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행장.시장(謚狀)

윤곤(尹坤 ) 행장(行狀)

야촌(1) 2017. 10. 29. 22:58

■ 윤곤(尹坤 ) 행장(行狀) - 윤선거(尹宣擧)

 

공(公)의 휘(諱)는 곤(坤)이며 파평(坡平) 사람으로 고려(高麗)의 태사(太師) 윤신달(尹莘達)의 14대손이다. 고조(高祖) 휘 보(珤)는 수 첨의정승(守僉議政丞) 영 평 군(鈴平君)이고 시호(諡號)는 문현(文顯)이다.

 

증조(曾祖)는 휘 안숙(安淑)인데 도첨의찬성사(都僉議贊成事)를 지냈고 시호는 양간(良簡)이며, 조(祖)는 휘 척(陟)으로 영평군(鈴平君)이다. 고(考)의 휘는 승순(承順)으로 판개성 부사(判開城府使)를 지냈고 시호는 충간(忠簡)이며, 비(妣)는 단양 이씨(丹陽李氏)로 판도 판서(版圖判書) 이거경(李居敬)의 딸이다.

 

공은 젊어서 과거에 급제(及第)하여 아우인 윤향(尹向)과 함께 문학(文學)으로 선발되어 임용되었다.

일찍이 완산부윤(完山府尹-從二品)을 지냈는데, 완산의 형승(形勝)을 이른 ‘국가의 풍패(豊沛, 한(漢)나라 고조(高祖)의 고향)로 산천이 신령하고 빼어나다.’는 등의 말이 서거정(徐居正)의 기(記)와 함께 나란히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 전주부(全州府) 조에 실려 있다.

 

건문(建文) 경진 년(庚辰年, 1400년 태종 즉위년) 정월에 추 충 익대 좌명공신(推忠翊戴佐命功臣) 3등에 녹훈(錄勳)되고, 파평군(坡平君)으로 봉해졌다. 일찍이 어떤 사건으로 파 평 현(坡平縣)에 유배되었다가 세종(世宗)이 선양(禪讓)을 받은 뒤에 평안도 관찰사(平安道觀察使)에 임명되었다.

 

장차 부임(赴任)하려고 할 때 양궁(兩宮, 태종과 세종)이 침전(寢殿)으로 불러 잔치를 베풀고 친히 전별(餞別)하였으니 그 총애하는 예우가 이와 같았다. 평안도에 부임하여서는 곧 상장(上章)하여 기악(妓樂)을 파해서 풍화(風化)를 바로잡자고 청하였다. 이어 우참찬(右叅贊)ㆍ이조판서(吏曹判書)에 임명되니 품계(品階)는 종1품이었다.

 

공은 영락(永樂) 임인 년(壬寅年, 1422년 세종 4년) 3월 10일에 집에서 돌아갔다. 부음(訃音)이 알려지자 조시(朝市)를 3일 동안 정지하였고, 태상왕(太上王, 태종)은 깊이 애도(哀悼)하면서 공을 부원군(府院君)으로 임명하지 못한 것을 한탄하였다.

 

그때 양궁은(사냥으로) 행재소(行在所)에 나와 있었는데 육선(肉饍)을 물리치니, 군신(群臣)들은 산람(山嵐)의 장기(瘴氣)가 두렵게 여길 만하다고 하면서 육선을 줄이지 말 것을 청하였다.

 

태상왕이 이르기를,

“임금이 대신이 졸(卒)하였다는 말을 듣고 감선(減膳)하는 것은 비록 고제(古制)에 없는 일이기는 하나, 신하는 임금을 위하여 삼년상(三年喪)을 입으니, 임금이 신하를 위하여 3일 동안 육선을 먹지 않는 것이 또한 옳지 않겠는가?” 하고는, 대신이 죽으면 3일 동안 감선하는 법을 만들게 하였다.

 

태상왕은 내관(內官) 김중귀(金重貴)를 보내 조문하고, 임금은 예관(禮官)을 보내고 아울러 사제(賜祭)하였다. 교서(敎書)에 대략 이르기를,

“기우(器宇)는 관대하고 커서 결단력이 있었고, 금회(襟懷)는 명철(明哲)한 지혜가 있어도 매섭게 사용치 않았다.

 

은대(銀臺, 승정원(承政院))에서 임금을 보필하고, 주목(州牧)을 다스리기도 하였으며, 관서(關西)를 순문(巡問)하고, 전부(銓部)에서 권형(權衡)을 맡아보면서 그 직위에 알맞았으니 관대하여 성명(聲名)이 있었다.”

하였으니, 군신(君臣) 사이에 애도하고 영화롭게 하는 은전(恩典)은 갖추어지고 성대하다고 할 만하다.

 

태상시(太常寺)에서 시호를 의논하였으니, 용의(容儀)가 아름다운 것을 소(昭)라 하고, 마음이 너그러워 고종명(考終命)한 것을 정(靖)이라 한다고 하였다.

 

또 사관(史官)은 기록하기를,

“윤곤은 성품이 관 후(寬厚)하며 풍채(風采)가 있었다.

 

공신으로 부귀(富貴)를 보전(保全)하였으니 세상 사람들이 복노인[福翁]이라 일컬었다.”

하였다. 이 몇 마디 말을 보더라도 공의 사람됨이 정성스럽고 높은 덕을 갖춘 큰 인물임을 알 수 있다.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즐기시는 군자여 덕 있는 소리 끊이지 않는다.”

하였으니, 그 천록(天祿)을 누리고 넉넉히 후손에게 전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였다.

 

두 세대가 지난 뒤에 돈실한 성녀(聖女)가 탄생하여 덕이 임금의 배필이 되었고 복이 그 자손에게 면면히 이어져 자자손손이 벼슬길이 끊이지 않았고 지금에 이르도록 여경(餘慶)이 있다.

 

전부인(前夫人)은 순정 택주(順靖宅主)로 고흥 유씨(高興柳氏) 첨의정승(僉議政丞) 유탁(柳濯)의 딸이고, 후부인은 청주한씨(淸州韓氏) 도 평의(都評議) 문열공(文烈公) 한상질(韓尙質)의 딸이다.

 

유 씨 부인이 두 아들을 낳았으니 장남은 상호군(上護軍) 윤희이(尹希夷)이고, 차남은 검참의(檢參議)로 찬성(贊成)에 추증된 윤희제(尹希齊)이다. 한 씨 부인은 아들 첨지(僉知) 윤삼산(尹三山)을 두었다. 또 측실(側室)에서 난 아들로 윤석노(尹石老)ㆍ윤가노(尹加老)ㆍ윤석년(尹石年)이 있다.

 

윤희이는 4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첨지 윤이(尹利), 군수(郡守) 윤정(尹貞), 병절(秉節) 윤선(尹善), 어모(禦侮) 윤신(尹信)이며, 사위는 현감(縣監) 이사강(李思剛)이다. 윤희제는 5남 3녀를 낳았는데, 군수로 영의정에 추증된 윤경(尹坰), 참의로 우의정에 추증된 윤은(尹垠), 부사(府使) 윤증(尹增), 장령(掌令) 윤배(尹培), 목사 윤훈(尹壎)과 사위는 직장 김민강(金閔姜), 참판 이교연(李皎然), 군수 정종우(鄭宗禹)이다.

 

윤삼산은 6남 3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상호군 윤오(尹塢), 주부(主簿) 윤당(尹塘), 우의정ㆍ영원부원군(鈴原府院君)이고 시호는 평정(平靖)이며 정현왕후(貞顯王后, 성종(成宗)의 계비(繼妃)의 아버지인 윤호(尹壕), 참판 윤해(尹垓), 영평군(鈴平君) 윤탄(尹坦), 동지(同知) 윤파(尹坡)이다.

 

사위는 첨지 박전(朴旃), 서림정(西林正) 이제(李怟), 청원정(淸原正) 이임(李霖)이다.

증현(曾玄) 이하는 보첩(譜牒)에 자세하게 실려 있고, 많아서 다 기록할 수 없는데, 지금 내외(內外) 지파(支派)가 천여 인이다.

 

공의 묘소는 파주(坡州) 치소(治所)에서 동쪽으로 5리쯤인 용지동(龍池洞)에 있는데, 돌아간 해 7월 18일에 장사지냈다. 유 부인(柳夫人)의 묘는 충간공(忠簡公) 묘 아래에 있었고, 한 부인(韓夫人)의 묘는 전의현(全義縣) 동쪽에 있었으나 세대가 멀어져서 지금은 그 소재지를 모두 알지 못한다.

 

공의 적손(嫡孫)이 전해오다가 8대에 이르러 단절되었다.

9대손 대사헌(大司憲) 윤문거(尹文擧)와 10대손 판서 윤강(尹絳) 등이 공의 후사를 세우는 일을 서로 의논하면서 말하기를,

“종사(宗嗣)를 이어갈 수가 없으니 차라리 지파 가운데서 어질고 뛰어난 자를 택해 다시 종적(宗適)으로 세워야 할 것이다. 국조(國朝)의 고사(故事)에도 이런 예 가 있으니 이를 따르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다.

 

마침내 연명(聯名)하여 조정에 고하니 조정에서 곧 허락하였다. 이에 공의 차방(次房)의 9세손인 승지 윤비경(尹飛卿)으로 하여금 공의 제사를 받들도록 하였다. 숭정(崇禎) 정유년(丁酉年, 1657년 효종 8년) 7월에 윤비경이 종인(宗人)을 인솔하여 신묘(新廟)에서 제사를 올렸다.

 

효향(孝享)을 잘 계승하여 끊어진 것을 다시 이었으니 실로 국가에서 공훈(功勳)이 높이 드러난 이에게 끊어진 뒤를 이어준 성전(盛典)이라 하겠다. 얼마 안 되어 승지공이 묘소 앞에 세운 표석의 전면에 겨우 관직과 장일(葬日)을 기록되고 그 나머지는 고신(考信)할 바가 없다고 여겨 드디어 국승(國乘)을 의지하여 사관이 마무리하여 쓴 일단(一段)을 얻었는데 연수(年壽)와 이력 덕행(德行)과 사적(事蹟)이 비록 자세히 구비되지는 못하였으나 또한 후세에 보이기에는 충분하다.

 

이에 여러 종인(宗人)들과 모의하여 함께 돌을 다듬고 각자(刻字)하여 묘도(墓道)에 세우려고 도모하였다.

3백 년 동안 겨를 하지 못했던 일을 금일에 비로소 거행하게 되었으니 어찌 선조의 끼친 은택과 후예들의 두터운 행복(幸福)이 아니겠는가?

 

승지공이 장차 당세의 군자(君子)에게 묘갈명을 청하려고 나 윤선거(尹宣擧)로 하여금 가장(家狀)의 문자를 기술하라고 하기에 삼가 국승(國乘)에서 얻은 바와 집에서 전하는 보첩의 여러 책을 가지고 감히 위와 같이 차례대로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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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先祖崇政大夫坡平君諡昭靖公家狀

 

公諱坤。字▣▣。坡平人。高麗太師莘達之十四世孫也。高祖諱珤。守僉議政丞鈴平君。諡文顯。曾祖諱安淑。都僉議贊成事。諡良簡。祖諱陟。鈴平君。考諱承順。判開城府事。諡忠簡。妣丹陽李氏。版圖判書居敬之女。公少登第。與弟向俱以文學進用。嘗尹完山。記其形勝。有國家豐沛山川靈秀等語。與徐居正記。並載在輿地志。建文庚辰正月。錄推忠翊戴佐命三等功臣。封坡平君。嘗以事謫坡平縣。後世宗受禪。拜平安道觀察使。將赴任。兩宮召入寢殿。設宴而親餞之。其見寵遇如此。旣莅西土。乃上章請罷妓樂。以正風化。已拜右參贊,吏曹判書。階從一品。永樂壬寅三月十日。考終于家。訃聞。命停朝市三日。太上深加傷悼。以不及拜府院君爲恨焉。時兩宮行幸在外。爲撤肉膳。群臣以山嵐瘴氣可畏。請勿減肉。太上敎曰。君聞大臣卒。減膳。雖無古制。臣爲君喪三年。君爲臣三日去肉膳。不亦可乎。仍命立大臣喪三日減膳之法。太上爲遣內官金重貴。上遣禮官。並賜祭敎。略曰。器宇寬弘而能斷。襟懷明智而不苛。或補衮銀臺。或連長州牧。巡問關西。權衡銓部。所在稱副。綽有聲名。君臣之際。哀榮之典。可謂備且盛矣。太常議易名。容儀恭美曰昭。寬樂令終曰靖。史官書之曰。某性寬厚有風彩。以功臣富貴保全。世目以福翁。觀乎此數言。則可知公之爲肫肫然長德鉅人也。詩云樂只君子。德音不已。宜其享有天祿。垂裕後昆。兩世之後。篤生聖女。媲德宸極。綿祚瓜瓞。子子孫孫。冠冕不絶。至于今有餘慶也。前夫人順靖宅主高興柳氏。僉議政丞濯之女。後夫人淸州韓氏。都評議文烈公尙質之女。柳夫人生二男。曰希夷上護軍。曰希齊檢參議。贈贊成。韓夫人生一男。曰三山僉知。側室子。曰石老,加老,石年。護軍四男。利僉知。貞郡守。善秉節。信禦侮。一女壻李思剛縣監。贊成五男。坰郡守。贈領議政。垠參議。贈右議政。增府使。培掌令。壎牧使。三女壻金閔姜直長,李皎然參判,鄭宗禹郡守。僉知六男。塢上護軍。塘主簿。壕右議政鈴原府院君。諡平靖。卽我貞顯王后之考也。垓參判。坦鈴平君。坡同知。三女壻。朴旃僉知,西林正怟,淸原正霖。曾玄以下詳載譜牒。多不盡錄。今內外支派千有餘人。公之墓在坡州治東五里許龍池洞。葬以卒之年七月十八日。柳夫人墓在忠簡公墓下。韓夫人墓在全義縣東。而世遠俱失其所。公之適孫。傳至八世而屬絶。九世孫大司憲文擧,十世孫判書絳等。相與議立公後。咸曰。宗嗣旣無可繼者。則寧擇諸支中賢而且顯者。更立宗適。國朝故事。已有此例。今宜倣而行之。遂聯名告于朝廷。朝廷卽準許之。乃命公次房下九世孫承旨飛卿。俾奉公祀。崇禎丁酉七月。飛卿率諸宗人。奉主禋祭于新廟。克承孝享。斷而復續。寔國家功宗繼絶之盛典也。旣而承旨公以爲墓前表面。僅記官職葬日。而餘無可考信者。遂憑國乘。得史筆書卒一段。年壽踐歷德行事蹟。雖未備具。亦足以示于後也。乃謀於諸宗人。共圖治石。顯刻于神道。三百年未遑之事。始擧於今日。茲豈非先祖之餘澤而後裔之厚幸也。承旨公將以請銘于當世之君子。俾宣擧述家狀文字。謹將國乘所得及家傳譜牒諸書。敢序次如右云。

 

자료 : 魯西先生遺稿卷之二十 >行狀/윤선거(尹宣擧)

윤선거 생졸년 : 1610(광해군 2)∼1669(현종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