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이상설보도자료

‘성명회 선언서’ 원본 107년 만에 발견

야촌(1) 2017. 11. 14. 00:08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 전경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의 문서보관 내부 모습

 

NARA에서 한국근대사의 비밀을 만나다. 나라(NARA)라는 약칭으로 불리는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은 미국 역사와 문화의 기록이 보존된 곳이다. 독립의 아버지들이 서명한 독립선언서로부터 케네디를 암살한 오스왈드의 라이플까지 미국 역사의 굴곡이 남긴 기록들이 살아 숨쉬고 있는 곳이다.

 

 

 

 

 

 

↑미국의 국립문서보관청(NARA)에서 발견된‘성명회 선언서’원본/김광만 PD, 

   이상설선생기념사업회 제공

 

↑일본 제국주의 시절 ‛조선인 생활상’ 모습/미국의 국립문서보관청(NARA) 소장 자료

 

  독립운동 사상 최대 규모 8,624명 세계만방에 고한 선언
  정파 사상 초월 다양한 인물이 참여 "목숨건 투쟁" 맹세

 

1910년 한일강제합병 직후 러시아 연해주에서 결성된 '성명회(聲明會)'가 세계만방에 독립의지를 천명했던 성명회선언서(聲明會宣言書) 원본이 107년 만에 민간에 의해 발견됐다. (사)이상설선생기념사업회는 당시 미국에 보내진 성명회선언서 문안전체를 근대사다큐멘터리 제작사 ‛더채널' 김광만 대표를 통해  미국 국립문서보관청(NARA)에서 최근 발견했다고 13일 밝혔다. 

 

성명회는 '헤이그 특사(特使)의 정사(正使)'로 유명한 독립운동가 이상설(1870∼1917)과 구한말 의병장으로 활약한 유인석(柳麟錫)을 비롯해 이범윤(李範允), 김학만(金學萬) 등이 함께 조직한 독립운동단체이다. 

 

독립운동사 최대 규모의 참여자의 자서가있는 역사적 기록물인 ‘성명회선언서’는 2017년 '헤이그 특사' 이상설선생의 순국100주년을 맞아 이상설선생의 기념사업회의 노력으로 찾은 것이다. 

 

1910년 8월 강제병합이 전해지자 같은 달 27일(토)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의 한 학교에 모인 한인들은 '성명회'를 결성하고 이상설(李相卨)이 사흘 뒤 성명서 초안을 완성했다. 이 선언서는 일제강점기 최대 규모인 8,624명이 서명해 '3·1독립선언서'에 버금가는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 학계의 평가다. 

 

이들은 선언서에 11명씩 7줄로 된 112매의 서명록에 차례로 자신의 이름을 적어 넣었다. 유인석이 성명회장 명의로 친필 사인을 남긴 선언서와 서명록 등으로 이뤄져 있다. 성명회가 1910년 당시 이상설 등의 주도로 작성된 성명회 선언서의 한 페이지. 11명씩 7줄로 쓰여진서명록은 112장으로 돼 있어 8,624명이 참여한 것으로 확인됐다.  

 

미국 국립문서보관청에서 첨부한 표지 서류에 '1910년 10월 미국 국무장관 앞으로 도착한 자료'란 설명이 붙여져 있다.선언서는 이상설이 집필한 것으로 성명회 조직 후 첫 사업으로 이뤄졌다. 성명회는 독립운동을 위해 서구 열강의 인식과 이해가 중요하다고 보고, 일제의 명성황후 시해사건 등 갖은 만행을 규탄했다. 

 

선언서는 당시 국제외교계의 공식 언어였던 프랑스어로 쓰였다. 이상설 선생은 프랑스·영어·중국어·일본어 등 7개 언어를 구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선언서에는 "무슨 일이 닥치더라도 진정한 대한인은 자유를 획득하기 위해 죽을 각오가 돼있습니다"란 참여자의 자서로 서명됐다. 

 

붓글씨체와 한글로 쓴 이름과 '누구의 처(妻)'란 이름 등으로 "내 조국을 찾고 싶다"고 한 목소리로 외쳤다.서명자들은 "일본인들이 범한 행위는 문명의 관념은 조금도 없이 인간이 취할 수 있는 행위 가운데 가장 잔인하고 가장 야만적이며 가장 사나운 것이 아니겠습니까"라고 반문하며 “불의를 두둔하려 명예와 영광을 이룬 원칙을 포기 말라. 목숨을 건 투쟁에 나서겠노라" 맹세하며 비굴하지 않게 세계 열강에 도움을 청했다.

 

특히 "아무리 어려운 것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광복과 국권회복에 기필코 도달할 때까지 손에 무기를 들고 일본과 투쟁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장차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진정한 한국인은 자신의 자유와 나라의 광복을 획득하기 위해 목숨을 던지겠습니다"라며 결연한 의지를 비쳤다.

 

당시 연해주에는 계파분열이 극심하던 시기에도 불구하고, 훗날 대한독립군사령관 홍범도 장군과 안중근 의사의 동생인 안정근을 비롯, 김치보·유진율·이갑 등의 활동모습에서 선언서 서명자들은 당대 정파나 사상을 초월했다는 점에서 현 시대에 던지는 의미가 크다 하겠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