 하였다.

 

그리고 수천 자의 상소를 기초(起草)하여 반복해서 그 뜻을 밝힌 것이 완곡하고 간절하였는데, 그 귀결은 학문을 좋아하라는 데에 있었다. 또 그 차집(次輯)한 뜻을 서술하기를, “고대의 제왕들 중에 이 다섯 가지를 바탕으로 삼지 않고 치도(治道)를 이룬 이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른바 학문이란 것이 어찌 많은 서적을 섭렵하여 기송(記誦)하는 것을 뜻하겠으며, 이른바 어질다는 것이 어찌 자기의 사욕(私慾)을 따르는 것을 뜻하겠으며, 이른바 간언을 받아들여 잘못을 고친다는 것이 어찌 마음속으로는 그렇지 않다고 여기면서 겉으로만 우선 따르는 것을 뜻하겠으며, 이른바 검소하고 덕을 귀하게 여긴다는 것이 어찌 말이나 웃는 따위의 겉모습으로만 하고 그치는 것을 뜻하겠습니까.

 

참으로 알고 실천하여 성현(聖賢)의 경지에 이르며, 충성스러운 신하를 찾아서 그의 도움을 받아 자기를 바로잡는 이익을 얻으며, 안으로 반성하고 자신의 잘못을 고쳐서 마침내 허물이 없는 상태가 되며, 여색(女色)을 좋아하듯이 어진 이를 좋아함으로써 실제로 그 예경(禮敬)을 극진히 갖추는 것을 말할 따름입니다.

 

지금 수집(蒐輯)한 이 책은 비록 어리석은 신(臣)이 얕은 소견으로 서책들을 보고 추려 모은 것이지만, 그 말인즉 이제(二帝), 삼왕(三王) 및 뭇 성인들의 말씀이며 역대 충현(忠賢)들이 임금을 깨우치기 위해 올린 훌륭하고 지당한 의론들입니다.

 

전하께서 만약 정사(政事)를 보시는 틈에 한번 읽어 보시되 아래위로 훑어보아 여유롭게 자득(自得)하는 데 이르기를 마치 주자(朱子)의 수도선부(水到船浮)의 뜻과 같이 하고, 정성을 미루어 어진 이를 임용하여 함께 시국의 간난(艱難)을 구제하기를 마치 고종(高宗)의 거천주즙(巨川舟楫)의 필요와 같이 하고, 윗사람은 겸손하고 아랫사람은 기뻐하며 중심을 비워서 상응(相應)하기를 마치 《주역(周易)》의 주허리섭(舟虛利涉)의 괘상(卦象)과 같이 하신다면, 주수(舟水)의 비유가 그저 이름난 고사성어가 되는 데 그치지 않고 반드시 능히 근면하고 능히 검소하여 실제로 훌륭히 성공을 거두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배를 조종할 때 형세가 한쪽으로 쏠리면 가기 어렵고 시내를 건너는 일은 굳건하지 않으면 순조로이 되지 않는다 하니, 이는 참으로 배에 의지해 물길을 가는 자가 더욱 유의해야 할 점입니다. 그리고 배에 물이 새서 파도에 가라앉는 것은 오직 사공이 운행을 제대로 하지 못해서이니, 배 안의 사람들은 다 물속에 빠져 죽게 될 터이고 기슭에서 이 광경을 보는 사람들은 모두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때에는 사공을 불러 깨워서 깊이 술에 취하지 않도록 하고 마음을 안정시키고 힘을 다하여 백성들을 구제하겠다는 뜻을 조금도 늦추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하였다. 상이 읽고서 감탄하여 호피(虎皮) 1령(領)을 하사하였다.

 

경신년(1680, 숙종 6) 여름에 허견(許堅)과 이남(李枏)의 악언(惡言)이 상을 범하여 큰 옥사가 일어나니, 김수항(金壽恒), 민정중(閔鼎重) 등이 다시 기용되어 삼공(三公)이 되고 종실과 대신, 중신들이 모두 반역죄(叛逆罪)로 논핵을 받아 죽거나 유배되었다.

 

다음 해에는 오상 시수(吳相始壽)가 하옥되어 사사되었고, 또 다음 해에는 허새(許璽)의 옥사가 일어나 죽은 자가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선생은 경신년 7월에 내간상(內艱喪)을 당하였다. 상을 마치고 나서 탄식하기를, “국사에 눈물을 흘릴 만한 바가 있으니, 한마디 말도 없이 있으면서 신하로서의 책무를 저버려서야 되겠는가.” 하였다. 마침 재이(災異)가 있어서 직언(直言)을 구하였는데, 선생은 즉시 유지에 응하여 소를 기초하였다.

 

대략에, “옛날에 효부(孝婦)가 원통하게 죽자 동해(東海)에 3년 동안 가뭄이 들었고, 구양철(歐陽澈)이 억울하게 죽자 초주(楚州)에서 8월에 눈이 내렸으며, 외척(外戚)이 멋대로 횡행하자 해일이 일고 겨울에 꽃이 피었으며, 신하가 국권(國權)을 전단(專斷)하자 지진과 일식(日蝕)이 있었습니다.

 

그 밖에 무지개, 흙비〔霾霧〕, 혜성, 지진, 우레, 눈, 바람, 우박 등의 재이가 모두 신하가 임금의 밝음을 가리고 간사함이 정도(正道)를 이기며 음(陰)이 모여 양(陽)을 에워싸서 조화되지 못하고 흩어져 버린 소치이니, 하늘과 사람이 교감하는 이치가 어찌 깊이 절실하고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겠습니까.

 

은(殷)나라 고종(高宗)이 정치(鼎雉)의 이변을 만나 능히 그 일을 바로잡자 은나라의 도가 부흥하였고, 주(周)나라 성왕(成王)이 바람과 우레의 변고에 느낀 바가 있어 친히 주공(周公)을 맞이하자 바람이 거꾸로 불어 벼를 일으켜 세웠고, 한(漢)나라 명제(明帝)가 한랑(寒朗)의 말을 채택하여 초옥(楚獄)의 원통함을 다스리자 오랫동안 가물다가 즉시 비가 왔으며, 송(宋)나라 태종(太宗)이 구준(寇準)의 말을 받아들여 양부(兩府)의 잘못을 꾸짖자 크게 가물다가 마침내 비가 왔습니다.

 

오늘날 당한 변고를 가지고 삼가 한번 유추해 보면, 음은 성하고 양은 미약하며 막히고 맺힌 현상이 있는 듯합니다. 이는 전하의 총명이 조금 이지러져 혹 막히고 가려진 근심이 있음을 면치 못해서가 아닐는지요? 전하의 기강이 조금 느슨해져 혹 사적인 관계에 연연함이 있음을 면치 못해서가 아닐는지요?

 

외척의 세력이 너무 성하여 혹 방종하고 전단하는 조짐이 있어서가 아닐는지요?

크고 작은 옥사(獄事)가 많아 혹 잘못 걸려들고 부당하게 죽은 원통함이 있어서가 아닐는지요?

 

혹 시비(是非)가 전도되어 공의(公議)가 펴지지 않은 일이 있어서가 아닐는지요?

혹 비방과 칭찬이 진실을 어지럽혀 사(邪)와 정(正)이 구분되지 않은 일이 있어서가 아닐는지요?

 

혹 상하가 서로 붙좇아 직언이 상의 귀에까지 들리지 않은 일이 있어서가 아닐는지요? 혹 자기편은 감싸 주고 반대편은 내쳐서 용사(用舍)가 공정성을 잃어서가 아닐는지요? 무릇 반드시 이 몇 가지가 있은 뒤라야 재이를 불러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궁중에서 한가한 때에 마음을 비우고 생각을 고요히 하여 이 몇 가지를 마음에 헤아려 보고 일에서 헤아려 보아 통렬히 스스로를 반성하소서. 그 유무(有無)를 살피고 허실을 살펴보시면 반드시 척연(惕然)히 깨닫고 측연(惻然)히 감동하시어 일의 시비(是非)와 정치의 득실(得失), 사람의 사정(邪正)에 대해 그 실상을 모두 알 수 있게 되어 그 정상(情狀)을 감출 곳이 없게 될 것입니다.”하였다.

 

끝에서 다시 ‘천명에 응할 때는 진실로써 하고 형식적으로 하지 않아야 한다’는 뜻을 거듭 말하였다.

친구와 자제들이 다시 만류하여 그만두기를 청하면서, 화만 초래할 뿐 득이 될 것이 없음을 말하였는데, 선생은 탄식하면서 이르기를, “일신(一身)의 화복(禍福)에 대해서는 내 이미 잊어버렸다.” 하였다.

 

그 글이 올라가자, 상이 비답하기를, “나라를 위해 아낌없이 말해 준 성의는 내 가상하게 여긴다.

다만 그런 말들이 모두 공정한 마음에서 나왔는지는 알지 못하겠다.” 하였다.

 

영상(領相) 김수항이, 역적을 두둔한 죄로 다스리기를 청하였는데, 마침 변호해 주는 이가 있어 무사하였다.

이때부터 기용되지 못하고 향촌에 처한 것이 6, 7년이었다.

 

기사년(1689, 숙종 15)에 성균관사업(成均館司業)에 발탁되었는데, 대신(大臣)과 중신(重臣) 들이 한목소리로 천거하였다. 상이 유지를 내려 돈독히 유시하기를, “내가 경학(經學)에 뜻을 두어 날마다 경연에 나아가지만, 박학하고 아정(雅正)한 유학자를 얻어 곁에 두지 못하는 것이 유감이다.

 

들으니, 그대가 독서하여 옛일에 해박하고 특히 경학에 정밀하다고 하여 즉시 그대를 성균관사업으로 삼았으니, 나의 뜻을 헤아려서 속히 올라오도록 하라.” 하였다. 선생이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으니, 상이 후한 비답을 내리고 윤허하지 않았다.

 

심지어 “번연(幡然)히 생각을 바꾸기를 내 날마다 고대한다.”라고 유시하기까지 하였다. 곧 중신의 말로 인하여 또 따뜻한 유시를 내리고 본도(本道)의 관찰사로 하여금 출사(出仕)하기를 권하게 하니, 선생은 각별한 은수(恩數)에 감격하여 비로소 소명(召命)에 응하였다.

 

아직 도성(都城)에 들어가지 않았을 때에 장령으로 옮겨졌다. 사직하고 나아가지 않으니, 특별히 공조 참의에 제수하였다. 마침 인현왕후(仁顯王后)가 폐출되어 사제(私第)에서 살았는데, 전(前) 판서 오두인(吳斗寅) 등이 간언하였다가 죄를 얻었다.

 

그리고 감히 폐서인(廢庶人)에 대해 말하는 자는 역률(逆律)로 다스리겠다는 하교까지 있었다.

선생은 ‘물러나기를 청했다가 도리어 승진하게 되었으니 농단(壟斷)과 다를 바가 없다.

 

또 나라에 변고가 있는 때에 금령(禁令)이 내렸다고 해서 끝내 한마디 말도 없을 수는 없다.’라고 하여, 즉시 소를 올려 고사하고, 이어서 아뢰기를, “전하께서는 조정의 기강을 다시 엄숙히 하시고 모든 정사를 일신하시며, 아침저녁으로 부지런히 강학(講學)에 전념하시니, 이는 장차 예법(禮法)을 따르고 이치를 따라서 몸을 닦고 집안을 바르게 하는 근본으로 삼고, 눈과 귀를 총명하게 하여 간언을 받아들이고 허물을 보충하는 바탕으로 삼으시려는 것입니다.

 

신은 삼가 나라 안에서 장차 이남(二南)의 교화가 행해지고 조정에서 군신이 화합하는 성대한 정치를 다시 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신이 방금 경기(京畿) 고을에 도착하여 삼가 저보(邸報)를 보니, 마침 주상의 마음이 편치 않으셔서 중궁(中宮)을 동요케 하시니, 어리석은 신이 평소에 전하께 바라던 바가 전혀 아닙니다.

 

신은 듣건대, 배필의 관계는 인륜의 시작이며 풍화(風化)의 근원이라고 하니, 처음을 신중히 하고 마침을 공경히 하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혹시라도 불행히 인륜의 변고에 처하게 되더라도 도리(道理)를 힘써 다하고 은의(恩義)를 곡진하게 다해야 하고, 갑자기 엄한 결단을 내려 거조가 합당함을 잃게 해서는 안 됩니다.

 

옛날 한나라 광무제(光武帝)가 앞에서 행하였다가 어진 황제의 허물이 됨을 면치 못하였고, 송나라 인종(仁宗)이 뒤에서 행하였다가 끝내 백옥(白玉)의 티가 되었으니,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유념하고 경계하소서. 신이 또 근일의 하교를 들으니, 기휘(忌諱)하는 바에 저촉되는 말을 하면 곧바로 역률로 다스리겠다는 말씀이 있으셨습니다.

 

이는 옛날 현철(賢哲)한 임금이 비방목(誹謗木)을 세우고 감간고(敢諫鼓)를 설치하여 뭇사람의 의견을 듣고 천근한 말까지 살펴서 선은 드러내고 악은 감춘 뜻이 아닌 듯합니다. 내리신 명령을 속히 도로 거두시어 언로(言路)를 넓혀 주소서.” 하였다.

 

그 상소는 금령(禁令)에 걸려 상께 전해지지는 못하였다. 이에 정협(鄭俠)이 금법(禁法)을 어기고 체마(遞馬)를 이용하여 상소를 올렸던 일을 본떠서 조리(曹吏)를 시켜 승정원에 바로 올렸으나, 또 받아들이지 않았다.

 

선생은 진언한 것은 아뢰어지지 않고 떠나려고 하였으나 되지 않아 진퇴(進退)에 근거할 바가 없게 되자 세 번이나 사양하여 반드시 체직되기를 기약하였으나 상이 끝내 윤허하지 않았다.

 

또 이조 참의로 옮겨졌는데, 간절히 사양하였으나 또 윤허하지 않았다.

두 번째 글을 올려 사직을 청하고 인하여 경신년의 무옥(誣獄)을 신속히 신원(伸冤)해 줄 것을 아뢰었다.

 

또 아뢰기를, “허견과 이남이 역심(逆心)을 품은 죄는 참으로 용서받기 어려우나, 이연(李㮒)ㆍ이환(李煥)ㆍ이혁(李爀)의 경우는 왕손(王孫)과 왕증손(王曾孫)인 지친(至親)입니다. 한나라 문제(文帝)가 회남왕(淮南王) 유장(劉長)의 네 아들을 후(侯)에 봉하였고, 송나라 태종(太宗)은 진왕(秦王) 정미(廷美)의 아들들의 관작을 회복하여 황질(皇姪)로 삼은 뜻으로 보건대, 임금이 죄가 있는 공족(公族)을 대하는 도리는 참으로 일반 사람과는 다릅니다.

 

더구나 성상께서는 경신년 옥사가 무고(誣告)라는 실상을 통촉하고 척연히 상심하시어 하늘에 밝히고 지하에 고하는 은택을 베푸려고 하셨으니, 이는 요순(堯舜)의 마음입니다. 아, 세 사람이 혹은 외딴섬에 있고 혹은 바닷가에 있어서 근심하고 두려워하며 지낸 지 이미 10여 년이 지났습니다.

 

만약 이 세 사람이 안개와 이슬, 이내와 장독(瘴毒)에 해를 입어 명대로 살지 못하고 죽게 된다면, 전하께서 어찌 척포두속(尺布斗粟)의 노래를 괴로워하시지 않겠으며, 사변(事變)에 처하여 도리를 다하지 못했다는 한을 남기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또 아뢰기를, “오두인 등이 비록 망언(妄言)하는 죄를 범하기는 하였지만 그 자식과 사위, 숙질(叔姪)까지 금고(禁錮)시켜서는 안 됩니다. 이상진(李尙眞)도 갑자기 엄한 견책을 내려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니, 상이 후한 비답을 내리고 체직은 윤허하지 않았다.

 

그리고 청한 것은 특별히 윤허하였으나, 오직 이상진의 일은 윤허하지 않았는데, 후에 등대(登對)하여 어전(御前)에서 청한 것으로 인해 위리(圍籬)에서 풀려 부처(付處)되었다. 그리고 곧 시탄(柴炭)과 미육(米肉)을 하사하고 특별히 사관을 보내 전유(傳諭)하게 하였으니, 모두 각별한 은수(恩數)였다.

 

선생이 여러 번 사직하였으나 허락하지 않고 재촉하는 명이 더욱 다급해졌으므로 마침내 들어가 사례하고 경연에 입시하였다. 당시에 바야흐로 《주역》을 진강(進講)하고 있었는데, 내용을 인하여 경계를 진술하고, 또 언외(言外)의 뜻을 추론하여 반복해서 설을 내었다. 강이 끝나고 또 사례(事例)를 가지고 충고를 드리니, 매우 절실하고 분명하였다.

 

상이 모두 가납(嘉納)하였다. 선생이 새로 산야(山野)에서 나와 처음으로 임금을 뵐 적에, 동작이 예법에 맞고 아뢰는 바가 분명하고 시원하여 온 조정이 서로 사람을 얻었다고 기뻐하였으며, 상도 멀리까지 눈길로 전송하였다.

 

6월에 성균관 좨주(成均館祭酒)로 옮겨 임명되었다. 재차 사직하였으나 윤허하지 않고 시탄과 미육을 계속해서 공급하게 하였다. 선생께서는 월름(月廩)이 이미 넉넉한데 다시 격외(格外)의 각별한 은전(恩典)을 받는 것은 더욱 온당치 못하다고 하여 사양하고 받지 않았으나, 상이 끝내 들어주지 않았다.

 

당시에 복더위로 인해 강(講)을 파한 지 오래되었으므로 선생이 소를 올려 아뢰기를, “조강(朝講)과 주강(晝講)을 통한 규잠(規箴)과 경외(敬畏)의 유익함이 전혀 없고 오직 친애하고 친압하는 사사로움만 있으면, 날이 가고 달이 가는 동안에 지려(志慮)가 변하게 되어 천리(天理)는 점점 소멸되고 인욕(人慾)은 점점 자라나지 않겠습니까.” 하고, 또 정자(程子)가 여름 동안 진강(進講)할 것을 청한 것과 진서산(眞西山 진덕수(眞德秀))이 야대(夜對)가 유익하다고 한 말과 우리 성종대왕(成宗大王)께서 주강과 야대를 하는 규칙을 둔 것을 들고 아뢰기를, “마땅히 멀리는 옛 훈계를 상고하고 가까이는 선왕의 모범을 따라서 명유(名儒)를 초빙하고 선발하여 권강(勸講)하는 인원을 채워서 상번(上番)과 하번(下番)으로 윤번(輪番)하게 하고, 낮에는 자문을 구하고 밤에는 소대(召對)하신다면 개발(開發)되고 훈도(薰陶)되는 유익함이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이전에 이이명(李頤命) 등이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 김 문충공(金文忠公)의 시주(諡註)를 바꾸면서 드러내 놓고 폄척(貶斥)하였는데, 선생이 일찍이 진강(進講)하는 것을 인하여 문충공의 도학(道學)의 연원에 대해 극진하게 아뢰어 이전의 주(注)를 그대로 쓸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공론이 통쾌하게 여겼다.

 

선생은 좨주의 직임에 대해서 여러 번 사양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간간이 태학(太學)에 나아가 제생(諸生)들을 불러 상읍례(相揖禮)를 행하고 《대학장구(大學章句)》를 강론하면서 궁리(窮理)ㆍ수신(修身)ㆍ명체(明體)ㆍ적용(適用)의 요체에 대해 추론(推論)하고 또 글을 지어 관학(館學)의 제생들을 통유(通諭)하기도 하였다.

 

얼마 안 있어 예조 참판으로 승진하고 세자 보양관(世子輔養官)을 겸하였는데, 조의(朝衣) 1습(襲)이 하사되었다. 선생은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8월에 대사헌으로 옮겨졌다. 잇달아 사양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마침 상이 병환이 있어서 할 수 없이 직책에 나아가기는 하였으나 곧 병으로 정고(呈告)하였다.

상이 태의(太醫)를 보내고 약물을 내렸으며 어주(御廚)의 진미를 나누어 주기까지 하였다.

 

선생은 연달아 글을 올려 사사(辭謝)하고 이어서 본직(本職)과 겸직(兼職)의 여러 직임들을 해면(解免)시켜 줄 것을 청하였으나, 모두 허락하지 않았다. 선생은 더욱 힘껏 사직하여 비로소 체직되었다.

 

마침 9월에 천둥 번개가 치는 이변이 있었으므로 선생은 《서경》 〈홍범(洪範)〉의 ‘게으르면 항상 더운 날씨가 뒤따른다.〔豫恒燠〕’라는 내용과 《주역》 〈고괘(蠱卦)〉의 ‘고는 원하여 형통하다.〔蠱 元亨〕’라는 뜻을 추론하여, 기강을 진작시키고 정사를 닦고 국전(國典)을 엄숙하게 하여 하늘의 경계에 답해야 한다는 설을 반복해서 아뢰었다.

 

인현왕후가 사제(私第)에 거처한 뒤로 조정에서는 엄한 유지(有旨)를 두려워하여 아무도 감히 다시 언급하지 못하였는데, 선생이 소를 올려 아뢰기를, “폐비(廢妃) 민씨(閔氏)는 중궁의 법도를 지키지 않아 스스로 하늘로부터 버림을 받았지만 전하께서 처우하는 방도에 있어서도 마땅히 도리를 힘써 다하여 은의(恩義)를 두루 온전히 한 뒤에야 여망(輿望)을 위로하고 뭇사람의 마음에 부합할 수 있을 것입니다.

 

민씨는 중궁으로 정해져 지존을 받든 지 거의 10년이 되는데, 지금 비록 죄가 있어 폐출(廢黜)되기는 했지만 여항(閭巷)의 사가(私家)에 두고서 그 늠료(廩料)를 끊어 버리고 조금도 관대하게 돌봐 주는 뜻이 없다면 마땅함을 지나쳐 중도를 잃게 됨을 면치 못할 듯합니다.

 

한나라 광무제와 송나라 인종이 진 황후(陳皇后)와 곽 황후(郭皇后)를 대우한 고사를 따라 이궁(離宮)의 별관에 거처하게 하고 방위(防衛)를 설치하여 규금(糾禁)을 근엄하게 하고 늠료를 헤아려 대 주어서 의지할 바가 있게 하소서. 그리하신다면 전하께서 변고에 대처하는 도리에 있어 거의 곡진하여 여한이 없게 될 것입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사체가 고금이 다르니, 결코 가볍게 논의하기 어렵다.” 하였다.

 

선생이 비록 은수(恩數)에 감격하여 일어나 소명에 응하기는 하였으나, 조정에 오래 있는 것은 본뜻이 아니었다. 큰 병을 앓고 난 이후로는 물러나기를 구하는 것이 더욱 간절하였으나 상이 모두 후한 비답을 내리고 윤허하지 않았다.

 

10월에 또 대사헌에 임명되어 사직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연달아 경연에 입시하면서 그 내용을 인하여 경계를 아뢰었는데, 기휘(忌諱)하는 바가 없었으니 상이 모두 훌륭하다고 칭찬하였다.

 

강(講)이 끝날 때마다 문득 절의(節義)를 숭상하고 인현(仁賢)을 본받으며 억울함을 해소해 주라는 뜻으로 간절하게 아뢰니, 혹은 증직(贈職)하고 혹은 치제(致祭)하고 정려(旌閭)하였다.

 

선생이 돌아가 분황(焚黃)하고 개장(改葬)하기를 청하니, 상이 처음에는 허락하지 않다가 두 번이나 소를 올리자 마침내 윤허하였다. 유지를 내려 말을 지급하고 관청에서 제수(祭需)를 공급하게 하니, 선생이 사사(辭謝)하였다.

 

이어서 소를 올려 세 가지 조목을 아뢰었는데, 첫째는 백성들을 보호하여 근본을 공고히 할 것을 말하고, 둘째는 장수를 가려 군대를 훈련시킬 것을 말하고, 셋째는 현자를 얻어서 인재를 양성하는 방도를 말하였다.

 

그리고 청하기를, “승보시(陞補試)ㆍ학제(學製)ㆍ공도회(公都會) 등 잡과(雜科)를 혁파하고 정자(程子)의 학교의(學校議)와 주자의 공거의(貢擧議)를 대략 모방하여 선비들로 하여금 덕행을 근본으로 삼고 문예를 말기(末技)로 여길 줄 알게 만든다면 인재와 풍속이 아름답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매우 크게 가납하고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상의해서 품처(稟處)하게 하였다.

조정을 하직하면서 또 아뢰기를, “근래에 감사와 수령 중에 이수언(李秀彦), 이지걸(李志傑) 같은 무리들은 제멋대로 살인을 하고도 조금도 거리낌이 없습니다.

 

만약 통렬하게 징벌(懲罰)하지 않는다면 왕법(王法)이 행해지지 않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의 말이 이와 같으니, 유념하여 깊이 궁구해 보겠다.” 하였다. 하직 인사를 하고 나자 태학생(太學生) 등이 소를 올려 만류할 것을 청하였다. 도중에 연달아 해면해 줄 것을 청하고 아울러 학문에 힘쓰고 자신의 사욕을 이겨야 한다는 뜻으로 아뢰었다.

 

또 아뢰기를, “신이 마땅히 체직되어야 하는 이유가 네 가지 있으니, 즉시 윤허하여 주시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였는데, 상이 조목별로 분별하여 체직되어서는 안 되는 네 가지 이유를 말하고, 또 이르기를, “천기(天氣)가 얼어붙어 추위가 점점 혹심해진다. 여정(旅程)을 생각하니 참으로 매우 염려스럽다.” 하였다.

 

또 별도의 유시를 추가로 내리면서 소의 내용을 일일이 거론하여 답하였는데, 그 끝에 이르기를, “경이 진달한 것처럼 한다면 인재가 성하게 배출되고 세도(世道)가 크게 변할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경오년(1690, 숙종 16) 봄에 효묘(孝廟), 현묘(顯廟) 두 임금과 명성왕후(明聖王后 현종의 비 김씨)ㆍ인경왕후[仁敬王后 숙종(肅宗)의 비 김씨]의 지문(誌文)을 일번인(一番人)이 사실을 날조하여 지었으므로 즉시 고쳐지어야 한다고 말하는 자가 있었다.

 

조정의 의견이 결정되지 않아 예관(禮官)을 보내 수의(收議)하게 하였는데, 선생이 헌의(獻議)하기를, “송나라 철종(哲宗)과 휘종(徽宗) 연간에 사당(邪黨)이 국정을 농단할 때 선인황후(宣仁皇后)를 무함하여 비방하면서 못 하는 짓이 없었습니다.

 

훗날에 고종(高宗)이 사관 범충(范沖)에게 명하여 국사(國史)를 중수(重修)하게 하였는데 지문을 고쳐지었다는 말은 듣지 못했습니다. 주염계(周濂溪 주돈이(周敦頤))의 사적(事蹟)에 사실과 다른 부분이 있었는데 주자(朱子)가 반청일(潘淸逸)이 지은 지문과 포종맹(蒲宗孟)이 지은 갈문(碣文)을 가지고 산삭(刪削)하고 취사(取捨)하여 합하여 사장(事狀)을 만들었으나, 지문과 갈문을 고치지 않은 것을 혐의쩍게 여기지는 않았습니다.

 

또 위염지(魏掞之)에게 추증(追贈)하게 되어, 지명(誌銘)에 빠진 부분을 묘표(墓表)의 뒤에 써넣었으나 또한 지문을 고쳐 짓지는 않았습니다. 아마도 묘도(墓道)를 뚫고서 지문을 바꾸어 넣는 것이 참으로 편치 못한 바가 있어서가 아니겠습니까.

 

‘사대부가(士大夫家)의 일을 국가의 전례에 적용해서는 안 된다.’라고 말할 수도 있겠으나, 이렇게 하는 것은 또한 옛날 천자와 제후의 상례(喪禮)가 전해지지 않아 할 수 없이 사상례(士喪禮)를 본떠서 행했던 뜻과 같은 것입니다.” 하니, 상이 그 의론을 옳게 여겼다.

 

마침 무지개가 해를 꿰뚫고 겨울에도 날씨가 따뜻한 이변이 있어 상께서 하교하여 직언을 구하였다.

선생은 즉시 해면을 청하는 글에 《춘추》의 재이(災異)와 《홍범오행전(洪範五行傳)》을 인용하여 옛날 성군(聖君)이 공구수성(恐懼修省)하여 재변(災變)을 길상(吉祥)으로 바꾼 뜻을 극진히 말하였는데, 특히 천리와 인욕의 구분과 상벌(賞罰)과 출척(黜陟)의 분별에 대하여 정성을 기울였다.

 

상이 후한 비답을 내리고 윤허하지 않으면서, 사관(史官)을 보내 전유(傳諭)하고 함께 돌아오게 하였다.

얼마 안 되어 이조 참판으로 옮겨졌다. 두 번 사양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사관이 또 이르니 선생은 더욱 난처하게 되었다. 4월에 영양현(英陽縣)에까지 나아가 병을 고하고 돌아왔다.

6월에 세자 책봉례(世子冊封禮)를 행하였는데, 선생은 아직도 세자 보양관(世子輔養官)을 맡고 있었기 때문에 마침내 병을 무릅쓰고 길에 올랐다. 도중에 또 시강원 찬선(侍講院贊善)에 임명되었다.

 

성 밖에 도착한 뒤에 즉시 소를 올려 전후(前後)의 직책에서 해임시켜 주기를 청하고, 이어서 대본(大本)과 급무(急務)에 대해 아뢰었는데, 이른바 ‘대본을 세운다’는 것에 특히 반복해서 뜻을 기울였다.

 

소가 무려 만여 자나 되었는데 상이 비답을 내려 후하게 격려하였다. 책봉례를 행하고 나서 예조가 진하(陳賀)할 때의 의주(儀註)를 반포하였는데, 당시에 효사전(孝思殿)의 궤연(几筵)이 아직도 모셔져 있었다.

 

선생이 또 소를 올려 아뢰기를, “세자를 책봉하고 길복(吉服)을 입는 것은 그 일을 중요하게 여겨서입니다.

어전에서 하례를 받는 경우는 결코 ‘3년의 상기(喪期) 내에는 하례하는 일을 위로하는 것으로 대신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고 다섯 번 소를 올려 체직을 청하였으나, 끝내 윤허하지 않았다.

 

당시에 오랜 가뭄으로 백성들이 굶주렸는데, 영남과 호남이 특히 심하였다.

감사(監司)가 장계(狀啓)로 아뢰니, 대신들은 별도로 경관(京官)을 파견하여 그 허실(虛實)을 조사해 밝히기를 청하였다.

 

선생이 나아가 아뢰기를, “조정에서 감사와 수령을 믿지 못하여 조신(朝臣)을 파견하여 실정을 조사해 밝히게 한다면 조정의 체면을 잃을 뿐 아니라 또 궁핍한 백성들을 실망시키게 될 듯합니다.” 하니, 상이 대신들을 돌아보며 이르기를, “모두의 의견은 어떠한가?” 하였다.

 

좌의정 목내선(睦來善)이 아뢰기를, “이모(李某)의 말이 참으로 충후(忠厚)합니다.

그러나 경상 감사(慶尙監司)가 장황하게 장계를 올리고, 심지어는 ‘적지(赤地)가 천 리나 된다.’라고까지 하였으니, 반드시 그 허실을 살피고자 하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하니, 선생이 대답하기를, “그것은 그렇지 않습니다.

 

맹자가 말하지 않았습니까? ‘《시경(詩經)》 〈운한(雲漢)〉에서, 주(周)나라의 남은 백성이 씨도 남지 않겠다〔周餘黎民 靡有孑遺〕고 하였으니, 이 말을 그대로 믿는다면 이것은 주나라의 백성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는 뜻이 된다.’라고 말입니다.

 

충후한 당시의 시인으로서도 오히려 그렇게 말하였으니, ‘적지가 천 리나 된다’는 장계를 어찌 지나친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조정의 신하들이 모두 선생의 의론을 옳게 여겼으나, 상이 대신의 뜻을 어기는 것을 어렵게 여겨 끝내 파견하였다.

 

당시에 더위가 아직 가시지 않아 오래도록 경연을 열지 않았는데, 선생은 주자서(朱子書) 중에서 《대학강의(大學講義)》 한 편을 뽑아내어 소(疏)와 함께 바치면서 아뢰기를, “편중(篇中)에서 말한 것은 모두 선(善)을 진설(陳說)하고 잘못을 바로잡는 지극한 뜻입니다.

 

만약 세 번 반복해 뜻을 다하여 읽고 척연(惕然)히 두려워할 줄 안다면, 또한 훌륭한 스승이 좌우에서 권강(勸講)할 때의 유익함과 다름이 없을 것이며, 장차 천하 후세로 하여금 주자의 설이 당대에 행해지지 못한 것을 한스러워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8월에 연달아서 강연(講筵)에 입시하였는데, 《주역》에 대한 강을 마치고 나서 진언하기를, “384개의 효(爻)가 우려하고 조심하라는 뜻이 아닌 것이 없으니, 모두가 임금으로서 마땅히 유념해야 할 대상입니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건괘(乾卦)의 ‘쉼 없이 노력하라〔自强不息〕’는 것이나 곤괘(坤卦)의 ‘두터운 덕으로 만물을 싣는다〔厚德載物〕’는 것, 비괘(否卦)와 태괘(泰卦)의 군자와 소인의 진퇴소장(進退消長)의 비유 같은 것은 더더욱 중요하고 절실한 것입니다.” 하였다.

 

그 나머지 여러 괘에 대해 설명한 것도 모두 이와 유사하였다. 상이 모두 마음을 비우고 받아들였다.

선생은 나아가서는 충성을 다하기를 생각하고 화복이나 이해를 계산하지 않았다.

 

시정(時政)의 득실, 치란(治亂)ㆍ안위(安危)의 기미에 있어서는 모두 극진하게 말하고 논하면서 조금도 회피하지 않았다. 모르는 사람들은 ‘유자의 사업은 여기에 있지 않다.’ 하고, 간혹 불쾌하게 생각하는 자들이 서로 선동하여 와언(訛言)이나 비방이 차츰 일어났다.

 

선생은 떠나기를 구하였으나 되지 않아서 두 번이나 개장(改葬)하는 일로 휴가를 청하였으나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즉시 소를 갖추어 떠나야 하는 네 가지 이유를 아뢰고 비답을 기다리지 않고 곧바로 나와 하향(下鄕)하였다.

 

상이 사관을 뒤쫓아 보냈는데, “함께 큰일을 하기에 부족해서 그런 것은 아닌가?” 라는 하교가 있었다.

연달아 사직하여 비로소 본직에서 체직되었다. 유지를 내려 본도(本道)로 하여금 봄날이 되면 출사(出仕)를 권하게 하였다. 11월에 대사헌으로 옮겨지자 여러 번 사양하였으나 모두 윤허 받지 못하였다.

 

당시에 영남에 큰 기근이 들었는데, 관찰사(觀察使) 이담명(李聃命)이 구휼하는 데 급급하여 한두 가지 편의대로 경감(輕減)하여 준 일이 있었다. 또 각 고을의 수령들이 남은 쌀을 빌려 주고 미처 수봉(收捧)하지 못하니, 목상(睦相 목래선(睦來善))이 그가 자기 마음대로 한 것에 노하여 경중에 따라 처벌할 것을 청하였다.

 

선생이 그 소식을 듣고서 사직하는 글을 인하여 치도(治道)에 대해 극진하게 아뢰고, 이어서 아뢰기를, “영남 지역 기근의 참상은 실로 평년의 재해에 비길 바가 아닙니다. 도신(道臣)이 구휼하기에 급해 편의대로 일을 처리하였는데, 묘당에서는 품의(稟議)를 거치지 않았다고 하여 두 번이나 문비(問備)를 청하였습니다. 신은 삼가 개연히 탄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옛날에 급암(汲黯)이 하남(河南)에 어사(御史)로 갔을 때, 편의대로 창고의 곡식을 내어 빈민을 진휼하고 거짓으로 황제의 명을 빙자한 데 대한 벌을 내려 주기를 청하니, 무제(武帝)가 현명하게 여겨 풀어 주었습니다.

 

한소(韓韶)가 영(嬴)의 수령이 되었을 때는 창고를 열어 유민(流民)들을 구제했으며, 정 백자(程伯子 정호(程顥))가 상원(上元)의 주부(主簿)가 되었을 때는 조사(漕司)에 품의하지 않고 백성들을 동원해 제방을 쌓았는데, 그 두 사람이 이 일로 인해 당시에 죄를 얻었다는 말은 듣지 못했습니다.

 

육지(陸贄)가 그 임금에게 고하기를, ‘진실로 인심을 잃지 않는다면 재용이 모자람을 어찌 걱정할 것이 있겠습니까.’ 하였습니다. 옛날의 신하들은 매양 인심을 수습하는 것을 급선무로 삼았는데, 오늘날의 논자들은 재용이 부족하게 되는 것만 근심으로 여기고, ‘백성들이 풍족하게 되면 임금이 누구와 더불어 부족해할 것인가.’라는 뜻은 조금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유약(有若)이 ‘어찌하여 철법(徹法)을 쓰지 않습니까.〔盍徹〕’라고 한 의론은 결과적으로 우활한 것이 되고, 반드시 왕홍(王鉷)ㆍ진경(陳京)ㆍ양신긍(楊愼矜) 따위와 같이 되고서야 나라에 충성한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백성들이 굶주리고 곤궁하여 구렁에 몸을 던지고자 하는 때를 당하여 갑자기 수령의 죄를 매기고 징수를 독촉하자는 청을 내는 것은 또한 위무(慰撫)하고 길러 주는 뜻이 아닌 듯합니다.”하였다. 또 아뢰기를,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김덕원(金德遠)이 말 한마디 때문에 성상의 뜻을 거슬러 이례적으로 파척(罷斥)되었습니다. 이는 결코 대성인(大聖人)이 대신(大臣)을 후하게 예우하고 직언을 용납하는 뜻이 아닙니다.”하였다.

 

소를 아직 올리기 전에 대신의 조언에 따라 사관을 보내어 소명(召命)에 응하도록 재촉하고, 도신이 또 장리(長吏)에게 신칙하여 출사(出仕)를 권하도록 하였으므로, 선생은 걱정과 군색함이 바야흐로 깊었다. 소가 들어가자 상이 비답을 내렸는데, 대략에, “나라를 걱정하고 임금을 아끼는 정성을 내가 가상하게 여긴다. 다만 상신(相臣)이 진달한 것은 망발 정도가 아니다.

 

이담명이 조정에 품의(稟議)하지 않은 것은 매우 마땅하지 않으며 대동수미(大同收米)를 봉납(捧納)하지 않고 대여해 주기를 허락한 것은 극히 한심스러우니, 죄를 매기고 상환을 독촉하는 일은 그만두어서는 안 될 듯하다.” 하고는, 여전히 체직을 윤허하지 않았다.

 

목상(睦相)이 그 소를 보고 성 밖으로 나가 스스로 논열(論列)하니, 상이 승지를 보내어 위유(慰諭)하였는데, 그 사의(辭意)에 자못 듣기 민망한 바가 있었다. 선생이 즉시 소장을 올려 스스로 탄핵하였다. 그보다 앞서 영상 권대운(權大運)이 선생을 위하여 상에게 아뢰기를, “평소에 예우하던 신하를 하루아침에 꺾어 버리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상이 후한 비답을 내려 마음을 풀어 주었다.

 

마침 어떤 일 때문에 체직되었다가 5월에 도로 대사헌에 제수되고, 곧 이조 참판으로 옮겨졌다. 모두 연달아 글을 올려 고사(固辭)하였다. 이윽고 목상(睦相)이 상에게 소환하기를 청하고 영상이 계속해서 진언하니, 상이 또 사관을 보내 돈독하게 유시하였다.

 

다섯 번을 사양하였으나 끝내 윤허하지 않았다. 선생은 부득이하여 마침내 소명에 응하였다. 그보다 한 달 전에 상이 장릉(章陵 인조와 인열왕후(仁烈王后)의 능)에 배알하러 가던 길에 연(輦)이 사육신(死六臣)의 묘를 지나게 되었는데, 예관(禮官)을 보내 치제(致祭)하게 하고 그 관작(官爵)을 회복시키라고 명하였다.

 

조정의 의론이 결정되지 못하였으므로 예관을 보내 수의(收議)하였다. 선생이 도중에서 헌의(獻議)하였는데, 대략에,“세조대왕(世祖大王)께서 천명(天命)과 인심(人心)을 거스를 수 없어 그런 부득이한 거조가 있으셨거니와 저 육신(六臣)들은 절의(節義)를 지키고 충성을 다하여 죽음에 이르러서도 그 마음이 변하지 않았으니, 곧 백이(伯夷)가 무왕(武王)을 그르다고 여긴 마음입니다.

 

공자(孔子)는, 주(周)나라 사람인데도 오히려 정벌을 말리다가 굶어 죽은 것을 두고 ‘인(仁)을 구하여 인을 얻었다.’라고 하였으니, 어찌 백이를 칭술(稱述)한 것으로 인해 무왕에게 누가 된다고 여긴 적이 있었겠습니까.

 

한통(韓通)이 후주(後周)의 황실을 위해 목숨을 바쳤으나 송나라 태조는 추증(追贈)하기를 후하게 하였고, 경청(景淸)과 정몽주(鄭夢周)는 자신이 섬기던 임금에게 절의를 다하였으나 명(明)나라 선종(宣宗)과 본조(本朝)의 태종(太宗)께서는 관작을 회복시켜 주거나 포장(褒奬)하고 증직(贈職)하였으니, 이는 모두 절의를 높이고 포장하여 후세 신하들의 충의를 권면하기 위해서입니다.

 

이제 상께서 육신(六臣)들을 포장하려고 하시는 것은 선종황제와 태종대왕과 같은 마음입니다. 더구나 세조대왕께서는 육신을 두고 후세에는 충신일 것이라는 하교를 하셨으니, 참으로 은밀한 뜻을 후세 자손들에게 보이셨습니다. 이번의 조치는 참으로 선조의 뜻을 잇고 사업을 계승하는 큰일입니다. 성상께서 속으로 결단하시어 조속히 시행하신다면 풍성(風聲)을 부지하고 치화(治化)를 조성하는 도(道)에 보탬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하였다.

 

교외(郊外)에 도착하자 연일 소명(召命)에 응하기를 재촉하고, 또 월봉(月俸) 외에 시탄(柴炭)과 미육(米肉)을 계속해서 공급하게 했다. 선생은 글을 올려 사사(辭謝)하였으나, 후한 비답을 내리고 윤허하지 않았다. 마침내 흥정전(興政殿)에서 인대(引對)하였는데, 상이 위로하기를 매우 돈독하게 하고, 이어서 기근 이후로 영남의 민정(民情)이 어떠한지를 물었다.

 

선생은 작년과 금년의 흉년과 백성들의 곤궁한 상황을 자세히 아뢰고 인하여 재난에 처하여서는 수양하고 반성하며 과한 직언(直言)이라도 좋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뜻으로 아뢰었다. 당시에 경연에서 《대학연의(大學衍義)》를 진강(進講)하고 있었는데, 강의를 통해 아뢰기를, “옛사람들이 이 책을 치평(治平)의 요체라고 한 것은 참으로 빈말이 아닙니다.

 

진덕수(眞德秀)가 수십 년 동안 공을 들여 찬집(纂集)하고 소를 올려 바쳤는데, 송나라 이종황제(理宗皇帝)는 기쁘게 받아들이고 경연에서 진강하게 하였습니다. 또 주돈이(周敦頤)와 정호(程顥)ㆍ정이(程頤) 형제의 의리지학(義理之學)을 높이고 포장하여 주자(朱子)와 같은 시대에 살지 못한 것을 애석해하였습니다.

 

또한 그 현자를 좋아하고 학문을 즐기는 마음이 없다고 할 수 없는데도 치적은 지리멸렬하였으니, 어찌 형식만을 숭상하고 실제로 체득한 것이 없어서가 아니겠습니까. 부디 전하께서는 이것을 거울삼아 경계하소서.” 하였다. 또 아뢰기를, “옛날 선묘(宣廟) 때에 김성일(金誠一)이 간관(諫官)이 되어 대신(大臣)이 뇌물을 받은 일을 논척(論斥)하였는데, 영상 노수신(盧守愼)이 이를 받아들여 잘못을 인정하였습니다.

 

그런데도 선묘께서는 그 둘이 다 훌륭하다고 하셨으니, 그 역량과 기풍이 이와 같았습니다. 그랬기에 비록 나라의 형세가 위태로웠어도 끝내는 중흥(中興)의 대업(大業)을 수립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바라건대, 전하께서 선조를 본받으셔서 노상(盧相)의 사례로써 대신들을 책려하신다면 종사(宗社)에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하였다. 당시에 한 대관(臺官)이 상신(相臣)을 언급한 일로 성상의 뜻을 거슬렀으므로 이런 말을 한 것이다.

 

하루는 야대(夜對)를 인하여 고금의 사변(事變)을 논했는데, 상이 문득 개연히 탄식하면서 이르기를, “중조(中朝)의 문물을 이제 다시는 볼 수 없겠구나. 전에 임진왜란 때 신종황제(神宗皇帝)께서 재조(再造)해 준 공이 아니었으면 사직(社稷)의 오늘이 없었을 것이다. 이 은혜를 어떻게 잊을 수 있겠는가.

 

숭정황제(崇禎皇帝 명나라 의종(毅宗)) 때에 조선에게 죄를 묻자고 청한 이가 있었는데, 황제께서 이르시기를, ‘그것은 참으로 형세가 급박해서였을 뿐이니, 죄를 묻지 말라.’ 하였다. 작은 나라를 이해해 주는 것이 이와 같았으니, 이것을 생각할 때면 감읍(感泣)을 금할 수 없다.” 하였다.

 

선생이 나아가 아뢰기를, “국운이 불행하여 사변(事變)이 여기에 이르렀으니, 초야의 미천한 신으로서도 비분한 마음에 가슴이 메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이제 성상의 하교를 받드니 신도 모르게 감격하여 눈물이 흐릅니다. 인조대왕께서 비록 종묘사직과 백성을 위한 계책으로 할 수 없이 치욕을 참고 잠시 굴복하였으나, 어찌 하루라도 천조(天朝)를 잊은 적이 있겠습니까. 매월 초하루와 보름의 망궐례(望闕禮) 때면 반드시 서쪽을 향하여 통곡하셨으니, 그 뜻을 또한 알 수 있습니다.

 

우리 효종대왕(孝宗大王)에 이르러서는 10년 동안 와신상담(臥薪嘗膽)하여 전대의 공렬을 회복해 보고자 하셨습니다만, 불행히도 중도에 승하하시어 무궁한 한을 남기셨습니다. 전하께서 만약 선대왕의 뜻을 추모하여 인재를 기르고 군대를 훈련하여 천하에 변고가 생기기를 기다려 전하께서 하고자 하는 바를 하신다면 어찌 하늘과 사람이 돕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지금은 믿을 만한 형세라고는 하나도 없으니, 모름지기 민심을 얻고 무비(武備)를 정비하여 근본적인 계책으로 삼은 뒤에라야 무언가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고, 계속해서 서관(西關)에 인물이 매우 많고 강변(江邊)의 건아(健兒)들도 정예롭고 용맹스러워 쓸 만하다는 것을 아뢰었다.

 

또 서쪽 변방의 성(城)과 해자(垓字)를 조사하여 수리하는 일에 미쳐서는, “이러한 일은 모름지기 인재를 얻어 맡긴 뒤에야 성과를 거두기를 기대할 수 있는 법입니다.” 하였다. 상이 한참을 감탄하다가 이르기를, “경이 아니라면 어떻게 이런 말을 듣겠는가.” 하고는, 이어서 술을 하사하였다.

 

술자리를 물리고 나서 또 앞으로 나아가 거듭 고하기를, “영특하고 용맹한 자질을 지닌 전하께서 만약 큰일을 하실 뜻이 있으시다면, 신이 비록 노둔하지만 감히 능력과 충심을 다 바치고 이어 죽음까지 바치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당시에 상이 자주 경연에 나아갔으므로, 선생이 연달아 강석(講席)에 입시하였는데, 본문의 내용을 강하는 것 외에도 민정(民情), 시무(時務)를 아울러 아뢰었다. 원통함과 무고(誣告)를 분변하는 일, 선(善)을 드러내고 악(惡)을 징계하는 일, 토지를 고르게 하고 부세(賦稅)를 바로잡는 일, 병거(兵車)를 제조하는 일, 동전(銅錢)을 유통시켜 폐단을 혁파하는 일 등의 경우에도 모두 그 근원을 궁구하고 반복해서 논열하여 시행된 일이 많았다.

 

또 소를 올려 여섯 가지 일을 논하였는데, ‘덕을 증진시킴〔進德〕’, ‘뜻을 세움〔立志〕’, ‘상황에 맞게 대처함〔通變〕’, ‘인재를 가려 임용함〔擇任〕’, ‘인재를 육성함〔育才〕’, ‘시간을 아낌〔惜時〕’이다. 모두가 확실하게 근거가 있어 요체에 들어맞았거니와, 이른바 ‘시간을 아낌〔惜時〕’에서는 또 재삼 뜻을 다하였으니, “신은 매번 주자가 ‘신이 창안백발(蒼顔白髮)로 이미 늘그막에 다다랐을 뿐만 아니라, 삼가 우러러보건대 용안(龍顔)도 옛날의 모습이 아님을 알겠습니다.’고 한 것을 읽을 때마다 책을 덮고 눈물을 흘리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하였다.

 

대개 군부에게 바라는 바가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그 말이 절실하기가 이와 같았다. 상이 매우 칭찬하여 받아들였다. 하루는 전석(前席)에서 물러 나오는데, 상이 손수 담비 갖옷을 집어 내시(內侍)에게 명하여 하사하게 하니, 또한 각별한 은수(恩數)였다.

 

즉시 소를 올려 사사(辭謝)하고 아뢰기를, “신은 공경히 고인(古人)의 ‘의인사인(衣人死人)’이라는 말을 외우며 가슴에 새기고 뼈에 새겨 성은의 만분의 일이라도 보답하기를 도모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신은 늘 송나라 신하인 왕조(王朝)가, 한 말〔斗〕의 명주(明珠)를 하사해 준 것에 감동하여 천서(天書)와 관련된 요망한 일을 중지하도록 간언(諫言)하지 못한 것에 대해 개탄하였습니다.

 

만약 신이 은혜를 생각하고 의리를 잊어 몸을 용납하고 자리나 보존할 생각을 하게 된다면 속히 파척하시어 여러 신하들을 책려(責勵)하소서.” 하니, 상이 또 《시경》의 ‘내게 아름다운 손님이 있어 진심에서 우러나 선물을 주고자 하는지라〔我有嘉賓 中心貺之〕’는 말을 인용하여 답하였다.

 

선생이 정고(呈告)하거나 소를 올려 사직하기를 두 번 세 번씩 하였으나 끝내 윤허하지 않았는데, 임신년 1월에 또 간절히 사직하니 비로소 본직(本職)에서 체직되었다. 당시에 저들 청(淸)나라에서 우리나라에 자문(咨文)을 보내 이르기를, “이제 《일통지(一統志)》를 찬수(撰修)하기 위해 대신(大臣)을 파견하여 장백산(長白山) 남쪽 지방의 형세를 순시하고자 한다.” 하였다.

 

조정의 의론은 장차 압록강(鴨綠江) 동쪽에서부터 장백산 남쪽을 거쳐 곧바로 두만강(頭滿江)까지 길을 닦아 그 사행(使行)을 통하게 해 주려고 하였다. 선생이 놀라고 탄식하면서 저들의 진위(眞僞)를 헤아릴 수 없다고 여겨 길을 닦아서 사신을 맞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극도로 논하여 차자(箚子)를 갖추어 나아가 아뢰었다.

 

상이 그 의론을 옳게 여겼으나 우선 윤허하지 않았는데, 마침 저들이 우리나라에 기근이 들었다는 이유로 마침내 중지시키고 관원을 파견하지 않았다고 한다. 또 대사헌에 임명되었다. 두 번 소를 올렸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그 사직 상소의 대략에, “옳은 것과 그른 것은 천하의 정리(正理)이니, 구차히 영합하기를 구해서는 안 됩니다.” 하였다. 또 이르기를, “대간(臺諫)은 임금의 이목(耳目)이니, 체례(體例)로써 속박하고 위분(位分)으로 억제해서는 안 됩니다.

 

안진경(顔眞卿)이 이른바 ‘만약 간관(諫官)이 논사(論事)하면서 먼저 재상에게 고한다면 이는 스스로 그 이목을 가리는 것입니다.’라는 것과, 소지충(蕭至忠)이 이른바 ‘만약 먼저 대부에게 고해야 탄핵을 허락한다면 대부를 탄핵하는 경우에는 누구에게 고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라고 한 것은 참으로 명언입니다.

 

이로써 보건대, 간관이 논사할 때에는 반드시 먼저 재상에게 고할 필요가 없을 뿐만 아니라, 군주가 간언을 받아들이는 도리도 매번 재상에게 자문하여 그의 의견에 따라 받아들이거나 거부해서는 안 됩니다.” 하니, 상이 비답하기를, “논사할 때에는 공평하고 타당하게 되기를 힘써야 하니, 이것이 경에게 바라는 바이다.”라는 등의 말이 있었다. 이에 시휘(時諱)를 범해 성상의 뜻에 저촉될까 근심하는 이도 더러 있었다.

 

그전에 상이 매년 자주 선릉(先陵)에 배알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서는 장차 광릉(光陵 세조(世祖)와 정희왕후(貞熹王后)의 능)에 배알하려고 하였다. 당시에는 상이 막 뜸을 뜬 상태이고 농사철에 해당되었다. 선생이 이에 동료들을 이끌고서 임시로 중지할 것을 계청(啓請)하였다. 여러 번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심지어 엄한 하교를 내리기까지 하였다. 선생이 마침내 글을 올려 스스로 탄핵하니, 상이 따뜻한 비답을 내렸다.

 

영상이 또 선생을 위하여 상에게 아뢰자, 이에 통렬히 스스로 인책(引責)하면서 사관을 보내 위유(慰諭)하였다. 선생이 글을 올려 사직하였으나 끝내 윤허하지 않았다. 얼마 안 되어 빈청(賓廳)에 입시하는 것을 인하여 또 아뢰기를, “경신년(1680, 숙종6)과 임술년(1682)의 무옥(誣獄)으로 아직 신원(伸冤)되지 않은 자는 속히 처분하여 신원해 주는 은혜를 베풀어 주셔야 합니다.” 하였다.

 

이어서 당(唐)나라 태종(太宗)이 방강(房彊)의 옥사를 다스린 일과 최인사(崔仁師)가 ‘연좌율로는 벌이 가볍다’고 한 것을 반박하였던 고사를 인용하여 증거로 삼으니, 상이 이르기를,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다음 날 여러 동료들이 인입(引入)하니, 선생 또한 세 번 고하여 체직을 허락받았다.  그날로 도성(都城)을 나와 고향으로 돌아왔다. 상이 또 사관을 뒤쫓아 보내어 전유(傳諭)하였다. 사관이 병으로 돌아가기가 어렵다고 아뢰자, 또 유시를 내렸는데, 사지(辭旨)가 더욱 융숭하였다.

 

선생이 글을 올리고 사관이 또 세 번 계문(啓聞)하여 질병으로 나아가기 어려운 형세를 아뢰니, 비로소 우선 서늘한 가을이 되기를 기다리라는 유지를 내렸다. 5월에 도로 대사헌이 되었다. 본도(本道)로 하여금 옷감과 음식물을 매우 후하게 지급하게 하였다.  선생이 두 번 소를 올려 사사(辭謝)하였다. 7월에 도로 이조 참판에 제수되었다.

 

다섯 번 사양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겨울에 도로 대사헌이 되었는데, 간곡히 사양하였으나 더욱더 윤허하지 않았다. 계유년(1693, 숙종 19) 봄에 재차 소를 올려 사직하고 이어서 아뢰기를, “전하께서 정사에 임하여 치적을 이루고자 한 지가 어언 19년이 되었으나, 현실에 안주하여 세월만 보내면서 차츰 기회를 잃어 가고 두드러지게 드러난 공효(功效)가 조금도 없습니다.

 

이는 전하의 격물치지(格物致知)하는 학문이 지극하지 못한 바가 있어서 더러 경중(輕重)과 시비(是非)의 분별이 흐려지고, 성의정심(誠意正心)의 공부가 극진하지 못한 바가 있어서 더러 호오(好惡)와 공사(公私)의 구분이 잘못된 데 따른 것이 아니겠습니까.

 

대개 학문의 공력이 지극하지 못하면 반드시 진흙탕에 빠진 듯 정밀하게 가리지 못하는 폐단이 있게 되며, 자신을 닦는 공부가 미진하면 반드시 사욕을 제거하고자 하더라도 제거하지 못하고 구차히 스스로를 속이는 병통이 있게 됩니다.

 

오늘날 제가 보고 기억하는 것을 가지고 한번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전하께서 지난번 성균관에 내리신 비망기(備忘記)에는 완연히 삼대(三代) 때의 유의(遺意)가 담겨 있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조치하는 과정에 있어서 준수한 인재들을 등용하고 덕행 있는 선비들을 맞아들였다는 것은 듣지 못했고, 다만 호당(湖堂)에서 시취(試取)하는 것과 반궁(泮宮)에서 절제(節製)하는 것을 가지고 격려하고 진작시키는 일로 삼고 있습니다.

 

대신들과 주사(籌司)를 한 달에 세 번 접견하는 규례도 정사에 대해 자문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지만 신하들이 입대하여 나라를 경영할 원대한 계획이나 나라를 보존할 장구한 계책을 내었다는 말은 듣지 못했고, 단지 관리의 승진하는 범례나 사안의 일반적인 규례를 가지고 하나의 큰일이라고 여기며, 더러는 보잘것없는 작은 기예가 옛날만 못한 것을 근심합니다.

 

모르겠습니다만, 조정에 있는 신하들 중에 상하가 서로 영합하여 직언(直言)이 아뢰어지지 않으며 염치가 땅에 떨어져 비방과 찬사가 실정을 흐리는 것을 두려워하여 전하의 곁에서 간언(諫言)해 주는 자가 있습니까. 수년 이래로 정월 초하루에 일식(日蝕)이 있었고 지진과 우박이 있었으며 달이 낮에도 사라지지 않고 샘물이 용솟음쳤습니다.

 

또 백기(白氣)가 하늘에 뻗치고 강과 하천엔 붉은 탁류(濁流)가 흐르며 겨울에 우레가 치고 여름에 눈이 내렸으며 산이 무너지고 하천이 마르는 등 갖가지 이상한 변괴가 달마다 생겨나고 있습니다. 신은 모르겠습니다만, 묘당(廟堂)에서 전하를 위해 이런 천재지변(天災地變)을 해소하고 미연(未然)에 방비할 수 있는 계책을 일일이 아뢴 자가 있었습니까?”하였다. 상이 후한 비답을 내리고 청한 바는 윤허하지 않았다.

 

3월에 또 병을 이유로 정장(呈狀)하여 해면해 줄 것을 청하였다. 사관이 특별 유시를 받들고 내려왔는데, 사지(辭旨)가 더욱 간절하였다. 또 거듭 사관에게 명하여 그대로 머물러 있다가 함께 오라고 하였다. 당시에 상이 또 재이(災異)로 인해 직언을 구하였는데, 즉시 사직 상소를 인하여 덕정(德政)을 닦고 편사(偏私)를 제거해야 한다는 뜻으로 남김없이 아뢰니, 상이 가납(嘉納)하고 재촉하기를 더욱더 정성스럽게 하였다. 마침내 길에 올라 도중에 또 사직하였다.

 

그러나 사관이 계속해서 이르고 은혜로운 유지가 거듭 내리므로 부득이 대궐에 나아가 공경히 사은(謝恩)하니, 상이 인견(引見)하고 더욱 후하게 위유(慰諭)하였다. 선생이 사사(辭謝)하고 이어서 아뢰기를, “옛날의 신하들은 비록 태평한 때에 처해서도 오히려 위란(危亂)에 대한 경계를 올렸습니다.

 

신은 감히 알지 못하겠습니다만, 전하께서는 오늘날의 국사(國事)가 다스려졌다고 여기십니까,  어지럽다고 여기십니까? 안정되었다고 여기십니까, 위태롭다고 여기십니까?”하니, 상이 이르기를,  “《주역》에 이르기를, ‘망하지나 않을까 망하지나 않을까 하고 노심초사하는 생각이 있어야 무더기로 난 뽕나무에 매어 놓은 것처럼 안정될 것이다.[其亡其亡 繫于苞桑]’ 하였다.

 

하물며 어려움과 우려할 일이 눈에 가득한 오늘날이 어찌 다스려지고 안정되었다고 할 수 있겠는가. 바라건대 경은 소회(所懷)가 있으면 다 진달하여 나의 부족하고 잘못된 부분을 돕도록 하라.”하였다. 선생이 대답하기를, “전하께서 예전에 유충(幼沖)하셨을 때에는 비록 약간의 사소한 실수가 있더라도 오히려 장래에 바로잡아지리란 희망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춘추(春秋)가 점차 장성하고 지려(志慮)도 두루 꿰뚫게 되시어, 몸을 닦고 집안을 바르게 하는 것부터 나라를 다스리고 세상을 다스리는 데까지 모두 성법(成法)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더러 희로(喜怒)가 치우침으로 인해 지나친 거조가 있음을 면치 못하시니, 그렇게 되면 성덕(聖德)에 누가 되는 것 또한 어찌 유충하셨을 때에 비할 바이겠습니까.

 

옛날 태갑(太甲)이 그 덕(德)을 줄곧 닦았는데도 이윤(伊尹)이 오히려 ‘덕을 떳떳이 하면 그 지위를 보존하고 덕이 떳떳하지 않으면 구주(九州)가 망할 것〔常厥德 保厥位 厥德靡常 九有以亡〕’이며, ‘덕이 한결같으면 동함에 길하지 않음이 없고, 덕이 한결같지 않으면 동함에 흉하지 않음이 없을 것[德惟一 動罔不吉 德二三 動罔不凶]’이라고 거듭 ‘마침〔終〕’에 대해 고하였습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덕을 떳떳이 하고 한결같이 하라는 경계에 대해 더욱 마음을 기울이소서. 《주역》에 ‘그 덕이 항구하지 않은지라 혹 부끄러움으로 이어지리라.〔不恒其德 或承之羞〕’ 하였습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말이 매우 절실하고 지극하다.

 

내 유념하겠다.”하고, 선온(宣醞)한 뒤에 파하였다. 며칠 뒤에 더욱 간절하게 사직하고 또 격외(格外)의 월름(月廩)을 도로 거두어 주기를 청하였으나 모두 윤허하지 않았다. 얼마 안 되어 강연(講筵)에 입시(入侍)하였다. 강이 끝나자 짧은 차자(箚子)를 올렸는데, 대략에, “신이 듣기로, 복(福)이 일어나는 것도 모두 집안에서 근본하며 도(道)가 쇠하는 것도 모두 집안에서 시작된다고 합니다.

 

삼대(三代) 때의 성군(聖君)과 현군(賢君)이 그 정사를 잘 닦을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집안을 잘 다스린 것에서 근본한 것입니다. 옛날에 주자(朱子)가 그 임금에게 고하기를, ‘남자가 밖에서 자신의 역할을 바로 하고 여자도 안에서 역할을 바로 하여 부부의 구별이 엄한 것을 집안이 잘 다스려진다고 하는 것입니다.

 

처(妻)가 위에서 남편과 일체가 되고 첩(妾)이 아래에서 받들어서 적서(嫡庶)의 구분이 바른 것을 집안이 잘 다스려진다고 하는 것입니다. 안의 말이 밖으로 나가지 않고 밖의 말이 안으로 들어오지 않아서 뇌물이 이르지 않고 청탁(請託)이 행해지지 않는 것을 집안이 잘 다스려진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규문(閨門) 안에서는 항상 은혜가 의리보다 앞서니, 대부분 정과 사랑에 빠져서 자신의 사사로운 마음을 극복하지 못합니다. 만약 마음을 바로잡고 몸을 닦아 행위가 예의에서 벗어나지 않을 정도가 되어 그들로 하여금 나의 법에 복종하고 나의 위엄을 두려워하게 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그 집안을 바로잡고 청탁을 막으며 인척을 단속하여 화란의 싹을 방지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습니다.

 

선정신(先正臣) 이황(李滉)은 선조대왕에게 아뢰기를, ‘참소하여 이간질하는 화는 보통 사람이면 피하기 어렵거니와, 제왕(帝王)의 집안에서는 이런 병통이 특히 많습니다. 그 까닭은 무엇입니까? 좌우에서 가까이 모시면서 아첨하고 시중드는 자는 모두 환관이나 아녀자들인데 이들은 일반적으로 음흉하고 교활하여 간사함을 속에 품고서 화란을 일으키기를 즐기며 세(勢)를 나누어 대치하여 많고 적음을 다투고 따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 정상(情狀)이 헤아릴 수 없이 다양하므로 한 번이라도 귀를 기울이게 되면 반드시 거기에 빠져들게 됩니다.’ 하였습니다. 양현(兩賢)의 말씀이 전후로 일관되어 지극히 절실하니, 어찌 후세 임금들의 귀감이 아니겠습니까. 전하께서는 천하의 사변(事變)을 겪으신 지 이미 오래되었고 전세(前世)의 득실(得失)을 살피는 것이 매우 분명하시니, 어찌 이런 일이 있겠습니까. 신은 그래도 지나친 염려를 이길 수 없어 감히 사전에 미리 경계를 아룁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경과 같이 나라를 근심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정성이 아니라면 여기에 이를 수 없을 것이다. 내 가슴에 새겨 두겠다.”하였다. 선생이 또 아뢰기를, “군신(君臣)은 의리로써 맺어진 사이입니다. 반드시 서로 정의(情義)로써 믿음을 주어 잘못을 서로 구제할 수 있어야만 광명하고 정대한 다스림을 함께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그렇지 못하여 군신 간에 서로 의심하고 막혀서 주저하고 머뭇거리며 답답한 심정으로 겉돌기만 하게 되면 얼마 안 가서 끝내 나라를 망하게 하는 데 이르지 않겠습니까.”하니, 상이 또 칭찬하였다. 이때에 대소 관료들이 모두 주저하면서 감히 왕실의 일과 관련되는 말을 하는 자가 없었는데, 선생은 문득 남김없이 다 말하고 기휘(忌諱)하는 바가 없었다.

 

같은 반열의 신하들 중에는 목을 움츠리고 식은땀을 흘리는 사람까지 있었는데, 상이 온화한 낯빛으로 겸허하게 받아들이자 다투어 서로 칭하(稱賀)하였다. 당시에 상이 일신헌(日新軒)과 융무당(隆武堂)에 절구(絶句) 네 수를 읊었는데, 모두 자신을 살펴서 사욕을 이긴다는 것과 전대(前代)의 공렬을 크게 계승한다는 내용이었다.

 

선생은 갱가(賡歌)하는 의리를 본받아서 장마다 화운(和韻)하여 바치니, 상이 읽어 보고 가탄(嘉歎)하였다. 연이어 사직하는 글을 올려 체직을 허락받았다. 얼마 안 되어 병조 참판으로 옮겨졌다. 세 번 사양하여 비로소 윤허를 받았다. 6월에 의정부 우참찬으로 승진되었다. 선생은, 매번 물러나기를 구하였다가 승진하게 되고 낮은 자리를 사양했다가 높은 자리로 오르게 되었다는 이유를 들어 여러 번 사양하였으나 윤허를 얻지 못하였다.

 

늘 근심과 탄식을 지니고서 한 가지 일로써 가능성을 보고자 하였다. 이에 덕을 진보시키고 풍속을 바로잡고 인재를 길러야 한다는 뜻으로 조목조목 나열하여 세 통의 차자를 올리고, 옛날에 선비를 선발하던 법과 주자(朱子)가 증손(增損)한 《여씨향약(呂氏鄕約)》을 시행하기를 청하였다.

 

선생은 이전에도 여러 번 이런 내용을 아뢰었으나 그 규모와 절목이 이때에 이르러 더욱 자세해졌다. 상이 묘당(廟堂)에 내려 의논하게 하였는데, 영상(領相) 권공(權公)이 예부(禮部)로 하여금 대제학과 함께 유신(儒臣)에게 나아가 충분히 검토한 다음 시행하게 하기를 청하니, 상이 그대로 따랐다.

 

7월에 이조 판서에 임명되었다. 세 번 사양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이윽고 병을 이유로 해면을 청하였으나 또 윤허하지 않고 의원(醫員)을 보내고 약물(藥物)을 하사하였다.  병이 차도가 있게 되자 조강(朝講)에 입시하였다. 강이 끝나자 정황으로나 병세로나 모두 그대로 자리를 차지하고 있기가 어렵다는 것을 극진하게 아뢰었으나 상은 따뜻하게 유시하고 윤허하지 않았다.

 

당시에 대사간(大司諫) 강세귀(姜世龜)가 능행(陵幸)을 정지할 것을 청하였다가 파직되었으며, 대사헌 권해(權瑎)가 또 임금의 뜻을 거슬러 파직되었다. 선생은 간쟁(諫諍)하는 신하를 연달아 배척하는 것은 성덕(聖德)이 아니라는 내용으로 짧은 차자를 올렸는데, 대략에, “대저 대간(臺諫)이란 임금의 이목이며 조정의 기강입니다.

 

설사 두 간신(諫臣)의 말이 지나쳐 마땅함을 잃었다고 하더라도 오히려 후하게 용납하여 겸허하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니, 꺾어 버리고 눌러 버리기를 이렇게 해서야 되겠습니까. 이후로 조정에 있는 신하들은 반드시 장차 간언하기를 꺼릴 것이니, 성덕에 어떠하겠으며 국사에 어떠하겠습니까.” 하였다.

 

또 아뢰기를, “왕자(王者)는 한가로이 처할 때는 아송(雅頌) 같은 음악을 듣고, 걸어다닐 때는 패옥(佩玉)이 부딪는 소리가 있으며, 수레를 타면 수레 방울 소리가 들리는 등, 거처함에 예(禮)가 있고 진퇴에 법도가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호령(號令)을 함에 선(善)하지 않은 것이 없고 거조(擧措)와 언행(言行)이 진실로 인심에 부합하였던 것이니, 어찌 후세의 임금으로서 위의(威儀)를 훼손시키고 덕성(德性)을 무너뜨리는 자들의 행위와 같겠습니까.

 

궁궐 안의 일은 엄밀(嚴密)하니 전하께서 한가로이 지내실 때의 절목에 대해서 신은 참으로 알 길이 없습니다. 다만 본성을 보존하고 기르는 공부가 깊으면 반드시 창졸간의 과실은 없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모두 가납하였다. 곧 두 번째 사직을 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분황(焚黃)하기 위해 휴가를 청하였으나 또 윤허하지 않았다.

 

곧 입시(入侍)를 인하여 ‘창빈(昌嬪)을 국가의 사전(祀典)에 수록하는 것은 예가 아님’을 논하여, 그대로 시행되었다. 이때에 왕자가 태어났는데, 선생이 하례하고 나서 인하여 나아가 아뢰기를, “예(禮)에 왕의 적자(嫡子)와 서자(庶子)가 태어나면 그 묻는 것과 보이는 것에 모두 각각 의절(儀節)이 있으니, 대체로 그 탄생한 초기부터 이미 등위(等威)의 차이가 나뉘어지는 것입니다.

 

이제 이미 세자를 책봉하였으므로 만약 그 등급을 분명히 하여 적서의 구분을 엄격히 한다면, 국가의 복이 될 뿐만 아니라 새로 태어나신 왕자에게도 복이 될 것입니다.” 하니, 상이 훌륭하다고 칭찬하였다. 또 2품 이상의 관원에게 각각 인재 3인을 천거하게 하되, 혹은 덕행(德行)으로 혹은 문예(文藝)로 혹은 재지(才智)로써 하도록 하고 천주법(薦主法)을 거듭 엄격히 할 것을 청하니, 모두 그대로 윤허하였다.

 

10월에 천둥 번개가 심하게 치면서 비가 내리자, 입시(入侍)를 인하여 ‘자신을 살펴보아 사욕을 극복할 것’, ‘백성들의 고통을 긍휼히 여기고 억울함을 해소시킬 것’, ‘궁금(宮禁)을 엄격히 하고 사행(私幸)을 막을 것’ 등을 가지고 하늘에 실사(實事)로 응답하는 방도로 삼고, 또 언로(言路)를 열고 인재를 등용하여 하늘에 응답하고 변고를 소멸시키는 방도로 삼아야 한다는 것을 극진하게 아뢰니, 상이 모두 훌륭하다고 칭찬하고, 즉시 논의대로 시행하게 하였다.

 

그전에 선생이 누차 선비를 선발하고 향약(鄕約)을 시행하는 일들을 가지고 청을 하였으나 아직 조례(條例)를 반포하지 않고 있었다. 이때에 이르러 또 앞의 청을 거듭하니, 유지(有旨)를 내려 속히 거행하게 하였다.  그러나 좌상(左相)이 어렵게 여기며 “인심(人心)이 선(善)하지 못한 상황에서는 시행되기 어렵다.” 하고, 대종백(大宗伯 예조 판서)도 “선비를 뽑는 법은 절목이 매우 많아 갑작스럽게 거행할 수가 없다.” 하니, 상이 일단 정지하라고 명하였다.

 

선생은 매번 옛날의 일을 인용하면서 속에 온축된 것을 한번 펼쳐 보려고 하였으나 끝내 당시에 행해지지 못하였다. 이로부터 더욱 물러나 돌아갈 뜻을 굳혔다. 대정(大政 12월의 정기적인 인사 행정)이 끝난 뒤에야 진정(陳情)하여 물러나기를 청하였는데, 그 대략에, “신은 어리석고 소략하여 일의 실정에 밝지 못합니다.

 

풍속을 바로잡고 인재를 길러 세도를 회복시키려는 경우에는 옛것에만 집착하여 뜻이 통하지 않고 행하기 어려워서 묘당(廟堂)에서 국사(國事)를 경영하고 임금을 보필하려는 은미한 뜻과 어긋나게 되고, 세금을 줄여 생활을 넉넉하게 하여 조금이라도 백성들의 노고를 덜어 주려는 경우에는 그저 너그럽게 빌려 줄 줄만 알고 간교한 술수를 막는 방법은 전혀 몰라서 원망을 감수하고 국사에 몸 바치는 묘당의 지극한 뜻에 어긋나게 됩니다.

 

그리고 관인(官人)을 뽑을 때 청탁(請託)을 두절시키려는 경우에는 신이 아는 사람을 들어서 오로지 제 뜻만을 주장하고 굽혀서 인사상의 규례를 따르지 못합니다. 평생 보국(報國)하겠다는 마음이 도리어 허망한 결과를 낳으니, 어찌 감히 그대로 무릅쓰고 있으면서 몸을 빼어 물러날 것을 생각하지 않아서 나라와 조정을 어지럽히는 죄를 거듭 지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잇달아 일곱 번이나 글을 올려 고사(固辭)하였으나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갑술년 봄에 종묘(宗廟)의 옥책(玉冊)이 병란 중에 산일된 것이 많다는 것에 대해 조정의 의론은 모두 추가로 보충하는 것이 옳다고 하였다. 선생은 《춘추(春秋)》의 ‘하오(夏五)’와 상송(商頌)에 일곱 편이 빠져 있는 뜻을 가지고 아뢰기를, “마땅히 미더운 것은 미더운 대로 의심나는 것은 의심나는 대로 전하여야 할 것이며, 경솔하게 대충대충하여 후세의 의혹을 야기해서는 안 됩니다.” 하였다.

 

얼마 안 되어 또 분황(焚黃)하기 위하여 휴가를 청하였는데, 상이 처음에는 윤허하지 않다가 세 번 사직하고서야 비로소 허락하였다. 하직 인사를 올리자, 상이 인견(引見)하여 선온(宣醞)하면서 자못 떠나는 것을 애석하게 여기는 뜻을 보였다.

 

선생이 일어나 배사(拜謝)하고 나아가 아뢰기를, “임금이 만약 적국의 외침(外侵)이 없으면 반드시 토목공사를 일으키고 진기한 동물이나 기화요초(琪花瑤草), 개와 말이나 가무(歌舞)와 여색(女色) 등으로 이목(耳目)을 즐겁게 하고 심지(心志)를 방탕하게 할 것이니, 이는 모두 임금이 지극히 경계해야 합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마음을 바로잡고 덕을 닦아 기강을 확립하시며, 세세한 오락거리를 멀리하고 원대한 계획을 세워서 효종대왕의 유의를 깊이 계승하소서. 이제 멀리 떠나가게 되매 감히 소회(所懷)를 아룁니다.” 하였다.

 

상이 가납(嘉納)하고는, 속히 돌아오라고 재삼 유시하였다. 이어서 세자(世子)에게 명하여 나와 보게 하였다. 상이 환관을 돌아보며 세자의 뜻으로 유시하였는데, 또한 속히 조정으로 돌아오라는 것이었으니, 그 기대하고 총애하는 뜻이 이러하였다.

 

3월에 집으로 돌아왔다. 이때 뜻을 얻지 못한 무리들이 원한을 품고 틈을 엿보다가 은화(銀貨)를 모아서 음모를 꾸미던 일이 발각되었다. 하옥(下獄)하여 실정이 드러나 장차 법대로 처리하려고 하였는데, 홀연히 김인(金寅)이라는 자가 악언(惡言)으로 변고를 아뢰어 상의 이목을 미혹시켰다.

 

상이 크게 노하여 옥사(獄事)를 맡았던 신하들은 모두 절도(絶島)에 안치(安置)되고 대신(大臣), 승지(承旨), 삼사(三司)가 한꺼번에 파출(罷黜)되는 등, 시사(時事)가 크게 변하였다. 선생은 처음에는 조정에 돌아오기 쉽지 않다는 이유로 개차(改差)하라는 유지가 내렸으나, 대간들의 의론이 계속해서 나와 마침내 홍원현(洪原縣)으로 유배되었다. 이는 일찍이 조사기(趙嗣基)를 구명(救命)한 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이에 앞서 조사기가 선후(先后)를 무욕(誣辱)하는 말을 했다는 것 때문에 대간(臺諫)의 논계(論啓)에 의해 원지(遠地)에 유배되었는데, 선생이 소를 올려 말 때문에 사람을 벌해서는 안 된다고 논하자 상도 그가 다른 뜻이 없다는 것을 통촉하여 마침내 사면되어 돌아왔다.

 

그런데 이때에 이르러 조사기가 선후를 무욕했다는 이유로 극형에 처해지자, 대간에서 당시에 그를 변호했던 자들에게 무겁게 벌주기를 청하였으므로 이런 명이 있게 된 것이다. 이때는 해기(駭機)가 갑자기 발하여 화망(禍網)이 하늘을 찌를 듯 하므로 조야(朝野)가 발칵 뒤집혔으나 선생은 태연하게 처하여 언행(言行)이 평상시와 다름이 없었다. 금오랑(金吾郞)이 도착하자 이르기를, “임금의 명을 받고서 집에서 지체해서는 안 된다.” 하고, 그날로 길을 떠났다.

 

미처 홍원현에 도달하기 전에 또 금부(禁府)의 관원이 체포하기 위해 이르렀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는 선생이 지난날 중전(中殿)을 위하여 별궁(別宮)에 처하게 해 주기를 청한 소에 있었던 ‘스스로 하늘로부터 버림을 받았다[自絶于天]’,

 

‘폐비(廢妃)를 위하여 방위를 두고 규금을 엄격히 해야 한다[爲設防衛 謹其糾禁]’는 등의 말을 가지고 장령 안세징(安世徵)이 ‘화심(禍心)을 속에 숨기고 드러나지 않게 침핍(侵逼)하였다’는 내용으로 앞장서서 나문(拿問)하기를 청한 대다가, 전에 아뢰었던 적서(嫡庶)의 구별을 엄격히 하라는 설이 다른 사람의 사주를 받아 궐내의 반응을 떠보기 위해서였다는 내용이 또 김인의 공초(供招)에서 나와, 겨우 며칠 만에 또 국청(鞫廳)을 열라는 명이 있었기 때문이다.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 서문중(徐文重)은 그것이 전적으로 날조한 데서 나왔다고 하여 그대로 두려고 하였다. 그런데 문사랑(問事郞) 김시걸(金時傑) 등이 서로 선동하면서 반드시 뜻을 이루고자 하였다. 사람들은 모두 화(禍)를 장차 예측할 수가 없다고 여겼는데, 선생은 유독 안색이 변하지 않았다.

 

그때에 아들 재(栽)가 곁에서 모시고 있다가 울부짖었는데, 선생이 천천히 이르기를, “화복은 하늘에 달린 것이니 하늘을 어찌하겠느냐. 너는 놀라거나 당황하지 말아라.” 하였다. 치대(置對)할 때에는 경서(經書)를 인용하고 의리(義理)에 근거하여 이치가 분명하고 말이 곧아서 원서(爰書)가 나오고 나자 안세징이 스스로 무망(誣罔)했음을 알고 실상을 잘못 말했다고 하여 인피(引避)하였다.

 

김인 또한 자주 말을 바꾸고 말한 바도 모두 증거가 없었으므로, 사죄(死罪)로 얽을 사유가 없어 마침내 종성부(鍾城府)에 위리안치(圍籬安置)하는 것으로 논죄(論罪)하였다. 선생이 곤궁(坤宮)을 위하여 전후로 진달한 것이 모두 매우 간절하여 임금의 이목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한 바가 있었으며, 결국에는 선생의 청을 따라서 별궁을 수리하라는 명이 있기도 하였다.

 

일이 비록 중지되기는 하였으나 그 본의를 또한 볼 수 있다. 저들이 비록 백방으로 얽어 대었으나 끝내 조그마한 죄도 얻을 수 없었다. 그런데도 반드시 곤경에 밀어 넣어 빠뜨리고자 한 것은 다른 이유에서가 아니다. 선생이 일을 맡았을 때 회피하는 바가 없어 사악(邪惡)함을 억누르고 정도(正道)를 부양(扶養)하였으며 악을 징치(懲治)하고 죄를 성토(聲討)하는 데 있어서 조금도 용서함이 없었다.

 

이에 시기하는 무리들이 다투어 일어나 기회를 엿보고 틈을 만들어 처음에는 조사기를 구명하였다는 것으로 논죄하더니, 마침내는 상소 가운데 몇 글자를 뽑아내어 선생의 죄안(罪案)으로 만들었다.  아, 잦은 간언으로 임금을 격동시키는 것이 끝내 일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지만 완곡한 말로 임금의 마음을 돌리는 것이 곧 진언(進言)의 도라고 여겼다.

 

저들이 어찌 그 본의가 진실하여 다른 마음이 없음을 모르겠는가. 그런데도 그 한두 글자를 지적하여 곧바로 몰아서 함정 속으로 빠뜨리려고 하였으니, 아, 또한 이상하도다. 더구나 왕궁에서 규금(糾禁)하는 법은 《주관경(周官經)》에 실려 있으니, 실로 체모(體貌)를 높이고 수위(守衛)를 갖추고자 한 것이다. 그런데도 이를 가지고 독을 뿜을 구실로 삼고자 하였던 것은 또한 유독 무슨 이유인가?

 

또 적서의 구별을 엄격히 하라고 한 것도 국가를 위하여 배필과 적자를 보존하라는 경계에 불과한 것인데도 “사주를 받아 궐내의 반응을 떠보기 위해서였다.”라고 말하는 것은 또한 어찌 너무도 근거 없고 무리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 변환하고 꾸며 댄 것이 최중태(崔重泰)가 말을 바꾸어 ‘엄가(嚴加)’라는 글자를 만들어 넣는 데 이르러서는 극에 달하였으니, 아, 이루 말로 다 할 수 있겠는가.

 

선생은 한여름의 찌는 듯한 더위 속에서 여러 달 동안 국옥(鞫獄)에 매여 있었는데, 태연하기가 마치 집에 있는 것 같았고 침식(寢食)도 평소처럼 하였다. 옥(獄)에서 나가자 경성(京城)의 사대부(士大夫)들이 모두 분주하게 힘을 쏟아 그 행구(行具)를 도와주었고 심지어 상서(上書)하여 억울함을 풀어 주고자 하는 이도 있었는데, 동파(東坡)가 장방평(張方平) 때문에 토설(吐舌)했던 일을 들어 말하는 자가 있어 마침내 중단하였다.

 

선생은 흔쾌히 유배길에 올라 조금도 얼굴에 기미를 드러내지 않으면서 중도까지 배웅 나온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인생의 환난(患難)은 지략으로 면하기 어려운 법이니, 원컨대 제현(諸賢)들은 장부(丈夫)의 기상을 더욱 면려(勉勵)하고 노부(老夫)의 경우를 보면서 스스로 좌절하지는 말라.” 하였다.

 

적소(謫所)에 이르러서는 운명처럼 편안히 여겼으며, 독서하고 저술하는 데에 날마다 일과를 두어 손수 《주역(周易)》 고경(古經)을 필사(筆寫)하여 정밀하게 수정을 가했다. 북쪽의 풍속이 거칠고 질박하여 의리(義理)의 학문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었는데, 선생이 그중에서 우수한 자를 가려서 사서장구(四書章句)와 주자서(朱子書)와 《소학(小學)》, 《가례(家禮)》 등의 책을 차근차근 가르쳐 더러 성대하게 흥기(興起)한 자도 있었다.

 

정축년(1697, 숙종 23) 여름에 호남(湖南)의 광양현(光陽縣)으로 양이(量移)되었는데, 뱃길과 육로로 다닌 것이 수천 리였다. 7월에 비로소 배소(配所)에 도착하여, 백운산(白雲山) 아래 옥룡동(玉龍洞)에 들어가 거처하였다. 선생은 칠순의 나이에 북으로 남으로 유배되어 전전하면서 지치다 보니 곤궁함이 또한 극에 달하였다.

 

경전(經典)의 훈고(訓詁)에 침잠하고 도(道)를 즐겨 근심을 잊었으며, 초(楚)나라 굴원(屈原)처럼 비통해하는 마음은 전혀 없었다. 기묘년(1699) 1월에 방면(放免)하여 고향으로 돌아가게 하라는 명이 있었다. 대간들이 도로 거둘 것을 청하였으므로 선생은 진양(晉陽)의 경내에서 또 1년 동안 대명(待命)하였다.

 

경진년(1700) 2월에 비로소 정계(停啓)하였으므로, 화산(花山 안동(安東))의 금양(錦陽)으로 돌아가 우거하였다. 그 산천이 밝고 수려한 것을 사랑하여 날마다 지팡이를 짚고 소요하였다. 신사년(1701) 8월에 인현왕후(仁顯王后)가 승하하니, 무술(巫術)로써 저주하였다는 옥사가 일어나 갑술년(1694)에 연루되었던 사람들에게 크게 벌이 가해졌다. 논자들이 다시 선생을 주목하여 위리안치하기를 청하였는데, 해가 지나도록 그치지 않았다.

 

선생은 날마다 행장(行裝)을 꾸려 놓고 명을 기다렸으며, 오히려 문하의 사람들과 날마다 명리(名理)를 강론하면서 근심하거나 탄식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상이 끝내 윤허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때부터 두문불출하여 세상사와 접하지 않으면서 때때로 ‘다른 사람을 만날 때는 입을 굳게 다물고 일이 없을 때는 머리 빗는 일을 배운다[逢人深閉口 無事學搔頭]’는 고인의 시구를 외우면서 이르기를, “오늘에야 비로소 이 말이 맛이 있음을 알겠다.” 하였다.

 

선생은 고령(高齡)이 되면 될수록 덕(德)도 더욱 높아져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 많았으니, 원근에서 문하에 들어 학업을 배우려는 자들이 날마다 문 앞에 끊이지 않았다. 선생이 일깨워 주고 가르쳐 주기를 각각 그 재주에 따라 독실하게 하니, 거의 차례에 따라 점차 진보되어 장차 성취될 가망이 있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노쇠함을 보이시더니 마침내 갑신년(1704, 숙종30) 10월 3일에 홀연히 후학(後學)들을 버리고 떠나셨다. 원근에서 부음(訃音)을 들은 자는 모두 탄식하고 애통해하면서 이르기를, “군자가 돌아가셨으니, 우리 도(道)는 어디에 의탁할 것인가?” 하였다. 서울의 인사들은 서로 도성 남쪽의 옛집에 자리를 만들어 조곡(弔哭)하였다.

 

다음 해 1월에 금양의 북쪽 산기슭 정향(丁向)의 언덕에 장사 지냈다. 이때에 모인선비들이 300여 인이나 되었으며, 여러 고을의 향교(鄕校)와 서원(書院)에서 글을 지어 치제(致祭)한 이도 많았다. 2년 뒤인 병술 년에 지관(地官)의 말에 따라 안동부(安東府) 남쪽 신석동(申石洞) 손향(巽向)의 언덕으로 이장(移葬)하였다.

 

선생의 가학의 연원은 경당(敬堂 장흥효(張興孝)) 장 선생(張先生)에게 근본하는데, 장 선생은 학문의 대방(大方)을 학봉 김성일(鶴峯 金誠一), 서애 유성룡(西厓 柳成龍) 두 선생에게서 얻었다. 존재(存齋) 선생이 그 실마리를 추광(推廣)하여 더욱 확충시켰다. 선생은 자품(資稟)이 기이한 데다가 또 중씨(仲氏) 선생을 따라 탁마(琢磨)하고 감화(感化)되었으니, 그 연원에 젖어 든 것이 대개 이와 같았다.

 

선생은 총명하고 영오(穎悟)하여 무리들보다 훨씬 뛰어났다. 초기에는 제가서(諸家書)를 두루 섭렵하여 경전(經傳)ㆍ자(子)ㆍ사(史)로부터 율려(律呂), 성력(星曆), 대연력(大衍曆), 참동계(參同契), 병법(兵法), 군율(軍律), 육화진법(六花陣法), 팔진법(八陣法)에 이르기까지 모두 끝까지 궁구하여 비록 어려운 요처(要處)라도 모두 능숙하게 풀어 버리는 등, 안전(眼前)에 어려운 글이 없었으니, 중씨 선생이 매번 미칠 수 없다고 칭찬하였다.

 

성년이 되었을 때 지기(志氣)가 웅원(雄遠)하고 강개(慷慨)하여 경세제민(經世濟民)에 스스로 뜻을 두고 국가를 위하여 일거에 치욕을 씻기를 생각하였다. 그러나 이미 어찌할 수 없음을 알고는 또 더욱 내외(內外)ㆍ빈주(賓主)의 분변이 있음을 알아 육경(六經)과 《중용(中庸)》, 《대학(大學)》, 《논어(論語)》, 《맹자(孟子)》, 정자(程子)ㆍ주자(朱子)의 제설(諸說)에서 돌이켜 구하였으니, 그런 뒤에 그 학문이 순수하게 한 결 같이 정도에서 나오게 되었다.

 

일찍이 이르기를, “《서경(書經)》 〈우서(虞書)〉의 유정유일(惟精惟一), 《논어》의 박문약례(博文約禮), 《대학》의 격치성정(格致誠正), 《중용》의 명선성신(明善誠身), 《맹자》의 지언양기(知言養氣) 같이 천고의 성현들이 서로 전하던 심법(心法)은 단지 하나의 일관된 길이니, 말은 비록 다르더라도 이치는 하나인 것이다.

 

정자와 주자께서 더욱 극진히 이 뜻을 발명(發明)하였으니, 학자들은 마땅히 서로 그 공력을 다 기울여야 할 것이며 한쪽으로 치우쳐서는 안 될 것이다.” 하였다. 또 일찍이 이르기를, “도(道)는 고원(高遠)하여 실행에 옮기기 어려운 일이 아니며, 그저 일상생활의 인륜(人倫) 속에 있다.

 

요순(堯舜)의 도는 이와 같을 따름이니, 이제 도를 일상적이지 않고 특이한 것으로 여겨 사람이 능히 할 수 있는 바가 아니라고 여긴다면 그 또한 이상한 것이다.” 하였다. 또 일찍이 이르기를, “학문이라는 것은 단지 장구(章句)나 외우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일상생활에서 응접하는 사이에 일마다 정밀히 살피고 곳마다 체험하되 먼저 ‘거처할 적에는 공손히 하며, 일을 집행할 적에는 공경하며, 말은 성실하고 미덥게 하며, 행동은 돈독하고 공경스럽게 하는’ 공부에서부터 한다면 거의 따르고 지킬 바가 있게 될 것이니, 공문(孔門)의 가법(家法)은 본래 이와 같은 것이다.” 하였다.

 

또 이르기를, “나를 위주로 하면 마음이 좁아지고 뜻이 사사로워지며, 이치를 위주로 하면 마음이 넓어지고 뜻이 공정해진다.” 하니, 그 말이 정밀하고 절실하기가 이와 같았다. 선생은 타고난 자질이 자상하고 덕기(德器)가 혼후하여 단정하고 장중하였으며, 게으름을 피우지 않았고 성실하고 겸손하여 재주를 드러내지 않았다.

 

성내고 난폭한 기상이 창졸간(倉卒間)에 드러나지 않았으며, 욕하고 꾸짖는 말이 자제(子弟)나 노복(奴僕)들에게 미치지 않았다. 멀리서 바라보면 우뚝하여 마치 높은 산악 같았으며, 다가가서 보면 온연(溫然)하여 마치 상서로운 해와 온화한 바람과 같았다.

 

평일에 서로 알지 못했거나 평소에 헐뜯던 자라고 하더라도 그 안색을 보고 그 사기(辭氣)를 접하게 되면 모두 한결같은 말로 칭찬하기를, “덕을 지닌 군자이다.” 하였으니, 이 어찌 까닭 없이 그렇게 된 것이겠는가.

 

그 행실에 드러난 것을 가지고 말해 보더라도, 어버이를 섬길 때는 비록 변변치 못한 음식을 제대로 봉양하지 못하더라도 항상 완곡하고 부드러운 안색으로 어버이의 뜻을 따랐으며, 형제를 대할 때에는 항상 우애롭고 화목하여 일찍이 안색이 변하거나 말다툼을 한 적이 없었다.

 

상례(喪禮)의 절차는 법도와 애통함을 모두 갖추었으며, 제사의 예법은 정성과 공경이 모두 지극하였다. 내외(內外)의 친척들에 대해서는 비록 이미 촌수가 멀어졌더라도 반드시 그 친목을 돈독히 하였으며, 향당(鄕黨)의 친구들에 대해서는 매우 지위가 낮더라도 위분(位分)을 내세워 대하지 않았다.

 

환난을 구제하고 곤궁함을 구휼함에 있어서는 반드시 그 힘이 미치는 바를 다하였다. 평생 생계와 관련되는 일을 말하지 않았으며 거처하는 가옥이 비바람을 가리지 못하고 식량이 누차 떨어졌어도 태연하였다. 또한 일찍이 자손의 생계를 위해 조금이라도 계책을 도모한 적이 없었다.

 

판서공이 일찍이 그 가계(家計)가 형편없음을 안타깝게 여겨 특별히 노비 등을 내려 주었는데, 그때마다 고사(固辭)하여 받지 않고 종가(宗家)로 돌렸다. 이것이 비록 작은 일이기는 하나 그 나머지를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선생은 반평생을 은둔하여 장차 그렇게 종신(終身)하려는 듯하였으나, 만년에 국운(國運)이 흥성(興盛)하여 예우(禮遇)가 융숭하니, 감격하여 보은(報恩)하기를 도모하고 소회(所懷)가 있으면 반드시 아뢰었다.

 

우리 임금은 요순(堯舜)이 될 수 있다고 하고 세도(世道)를 만회할 수 있다고 하면서, 선(善)을 아뢰고 과실을 바로잡는 의론을 올리는 글마다 계속하고, 풍속을 바로잡고 인재를 기르라는 논의를 면대하여 진언할 때마다 아뢰었다. ‘호오(好惡)를 함께할 것’, ‘민심을 결합할 것’, ‘장법(章法)을 훈도할 것’, ‘변비(邊備)를 정비할 것’, ‘현사(賢邪)를 구분할 것’, ‘상벌을 분명하게 할 것’ 등과 같은 것은 모두 나라를 보전하는 급선무이자 다스림의 대도(大道)이다.

 

또 경연에 임하여 강의할 때에는 경사(經史)를 원용하고 고금(古今)을 드나들면서 일에 따라 건의한 것이 통절(痛切)하고 적당하였는데, 요점은 또한 임금의 일심(一心)에 귀결되었다. 성상이 마음을 비우고 받아들이니, 동료들이 그 아뢰는 것을 주목하고 모두들 물러나서 탄식하기를, “진정한 강관(講官)이다.” 하였다.

 

그러나 그 논열하는 바가 시행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 중에는 더러 세무(世務)를 담당하는 것을 병통으로 여기기도 하였다. 선생은 더욱 내키지 않아서 매번 제수(除授)하는 명이 있을 때마다 문득 글을 올려 해면해 줄 것을 청하였는데, 때로는 예닐곱 번에 이르도록 그치지 않았다.

 

비록 임금의 은혜를 잊지 못하여 차마 바로 영영 떠나지는 못하였으나 그 거취를 결정하게 된 것이 또한 이미 오래되었다. 그러나 나라를 걱정하는 일념은 혹여 진퇴(進退)나 빈척(擯斥) 때문에 잊거나 하지는 않았으니, 매번 천재시변(天災時變)과 풍화(風化)를 손상시키고 치도(治道)를 해칠 만한 정령(政令)이나 거조(擧措)에 대해 들을 때면 일찍이 강개하여 탄식하면서 눈물을 흘리기까지 하였다.

 

크게 정력(定力)이 있어서 험난한 상황에도 흔들리지 않았으니, 문망(文罔 필화(筆禍))에 걸려 국문장(鞫問場)에 나아갈 때에는 동작이 온화하고 조용하였으며 응대하는 것이 자세하고 느긋하여 조금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위관(委官) 이하가 또한 자신도 모르게 속으로 기이하다고 칭찬하였다.

 

공초(供招)가 끝나자 모두들 눈길로 전송하면서 이르기를, “이 사람은 오늘 명예를 실추하지 않았다.” 하였다. 안세징이 일찍이 다른 사람에게 이르기를, “처음에 내가 남의 말을 잘못 듣고 발론(發論)하여 체포하기를 청하였는데, 그 용모와 사기(辭氣)를 보니 무망(无妄)한 것이었을 뿐만 아니라 참으로 도(道)를 지닌 군자였다.

 

내가 마침내 실상을 잘못 말했다고 하여 스스로 탄핵하고, 그로 인해 외직(外職)에 보임(補任)되었다.  그러나 한스럽지 않다.” 하였다. 이어서 혀를 차면서 칭탄(稱嘆)하였으니, 떳떳한 양심은 끝내 속일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선생의 학문은 주경(主敬)을 근본으로 하고 궁리(窮理)를 요체로 하였다.

 

집안에 거처할 때는 종일토록 정좌(靜坐)하여 엄연히 의칙(儀則)이 있었고, 의리를 논할 때에는 세세하게 분석하여 각각 그 귀취(歸趣)를 다하였다. 지행(知行)이 함께 나아가고 표리(表裏)가 한결같았다. 그 말년에 이르러서는 의리가 정밀하고 인(仁)이 원숙해져서 매번 학술(學術)이 갈라져 이설(異說)이 횡행하는 것을 자신의 근심으로 삼았다.

 

비록 전배(前輩)들이 입언(立言)한 것이라도 혹시 온당치 못한 부분이 있으면 반드시 의심나는 것을 분변(分辨)하고 잘못된 것을 바로잡아 바른 곳으로 돌리기를 힘썼다. 일찍이 이르기를, “퇴도(退陶 이황(李滉))의 사칠변(四七辨)은 실로 주자(朱子)의 설에 부합하니, 뒤집히고 부딪쳐도 깨지지 않아 백세 뒤를 기다리더라도 의혹이 없다고 이를 만한 것인데, 율곡(栗谷) 이씨(李氏)는 크게 배척하여 심지어 의리가 분명하지 못하다고까지 하였다.

 

그 설이 장황하고 휘황찬란하여 율곡을 조술(祖述)하는 자들은 한결같이 그에 화답하여 전현(前賢)이 발명하지 못한 바를 발하였다고 하고, 공공연히 기(氣)를 이(理)라고 인식하고, 인욕을 천리로 인식하고, 이를 공허(空虛)하고 명적(冥寂)한 물건으로 인식하니, 그 유폐(流弊)가 장차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게 되었다.” 하고, 마침내 그중에서 특히 이치에 해가 되는 것을 뽑아내어 조목별로 변파(辨破)하였다.

 

무릇 수천 자가 되었는데 〈율곡사단칠정서변(栗谷四端七情書辨)〉이라고 이름하였다. 붕우와 학자들에게 주는 편지에서도 이를 가지고 반복해서 변론하여 극도로 말하기를 마지않았다. 그러나 모두 정자와 주자의 정론(定論)을 조술한 것이고 자신의 견해를 내세운 적은 없었다.

 

전에 존재(存齋) 선생이 강학(講學)하던 차에 경세(經世)의 학문에 유의하여 이르기를, “홍범구주(洪範九疇)에는 실로 성왕(聖王)이 수신(修身)하고 경세(經世)하는 대경(大經)ㆍ대법(大法)이 들어 있다. 더구나 부사(父師 기자(箕子))의 팔조(八條)의 가르침은 우리 조선(朝鮮) 만세(萬世)의 표준을 세웠으니, 홍범구주를 발휘하여 저술하여 일가의 말로 삼는다면 어찌 전대에 없던 일대 기사(奇事)가 아니겠는가.” 하고는 이에 경전(經傳)에서 채록하여 유별(類別)로 찬집(纂輯)하니, 편목(篇目)은 이미 차례를 정하였으나 책이 아직 완성되기 전에 존재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선생은 이를 개탄하면서 그 조목을 그대로 따라 이어서 완성하였다.  그 책은 경문(經文)에 근본하여 그 강(綱)을 세우고 전문(傳文)을 참조하여 그 기(紀)를 펼쳤으며, 실제 증거가 될 만한 일을 드러내어 그 말을 징험(徵驗)하고 의론을 덧붙여 그 뜻을 밝혔다.

 

수(水)ㆍ화(火)ㆍ목(木)ㆍ금(金)ㆍ토(土)의 성질과 모(貌)ㆍ언(言)ㆍ시(視)ㆍ청(聽)ㆍ사(思)의 법칙에서부터 병농(兵農), 재부(財賦), 제사(祭祀), 치인(治人), 오복(五福)ㆍ육극(六極)으로 권면 징계하는 도(道)에 이르기까지 모두 적당하도록 배열하였다.

 

책이 완성되자 진서산(眞西山 진덕수(眞德秀))의 《대학연의(大學衍義)》의 예처럼 성상에게 올려 을람(乙覽)하게 하고자 하였으나 불행히도 중도에 화란을 만나 결국 올리지 못하니, 식자(識者)들이 한으로 여겼다. 선생은 여러 책들에 널리 통하여 마치 땅에 실려 있고 바다에 담겨 있는 것과 같았다. 어쩌다 처리하기 곤란한 일이나 다른 사람의 의문에 답하게 될 경우에는 모두 고거(考據)가 자세하고 비유가 친절하였으며, 마치 자신의 말을 읊듯이 거침이 없었다.

 

조정에 있을 당시 큰일에 임하거나 큰 문제를 해결할 때에도 모두 자세히 파악하여 사례를 원용(援用)하기를 마치 강물을 터놓은 듯이 거침이 없었으니, 변설이 광대하고 심오한 것은 말할 것도 없으며 진실로 평소에 깊이 궁구하고 분명하게 이해한 것이 아니라면 어찌 일에 임하여 이와 같이 현혹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특히 주자(朱子)의 글을 존신(尊信)하여 종신토록 음미하였으며,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 등의 글 같은 것은 만년(晩年)에 이르러서도 종종 외울 수 있었으니, 그 평생의 수용(受用)한 바가 대부분 이 속에서 나왔다. 특히 선류(善類)를 장려하고 후진을 인도하는 데 부지런하였으니, 다른 사람이 선(善)을 향한 마음이 있거나 학문한다는 명성이 있음을 듣게 되면 마치 자신이 그러한 것처럼 얼굴에 기쁜 빛이 돌았고 성의(誠意)가 애연(藹然)하였다.

 

학자들에게 말해 줄 때에는 반드시 사서(四書)를 입두처(入頭處)로 하였고 특히 《논어》를 요처로 삼았으며, 만약 그대로 하지 않는 자가 있으면 반드시 ‘엽등(躐等)하여 절차를 무시하고 외면으로 내달아 부범(浮泛)하다’는 것으로 꾸짖었다.

 

그 때문에 그 문하에 든 자는 비록 기품(氣稟)에 고하(高下)가 있고 견식(見識)에 천심(淺深)이 있었으나 모두 겸손하고 순후(醇厚)하여 부박(浮薄)하거나 거친 습속이 없었다. 이른바 “물어보지 않아도 안정(安定)의 문인(門人)임을 알겠다.”라는 것이다.

 

병자호란 후에는 매번 신주(神州-명나라)가 망해 가는 것을 한탄하면서 때때로 커다란 변고가 들릴 때마다 문득 감개하여 마지않았다. 평생토록 제갈 무후(諸葛武侯 제갈량(諸葛亮))의 사람됨을 사모하여 그 유문(遺文)과 후대의 유자(儒者)들의 의론을 모아 도 정절(陶靖節 도잠(陶潛))의 유사(遺事)와 합하여 《충절록(忠節錄)》을 지었다.

 

만년에 또 흥을 읊고 일을 논한 작품들과 군주에게 올린 글들 중에서 황조(皇朝)에 대해 언급한 것들을 편차하여 《존주록(尊周錄)》을 지었다. 때로 붕우들과의 술자리에서 마음에 맞는 사람을 만나면 술이 몇 순배 돈 뒤에 문득 무후의 〈출사표(出師表)〉를 읊고 간간이 노두(老杜 두보(杜甫))의 〈고백행(古柏行)〉을 읊었다.

 

음절이 맑고 통창(通暢)하였으며 의기(意氣)가 격앙(激昂)되니 사람들이 모두 송연(悚然)하게 들었다. 평소에 아름다운 산수를 좋아하여 마음에 드는 곳이 있으면 소요하면서 돌아가기를 잊고 유연히 자득(自得)하는 흥취가 있었다.

 

병이 깊어지자 제생(諸生)들이 와서 병문안을 하였는데 선생은 병을 무릅쓰고 거의 감긴 눈으로 바라보면서 이르기를, “늘그막에 서로 종유(從遊)하여 거의 상장(相長)의 유익함이 있을 듯하였는데, 이제 병이 여기에 이르게 되어 이 일을 그만두어야 하는 것이 매우 한스럽네.” 하였다. 병환이 이미 위급해지자 붓을 잡아 벽에 한 수를 제하기를,

 

덧없는 인간 세상 / 草草人間世
어느덧 팔십 년이 흘렀네. / 居然八十年

평생토록 한 일이 무엇이던가 / 生平何所事
하늘에 부끄럽지 않고자 하였을 뿐 / 要不愧皇天

하였다.

 

아, 이것은 아마도 ‘수족을 펴 보라[啓手足]’는 뜻이 아니겠는가. 선생이 후생(後生 학생)일 때는 문장에 고건(古健)한 맛이 가득하였으며 그 시(詩) 또한 그러하였다.  만년에 이르러서는 학문을 강하고 이치를 밝히는 데 전심하였으므로 그 문장이 분명하고 통창하였으며 수식을 일삼지 않았다. 대개 고정(考亭 주희(朱熹))에게서 얻은 바가 많았기 때문이다.

 

저서로는 《홍범연의(洪範衍義)》, 《어제주수도설발휘(御製舟水圖說發揮)》, 《돈전최어(惇典稡語)》, 《율곡사단칠정서변(栗谷四端七情書辨)》, 《수주관규록(愁州管窺錄)》, 《충절록(忠節錄)》, 《영모록(永慕錄)》, 《신편팔진도설(新編八陣圖說)》과 소차(疏箚), 강의(講義), 시문(詩文), 잡저(雜著) 약간 권이 집안에 보관되어 있다.

 

부인(夫人) 무안박씨(務安朴氏)는 경력(經歷) 륵(玏)의 따님이고 영남동도 병마절도사(嶺南東道兵馬節度使) 증(贈) 호조판서(戶曹判書) 의장(毅長)의 손녀이다. 규문(閨門)의 법도가 있었고 집안을 화목하게 하는 덕이 있었다.

 

군자를 모시는 데 어김이 없었으며, 시부모를 봉양함에 정성을 다하였다.

선생보다 32년 먼저 졸(卒)하였으며, 영양현(英陽縣) 수비(首比)의 남쪽 언덕에 장사 지냈다.

 

아들 넷과 딸 셋을 두었다. 장남은 천(梴)이다. 다음은 의(檥)인데, 중부(仲父) 존재(存齋) 선생의 후사로 갔다. 문행(文行)이 있었으나 일찍 졸하였다. 그다음은 재(栽)이고, 다음은 심(杺)으로, 모두 가학(家學)을 잘 계승하였다.

 

장녀는 김이현(金以鉉)에게 시집가고, 다음은 홍억(洪億)에게 시집가고, 다음은 김대(金岱)에게 시집갔는데, 모두 일찍 죽었다. 서자(庶子)가 또 셋이었으니, 전(槇), 련(槤), 반(㭓)이다. 전은 상을 감당하지 못하고 죽었다.

 

천은 3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지후(之㷞), 지유(之煣), 지료(之炓)이고, 딸은 금수익(琴壽益)에게 시집갔다. 서자가 또 둘 있다. 의는 2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지익(之熤), 지확(之?)이고, 딸은 권구(權榘)에게 시집갔다.

 

재는 4남 5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지훤(之烜), 지번(之燔), 지휘(之煇), 지온(之熅)이며, 장녀는 이태화(李泰和)에게 시집가고, 다음은 홍정(洪侹)에게 시집갔고, 나머지는 어리다. 심은 3남 2녀를 두었는데, 장녀는 김광현(金光鉉)에게 시집갔고 나머지는 어리다. 김이현은 3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몽렴(夢濂), 정렴(挺濂), 상렴(象濂)이고, 딸은 채명길(蔡命吉)에게 시집갔다.

 

홍억은 2남 2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경전(景全), 상전(尙全)이며, 딸은 모두 어리다. 김대는 1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지원(智元)이고, 딸은 이수야(李秀埜)에게 시집갔다. 전은 1남 1녀를 두었고, 련은 1녀를 두었는데, 모두 어리다. 내외로 손, 증손이 남녀 80여 인이나 된다.

 

아, 선생의 도는 내면에서 온축되어 외부로 드러났으며, 집안에서 행해져서 나라에까지 미쳤으니, 참으로 명체적용(明體適用)하여 세상에 이름을 날린 큰 유자(儒者)이시다. 그 조정에서 건의한 것을 살펴보면 나라를 경륜(經綸)할 훌륭한 계책이 아닌 것이 없었다. 만약 그 포부를 마저 펼치게 하였더라면 비록 그로 인해 다스림이 밝아진다고 해도 또한 이상할 것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은 나와 어긋나고 일은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공언(空言)으로 시행되지 못하여 군신(君臣)이 함께 일을 도모할 즈음에 펼쳐 보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사람을 참소함이 망극(罔極)하여 끝내 당화(黨禍)가 춤을 추는 때에 곤액(困厄)을 면치 못하였다.

 

남다른 포부를 지니고도 결국 뜻을 품은 채 세상을 떠났으니, 도가 행해지지 못하는 것은 운명인 것을 또한 장차 어찌할 것인가. 그러나 선생의 도는 비록 당대에 시행되지 못하였지만 그 강명(講明)하고 논저(論著)한 것은 또한 내세(來世)를 다행스럽게 하고 무궁(無窮)하게 전해질 것이다. 아, 무엇을 한할 것인가.

 

두인(斗寅)은 분에 넘치게도 선생께서 버리지 않으시고 또한 일찍이 거두어 가르칠 만한 자들의 축에 넣어 주셨다. 그 장려하고 이끌어 주시는 것이 평범하지 않았으나 어리석은 탓에 이룬 것이 없이 공연히 흰머리만 가득하다는 탄식만이 있게 되었다.

 

비록 다시 편달(鞭撻)을 받고 싶으나 이미 그럴 수 없게 되었으니, 그 때문에 눈물을 쏟으며 슬퍼하지 않은 적이 없다. 하루는 선생의 고아(孤兒)인 재(栽)가 손수 그 가전(家傳)을 적어서 내게 행장(行狀)을 지어 달라고 부탁하였다. 내가 일어나 이르기를, “그것은 대사(大事)이다. 마땅히 세상의 덕을 아는 자를 구하여 찾아가야 할 것이니, 두인같이 식견이 얕고 글재주가 없는 사람이 어찌 감히 선생의 성덕(盛德)과 대업(大業)을 행장으로 기술하여 후세에 증거로 남기겠는가. 감히 사양하노라.” 하였다.

 

군(君)이 의리를 들어 요구하기를 반복해서 그치지 않으므로 감히 끝내 사양할 수 없어 마침내 그 고루함을 잊고 가전에 의거해서 그대로 썼다. 감히 이것으로써 선생의 덕업(德業)의 만분의 일이나마 충분히 발명(發明)하였다고 여기는 것은 아니며, 그저 훗날 병필가(秉筆家)가 살펴보고 첨삭(添削)해 주기를 기다릴 뿐이다.

 

금상(今上=숙종) 33년(1707) 7월 정사일에 후학(後學) 영가(永嘉) 권두인(權斗寅)은 삼가 기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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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01] 1원(元)ㆍ12회(會)의 수 : 1원은 세상이 열린 뒤부터 소멸되기까지의 한 주기를 말하는 것으로, 1원은 12회(會)이고 1회는 30운(雲), 1운은 12세(世), 1세는 30년(年)이니, 1원은 12만 9600년이 된다. 《皇極經世書 觀物》

 

[주02] 한(漢)나라 …… 일 : 한나라 때 공승(龔勝)과 하후상(夏侯常)이 서로를 심하게 헐뜯자 상서(尙書)가 어사(御史)를 시켜 그들이 조정을 더럽히고 욕되게 한 것을 논핵(論劾)하게 하니, 어사가 “공승과 하후상이 높은 지위에 있으면서 예의(禮義)를 존숭하지 않고 서로 원망하고 비난하여 기강과 체모를 손상시켰다.”라고 하여 불경죄(不敬罪)로 논하였던 고사이다. 《漢書 卷72 王貢兩龔鮑傳》

 

[주03] 송(宋)나라 …… 사실 : 송나라 때 어사 장지기(蔣之奇)가 개인적인 원한을 품고 집정(執政)인 구양수(歐陽脩)의 음사(陰事)를 드러내어 논하였는데, 팽사영(彭思永)이 당시에 어사중승(御史中丞)으로 있으면서 “남녀 간의 비밀스러운 일은 외부인이 알 수 있는 바가 아니므로 비록 끝까지 힐문해서는 안 되지만, 이 말이 나온 것은 그 근거가 있을 것이니 관직에 머물러 있게 해서는 안 된다.”라고 논핵하였던 일을 가리킨다. 《宋史 卷320 彭思永傳》

 

[주04] 종계(宗系)와 관련하여 무고(誣告) : 청(淸)나라가 명(明)나라의 역사를 정리하면서 조선의 인조반정(仁祖反正)에 대해 반정을 부정적으로 다룬 야사(野史)의 기록을 인용한 일을 가리킨다. 《肅宗實錄 4年 3月 11日》

 

[주05] 중비(中批) : 정식 의망(擬望)을 거치지 않고 왕의 특지(特旨)로 임명하는 것을 말한다.

 

[주06] 임금이 …… 물이다 : 임금이 정사를 함에 있어서 백성들의 힘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는 말로, 《순자(荀子)》 〈왕제(王制)〉에 “임금은 배이고 백성은 물이다. 물은 배를 띄울 수도 있고 뒤집을 수도 있다.〔君者舟也 庶人者水也 水則載舟 水則覆舟〕” 하였다.

 

[주07] 근폭(芹曝)의 정성 : 하찮은 것이라도 임금을 생각하여 바치고자 하는 아랫사람의 정성을 가리킨다. 송(宋)나라의 어떤 사람이 봄철의 따스한 햇볕을 쬐며 더없이 좋은 것이라고 여겨 임금에게 바치고자 한 고사(故事)와, 시골 사람이 토호(土豪)에게 미나리를 진미(珍味)라고 여겨 바쳤다는 고사에서 유래하였다. 《列子 楊朱》

 

[주08] 학문이란 …… 뜻하겠습니까 : 맹자(孟子)가 “공손한 사람은 남을 업신여기지 않고, 검소한 사람은 남의 것을 빼앗지 않는다. 남을 업신여기고 남의 것을 빼앗는 임금은 오직 남이 나의 뜻을 따라 주지 않을까 걱정하니, 어찌 공손함과 검소함을 할 수 있으리요. 공손함과 검소함을 어찌 음성이나 웃음과 모습으로써 꾸며서 할 수 있으리요.” 하였다. 《孟子 離婁上》

 

[주09] 수도선부(水到船浮) : 물이 불어나서 자연스럽게 배가 뜨는 것으로, 치지(致知)의 공부가 쌓여서 모든 일이 인위적인 힘을 쓰지 않아도 절로 이치에 맞게 됨을 뜻한다. 《朱子語類 訓門人》

 

[주10] 거천주즙(巨川舟楫) : 훌륭한 재상을 뜻한다. 은(殷)나라 고종(高宗)이 부열(傅說)을 발탁하여 재상의 일을 맡기고 자신을 가르쳐 주기를 당부하면서 “만약 큰 시내를 건너고자 한다면 너를 배〔舟〕와 노〔楫〕로 삼으리라.” 하였다. 《書經 說命上》

 

[주11] 주허리섭(舟虛利涉) : 《주역(周易)》 중부괘(中孚卦)는, 상괘(上卦)는 태(兌), 하괘(下卦)는 손(巽)으로 이루어져 임금은 아랫사람에게 겸손하고 아랫사람은 임금을 믿고 기뻐서 따르는 형상이 되고, 또 초구(初九), 구이(九二), 육삼(六三), 육사(六四), 구오(九五), 상구(上九)로 이루어져 중심이 비어 있는 형상이 된다.

 

중심이 비어 있음, 즉 허중(虛中)을 주자(朱子)는 ‘일이 없을 때 마음이 비어 있는 것’으로 해석하여, 일체의 선입견이나 사심이 없이 텅 비어 있는 마음의 상태로 모든 사물을 접응(接應)하는 것을 뜻한다고 보았다.

 

[주12] 정치(鼎雉)의 이변 : 은나라 고종 때 제사에 쓰던 솥귀〔鼎耳〕에 꿩이 날아와 앉아 울었던 변고를 가리키는 것으로, 고종은 이것을 자신의 실덕(失德) 때문으로 여겨 몸을 닦고 선정(善政)을 베풀어 은나라를 중흥시켰다. 《書經 高宗肜日》

 

[주13] 정협(鄭俠)이 …… 일 : 정협은 송(宋)나라 신종(神宗) 때의 사람으로, 왕안석(王安石)의 신법(新法)이 백성에게 해를 끼친다고 여겨 직접 상소문을 가지고 대궐로 갔으나 받아 주지 않자, 기밀에 관한 급무라 가칭하고 체마(遞馬)를 이용하여 은대사(銀臺司)에 올렸던 일을 가리킨다. 《宋史 卷321 鄭俠列傳》

 

[주14] 척포두속(尺布斗粟)의 노래 : 한나라 문제(文帝)가, 역모를 꾀한 아우 회남왕(淮南王) 유장(劉長)을 촉(蜀)에 귀양 보내 죽게 하자 백성들이 천하를 소유하고도 아우 하나를 용납하지 못한 문제를 비난했던 노래로서, “한 자의 베도 바느질하여 함께 옷을 해 입을 수 있고, 한 말의 곡식도 절구질하여 함께 밥을 지어 먹을 수 있건만, 형제가 서로 용납하지 못하는구나.〔一斗布尙可縫 一斗粟尙可舂 兄弟二人不能相容〕”라는 내용이다. 《史記 卷118 淮南衡山列傳》

 

[주15] 일번인(一番人) : 당파나 이념을 달리하는 쪽의 사람을 구체적으로 지칭하지 않고자 할 때 쓰는 말로, 여기서는 송시열(宋時烈)과 김석주(金錫胄)를 가리킨다.

 

[주16] 효사전(孝思殿) : 조선 인조(仁祖)의 계비(繼妃) 장렬왕후(莊烈王后) 조씨(趙氏)의 혼전(魂殿)이다.

 

[주17] 비괘(否卦)와 …… 비유 : 태괘(泰卦)는 양(陽)인 군자가 안에 있고 음(陰)인 소인이 바깥에 있으니 군자의 도가 자라나고 소인의 도는 소멸되는 것을 비유하고, 비괘는 반대로 안에 소인이 있고 바깥에 군자가 있으니 소인의 도가 자라나고 군자의 도는 소멸되는 것을 비유한다.

 

[주18] 백성들이 …… 것인가 : 춘추(春秋) 시대 노(魯)나라에 흉년이 들자 국가의 재용이 부족한 것을 걱정한 애공(哀公)이 유약(有若)에게 그 대책을 물었는데, 유약은 “어찌하여 철법을 쓰지 않으십니까.〔盍徹〕”라고 답하였다.

 

철법은 10분의 1을 세금으로 걷는 제도로서, 애공이 “10분의 2를 걷는 지금도 오히려 부족한데 어떻게 철법을 쓰겠는가.” 하자 유약이 이렇게 말하여 군주와 백성은 일체이므로 즐거움과 고통을 항상 함께해야 한다는 것을 깨우쳤다. 《論語 顔淵》

 

[주19] 왕홍(王鉷)ㆍ진경(陳京)ㆍ양신긍(楊愼矜) : 모두 당나라 때의 권신(權臣)들로서, 임금의 뜻에 영합하여 새로운 명목의 세금을 거두자는 의론을 내어 백성들에게 해를 끼쳤다. 왕홍은 당나라 현종(玄宗) 때 사람으로, 혹독하게 세금을 거두어들여 조야(朝野)에 해독을 끼쳤다.

 

진경은 당나라 덕종(德宗) 때의 사람으로, 덕종이 세금을 거두어들이기를 좋아하자, 조찬(趙贊) 등과 함께 점맥전(墊陌錢)ㆍ간가세(間架稅)를 거두자는 의견을 내었다. 양신긍은 당나라 현종 때의 사람으로 현종이 대부(大府)의 출납(出納)을 맡기자, “여러 고을에서 바친 포백(布帛)이 찌들어서 파손된 것이 있으니, 본 고을에 돌려보내어 절고전(折估錢)을 받고 저자로 보내어야 한다.”라는 의견을 내어 징수하고 조달하는 것을 번거롭게 만들었다.

 

[주20] 의인사인(衣人死人) : 유세가인 괴통(蒯通)이 한신(韓信)에게 한왕(漢王)인 유방(劉邦)을 배신하도록 설득하니, 한신이 “한왕이 나를 매우 후대하여 자신의 옷을 내게 입히고 자신의 음식을 내게 먹였다.

 

내가 듣기로 ‘남의 옷을 얻어 입은 자는 그 사람의 근심을 생각하고 남의 음식을 얻어 먹은 자는 그 사람의 일에 목숨을 바친다〔衣人之衣者 懷人之憂 食人之食者 死人之事〕’고 하였으니, 내가 어찌 이익 때문에 의리를 저버릴 수 있으랴.”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史記 卷92 淮陰侯列傳》

 

[주21] 왕조(王朝) : 왕단(王旦)을 가리킨다. 조선(朝鮮) 태조(太祖)의 휘(諱)가 단(旦)이었으므로 피휘(避諱)한 것이다.

 

[주22] 천서(天書)와 …… 일 : 송(宋)나라 진종(眞宗)이 거란의 침공을 받아 전연(澶淵)에서 금품을 주고 맹약(盟約)을 맺었던 일을 부끄러워하여, 봉선(封禪)하여 사해(四海)를 진압하고자 꿈에서 신인(神人)이 천서를 내려 주었다고 거짓말을 하였는데, 실제로 천서를 승천문(承天門)과 태산(泰山)에서 얻게 되자 군신들과 함께 미친 듯이 기뻐한 일을 가리킨다. 《宋史 卷6 眞宗本紀》

 

[주23] 창빈(昌嬪) : 선조(宣祖)의 사친(私親)인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의 어머니 안씨(安氏)로, 효종조(孝宗朝)에 대신들과 의논하여 불천위(不遷位)로 하였다. 묘는 과천(果川)에 있다. 《孝宗實錄 9年 11月 14日》

 

[주24] 천주법(薦主法) : 추천되어 임관한 자가 만일 비리를 저지르거나 죄를 범한 경우에는 추천한 사람도 함께 그 죄에 연좌하는 법을 말한다.

 

[주25] 춘추(春秋)의 하오(夏五) : 《춘추》의 내용 중에는 분명히 ‘여름 오월〔夏五月〕’이라고 되어야 할 곳에 ‘월(月)’ 자가 빠져 있는 부분이 있다.

 

여기서는 이 부분을 후대에서 굳이 유추(類推)하여 채워 넣지 않고 그대로 남겨 두었던 것을 가리키는데, 이는 하찮은 부분이라도 함부로 첨삭을 가하지 않는다는 원칙 때문이었다.

 

[주26] 상송(商頌)에 …… 있는 : 춘추 시대 송나라 대공(戴公) 때 대부(大夫)인 정고보(正考父)가 상송 12편을 주(周)나라 태사(太師)에게서 얻어 돌아와, 선왕(先王)에게 제사 지낼 때 사용하였는데, 공자(孔子)가 《시경(詩經)》을 엮을 때에 그중에서 일곱 편이 망실되었는데도 추가로 보충하지 않고 그대로 두었던 것을 가리킨다.

 

[주27] 조사기(趙嗣基)가 선후(先后)를 무욕(誣辱) : 참의 조사기가 경신년(1680, 숙종6) 대출척(大黜斥) 때 유배당했다가 풀려나 돌아올 때, 도중에서 스스로 해명하는 소를 올리면서 송시열(宋時烈)이 찬한 명성왕후(明聖王后)의 지문(誌文) 중에 “태후가 밤에 임금과 함께 선정전(宣政殿)에 나아가 임금은 동쪽으로 향해 앉게 하고 태후는 문을 닫고 합내(閤內)에 계시면서 대신들을 불러 놓고 목 놓아 통곡했다.”라는 등의 말을 인용하고는, “시열의 당에서 무고하고 망극한 말로써 태후를 놀라게 한 것이 이와 같으니, 만일 성상께서 받들어 주선(周旋)하여 태후의 성심(聖心)을 깨우치게 하지 않았다면 당일의 여러 신하들은 이미 주륙(誅戮)을 당하였을 것입니다.” 하였던 일을 가리킨다.

 

[주28] 동파(東坡)가 …… 일 : 송나라 선제(宣帝) 때 소식(蘇軾)이 하옥되었다가 풀려나온 뒤에 장방평(張方平)이 그를 구원하기 위해 올리려고 했던 상소를 읽어 보고는 너무 놀라 자신도 모르게 혀를 내밀고 안색이 변했던 일을 가리킨다. 그 내용이 너무 과격하여 하마터면 황제의 노여움을 사서 오히려 큰 화를 당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言行龜鑑 卷6》

 

[주29] 오복(五福)ㆍ육극(六極) : 오복은 장수〔壽〕, 부(富), 강녕(康寧), 덕을 좋아함〔攸好德〕, 올바르게 명을 다함〔考終命〕이고, 육극은 흉사와 요절함〔凶短折〕, 질병〔疾〕, 우환〔憂〕, 가난〔貧〕, 악함〔惡〕, 나약함〔弱〕이다. 《書經 洪範》

 

[주30] 물어보지 …… 알겠다 : 안정(安定)은 북송(北宋) 때의 대유학자 호원(胡瑗)을 가리킨다. 그가 호주 교수(湖州敎授)로 있을 적에 경술(經術), 치도(治道) 두 서재를 두어 생도들을 각자의 자질에 맞게 가르치며 크게 학풍(學風)을 일으켜 많은 문하생들이 몰려들었는데, 모두들 행실과 학문이 훌륭하여 묻지 않아도 그 제자임을 알 수 있었다고 한다. 《言行龜鑑 卷1》

 

[주31] 수족을 펴보라는 뜻 : 계수족(啓手足)은 증자(曾子)가 병이 위독하여 임종(臨終)을 앞두고 있을 때, 제자를 불러 “내 발을 펴고 내 손을 펴 보아라. 《시경》에 이르기를 ‘전전긍긍하여 깊은 못에 다다른 듯 얇은 얼음을 밟듯 하라.’ 하였으니, 이제야 나는 근심을 잊었다.”라고 하여, 평생토록 조심하여 부모가 주신 몸을 상하게 하지 않고 죽게 된 것에 안도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 여기서는 임종을 예견하고 절필시(絶筆詩)를 쓰게 되었음을 뜻한다.

 

권경열(역) |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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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行狀]

 

本貫黃海道載寧郡。

曾祖殷輔。忠武衛副司直。 贈通政大夫承政院左承旨兼 經筵參贊官。 妣永嘉金氏 贈淑夫人。 繼全義李氏 贈淑夫人。

祖涵。通訓大夫宜寧縣監,晉州鎭管兵馬節制都尉。 贈嘉善大夫吏曹參判兼同知 經筵義禁府春秋館成均館事,弘文館提學, 世子左副賓客,五衛都摠府副摠管。 妣眞城李氏 贈貞夫人。

父時明。宣敎郞 康陵參奉。 贈資憲大夫吏曹判書兼知義禁府事,五衛都摠府都摠管。 妣金氏 贈貞夫人。 繼張氏 贈貞夫人。

先生諱玄逸。字翼昇。姓李氏。其先蓋出月城。新羅佐命功臣謁平之後也。勝國時有諱禹偁。封載寧君。始貫載寧。中世居密陽。後徙咸安之茅谷里。有諱孟賢。用經學顯重于 惠莊 康靖時。 賜第於京師。官至副提學。於先生爲五世祖。高祖諱璦。蔚珍縣令。縣令公贅于寧海。因家焉。子孫遂爲寧人。判書公凡兩娶。先配光山金氏。檢閱垓之女。後配安東張氏。敬堂先生興孝之女。判書公以經訓傳家。勤於穮蔉。張夫人服訓儒門。莊毅有學識。稱女中君子。以天啓七年丁卯正月十一日寅時。生先生于府西之仁良里第。張夫人方娠。得異夢焉。旣生。果有異質。未能言。指示爨婢失匙處。人異之。六歲。在判書公側。忽言人兩眉正似坤卦象。判書公大奇之。爲詩以識之。與群兒戲嬉。築壇設尼父位。爲俎豆習禮容之事。七歲。始受學。九歲。作花王詩曰。花王發春風。不語階壇上。紛紛百花開。何花爲丞相。人已知其異日爲公輔器也。十歲。聞南漢受圍。賦臘梅詩曰。牕前四梅樹。開向黃昏月。欲飮花下酒。奴賊圍城闕。其感時憂國之志。已溢於言外。嘗作方圓圖。以象天地。列書先天八卦。又以太極兩儀四象八卦十六三十二六十四卦生出次第。排列爲圖。又推一元十二會年數。著爲成說。識者歎曰。此兒他日必成大儒。及年十四五。豪宕有奇氣。所居石保村。舊有叢祠。人莫敢犯其樹木。先生焚其祠。卒無事。自是離經辨志。博通諸史百氏之書。尤喜看孫吳兵略。蓋有笞兵朔野之志。已而覺其於己分上不切。始回頭著近裏工。作五箴以自警。先生旣痛憤宗國非常之變。亡何天下事又大去。仰天大慟。爲之廢寢食者久。雖爲親強赴公車而非其志也。嘗再得解。再屈省試。遂棄擧子業。從仲氏存齋先生。一以讀書求志爲事。間入嶺海魚鰕之鄕。爲負米鹽養親之具。則泊然已無當世之念矣。然有時抱膝長吟。憂世愍俗之意。亦未嘗一日而忘也。先是 孝宗大王服制擬定時。宋時烈僭引四種服制中體而不正之說。指擬非倫。斷爲國是。人懷憤鬱。國言藉藉。而一言出口。竄逐禁錮隨之。人皆畏禍。莫敢復言。丙午春。嶺儒齊聲以爲不可以後時不論。將有抗章之擧。請先生製疏文。先生歷擧時烈獻議。段段攻破。其略曰。天子諸侯旣已承天序纂丕基。體祖傳重。統理神人。則不當復論系出之宗支族序之尊卑。夫將傳之與旣傳事體絶不同。豈可以宸極視監撫。至尊同儲貳。爭較嫡庶。辨論宗支。致有紛紜不決之疑哉。臣子之於君父。致謹致敬。在所當諱。則不敢直書。是故朱子嘗擧向太后之言。而至諸王皆庶子之文。乃以云云字。代補庶子字。夫端王實爲神宗之庶子。以其嘗爲天下父。故不敢以此等名號措諸文字間。此乃尊君諱國之義也。今我 孝廟以次嫡之正。寅紹丕圖。秪膺駿命。而時烈開口大言。略無忌諱。以爲 孝宗大王不害爲 仁祖大王之庶子也。殊非臣子之辭。尊上之道也。禮文繁漫。指擬多端。自昔鴻儒亦或不免考據之差。如使時烈初無遂非之失。則所謂君子之過。政如日月之更。而不思出此。曲爲回互迷藏之計。此所以犯不韙之罪。被不敬之名。而終無辭以自解也。疏雖不見用。木齋洪公汝河見其文。亟稱之曰。足以訂旣往之失。開後來之惑。遂定爲道義交。甲寅八月。 顯宗昇遐。今 上卽位。克遵 先志。首正邦禮。於是拜先生爲 孝廟寢郞。而先數日。已遭判書公憂。未除喪。又除社稷署參奉。丁巳夏。用薦者。超授掌樂主簿。始起應命。尋遷工曹佐郞。爲親老呈告下鄕。許文正公穆進言於 上曰。近觀李某。眞儒者也。 經席不可無此人。是冬。拜司憲府持平。累辭 不允。遂就職。筵臣建白請令入侍 經筵。再辭 不允。降旨褒諭。因事遞職。尋拜工曹正郞。復爲持平。上章固辭。仍陳五條。曰明正學以立大本。曰振紀綱以厲風俗。曰恢公道以正王法。曰納忠諫以祛壅蔽。曰察民情以行實惠。卒以戒逸慾保身體之說。申告于終。蓋以 上新經大病。方在攝養故也。其言懇切明暢。深得告君之體。 上優答。仍賜馬粧一部。以示嘉奬之意。先生卽陳疏辭謝。因乞解經幄之 命。不允。時朝紳中有因一小嫌。互相非毀。至發陰私。先生以爲此無異賈豎女子爭言。其虧士風辱朝廷大矣。乃引漢御史劾龔勝夏侯常及宋彭中丞駁歐陽公事。將發論。僚議不一。引嫌見遞。以尙帶 經筵指揮。未敢言去。會 上疾瘳。大臣請告 廟陳賀。又以宗祊被誣。議遣辨誣使。先生進密疏略曰。陳賀之請。固出臣子至情。而謙抑之美。尤宜將順。速令停止。傳示四方。又言今茲辨誣之擧。徒惹日後有識者之疑。而重爲宗祊之辱。北虜於我有 宗廟社稷之羞。而勦絶我有 明三百年之命。其所以事以皮幣。羈縻不絶者。特迫於勢耳。奈何忘深羞冒大恥。爲此得不爲榮。不得不損之擧乎。伏願亟寢無益之行。免貽後日之悔。 上批曰。陳賀事。予意固不欲。卽令該曹停止。辨誣事。必欲昭雪而後已。更勿煩論。還授持平。先生固辭。因言中批除官之失。 不允。仍呈告歸覲。以 上久廢經筵。擬進一疏。以犯事君數之戒。遂止不上。六月。又爲持平。累辭許遞。初 上沖年卽阼。勵精圖治。嘗因舟水君民之喩。旣命畫工爲圖。又親爲之說而論治國之道。其目有五。曰好學問也。用賢良也。納諫諍也。喜聞過也。賤貨而貴德也。至是先生歎曰。以 上聰明睿智。足以有爲。而朝著不靖。國事日非。豈非有是君。無是臣而以至於此耶。吾雖退伏田野。曾忝侍從之列。其可無一言以效芹曝之誠乎。遂就圖說。採摭經傳。釐爲六篇。名之曰 御製舟水圖說發揮。草疏累數千言。反覆推明。委曲懇惻。而其歸在於好學問。旣又敍其次輯之意曰。古之帝王。未有不資是五者而能成治道者。然所謂學者。豈涉獵記誦之謂。所謂賢者。豈順適己私之謂。所謂納諫而改過者。豈內不然而外姑從之謂。所謂儉而貴德者。豈聲音笑貌爲之而已之謂哉。亦語夫眞知實踐。至乎聖賢之域。求忠以助。取其正己之益。內省自訟。終歸無過之地。賢賢易色。以盡夫禮敬之實而已。今茲蒐輯之書。雖出愚臣佔畢之微。其言則二帝三王群聖人之訓。而歷代忠賢陳善納誨剴切的當之論也。殿聽下若於聽斷之隙。試取而一觀之。沿洄上下。優游自得。如朱子水到船浮之意。推誠任賢。共濟艱虞。如高宗巨川舟楫之須。上巽下說。虛中相應。如大易舟虛利涉之象。則舟水之喩。不但爲古事名言而已。必將有克勤克儉成允成功之美。然操舟之勢。偏重則難行。涉川之功。非健則不利。此正據舟臨水者之所當加意焉。而漏船頹瀾。維楫失宜。舟中性命。擧將昏墊。岸上傍觀。莫不寒心。則喚醒梢工。不至沈醉。平志畢力。以渡元元之意。尤不可緩也。 上覽之嘉歎。錫以虎皮一領。庚申夏。以堅,柟惡言犯上。而大獄起。金壽恒,閔鼎重等復起爲三公。宗室大臣重臣。並論以叛逆之科。或誅或竄。明年。吳相始壽下獄論死。又明年。有許璽獄。死者無數。先生以庚申七月。丁內憂。旣除喪。歎曰。國事有足流涕者。其可無一言以負臣子之責耶。會以災異求言。先生卽應 旨草疏。略曰。昔孝婦冤死東海。有三年之旱。歐陽枉死楚州。有八月之雪。外戚縱橫。則海溢冬華。臣下專輒。則日食地震。至他陰虹霾霧星芒地坼雷雪風雹之異。率由於臣蔽主明。姦邪勝正。陰聚包陽。不和而散之致。天人交感之理。豈不深切而著明也哉。商宗遇雊雉之異。克正厥事而殷道復興。成王感風雷之變。親逆周公而反風起禾。漢明帝用寒朗之言。理楚獄之冤。而久旱卽雨。宋太宗納寇準之說。責兩府之失。而大旱遂雨。試就今日所値之變。因竊以類而推之。似有陰盛陽微。蔽塞鬱結之象。毋乃 离明少虧。而或不免有蔽塞之患歟。乾綱少弛。而或不免有係攣之私歟。戚里之勢太盛。而或有放縱專恣之漸歟。小大之獄多濫。而或有橫罹枉死之冤歟。或是非顚倒。而公議有未伸歟。或毀譽亂眞。而邪正有未分歟。或上下相徇。而直言有不聞歟。或黨同伐異。而用舍有不公歟。夫必有是數者而後。足以召災而致異。 殿下試於燕閒濩蠖之中。虛心靜慮。以此數者。隱之於心。度之於事。而痛自省焉。察其有無。審其虛實。則必惕然而悟。惻然而感。事之是非。政之得失。人之邪正。皆得其實而無所遁其情矣。末復申言應天以實不以文之意。親舊子弟更扳挽請止以爲徒惹禍無益。先生歎曰。一身禍福。吾已不計矣。及章上。 上批曰。爲國盡言之誠。予庸嘉之。第未知其皆出於公也。領相金壽恒請論以護逆。會有言者。事得已。自是廢處田野者六七年。己巳。擢爲成均司業。大臣重臣。交口論薦。 上降旨敦諭曰。予留心經學。日御經筵。顧以未得博雅之儒爲恨。聞爾讀書博古。尤精於經學。卽以爾爲成均司業。須體予意。從速上來。先生辭不就。 上優批不允。至以幡然改圖予日望之爲諭。尋因重臣言。又 降溫諭。令道臣勸駕。先生感激異數。始赴 召未入城。轉拜掌令。辭不就。持除工曹參議。會 仁顯王后廢處私第。前判書吳斗寅等以諫獲罪。繼而有敢爲廢庶人言者。論以逆律之 敎。先生以求退得進。無異壟斷。且國有變故。不可以有禁令而終無一言。卽上疏固辭。因言 殿下再肅朝綱。一新庶政。蚤夜孜孜。專意講學。蓋將率禮循理。爲修身正家之本。明目達聰。爲納諫補過之地。臣竊以爲邦域之內。將興二南之化。廊廟之上。復覩都兪之盛。乍到圻邑。伏見邸報。屬因 天心未豫。動搖中壼。殊非愚臣平日所望於 殿下者也。臣聞妃匹之際。人倫之始。風化之原。不可不愼始而敬終。脫有不幸而處人倫之變。亦宜務盡道理。曲全恩義。不宜遽用威斷。使擧措失當也。昔漢之光武行之於前而不免賢帝之過。宋之仁宗行之於後而終爲白璧之瑕。惟 殿下念哉戒哉。臣又聞近日指揮。有言涉忌諱。直治之以逆律。似非古先哲王設誹謗之木。陳敢諫之鼓。稽衆察邇。隱惡揚善之意。亟令反汗。以廣言路。其疏格於禁令。不得達。於是依鄭俠違禁發遞事。授曹吏徑投政院。又不聽入。先生以進言不效。求去不得。進退無所據。辭至三。期於必遞。 上終不許。又移吏曹參議懇辭。又 不允。再上章請辭。因言庚申誣獄。速宜伸雪。又言堅,柟罪犯無將。固難容貸。至於㮒,煥,爀。親則王孫若王曾孫也。昔漢文帝封淮南王四子爲侯。宋太宗復秦王廷美子爲皇姪。人君待宗族有罪者之道。固異於凡人。況 聖上洞燭庚申獄誣告狀。惕然傷感。欲施昭天漏泉之澤。此堯舜之心也。噫。三人者或在絶島。或在海濱。愁居懾處。已經十許寒暑。如使被霧露嵐瘴毒。有不終其天年而死者。 殿下豈不病尺布斗粟之謠。豈不貽處事變不盡道之恨哉。又言吳斗寅等雖犯妄言之科。不宜禁錮其子壻叔姪。李尙眞亦不宜遽施嚴譴。 上優批。不許遞職。特允所請。惟李尙眞事不允。後因登對面請。得撤栫棘付處。尋賜柴炭米肉。特遣史官傳諭。蓋異數云。先生屢辭不許。促召愈急。遂入謝。入侍經筵。時方進講周易。因文獻戒。又推言外之意。反復開說。講訖。又隨事納誨。深切著明。 上皆嘉納。先生新從山野來。初見 君父。周旋中禮。敷奏明暢。擧朝相慶得人。 上亦目送之。六月。移拜成均祭酒。再辭不許。連給柴炭米肉。先生以月廩已優。更受格外異恩。尤未安。辭不受。 上終不聽。時以伏熱。罷講已久。先生上疏言朝晝之間。絶無箴規敬畏之益。但有親愛昵狎之私。則日往月來。志慮變易。不幾於天理漸消。人慾漸長乎。又擧程子暑月進講之請。眞西山夜對有益之語。及我 成宗大王晝訪夜對之規。以爲宜遠稽古訓。近追 先範。招選名儒。以充勸講之員。輪番上下。晝訪夜對。則庶幾有開發薰陶之益云。始李頤命等。改鶴峯金文忠公諡註。顯如貶斥。先生嘗因進講。極陳文忠公道學源流。請仍前註。從之。公論快之。先生於祭酒之任。屢辭不獲。則間詣太學。招諸生行相揖禮。講大學章句。推言窮理修身明體適用之要。又爲文通諭館學諸生。未幾。陞禮曹參判。兼 世子輔養官。頒朝衣一襲。先生辭不就。八月。遷大司憲。連辭 不允。會 上違豫。黽勉就職。尋移疾。 上遣醫賜藥物。至分賜御廚珍味。先生連章辭謝。仍乞解本兼諸任。皆 不許。先生辭之益力。始得許遞。會有九月雷震之異。先生推言豫恒燠。蠱元亨之義。以振綱維修政事肅邦典。答天戒之說。反覆言之。自 仁顯居私第。朝廷畏 嚴旨。莫敢復言。先生上疏言廢妃閔氏不循壼彝。自絶于天。然在 殿下所以處之之道。亦宜務盡道理。曲全恩義。然後可以慰輿望而答群情。閔氏正位中宮。奉承 至尊。殆將十年。今雖以罪廢黜。至於置之閭家。絶其廩食。略無毫分假借顧念之意。則似未免過當失中之歸。請依漢光武,宋仁宗待陳,郭故事。處之以離宮別館。爲設防衛。謹其糾禁。量給廩料。俾有所賴。則於 殿下處變之道。庶幾曲盡無遺恨矣。 上答曰。事異古今。決難輕議也。先生雖感激恩數。起應 召命。久於朝非志也。自經大病。求退益切。 上皆優批不許。十月。又拜大司憲。辭 不許。連入經席。因文陳戒。不避忌諱。 上皆稱善。每講畢。輒以崇節義象仁賢伸理冤枉。眷眷陳達。或贈職。或致祭旌閭。先生乞歸改葬焚黃。 上初不許。再辭乃 允。有旨給馬。官給祭需。先生辭謝。仍疏陳三條。其一。言保民固本。其二。言擇將訓兵。其三。言得賢養才之方。而請罷升補學製都會雜科。略倣程子學校之制,朱子貢擧之議。使士知德行之爲本。文藝之爲末。則庶幾人才風俗可得以美矣。 上深加奬納。令廟堂商確稟處。及辭。又言近來監司守令如李秀彥,李志傑輩。恣意殺人。不復忌憚。若不痛懲。則王法不行。 上曰。卿言至此。當體念而重究焉。旣辭朝。太學生等上疏請留。在途連乞免。兼陳勉學克己之意。又言臣有四當遞。宜卽允從。 上爲分別言四不當遞。且曰。天氣凝沍。寒事漸緊。念彼行李。憂心實多。旣又追 降別諭。歷擧疏辭褒答。其末有曰如卿所陳則人才可蔚興。世道可丕變云。庚午春。有言 孝,顯兩廟及 明聖,仁敬王后誌文。爲一番人誣筆。宜卽改撰。廷議不決。遣禮官收議。先生議以爲宋哲,徽之際。邪黨用事。誣謗宣,仁。無所不至。異時高宗命史官范沖重修國史。而未聞有改誌之事。周濂溪事蹟有失實處。朱子就潘誌蒲碣。删削去取。合爲事狀。而不以不改誌碣爲嫌。旣又追敍魏掞之誌銘之闕。書于墓表之後。而亦未嘗改撰誌文。豈不以穿掘墓隧。易舊以新。誠有所未安故耶。借曰士夫家事。不可擬之邦家典禮。則亦古者天子諸侯禮亡。不免以士喪禮倣而行之之意也。 上可其議。會有虹貫冬燠之變。 上下敎求言。先生卽於求免章。引春秋災異及洪範五行傳。極言恐懼修省變災爲祥之意。而尤惓惓於天理人欲之分。刑賞黜陟之際。 上優批不許。遣史官傳諭。令與偕還。俄移吏曹參判。再辭 不允。史官又至。先生益難處。四月。進至英陽縣。告病還。六月。行 世子冊禮。先生以尙帶輔養官。遂力疾登道。在道又拜侍講院贊善。旣至城外。卽上疏乞遞新舊職名。仍陳大本急務。而於所謂立大本者。尤反復致意焉。疏凡萬餘言。 上下批優奬。冊禮旣行。禮曹頒陳賀儀註。時 孝思殿几筵尙未徹。先生又上疏言建儲吉服。所以重其事也。至於 御殿受賀。殊非三年內改賀爲慰之意也。五疏乞遞。終 不許。時久旱民饑。兩南特甚。監司以狀聞。大臣請別遣官覈其虛實。先生進曰。朝廷不信監司守令。遣臣審覈。旣非朝廷體面。且失窮民望。 上顧大臣曰。僉意如何。左議政睦來善曰。李某言儘忠厚。然慶尙監司張皇 啓聞。至以爲赤地千里。必欲審其虛實者此也。先生對曰。是則不然。孟子不云乎。雲漢之詩曰。周餘黎民。靡有孑遺。信斯言也。是周無遺民也。以詩人忠厚。猶所云若是。豈以赤地之 啓。爲過當乎。廷議皆然之。 上重違大臣意。卒遣之。時以餘暑未祛。久不開筵。先生拈出朱子書,大學講義一篇。隨疏投進曰。篇中所言。莫非陳善格非之至意。苟於此三復致意。惕然警懼。則亦無異明師勸講居前在後之爲益。將使天下後世不恨朱子之說不行於當時。八月。連入侍講筵。講易訖。進言曰。三百八十四爻。無非憂勤惕厲之意。皆人主所當體念處。然如乾大象之自強不息。坤大象之厚德載物。否泰君子小人進退消長之喩。尤爲要切。其他隨卦陳說皆類此。 上皆虛心聽納先生進思盡忠。不計禍福利害。於時政得失治亂安危之幾。無不極言竭論。不少回避。不知者以爲儒者事業不在是。間有不悅者。胥動訛言浮謗。駸駸起矣。先生求去不得。再以改墓乞假。 上不許。卽具疏言四當去。不待 批徑歸。 上追遣史官。有無乃不足與有爲之敎。連辭。始遞本職。有 旨令本道待春和勸駕。十一月。移大司憲屢辭。皆 不允。時嶺南大饑。觀察使李聃命急於賑救。有一二便宜蠲給事。各邑守宰許貸餘米。未及收捧。睦相怒其擅便。請從輕重科罪。先生聞之。因丐章極言治道。仍言嶺南饑饉之慘。實非常年被災之比。道臣急於施置。便宜從事。廟堂以不經稟裁。再請問備。臣竊慨然。昔汲黯之使河南也。以便宜發倉賑民。請伏矯制之罪。武帝賢而釋之。韓韶之爲嬴長也。開倉以活流民。程伯子之爲上元主簿也。不稟漕司。發民築堤。未聞二子以此得罪於當時也。陸䞇之告其君曰。苟不失人。何憂乏用乎。古之人臣。每以收拾人心爲急務。今之議者。徒以經用闕乏爲憂。殊不念百姓足君誰與不足之義。若是則有若盍徹之論。果然迂闊。而必如王鉷,陳京,楊愼矜之徒。然後可謂忠於國矣。當此餓莩顚連。欲塡溝壑之際。遽發科罪督納之請。亦恐非撫存休養之意也。又言領府事金德遠以一言忤 旨。特罷斥之。殊非大聖人優禮大臣容受讜言之義也。疏未上。以大臣言。遣史官促召。道臣又勑長吏勸駕。先生憂窘方深。疏入。 上批略曰。憂愛之誠。予庸嘉尙。第相臣陳達。不啻妄發。李聃命之不稟朝命。甚非得宜。收米許貸。極可寒心。科罪督納。似不可已也。猶不許遞職。睦相見疏。出城自列。 上遣承旨慰諭。辭旨頗有未安者。先生卽上章自劾。先是領相權大運爲 上言平日禮遇之臣。不宜一朝摧折之。至是 上優批開釋。會引事見遞。五月。復還憲職。俄移吏曹參判。皆連章固辭。旣而睦相請 上召還。領相繼而爲言。 上又遣史官敦諭。五辭終 不許。先生不得已遂赴召。先一月。 上謁章陵。輦過六臣墓。遣官致祭。命追復其官。廷議不決。遣官收議。先生在途獻議。略曰。 世祖大王爲人心天命所迫。有此不得已之擧。彼六臣者抗節致忠。至死不變其心。卽伯夷非武王之心也。孔子是周人。猶以諫伐而餓。爲求仁而得仁。何嘗以稱述伯夷之故。有所嫌逼於武王哉。韓通效死於周。而宋太祖追贈優厚。景淸,鄭夢周盡節於所事。而 大明宣宗,本朝 太宗。或復官或褒贈。皆所以崇奬節義。爲後世人臣之勸也。今 上欲褒奬六臣。則亦 宣宗皇帝, 太宗大王之心。況 世祖大王以六臣爲後世忠臣之敎。實示微意於後世子孫。今茲之擧。實繼志述事之大者。斷自 宸衷。早賜施行。則其於樹風聲扶綱常之道。不爲少補。旣至郊外。連日促 召。繼給柴炭米肉。上章辭謝。優 批不允。遂引對興政殿。 上勞問甚厚。因問嶺南饑饉之餘。物情何如。先生具告昨今年歲儉民困狀。因陳遇災修省優容戇直之意。時方進講大學衍義。因 啓曰。古人謂此書爲治平之要道者。信不虛矣。眞德秀積年纂集。上疏投進。宋理皇欣然開納。進講經筵。旣又崇奬周程義理之學。恨不與朱子同時。亦不可謂無嗜賢好學之心。而治效殊甚滅裂。豈不以徒尙文具而無實得故耶。惟 殿下鑑於此而爲戒焉。又言昔在 宣廟時。金誠一爲諫官。斥言大臣受賕事。領相盧守愼受而爲過。 宣廟稱其兩得之。其力量風采如是。故雖値傾覆之患。卒能樹中興之業。願 殿下以 宣祖爲法。以盧相事責大臣。則宗社幸甚。時有一臺官言及相臣忤 上意故及之。一日因夜對。論古今事變。 上忽慨然發歎曰。中朝文物。今不可復見矣。始壬辰之亂。微 神宗皇帝再造之力。社稷無今日矣。此恩何可忘也。 崇禎皇帝時。有請問罪朝鮮者。 皇帝曰。彼誠迫於勢耳。勿問也。其體念小邦如此。每念之。不勝感泣也。先生進曰。國運不幸。事變至此。臣以草野螻蟻之賤。未嘗不悲憤塡臆。今承 聖敎。不覺感激涕下。 仁祖大王雖爲宗社計。不免忍恥暫屈。豈嘗一日而忘 天朝哉。每朔望望闕時。必西向痛哭。其意亦可見矣。及我 孝宗大王十年薪膽。規恢前烈。不幸中道晏駕。遺恨千古。 殿下若能聿追先志。養人才鍊甲兵。俟天下有變。爲 殿下所欲爲。豈不爲天人所助耶。顧今無一可恃之勢。必須得民心修武備。以爲根本之計。然後乃可爲也。因言西土人物極盛。江邊健兒精悍可用。且及西邊城池修葺事曰。此等事。必須得人而任之。然後可責成效也。 上嗟歎良久曰。非卿安得聞此言。仍賜酒。及退。又進前申告曰。以 殿下英武之資。若有大有爲之志。臣雖駑下。敢不竭力效忠。繼之以死乎。是時。 上頻御經筵。先生連入侍講席。不獨因文講義。兼陳物情時務。至於理冤辨誣。彰善癉惡。均田正賦。制造兵車。行錢革弊之要。靡不究極其原。反復論列。事多施行。又上疏論六事。曰進德,曰立志,曰通變,曰擇任,曰育才,曰惜時。率鑿鑿中窾。而於所謂惜時者。又三致志焉曰。臣每讀朱子所謂不惟臣之蒼顏白髮。已迫遲暮。竊仰天顏。亦覺非昔時者。未嘗不掩卷流涕也。蓋其所望於君父者愈深。而其言之愈切如此。 上深加奬納。一日自前席退。 上手執貂裘。令內璫宣賜。亦異數也。卽上疏辭謝曰。臣祗誦古人衣人死人之語。銘心篆骨。圖報萬一。然臣嘗有慨於宋臣王朝感一斗明珠之貺。不能諫止天書妖誕之事也。如使臣懷惠忘義。爲容身保位之計。亟賜罷斥。以厲群下。 上又引詩我有嘉賓中心貺之之語以答之。先生或呈告或疏辭。至再至三。而終 不允。壬申正月。又懇辭。始許遞本職。時自彼國移咨云方修一統志。將遣大臣。循視長白以南地方形勢。朝議方且除道於鴨綠東邊。歷長白之陽。直抵豆滿江。以達其行李。先生驚歎以爲彼人情僞不可測。極論其不可除道迎使狀。具箚進奏。 上可其議而姑不允。適會彼人因我國歲饑。事遂寢。又拜大司憲。再疏不許。其辭疏略曰。是非者天下之正理。不可苟焉而求合。又曰。臺諫者人主之耳目。不可束以體例。抑以分位。顏眞卿所謂如使諫官論事。先白宰相。是自掩其耳目。蕭至忠所謂若先白大夫而許彈事。如彈大夫。不知白誰者。實爲名言。由此觀之。非惟諫官論事。不必先白宰相。人君聽言之道。亦不可每咨宰相而爲之從違也。 上批。有論事之際。務歸平允。是所望於卿等語。或以其犯時諱觸 上意爲憂。初 上每歲頻詣先陵。至是將詣 光陵。時 上纔受灸。且當農時。於是先生率同僚啓請權停。累請不允。至下嚴敎。遂陳章自劾。 上降溫旨。領相又爲 上言。於是 上痛自引咎。遣史官慰諭。先生陳章移告。終不許。尋因賓廳入侍。又言速宜伸雪庚壬獄未盡伸雪者。以渙雷雨之澤。因引唐太宗治房彊獄及崔仁卿駁緣坐律輕議爲證。 上曰。當令廟堂稟處。翌日。諸僚引入。先生亦三告許遞。卽日出城還家。 上又追遣史官傳諭。史官以病難回程 啓。又下諭。辭旨益隆。先生陳章。史官又三啓言疾病難進狀。始有 旨且待秋涼。五月。還大司憲。下本道給衣資食物甚厚。先生再疏辭謝。七月。還授吏曹參判。五辭不許。冬。還大司憲懇辭。愈不許。癸酉春。再疏辭。因言 殿下臨政願治十有九年。荏苒因循。寢失寢亡。了無卓然可見之效。無乃 殿下格致之學。有所未至。而或蔽於輕重是非之分。誠正之工。有所未盡。而或失於好惡公私之判耶。夫學問之力未至。則必有和泥帶水淘擇不精之弊。自修之工未盡。則必有欲祛未祛苟焉自欺之患。試以今日耳目之所覩記者言之。 殿下前日所下成均備忘記。宛然有三代上遺意。及其施諸擧措之間。則未聞有登崇俊良招延德行之實。只以湖堂試取泮宮節製。爲聳動振作之擧。大臣籌司一月三接之規。亦出於疇咨訪問之意。而諸臣入對。未聞有經國遠謀保邦長策。只以遷進凡例事面常規。將做一大事。或以小技末藝不及古昔爲憂。未知在廷之臣。有以上下相徇。直言蔑聞。廉恥道喪。毀譽亂眞爲懼。而警咳於 冕旒之側者乎。數年以來。日食三始。地震雨雹。金精晝彩。水泉涌溢。白氣經天。江河赤濁。冬雷夏雪。山崩川渴。種種差異之變。式月斯生。臣未知廟堂之上。有以消弭災變備禦未然之策。爲 殿下一二陳列者乎。 上優答。不允所請。三月。又呈病乞免。史官齎到 別諭。辭旨愈懇。旣又申命史官仍留與偕。時 上又以災異求言。卽因辭疏。極言修德政祛偏私之意。 上嘉納。促召愈勤。遂就道行且辭。史官繼到。恩旨荐降。不得已詣闕祗謝。 上引見慰諭加厚。先生辭謝。因言古之人臣雖在治平之際。猶進危亂之戒。臣不敢知。 殿下以今日國事。爲治耶亂耶。安耶危耶。 上曰。易云其亡其亡。繫于苞桑。況今艱虞溢目。何可謂治安。惟望卿有懷畢陳。裨補闕失。對曰。 殿下昔在沖年。雖有小出入纔差失。猶有將來之望。到今春秋漸盛。志慮周徧。自修身正家。以至治國御世。皆當有成法。或因喜怒偏私。不免有過擧。則其爲盛德之累。又豈沖年之比也。昔太甲克終厥德。伊尹猶以常厥德。保厥位。厥德靡常。九有以亡。德惟一。動罔不吉。德二三。動罔不凶。申告于終。惟 殿下更加意於常厥德不二三之戒。易不云乎。不恒其德。或承之羞。 上曰。言甚切至。予當體念焉。宣醞以罷。後數日。控辭益懇。又請收還格外月廩。皆 不允。尋入侍講筵。講訖進小箚。略曰。臣聞福之興。莫不本乎室家。道之喪。莫不始乎梱內。三代聖賢之君能修其政者。莫不本於齊家。昔朱子之告其君曰。男定位乎外。女定位乎內。而夫婦之別嚴者。家之齊也。妻齊體於上。妾接承乎下。而庶嫡之分正者。家之齊也。內言不出。外言不入。苞苴不達。請托不行者。家之齊也。然閨門之內。恩常掩義。率多溺於情愛而不能自克。苟非正心修身。動由禮義。使之有以服吾之法而畏吾之威。何以正宮梱杜請托。檢姻戚而防禍亂之萌哉。先正臣李滉之告 宣祖大王曰。讒間之禍。恒人所不免。帝王之家。此患尤多。其故何哉。昵侍左右。便嬖給事者。無非宦寺與婦人。此輩例多陰邪狡獪。挾姦懷詐。喜亂樂禍。分勢角立。爭多較少。情狀萬端。一或傾耳。必至陷溺。兩賢之言。前後一貫。至爲痛切。豈非後世人主之龜鑑也哉。 殿下閱天下事變旣久。鑑前代得失甚明則豈有是哉。臣猶不勝過慮。敢陳先事之戒。 上曰。非卿憂愛之誠。無以至此。予當服膺焉。先生又曰。君臣以義合者也。必須情義交孚。可否相濟。然後可以共成光明正大之治。苟爲不然。君臣之間。兩相疑阻。咨且躑躅。悶默徊徨。則幾何其不至於亡人之國哉。 上又稱善。是時大小媕娿。莫有敢言內者。先生輒盡言不諱。同列至有縮頸汗下者。及 上溫顏虛受。爭相稱賀。時 上有日新軒隆武堂四絶句。皆省身克己丕承前烈之旨。先生效賡歌之義。隨章投進。 上覽之嘉歎。連上辭章許遞。俄移兵曹參判。三辭始得請。六月。陞議政府右參贊。先生每以求退得進辭卑居尊。累辭不獲命。常懷憂歎。欲以一事爲之兆也。乃以進德正俗育才之意。條陳三箚。以進請行古者選士之法及朱子所增損呂氏鄕約。蓋先生前此累以是爲言。而至是則其規模節目。益詳密矣。 上下廟堂議。領相權公請令禮部同大提學就儒臣熟講以行。 上從之。七月。拜吏曹判書三辭。不許。已而告病乞免。又不許。遣醫賜藥物。病間。入侍朝講。講畢。極陳情病俱難仍冒。 上溫諭不許。時大司諫姜世龜以請停 陵行罷。大司憲權瑎又忤 旨罷。先生以連斥爭臣非聖德事。進小箚略曰。夫臺諫者。人主之耳目。朝廷之紀綱。設使二諫臣之言。過中失當。猶當優容虛受。豈宜摧折之挫抑之若是乎。自此廷臣必將以言爲戒。其於 聖德何如。國事何如。又曰。王者燕處則聽雅頌之音。行步則有環佩之聲。乘車則有鸞和之音。居處有禮。進退有度。故發號施令。罔有不臧。擧措云爲。允合人心。豈若後世人主虧損威儀。敗壞德性者之爲哉。宮省事禁。 殿下燕處之節。臣固不得而知。然持養之工深。則必無倉卒急遽之失。 上皆嘉納焉。尋再辭。 不允。乞假焚黃。又不許。尋因入侍。論昌嬪載祀典非禮事。得施。時有 王子生。先生稱賀訖。因進言曰。禮王之適子若庶子生。其問之與見之各有節。蓋自誕生之初。等威已分。今旣冊立 世子。若明其等級。以嚴嫡庶之分。非但爲國家之福。亦爲新生王子之福。 上稱善。又請二品以上。各薦人才三人。或以德行。或以文藝。或以才諝。申嚴薦主法。皆依允。十月。大雷電以雨。因入侍。極陳省身克己。恤民隱疏冤滯。嚴宮禁杜私耶。以爲應天以實之道。又以開言路用人才。爲應天弭災之道。 上皆稱善。卽令依議擧行。先是先生累以選士鄕約等事爲請。而尙未頒降條制。至是又申前請。有旨卽速擧行。左相難以爲人心不淑。勢難行得。大宗伯亦言選士節目甚多。難可卒然擧行。 上命姑停。先生動引古昔。庶幾一展蘊蓄。而卒不得有爲於時。自此益決退歸之志。過大政後。陳情乞退。其略曰。臣愚戇狂疏。闊於事情。欲正俗育才。挽回世道。則泥古不通。窒礙難行。有違廟堂彌綸補贊之微意。欲薄斂裕下。少紓民力。則徒知容貸。全昧防奸。有違廟堂任怨奉公之至意。欲爲官擇人。杜絶請托。則擧爾所知。全用己意。不能曲循人事上規例。平生報國之心。反成虛妄之歸。豈敢因仍叨冒。不思奉身而退。以重迷國誤朝之罪乎。連章固辭者七。終不許。甲戌春。以 宗廟玉冊。因兵亂多散佚。廷議皆以追補爲是。先生因春秋夏五。商頌亡七篇之義。以爲當以傳信傳疑處之。不可率爾苟簡。以起後世之惑。尋又以焚黃乞假。 上初不允。三辭始許。及陛辭。 上引見宣醞。頗示惜去之意。先生起拜謝進曰。人主若無敵國外患。必有土木興作。珍禽奇獸。名花異草。狗馬聲色之玩。以娛耳目蕩心志。皆人君之至戒也。又曰。願 殿下正心修德。立經陳紀。遠細娛而圖大計。以深追 孝宗大王遺意。今當遠離。敢陳所懷。 上嘉奬。再三諭以早還。仍 命世子出見。 上顧侍璫諭 世子意。亦令從速還朝。其虛佇眷注之意如此。三月還家。時失志輩含怨伺隙。聚銀貨陰謀事覺。下獄得情。將法之。忽有寅者。爲惡言上變。熒惑上聽。 上大怒。按獄諸臣。皆絶島安置。大臣及承旨三司一倂罷黜。時事大變。先生始以還朝未易。有旨改差。臺論繼發。遂有洪原之責。蓋以嘗營救趙嗣基故也。先是趙以語犯 先后。因臺啓遠竄。先生疏論其不宜以言語罪人。 上亦洞燭其無他。遂命赦還。至是以誣辱 先后置極刑。臺諫請科營護人罪。故有是命。是時駭機卒發。禍網彌天。朝野震盪。先生處之夷然。言動如常時。及禁府郞至。則曰。君命不可宿。卽日就道。未及洪原。又聞有錦衣逮。蓋先生前日爲 坤宮請處別宮疏。有自絶于天及爲設防衛謹其糾禁等語。掌令安世徵以包藏禍心。陰祕侵逼爲辭。首請拿問。而以前所陳嚴嫡庶之說。爲受人指嗾探試內事者。又出於金寅招。纔數日。又有鞫廳之命。知事徐文重謂其專出搆捏。欲置之。問事郞金時傑等互相煽俑。必欲甘心。人皆謂禍將不測。先生獨神色不變。時男栽在側號泣。先生徐曰。禍福在天。其於天何。爾無驚遑爾。及置對。引經據義。理明辭直。爰書旣出。世徵自知誣罔以爽實。引避。金寅亦屢變辭。所言皆不讎。無辭以傳死議。竟論鍾城府圍籬安置。夫以先生爲 坤宮前後陳達者。皆懇惻深切。有足感動人主之聽者。卒之從先生之請。有修理別宮之命。事雖中寢。其本意亦可見矣。彼雖百般羅織。終不得毫毛罪。而必欲擠而陷之者無他。蓋先生當事。無所回避。於抑邪扶正懲惡討罪。不少饒假。於是群猜競起。乘時修郤。始發營救趙嗣基之論。終焉拈出疏中數箇字。爲先生罪案。噫。驟諫激君。終知無益於事。而婉辭回天。自是進言之道。彼豈不知其本意之斷斷無他。而摘其一二文字。直欲驅而納之陷阱之中。吁亦異矣。況王宮糾禁之法。載在周官經。實所以尊體貌備守衛。而欲以此爲蜮射之資者。亦獨何哉。且夫嚴嫡庶之說。亦不過爲國家存匹嫡之戒。其曰受嗾探試。亦豈非無理無據之甚哉。其變幻粧撰。至於崔重泰之換爲設作嚴加字而極矣。嗚呼。可勝言耶。先生當盛暑蒸熱。累朔繫鞫獄。先生恬然若處齋閤。寢食如平日。旣出獄。京城大夫士莫不奔走致力。助其行具。至有欲爲上書訟冤者。或有以東坡吐舌於張方平爲言者。遂止。先生怡然就道。略無幾微見顏面。謂追送中路諸人曰。人生患難。難容智計規免。願諸賢益勵丈夫之氣。勿以老夫故而自沮也。旣至謫所。安之若命。讀書著文。日有程課。手書周易古經。精加點竄。北俗椎樸。不知有義理之學。先生進其秀者。授以四書章句及朱子小學家禮等書。循循誘掖。往往有斐然興起者。丁丑夏。量移湖南之光陽。跋涉數千里。七月始到配。入白雲山下玉龍洞而居焉。先生七十之年。北竄南謫。流離撼頓。窮亦極矣。而沈潛典訓。樂以忘憂。殆無楚囚湘纍之思。己卯正月。 命放歸。臺諫請還收。先生待命於晉陽境上且一年。庚辰二月。始停 啓。歸寓花山之錦陽。愛其山川明秀。日杖屨逍遙。辛巳八月。 仁顯王后上仙。巫蠱獄起。大加罪甲戌諸人。論者復以先生爲注。請處栫棘。經年不止。先生日束裝待命。猶與門下人日講論名理。不見有憂歎色。 上終不允。然自此杜門不接人事。時誦古人逢人深閉口無事學搔頭之句曰。今日始知此語爲有味也。先生年益高德益邵。而信從者衆。遠近摳衣問業者日踵門。先生提撕警誨。各因其才而篤焉。庶幾循序漸進。將有成就之望。不幸先生示憊。遂以甲申十月三日。奄棄後學。遠近聞者。莫不咨嗟痛惜曰。君子亡矣。吾道何托焉。京中人士相率爲位於城南舊館而哭之。明年正月。葬錦陽北麓丁向原。會者三百餘人。列邑校院操文致祭者亦多。粤二年丙戌。用卜人言。移葬于安東府南申石巽向之原。先生家學之傳。蓋本之敬堂張先生。張先生得爲學之大方於鶴,厓兩先生。存齋先生推其緖餘而益大之。先生資稟旣異。而又從仲氏先生。切磨浸灌。其淵源所漸蓋如此。先生聰明穎悟。絶出倫類。始也汎濫諸家。自經傳子史。以及律呂星曆大衍參同兵謀師律六花八陣之法。靡不淹貫究極。雖肯綮盤錯。皆迎刃而解。目無難書。仲氏先生每稱其不可及。當其盛年時。志氣雄遠慷慨。以經濟自期。思欲爲國家。一雪讎恥。旣知其不可有爲。又益知有內外賓主之辨。反而求之六經,庸學,語孟,程,朱子諸說而後。其學粹然一出於正矣。嘗曰。虞書精一。孔門博約。大學格致誠正。中庸明善誠身。孟子知言養氣。千古聖賢相傳心法。只是一箇塗轍。言雖殊而理則一。程,朱子發明此義尤盡。學者當交致其功。不可倚於一偏。又嘗曰。道非高遠難行。只在日用彝倫之間。堯舜之道不過如此。今以道爲非常差異底物。非人人所可能。其亦異矣。又嘗曰。學者不但在章句誦說之間。日用應接之際。隨事精察。隨處體驗。而先從居處恭執事敬忠信篤敬上做工夫。庶幾有所持循據守。孔門家法。本自如此。又曰。以我爲主則心狹而意私。以理爲主則心廣而意公。其言之精切如此。先生天資慈祥。德宇渾成。端莊凝重。不設惰慢。雅諄謙沖。不露圭角。忿厲粗暴之氣。不形於倉卒急遽之際。罵詈呵責之言。不及於子弟僕隷之間。望之嶷然。如高山崇嶽。卽之溫然。如瑞日和風。雖平日不相識及素相訾嗸者。及瞻其顏色。接其辭氣。則莫不一辭稱曰有德君子。茲豈無所以而然哉。試以其見於行實者言之。其事親也。雖菽水不給。而常婉容愉色。順適其意。其處兄弟也。常友恭和悅。而未嘗有失色違言。死喪之節。戚易咸備。祭祀之禮。誠敬俱至。內外親戚。雖已疏遠。必敦其姻睦。鄕黨故舊。雖甚卑微。不以位分相加。以至救患難恤窮困。必盡其力之所至。平生不言生產作業。所居屋不蔽風雨。簞瓢屢空。晏如也。亦未嘗爲子孫毫髮計營立。判書公嘗閔其家計旁落。特賜臧獲等物。輒固辭不受。歸之宗祀。此雖小節。其他可槩已。先生半世嘉遯。若將終身。晩際煕運。禮遇隆洽。感激圖報。有懷必達。謂吾君可以爲堯舜。謂世道可以挽回。陳善格非之論。不輟於章奏之間。正俗育才之論。屢勤於造膝之規。至如同好惡,結民心,訓章法,飭邊備,辨賢邪,明賞罰。莫非保邦急務。爲治大道。且夫臨筵講義之際。援據經史。出入古今。隨事陳謨。痛切的當。而要亦歸之人主一心。 聖上虛心而聽納。同僚注目其敷施。莫不退而歎曰眞講官也。然其所論列。不但不見施行。人或以擔當世務病之。先生益不樂。每有除命。輒上章乞免。或至六七上而不止。雖眷戀君恩。不忍便永訣。而其所以決去就者。蓋亦已久矣。然憂國一念。不以進退擯斥而或忘。每聞天災時變。與夫政令施措有傷風化害治道者。則未嘗不慷慨憂歎。或至泣下。大有定力。夷險不貳。方其罹文罔就訊庭也。擧止雍容。應對詳緩。略無危怖色。委官以下。亦不覺暗暗稱奇。供畢。皆目送曰。此人今日能不落名矣。安世徵嘗語人曰。始吾誤聞人言。發論請逮。及觀其容貌辭氣。匪直无妄。眞箇有道君子。吾遂以爽實自劾。坐是補外。然不恨也。因嘖嘖稱歎。可見秉彝之心終不可誣也。蓋先生之學。以主敬爲本。窮理爲要。當居室則靜坐終日。儼然有儀則。論義理則縷析毫分。各極其歸趣。知行幷進。表裏如一。迨其季年。義精仁熟。每以學術分岐。異說肆行。爲己隱憂。雖前輩立言。或有未安處。必辨疑訂誤。要歸於正。嘗曰。退陶四七辨。實合朱子說。可謂顚撲不破。百世以俟而不惑者。栗谷李氏大加非斥。至謂義理不明。其說張皇震耀。祖栗谷者。同然和之。謂發前賢所未發。公然認氣爲理。認人欲爲天理。認理爲空虛冥寂底物事。其流之禍。將有不可勝言者。遂摭出其中尤害理者。逐條辨破。累數千言。名曰栗谷四端七情書辨。其與朋友及學者書。亦以此反復辨論。極言不已。然皆祖述程朱定論。未嘗創之己見。始存齋先生講學之餘。留意經世之業。以爲洪範九疇。實聖王修身經世之大經大法。況父師八條之敎。立我朝鮮萬世之極。有能發揮範疇。著爲一家言。則豈非曠古一奇事耶。於是採摭經傳。類纂彙輯。篇目已次。書未及成。而存齋遽沒。先生有慨于是。則因其條貫而續成之。其書本之經文。以立其綱。參之傳文。以張其紀。著之事證。以徵其言。附之議論。以明其義。使水火木金土之性。貌言視聽思之則。以至兵農財賦事神治人福極勸懲之道。咸各序其宜。書成。將欲上備 乙覽。如眞西山大學衍義例。不幸中遭禍難。竟不果上。識者恨之。先生博極群書。如地負海涵。遇有難處事及答人疑問。皆考據精詳。引喩親切。沛然如誦己言。其在朝廷。臨大事決大疑。亦莫不貫穿援擧。若決江河。卽無論辨博宏奧。苟非平日窮格深而見得明。焉能臨事不眩如是哉。尤尊信朱子書。味之終身。如節要等書。雖在晩暮後。往往能成誦。蓋其平生受用。多從這裏出。尤勤於奬勵善類。接引後進。如聞人有向善之心爲學之名。則喜動顏色。若己有之。誠意藹然。其與學者言。必以四書爲入頭處。尤以論語爲切要。其有不然者。必以躐等凌節向外浮汎責之。是以登其門者。雖氣稟有高下。見識有淺深。而率皆謙恭醇謹。無浮薄粗厲之習。所謂不問可知其爲安定之門人也。自丙子變後。每歎神州之陸沈。時聞有風飆之響。輒爲之感慨不歇。平生慕諸葛武侯之爲人。輯其遺文及後儒議論。合陶靖節遺事。作忠節錄。晩節。又次其遣興論事之作及奏 御文。有言及 皇朝者。作尊周錄。有時朋酒之會。遇賞心之人。則酒數行。輒誦武侯出師表。間詠老杜古柏行。音節響亮。意氣激仰。人皆竦聽。雅好佳山水。遇會心處。徜徉忘返。有悠然自得之趣。旣寢疾。諸生來問疾。先生力疾微視曰。暮年相從。庶幾有相長之益。今病至此。深恨此事遂已也。病旣革。援筆題一絶于壁曰。草草人間世。居然八十年。生平何所事。要不愧皇天。嗚呼。此其啓手足之意也歟。先生後生時。文章蒼蔚古健。其詩亦如之。及乎晩年。專意講學明理。其文明白暢達。不事雕飾。蓋得於考亭者爲多。所著書有洪範衍義, 御製舟水圖說發揮,惇典稡語,栗谷四七書辨,愁州管窺錄,忠節錄,永慕錄,新編八陣圖說,疏箚講義,詩文雜著如干卷藏于家。夫人務安朴氏。經歷玏之女。嶺南東道兵馬節度使 贈戶曹判書毅長之孫女也。有型壼之範宜家之德。事君子無違。奉舅姑以誠。先先生三十二年卒。葬英陽首比負坎之原。有子男四人女三人。長梴。次檥出後仲父存齋先生。有文行早卒。次栽,次杺皆能世其家。女長適金以鉉。次適洪億。次適金岱。皆早沒。餘男又三人。槇,槤,㭓。槇不勝喪。梴有三男一女。男之㷞,之煣,之炓。女適琴壽益。餘男又二人。檥有二男一女。男之熤,之?。女適權榘。栽有四男五女。男之烜,之燔,之煇,之熅。女適李泰和。次適洪侹。餘幼。杺有三男二女。女長適金光鉉。餘幼。金以鉉有三男一女。男夢濂,挺濂,象濂。女適蔡命吉。洪億有二男二女。男景全尙全。女皆幼。金岱有一男一女。男智元。女適李秀埜。槇有一男一女。槤有一女。皆幼。內外孫曾男女八十餘人。嗚呼。先生之道。積于中發于外。行于家達于國。可謂明體適用。命世之宏儒也。蹟其立朝建明。莫非經國嘉謨。使畢其猷爲。雖由此致理休明。亦不異矣。而顧世與我違。事不從心。空言無施。旣不得展布於明良吁咈之際。讒人罔極。卒不免困厄於黨禍翻覆之時。抱負經奇。畢竟齎志以沒。道之不行也命。亦將如之何哉。雖然。先生之道。雖不獲見施於一時。而其所講明論著。亦足幸來世而垂無窮。嗚呼何恨哉。斗寅辱先生不棄。亦嘗收而置之可敎之科。其所以奬勉提掖之者。蓋非尋常。而愚陋無聞。空有白首紛如之歎。雖欲更受鞭繩。而已不可得。則未嘗不爲之潸焉出涕以悲也。一日先生之孤栽氏手其家傳。屬余狀之。余作而曰。此大事也。當求之世之知德者而謁之。如斗寅淺弊不文。其何敢狀先生盛德大業而徵諸後哉。敢辭。君以義責之。反復不置。不敢終讓。遂忘其固陋。據家傳而直書之。非敢以是爲足以發明先生德業之萬一也。聊以備異日秉筆者之垂察而裁削焉爾。

上之三十三年七月丁巳。後學永嘉權斗寅謹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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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01] 聽 : 衍字

[주02] 持 : 特

[주03] 卿 : 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