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가집(四佳集) 제2권 기(記) /서거정(徐居正) 著
전주(全州)의 향교(鄕校)를 중신한 것에 대한 기문
삼가 생각건대 우리나라는 유학을 높이고 도(道)를 중시하여 학교를 세우고 스승을 두었으니, 비록 궁벽진 시골일지라도 그렇지 않은 곳이 없다. 하물며 전주는 우리 왕조의 시조가 살았던 땅으로서 남쪽 지역의 인재들이 모여드는 곳이니, 그들을 가르치고 기르는 일을 가장 우선적으로 행해야 할 곳이다.
고을의 젊은이들이 또한 대부분 대대로 학문하는 집안의 출신들로서 선행을 즐기고 배우기를 좋아한다. 그러므로 한 고을이 교화되어 아주 뛰어난 사람이 간혹 출현한다. 이것은 땅의 아름다운 기운이 모인 까닭이기도 하지만, 또한 모두 평소의 교육이 그 바탕이 되었기 때문이다.
전주부의 학교는 예전에는 치소(治所) 안에 있었는데, 신유년(1441, 세종23)에 태조의 영정을 경기전(慶基殿)에 봉안하니, 경기전과 너무 가까운 탓에 시서(詩書)를 외는 소리, 회초리를 치는 소리 등이 시끌벅적 끊임이 없어서 성령(聖靈)을 편안히 모실 수가 없었다.
이에 성곽 서쪽 6, 7리 되는 곳에 옮겨 지었다. 성전(聖殿)과 강당과 재사(齋舍)와 부엌이 차례대로 지어졌다. 다만 그 지역이 깊고 주변이 비어 있는 곳으로 전주 마을과는 멀리 떨어져 있어서, 도둑과 짐승들의 피해에 대한 걱정이 없을 수 없었다. 그래서 담장을 두르고 자물쇠를 굳게 잠가 오직 단단히 지키는 데에 신경을 쓸 뿐이었다.
기해년(1479, 성종10)에 계림(鷄林) 이유인(李有仁) 선생이 이곳에 부윤으로 부임하였다. 먼저 공자의 사당에 알현하고 다음에 여러 학생들에게 읍하여 나아오게 하고서, 제사에 대한 일을 강론하였다. 개탄하는 심정으로 교화를 일으키고 현인을 면려하겠다는 마음을 먹고 교과를 과정별로 체계화하였으며, 양식과 물품을 넉넉하게 공급하였다.
작은 일을 고치고 다듬는 것까지도 여유롭게 잘 조치하였다.
이듬해 경자년(1480, 성종11) 봄에 다섯 칸 누각을 새로 세웠는데, 우뚝 솟고 시원하게 트였으며 제도가 아주 적합하였다.
완공한 뒤에, 선생이 여러 학생들을 거느리고 올라가서 잔치를 벌여 낙성식을 하고, 학생들을 돌아보며 이르기를, “여러분은 이 누각에서 얻은 것이 있는가?”하니, 학생이 답하기를, “이전에 누각이 지어지기 전에는 공부하는 집이 낮고 좁아, 저희들이 공부하는 여가에 답답함을 없애고 정신을 통창하게 하고 싶어도 쉬거나 놀 데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답답하기가 마치 뜨거운 물건을 잡았던 손을 얼른 물에 식혀야겠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았습니다.
이제 이 누각에 올라 저희들의 번잡한 마음을 씻고 저희들의 막힌 생각을 씻을 것입니다. 산을 보면서 그 어짊을 체득하고 물을 보면서 그 지혜를 기르며, 솔개와 물고기가 날고뛰는 것을 보면서 도체가 밝게 드러남을 알게 될 것입니다.
아래위로 한 번 보는 것도 배움이고 행동거지 하나하나도 배움입니다. 무릇 눈에 들어오고 귀에 들어오는, 그 많고 많은 만물들이 어느 것인들 저희가 본성을 기르는 데에 도움을 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미루어 그 공부를 지극히 하면 또한 화육(化育)에 참여하여 천지와 함께 흐르게 될 것입니다.
선생께서 저희들에게 매우 좋은 은혜를 베푼 것입니다. 노는 즐거움에 빠져 허송세월만 하고 글공부를 하다 말다 한다면 이는 선생께서 저희들에게 바라는 바가 아닐 것입니다.”하였다. 선생이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학생들이 공의 은택을 아름답게 꾸며 두고자 하여 나에게 기문을 청하였다.
나 또한 이 고을에 적(籍)을 붙이고 있는지라 의리로 보아 감히 거절할 수가 없었다. 나는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학교는 교화를 하는 곳이다. 가르치는 방법은, 다른 것이 없고, 사람이 본디 지니고 있는 것을 인하여 인도하는 것일 따름이다. 인(仁), 의(義), 예(禮), 지(智)는 사람이 본디 지니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더러 가려져서 어둡게 됨이 없을 수 없는데, 그렇게 되면 일상생활에서의 인륜과 수작하는 사물에 대해 타당하게 처신하지 못하는 경우가 생긴다. 그러므로 성인께서 글을 짓고 말씀을 하여 후세에 가르침을 남겼으니, 모두가 인륜을 밝히기 위한 것이다.
이 책을 읽고 이 도를 밝혀, 발휘하여 문장을 짓고 사업에 적용한다면 그 관계되는 바가 어찌 중요하고도 크지 않겠는가. 그러나 가르치고 권면하는 책무는 반드시 주관하는 자가 있어야 한다. 오늘날 벼슬자리에 있는 자들은 문서를 처리하는 잗단 일이나 힘쓰면서 학교를 흥기시키는 것을 오활하게 본다.
고을의 학교는 더욱 심하다. 맹자가 이르기를 “한 고을의 훌륭한 선비라야 한 나라의 훌륭한 선비를 벗하고 한 나라의 훌륭한 선비라야 천하의 훌륭한 선비를 벗한다.”라고 하였다. 고을을 말미암아 나라로 가고 천하로 가는 것이다.
일찍이 고을의 학교라 해서 가벼이 여겼더란 말인가. 선생은 선비를 가르치고 기르는 일을 자신의 임무로 삼고 학교를 흥기시키는 일을 우선으로 삼았다. 누각을 지은 데다 또 잔치를 열어 낙성식을 하였고 또 여러 학생들과 토론하였다.
그 가슴속이 넓고 그윽하여 상대와 나와의 간격이 없는 경지는, 무우(舞雩)에서 바람 쐬고 시를 읊으며 돌아오겠다는 천성에 견줄 만하고, 천지처럼 넓은 도량은, 태산에 올라 천하를 작게 여긴 공자의 기상과 함께 놓고 이야기할 만하다. 선생이 한 누각을 지음이 이처럼 유교의 학문에 관계된 줄을 아는 이가 누구일까?
여러 학생들에게 바라는 것은, 정미하게 살피고 힘써 실천하여 학업을 거칠어지게 하지 말며 생각 없이 내버려 두어서 학업을 훼손되게 하지 말아서, 선생이 교육하여 인재를 양성하고자 하는 뜻을 저버리지 않는 것이다.
아! 민월(閩越)은 궁벽한 고을이라 그 풍속이 문서와 이사(吏事)를 잘 알지 못했는데, 상곤(常袞)이 관찰사가 되어 선비들을 불러 그들과 더불어 예를 갖추니 선비들이 모두 흔쾌히 따랐으며, 구양첨(歐陽詹)이 비로소 진사에 합격하였고 문치(文治)가 점점 일어나게 되었다.
하물며 우리 임금의 고향은 인재가 많은 지역이고 선생이 이처럼 인도하고 권면하니, 장차 집집마다 유학의 기풍이 일고 사람마다 정주(程朱)의 학문을 하여, 나가서 나라의 쓰임이 될 훌륭한 사람이 반드시 많이 나올 것이다. 이것으로 기문을 삼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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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01] 이유인(李有仁) : 1431년(세종 13) ∼1492(성종 23).본관은 경주이다. 헌납, 이천 부사(利川府使), 장례원 판결사, 호조 참의 등을 거쳐 1479년(성종10) 2월에 전주 부윤에 제수되었다. 그 뒤 우부승지, 강원도 관찰사, 대사헌, 예조 참판 등을 지냈다.
[주02] 우뚝 솟고 : 대본에는 ‘窮隆’으로 되어 있는데, 문리로 보아 ‘窮’은 ‘穹’이 타당할 듯하여 고쳐서 번역하였다.
[주03] 산을 …… 기르며 : 《논어》 〈옹야〉에 “지혜로운 자는 물을 좋아하고 어진 자는 산을 좋아한다.” 하였다.
[주04] 솔개와 …… 것입니다 : 《시경》 〈한록(旱麓)〉에, “솔개는 하늘 높이 날고, 물고기는 못에서 뛰네.”라고 하였다. 《중용장구》에 이 시를 인용하였는데, 주자의 주에 “화육(化育)이 유행(流行)하여 위와 아래에 환히 드러나는 것이 이치의 효용이 아닌 것이 없음을 밝힌 것이다.” 하였다.
[주05] 화육(化育)에 …… 것입니다 : 《중용장구》 제22장에 “사물의 성(性)을 극진히 하면 천지의 화육을 도울 수 있고 천지의 화육을 도울 수 있으면 천지와 더불어 함께할 수 있다.” 하였고, 《맹자》 〈진심 상〉에 “군자는 지나가는 곳이 교화되며 지닌 바가 신묘하기 때문에 위아래로 천지와 더불어 함께 흐른다.” 하였다.
눈과 귀에 들어오는 만물의 본성을 모두 깊이 연구해서 알게 되면 천지가 하는 일에 동참하여 천지와 일체가 된다는 뜻이다.
[주06] 한 고을의 …… 벗한다 : 《맹자》 〈만장 하〉에 나온다.
[주07] 무우(舞雩)에서 …… 천성 : 《논어》 〈선진(先進)〉에 나온다. 각자의 뜻을 이야기해 보라는 공자의 질문에 증점(曾點)이 대답하기를, “늦봄에 봄옷이 완성되면 관례(冠禮)를 지낸 자 대여섯과 동자(童子) 예닐곱과 함께 기수(沂水)에서 목욕하고 무우에서 바람을 쐬고 돌아오고 싶습니다.” 하였는데, 주자의 주에, “그 가슴이 넓고 그윽하여 천지 만물과 더불어 위아래로 함께 흘러 각각 득기소(得其所)한 오묘함이 은연히 절로 말 밖으로 드러났다.” 하였다. 번역문의 ‘천성’은 자연과 일체가 된 증점의 성품을 말한다.
[주08] 태산에 …… 기상 : 《맹자》 〈진심 상〉에, “공자가 동산(東山)에 올라 노나라를 작게 여겼고 태산(泰山)에 올라 천하를 작게 여겼다.” 하였다.
[주09] 민월(閩越)은 …… 되었다 : 상곤(常袞)과 구양첨(歐陽詹)은 모두 당나라 때의 인물이다. 당나라 덕종(德宗) 초기에 상곤이 민월 지역의 관찰사가 되어 향교를 세우고 교육을 하니 민월 지방에 문치가 이루어졌으며, 그 지역 사람으로서 구양첨이 처음으로 과거에 급제하였다.
[주10] 정주(程朱) : 송나라의 정호(程顥), 정이(程頤) 형제와 주희(朱熹)를 가리킨다. 이들이 이룬 학문을 정주학이라 한다.
임정기 (역) |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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