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이상설보도자료

독립전쟁 외교관 이상설

야촌(1) 2017. 12. 11. 14:59

英·佛·獨·美 등 세계 각국에 한민족 독립 호소

연해주 독립전쟁의 혼을 찾아 <4> 독립전쟁 외교관 이상설

[국방일보]2017. 12. 10   10:44 입력 | 2017. 12. 11   11:13 수정

 

연변 최초 근대학교 ‘서전서숙’ 설립

광무황제 밀명 받고 헤이그 특사 파견

美서 ‘국민회’ 탄생시킨 후 연해주로

‘대한광복군정부’ 설립 독립전쟁 도모

 

“조국 광복을 이루지 못하고 떠나니

내 몸을 불태워 재는 바다에 날려라”

1917년 서릿발 같은 유언 남기고 별세.

 

 

보재(溥齋) 이상설 하면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책임자인 정사로 파견됐다는 정도로만 알려져 있다.

게다가 부사인 이준 열사의 순국으로 인해 그 이름조차 가려진 형국이다. 그런데 이상설 선생의 유허비(遺墟碑)가 연해주 우수리스크에 있다고 했다.

 

그것도 이름도 생소한 유허비라니? 궁금증을 안고 우수리스크로 향했다.연해주의 블라디보스토크가 조선과 국경을 접하고 있어 많은 이주민이 정착해 독립운동의 출발지가 됐다면, 촉촉이 젖은 땅이라는 뜻이라는 우수리스크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110㎞ 거리로 연해주에서는 보기 드물게 계획도시라 한다.

 

도로망과 골목이 유사해 길을 잃기 쉽다고 했다. 러시아 푸틴 대통령 지시로 밤 10시 이후에는 술을 팔지 않는다는 사실을 깜빡 잊고 대형마트에서 모처럼 쇼핑하다가 5분이 지나는 바람에 술을 사지 못해 아쉬움이 컸던 추억도 있다.

 

우수리스크에는 보재 이상설 유허비, 연해주 독립운동의 대부 최재형의 마지막 거주지, 전로한족총회 결성지, 4월 참변 추모비, 그리고 1937년 중앙아시아로의 강제 이주 시 많은 한인을 출발시켰던 라즈돌리노예 역 등이 있어 나라 잃은 한인들의 설움이 많이 깃든, 가슴 아픈 역사를 간직한 곳이다.
 
특히 러시아의 유일한 고려인 동포들의 기념관인 고려인 문화센터가 2009년 개관해 연해주 독립운동의 발자취를 잘 보여주고 있다.

 

 

↑헤이그 특사의 호소문인 ‘공고사’를 보도한 1907년 7월 5일자 ‘평화회의보’. 

  가운데가 수석대표 정사 이상설 선생.

용정에서의 민족교육 운동이상설은 1870년 충북 진천에서 이행우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신동이란 소문이 나서 7세에 정3품 동부승지 이용우의 양자가 되어 서울로 올라간다. 1894년 25세에 이승만·김구와 함께 응시한 조선의 마지막 과거인 갑오문과에 급제한다.
 
여러 직책을 수행하면서 광무황제(고종)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이 인연으로 후일 헤이그 사행(使行)의 수석으로 파견됐을 것으로 판단된다.선생은 1905년 11월 대신회의 실무를 총괄하는 의정부 참찬에 발탁됐다. 그해 11월 17일 이토가 광무황제와 대신들을 위협하여 ‘을사늑약’을 강제 체결하려는 것을 저지하려고 했으나 체결 회의에는 참석하지도 못한다.
 
이후 황제에게 상소를 올리고 관직을 버리면서까지 조약 파기를 위한 거국 항쟁을 추진하고 자결도 시도한다. 그러나 뜻을 못 이루자 1906년 4월 이회영·이동녕 등과 국외 망명을 결정, 만주 연길 현 용정촌으로 간다.

 

국권을 찾지 못하면 다시 고국 땅을 밟지 않겠다고 결심하고 저택과 토지 등 가산을 처분해 자금을 마련했다.선생은 먼저 민족주의 교육에서 큰 자취를 남긴다. 용정에서 8월에 연변 최초의 근대 학교로서 항일 근대 민족교육의 요람인 ‘상서로운 배움의 터’란 뜻의 서전서숙(瑞甸書塾)을 설립, 최초로 22명의 학생을 모아 소학과 중학 과목을 구분해 반일의식과 민족독립사상을 교육하면서 신식 교육의 기반을 잡는다.
 
그러나 서전서숙은 일본의 핍박, 보재 선생의 헤이그 회의 참여 등으로 1년 만에 문을 닫게 되고 명동학교로 그 명맥을 이어간다.

 

 

↑2001년 우수리스크 외곽 수이푼 강변에 세워진 이상설 유허비. 필자 제공


헤이그 평화회의와 외교전쟁러시아 니콜라이 2세 황제가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리는 제2차 만국평화회의를 발의하고 1907년 4월 남미 파나마 등 몇 나라와 함께 비밀 초청장을 광무황제에게 보낸다. 

 

이에 광무황제의 밀명을 받은 선생은 연해주로 가서 이준과 합세한 후 시베리아철도를 타고 러시아 수도 페테르부르크에서 전 러시아주재 공사 이범진의 아들 이위종을 만나 셋이서 6월 25일 헤이그에 도착한다.

 

그러나 회의는 6월 15일에 개최돼 회의 의장인 러시아 넬리도프 백작에게 의장 직권으로 참석을 요구했으나 일본의 반대와 열강의 상이한 이해관계로 회의에 참석하지 못한다. 그런데도 일본의 침략상을 밝히고 독립을 요구한 ‘공고사’를 구미 언론에서 보도하게 한 것은 성과였으며, 특히 7월 9일 국제협회에 귀빈으로 참석해 이위종이 유창한 프랑스어로 ‘한국의 호소’를 연설함으로써 모든 참석자의 감명과 함께 찬사를 받게 된다.

 

이 상황에서 7월 14일 특사 중 이준이 뜻을 이루지 못한 분함에 병을 얻어 분사(憤死)한다. 안타깝게도 헤이그 특사는 실질적인 소득 없이 일본의 한국 침략을 촉진하는 구실만을 주게 됐다. 이토는 광무황제에게 밀사 책임을 물어 7월 18일 강제로 퇴위시키고 정미7조약을 체결했으며 군대를 해산하고 궐석재판을 해 이상설 사형, 이준과 이위종에게는 무기형을 선고한다. 

 

충신이 역적으로 몰리는 세상이 된 것이다.망명정부 수립과 독립전쟁이후 선생은 영국·프랑스·독일·미국·러시아 등 각국을 순방하면서 한민족의 독립이 동양평화의 관건임을 주장하고 나아가 극동의 영구평화를 위한 ‘한국의 영세중립’을 주장했다. 특히 1908년 11월 미국 콜로라도 덴버에서 개최된 애국동지회에 해외 한인단체들을 규합해 최대 민족운동단체인 ‘국민회’를 탄생시키는 역할을 한다.


이후 원동에서 독립운동사업을 하라는 중책을 맡고 연해주로 간다. 연해주는 고구려와 발해의 활동무대로서 한민족에게 염원이 깊은 겨레의 땅이기 때문에 독립운동기지로 적합하다고 판단한 것이다.1909년 4월 블라디보스토크로 간 선생은 독립운동기지 건설에 필요한 자금을 모아 1910년 6월에 연해주와 북간도 일대의 의병을 단일 군단으로 통합해 ‘십삼도의군(十三道義軍)’을 창설한다.


그러나 8월에 조국 병탄 소식이 들리자 병탄 후 연해주의 첫 번째 조직적인 항일단체로 “적의 죄상을 성토하고 우리의 억울함을 밝힌다”는 의미의 ‘성명회’를 조직해 선언서를 내고 8624명의 한인 지도자가 서명했다. 한민족의 대단한 병탄 반대 투쟁 의지를 느낄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한편, 1910년 7월에 체결된 제2차 ‘러일협약’ 이후 러시아와 일본의 외교관계가 강화됨으로써 일본은 항일운동에 대해 러시아에 강력히 항의하고 주요 인물을 체포해 인도하도록 요구한다. 이에 러시아는 8월 30일에 선생을 비롯해 ‘성명회’와 ‘십삼도의군’ 주요인물 42명을 체포했다.


선생은 니콜스크로 추방됐다가 다음 해에 블라디보스토크로 귀환한다. 1911년 5월에 최재형을 총재로 하고 선생을 의장으로 하는 ‘권업회’를 조직해 비밀리에 광복군을 양성함으로써 독립전쟁론을 구현해 나간다.


권업회는 1913년 동북만주 나자구에 독립운동사상 최초의 사관학교인 대전(大甸)학교를 설립해 광복군의 중견 간부를 양성한다.선생은 1914년 연해주 이민 50주년에 맞춰 한인들의 민족의식을 높이고 광복군 군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최초 망명정부이자 임시정부 이름을 남긴 ‘대한광복군정부’를 설립해 정통령(正統領)에 당선되고 연해주와 서·북간도에 3개 군구를 설치한다.


이 조직은 광복군을 기반으로 국내외의 독립운동을 주도하면서 독립전쟁을 추진하고자 했다. 그해 5월 일경에 압수당한 독립문건인 『각처 군용정세 상세』에서 “블라디보스토크의 제1군구 주무자를 이상설로 기록하면서 훈련받은 병력이 2만9365명이고 총기 1만3000정과 탄약 30만 발을 수장하고 있다”고 설명하는 것에서 그 규모의 방대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러·일이 동맹함에 따라 연해주 일대의 한인 독립운동은 탄압을 받게 된다. 이에 9월에 권업회도 해산하고 대한광복군정부도 표면적인 활동을 못 하고 해체된다. 

 

이어 중국 상해로 가서 1915년에 박은식·신규식 등과 신한혁명당을 조직, 총책임자인 본부장에 선임돼 광복군의 무장과 독립전쟁의 추진 방략을 결의한다.유해는 수이푼 강가에서 화장이상설 선생은 망명지인 연해주 니콜리스크에서 1917년 3월 2일 48세로 병사했다.


투병 중에 부인과 아들, 동생을 잠시 만났고, 이동녕 등 동지들에게
“왜적은 만주를 집어먹은 후에야 패망할 것이다.


동지들은 합세하여 조국 광복을 기필코 이룩하라.
나는 조국 광복을 이루지 못하고 이 세상을 떠나니


어찌 고혼인들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으랴?
내 몸과 유품은 모두 불태우고


재마저 바다에 날린 후 제사도 지내지 마라”
는 서릿발 같은 유언을 남김에 따라 유해는 수이푼 강가에서 화장하고 문고도 모두 불태워 강물에 뿌려졌다.

 

안중근은 옥중에서 이상설을
“세계 대세에 밝고 동양 시국을 간파한 동양평화주의자”라고 높이 평가했다. 

 

그는 국외 독립운동가, 외교관으로서 독립운동사의 빛나는 한 장을 장식했다. 

그의 투혼을 되살려 일본을 앞지르는 통일 강국으로 만드는 길이 우리의 과업임을 이상설 유허비 앞에서 굳게 다짐하고 왔다.<김칠주 가톨릭대학교 안보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