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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륜당 편액은 명나라 주지번(朱之蕃)의 글씨.

야촌(1) 2017. 12. 7. 13:00

명륜당 현판 글씨는 "進士級弟 翰林院 修撰 欽差正使朱之蕃"이다.

즉 그는 명나라 사람으로 장원급제한 한림원 수찬, 특임전권사절 주지번(朱之蕃)인 것이다. 그의 일화가 전한다.

 

 

↑명나라 주지번이 1606년 사절단 대표로 왔을때 쓴 명륜당 편액이다.

 

선조(재위 1567∼1608) 때의 문인 표옹 송영구가 은거하던 곳의 후원에 있는 누각이다. 선조 40년(1607)에 부친 상을 당한 뒤에 집 뒤쪽 언덕에 이 집을 짓고, 동쪽 우산에 모셔져 있는 조상들을 추모하였다고 한다. 앞면 3칸·옆면 3칸의 정사각형 건물로,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의 화려한 팔작지붕집이다.

 

앞면에 있는 4개의 주춧돌은 1m 정도의 높이로 마치 돌기둥같고, 뒷면은 지반을 계단식으로 다져 얕게 세웠다. ‘망모당’이란 현판은 중국 사신 주지번이 직접 쓴 것을 새긴 것이다. 망모당 부근에는 100여 명이 충분히 앉을 수 있는 넓은 바위와 왕궁천이라는 맑고 깨끗한 시냇물이 흐른다.

 

또한 중국의 흰 연꽃을 우리나라에 처음 들여와 연꽃 연못을 만들어 주변의 풍치가 매우 아름답다. 이 당은 조선(朝鮮) 선조(宣祖) 때의 문인(文人) 표옹(瓢翁) 송영구(宋英耉) 선생이 선조 40년(1607) 선친을 여의고 지은 곳으로, 이곳에서 우산(山)에 있는 선영(先瑩)을 망모(望慕)하였다고 한다.

 

망모당(望慕堂)이란 편액(扁額)은 중국사신 주지번(朱之蕃)의 친필을 현각한 것이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집으로 전면의 주초는 주형초석(柱形礎石)으로 누집 형식을 이루고 있다. 기둥 위에 첨차를 놓아 굴도리 밑의 장혀를 받친 것이나, 난간 두겹대의 받침기둥을 계자각 비슷하게 다듬은 것 등은 특색 있는 점이라 하겠다.

 

 

↑명나라 사신 주지번이 1606년에 익산에 사는 스승 표옹 송영구(瓢翁 宋英耉) 집을 방문하여 써준 편액이다.

 

임진왜란이 발발한 이듬해인 1593년(선조 26), 송강 정철(松江 鄭澈)이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갈 때 서장관으로 함께 수행한 익산 출신의 표옹 송영구[(瓢翁 宋英耉,1556년(명종 11)~1620년(광해군 12)]가 있었다. 그 송영구가 머물던 북경의 숙소에 청년 한 사람이 무언가 읍조리며 아궁이에 불을 때는 모습이 보였다. 

 

자세히 들어보니 《장자 남화경(莊子南華經》이었다. 감탄한 그는 그 청년을 불러 세웠다.

"그대는 누구이기에 이런 막일을 하면서 어려운 남화경을 줄줄 외는가?" 청년이 답하기를 "저는 남월[南越: 지금의 광동성(廣東省)과 광서성(廣西省) 일대를 말함] 출신으로 과거를 보러 북경에 왔는데, 수차레나 낙방하고 보니 노자도 떨어지고 호구지책으로 이렇게 막노동을 하고 있습니다" 하니 송영구는 그 청년에게 시험문제와 그가 썼던 답안을 물어보았다. 

 

정년이 작성한 답안을 보니 문제의 이치는 깨우쳤으나, 답안작성의 요령을 모르고 있었다.

이를 안타까이 여겨 과거시험 보는 법을 자세히 알려주며, 소위 쪽 집게 과외를 실시했다.

 

그는 그 청년을 귀히 여겨 무료과외 뿐 아니라, 갖고 있던 중요서적들도 필사해 주며 헤어질 때는 수중의 돈까지도 쥐어 주었다. 시간을 아껴서 과거시험 준비에 전념하라는 뜻이었다. 다음해 그 청년은 명나라 과거시험에 진사(進士) 합격이 되었는데, 이는 조선의 진사와 달리 당시 명나라에서는 최고의 장원급제에 해당하는 것으로, 관직의 앞에 늘 붙이는 영예를 받는 것이었다. 그 청년이 주지번(朱之番)으로 그는 이후 중국조정에서 계속 높은 벼슬로 올라갔다.

 

1606년(선조 39), 주지번은 명나라 흠차사절(欽差使節) 즉, 황제 특명 전권사절단을 이끌고 조선을 방문했다. 

임란이 끝나 후 얼마 되지 않은 시기라 조선은 국왕이하 그 접대에 분주하였다.

 

영접사가 의주까지 마중을 나가고 국왕도 서대문의 영은문(迎恩門)까지 나가 사신을 맞는 등 극진한 대접을 하였다. 

서울의 공식행사를 마친 그가 은인이자 스승인 송영구(宋英耉)를 찾으니, 마침 그는 익산의 고향으로 낙향하여 있었다.

 

주위의 만류도 듣지 않고 주지번은 그를 찾아 익산으로 방문 하겠다 하니, 이는 당시 극히 예외적인 사건이었다. 

주지번은 익산 송영구의 고향집을 찾아가서 그를 만나고 며칠을 밤새워 사제지간(師弟之間)의 회포를 풀었다.

 

그는 많은 귀중한 서책도 선물로 가져갔으나, 헤어지면서 두개의 큰 선물을 했으니, 그 하나는 송영구가 마침 조상들을 위해 지은 망모당(望慕堂)이란 건물에 쓴 현판 글씨였고 또 하나는 풍수에 밝았던지라 송영구의 후일을 를 위해 묘 자리를 잡아 주었다. 이는 지금도 풍수가들이 명당 중에 명당이라고 곱는 터이다.

 

 

↑전주 풍패지관(全州 豊沛之館)/ 보물 제583호로 지정되어 있다.

 

↑당시 주지번이 익산 방문길에 묵은 전주관아의 객사에는 그가 남긴 풍패지관이란 현판글씨가 아직도 걸려있다.

 

그는 술과 시를 좋아하며 주변을 늘 편하게 하는 성격으로 중국에서도 명필로 소문이 난 사람인데 우리나라에 와서는 누구나 그 이름을 듣고 편액 글씨를 요청하면 거절하지 않고 써주어 서을서 지방에 까지 그의 글씨가 각종 건물의 현판으로 많이 남아있다. 

 

임란 후 피폐해 있었던 조선에 특명 사신으로 온 그의 행적은 크게 조야의 민심을 위로했으리라.   

송영구는 풍채가 단아하고 언행이 바르고 강직한 성품이었으나 남의 잘 못에는 관대하였다.

 

공직에서는 매우 청렴하여 경상감사를 마칠 때는 가지고 가는 것이 너무 없어 주위를 안타깝게 했는데, 그가 낙동강 나루를 건널 때 부채를 들고 있기에 하인이 "영감님 경상감사에서 부채 하나 얻고 가네요" 하니 "그렇군", 하면서 그 부채마저 강물에 더져 버렸다는 일화가 있다.

 

아깝게도 당쟁에 휘쓸려 파직되는 등 말년은 좋지않았으나,그 후손들은 그를 매우 자랑스러운 조상으로 지금도 기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