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벽오 이시발선생

계유사마동방계회도(癸酉司馬同榜契會圖)

야촌(1) 2017. 12. 1. 15:25

계유사마동방계회도(癸酉司馬同榜契會圖)’

 

 ↑계유사마동방계회도(癸酉司馬同榜契會圖)

 

1573년(선조 6) 계유년에 치러진 사마시(司馬試)에 급제한 사람들이 30년 뒤인 1602년(선조 35) 10월 16일, 안동에서 계회(契會)를 할 때의 광경을 그린 그림이다.

 

사마시는 조선시대 성균관에 입학할 자격을 부여하는 것을 본래의 목적으로 실시한 과거로 소과(小科)라고도 한다. 관리 임용을 위한 문과[文科=大科]와는 성격이 달랐다. 생원・진사 두 시험 중에 진사시를 먼저 하고, 하루 지난 뒤에 생원시를 하기 때문에 흔히 진사시를 감시 초장(監試初場)이라 하고, 생원시를 감시 후장(監試後場)이라 하였으며, 이때 한 사람이 생원·진사 두 시험에 응시할 수 있어서 두 시험에 모두 합격하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그림을 살펴보면 관아의 별채 앞에 친 천막 아래 안동부사 홍사군(洪使君=해당 고을원의 존칭으로 홍의상을 말함)의 모친을 중심으로 참석자들이 왼편에는 사모관대 즉 벼슬아치들이 쓰던 모자와 관복을 입은 사람들 9명으로 당시 벼슬에 비춰보면 안동부사 홍이상(洪履祥), 경주부윤 이시언(李時彦), 신령 현감 채길선(蔡吉先), 비안 현감 유위(柳 湋), 영주군수 이람(李 覽), 전 대구부사 김구정(金九鼎), 함양군수 고상안(高尙顔), 성주목사 신경진(辛慶晉), 종사랑 금복고(琴復古)로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오른쪽으로는 선비들이 평상시에 입던 겉옷인 도포와 흑립(검은 갓)을 쓴 사람들이 나란히 앉아있다.

 

8명이 앉아 있으나 참석자 명단을 살펴보면 생원 윤의정(尹義貞), 진사 이종강(李終綱), 생원 유인옥(柳仁沃), 생원 김승복(金升福), 진사 권눌(權 訥), 생원 이희백(李喜白) 등 6명이고 나머지 2명은 누구인지 궁금하다. 주위에는 따라온 시종, 곁에서 시중드는 관기와 이 모습을 구경하러 각지에서 찾아온 사람들, 주변의 건물과 산천을 묘사하였다.

 

이 모임의 이름을 찾다보니 여러 이름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이시발의 문집 '벽오유고'에는 '화산홍사군동방회(花山洪使君同榜會)', 홍이상의 '모당집(慕堂集)'에는 '계유사마방중회(癸酉司馬榜重會)', 권눌의 '매헌유고'에는 '계유동년방회(癸酉同年榜會)', 윤의정의 '지령선생문집'에는 '방회(榜會)'로 나오는데 경남대 박물관에서 말하는 '계유사마동방계회(癸酉司馬同榜契會)가 가장 무난할 것 같았다.

 

(호남에서 온 두 상사는 부안김씨로 부안에 사는 생원김승복과 서산유씨로 남원에 사는 생원 유인옥이다)

 

참석자들의 1573년 계유년 사마시 성적은 다음과 같다.

1. 윤의정[尹義貞, 1525(중종 20) ~ 1612(광해군 4 )] 생원 1등 5위

2. 고상안[高尙顔, 1553(명종 8)~1623(인조 1)] 진사 2등 9위

3. 이   람[李   覽, 1550(명종 5)~) 진사 3등 41위, 생원 3등 2위

4. 이종강(李終綱, 1537~) 진사 3등 8위

5. 김승복(金升福, 1546~) 생원 3등 12위

 

6. 신경진(辛慶晉, 1554~1619) 진사 3등 20위

7. 유   위(柳   湋, 1548~) 생원 3등 33위

8. 금복고(琴復古, 1549~1631) 생원 3등 37위

9. 채길선(蔡吉先, 1541~) 생원 3등 41위

10. 이시언(李時彦, 1545~1628) 진사 3등 43위

 

11. 김구정(金九鼎, 1550~) 생원 3등 45위

12. 홍이상(洪履祥, 1549~1615) 생원 3등 54위

13. 유인옥(柳仁沃, 1541~) 생원 3등 63위

14. 권   눌(權    訥, 1547~) 진사 3등 64위

15. 생원 윤의정(尹義貞)/德山人, 1525(중종 20)~1612(광해군 4) [생원] 1등(一等) 5위(5/100위

 

16. 진사 이종강(李終綱)/眞城)人,거주지 : 安東/1537년 (중종 32)~    / [진사] 3등(三等) 8위(38/100)

17. 생원 유인옥(柳仁沃)/ 瑞山人, 거주지 : 南原/1541년 (중종 36)~  /[생원] 3등(三等) 63위(93/100)

18. 생원 김승복(金升福)/부령인(扶寧人), 거주지 : 부안(扶安)/1546년 (명종 1)~ /[생원] 3등(三等) 12위(42/100)

19. 진사 권눌(權訥)/安東人. 거주지 : 安東/ 1547년 (명종 2)~   /[진사] 3등(三等) 64위(94/100)

20. 이희백(李喜白)/벽진(碧珍)人, 거주지 : 永川/ 1548(명종 3)~1608년(광해군 원년)]/[생원] 3등(三等) 67위(97/100)

 

 

이 모임의 발문(跋文)은 다음 해인 1603년 3월에 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인 이시발(李時發)이 지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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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碧梧先生遺稿卷之六花山洪使君同榜會序.  <慕堂洪公履祥> 

 

同榜謂之同年。同年有兄弟之分。以時而修其好。情義之所不已者。而世故多端。聚散不常。杏園一分袂之後。能爲盍簪之盛者。蓋未之多見也。癸酉司馬。當時號多得人。花山洪使君,月城李令尹。俱以今之名宰。出守南藩。相與謀曰。吾同年今有官嶺外者七人。家南土而幸無恙者亦八九。盍於斯時修其好也哉。噫。余之先大夫。卽榜中之一人。不肖今忝按節于茲。得聞此擧。寧不樂爲之助而歡成之乎。諸公之在道內者。指期咸集于花山。聞風邂逅而會者。亦有湖南之二上舍焉。壬寅孟冬旣望。卽其日也。湖樓公館。無非勝所。而必席之于使君之衙庭者。以使君大夫人在堂故也。團圓千百里之面目。暢敍三十年之悲歡。琴歌永夕。且以秉燭。升堂拜舞。鶴髮怡顏。邑之故老。聚觀咨嗟。皆曰人間之盛事也。嗚呼。有親康寧。而與數十同年。奉壽于前如洪使君者。誠人間之盛事也。孤露如不肖者。與在今日之席末。得覩諸公之無疾病與。則豈不爲之向隅愴懷。繼之泣血也哉。繪事旣具。因書識之。萬曆癸卯暮春上澣。嘉善大夫,慶尙道觀察使,兵馬水軍節度使,大丘都護府使巡察使月城李某。謹跋。

 

[국역]

동방(同榜)이란 같은 해에 급제한 사람을 말하며 모두 형제같은 친분이 있었다. 때때로 만나 좋은 정분을 나누며 정의(情義)가 돈독해야 하지만 세상살이 많이들 바빠서 만나고 헤어짐이 정상적 일 수 없었다. 성균관에서 한번 이별하고 나서는 친구들의 얼굴을 자주 보지 못하였다.

 

 계유년(1573, 선조 6) 사마시를 볼 당시에 많은 인재를 얻었다고 하였다. 화산(花山, 안동) 홍사군(홍이상 안동 부사를 높여 부르는 말)과 월성(月城, 경주) 이영윤(이시언) 모두 이름난 재상으로 영남지역(남번, 南藩)의 태수가 되어 서로 의논하기를, "우리 동기 가운데 지금 영남지역 밖에서 벼슬하는 사람이 7명이고, 영남지역에 살면서 다행히 아무 탈이 없는 사람이 또한 8, 9명이니, 어찌 이때 한번 모이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아! 나의 돌아가신 아버지께서도 이들과 함께 급제한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이시발의 부친 이대건-李大建, 1550(명종 5)~1574(선조 7) 불초한 내가 외람되게 지금 이곳 경상도의 관찰사가 되었으니, 이 일을 듣고 원만하게 이루어지기를 어찌 즐겨 돕지 않겠는가?

 

도내에 계시는 제공(諸公)들이 기일을 지정하여 안동에 다 모였는데, 만난다는 소문을 듣고 모인 사람으로 또한 호남의 두 상사(上舍)도 있었다. 그 날이 바로 임인년(1602, 선조 35) 10월(맹동, 孟冬) 16일(기망, 旣望)이었다.

 

안동에는 호수, 정자, 공관(호루공관-湖樓公館)등이 경치가 좋지 않은 곳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홍이상 안동부사의 관아(아정-衙庭)에 자리를 만든 것은 부사가 대부인(大夫人)을 모시고 계셨기 때문이다. 수천 리 떨어진 지역에 사는 사람들이 단란하게 모여 삼십년 동안 겪었던 슬픔과 기쁨을 시원스레 풀며 저녁까지 거문고를 타며 노래하였다.

 

또 촛불을 밝히고 마루에 올라 백발의 대부인(慈親=현직 안동부사 홍이상의 어머니)에게 절하고 춤추니 고을의 늙은이들은 기쁜 얼굴로 모여 바라보며 모두 감탄하고 말하기를, "인간세상의 성대한 일이로다." 하였다.

 

아, 대부인이 강녕하여 십여 명의 동기들 앞에서 축수를 받으니, 홍이상 같은 이는 참으로 인간의 왕성한 복을 누리는 사람이로다. 불초(이시발) 같이 외로운 사람은 이번 모임에서 제공들이 질병이 없는 것을 보니 어찌 돌아가신 아버지 생각에 가슴 아파하고 울먹이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림을 그리는 일이 이미 갖추어졌으므로 인하여 써서 기록하노라.

만력 계묘(癸卯 1603, 선조 36) 3월(모춘, 暮春) 상한에 가선대부 경상도 관찰사 겸 병마수군절도사 대구도호부사 순찰사 월성 이시발(李時發)은 삼가 발문을 짓다.

 

옮긴이 :  13代孫 李在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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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되는 자료를 좀 더 찾을 수 있을까 해서 참석자들의 문집을 확인했는데, 이시발의 발문만 여러곳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번 모임에 참석은 못했지만 사마시 동기인 조응록의 '죽계일기(竹溪日記)'를 검토하다보니 1602년 4월 26일 날자에 방회 기록이 있어 참석자들을 확인했더니 홍이상(갑과 장원), 정광적(鄭光績, 병과 2위), 권준(權俊), 손윤선(孫胤先, 병과 24위), 조응록(趙應祿, 병과 4위) 등이었는데 안타깝게도 이들은 1579년 문과(대과) 급제자들이었다.  단, 권준은 없었고 권선(權宣, 병과 18위)의 착오로 생각한다.

 

 

아쉬움을 뒤로 하고 죽계일기를 계속 확인했더니 1614년 10월 22일 사마방회 기록이 있었다. 이 모임의 참석자들은 이광정(李光庭, 생원 3등 34위), 이시언, 정사호(鄭賜湖), 한덕원(韓德遠, 진사 3등 17위), 신경행(辛景行, 진사 2등 23위), 이람, 조응록(진사 3등 32위) 등이 심일취(沈日就, 진사 3등 34위)의 집에서 개최한 방회였다.

 

이들은 1602년 참석자 일부와 새로운 사람이 참석했지만 계유년(1573년) 사마시 동기들이었다. 조응록이 참석한 방회만 기록되어 있는 것이기에 또 다른 계유사마방회도 여럿 있었을 것이나 확인을 할 수 없는 것이 안타까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