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행장. 시장.

백사 이항복 행장(白沙 李恒福 行狀)

야촌(1) 2015. 11. 25. 01:08

■ 백사 이항복 행장(白沙 李恒福行狀)

   이항복李恒福, 1556(명종 11) ~ 1618(광해군 10)

 

   지은이 : 장유(張維)

 

추충분의평난충근정량갈성효절협책호성공신(推忠奮義平難忠勤貞亮竭誠效節協策扈聖功臣)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영의정 겸 영경연홍문관예문관춘추관관상감사 세자사(議政府領議政兼領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世子師) 오성부원군(鰲城府院君) 이공(李公)의 행장(行狀)

 

공의 휘(諱)는 항복(恒福)이고 자(字)는 자상(子常)이요, 그 선대는 경주인(慶州人)이다. 원조(遠祖)인 문충공(文忠公) 제현(齊賢)은 문장(文章)과 덕업(德業)으로 고려(高麗)의 명상(名相)이 되었는데, 세상에서 익재선생(益齋先生)이라 일컫는다.

 

고(考) 몽량(夢亮)은 중종(中宗), 인종(仁宗), 명종(明宗)을 섬겨, 벼슬이 참찬(參贊)에 이르렀고, 최 부인(崔夫人)에게 장가들어 가정(嘉靖) 병진년(丙辰年,1556) 10월경자(庚子) 일에 공을 낳았다. 공은 막 태어나서 2일 동안은 젖을 빨지 못했고 3일 동안은 울지도 못했으므로, 가인(家人)들이 이를 걱정하였다.

 

그러자 참찬공(參贊公)이 고사(瞽史)를 시켜 점을 쳐 보게 하니, 고사가 축하하며 말하기를, “걱정할 것 없습니다. 이 아이는 의당 귀(貴)가 인작(人爵)의 극에 이를 것입니다.” 하였다.

 

조금 자라서는 재주가 뛰어나고 식견과 도량이 있어 보통 아이들과 월등히 달랐으므로, 참찬공(參贊公-아버지를 말함)이 기특하게 여겨 이르기를, “이 아이가 반드시 우리 가문(家門)을 창성하게 만들 것이다.” 하였다.

 

8세 때에 비로소 글을 읽기 시작했는데, 뛰어나게 총명하므로 참찬공이 명하여 검금(劍琴) 두 글자로 변구(騈句)를 짓게 하니, 공이 즉시 부르기를, “칼에는 장부의 기상이 있고, 거문고엔 천고의 소리가 담기었네[劍有丈夫氣 琴藏千古音].”라고 하였으므로, 들은 이들이 장차 대성(大成)할 것을 알았다.

 

9세 때에 부친을 여의고는 마치 성인(成人)처럼 너무 슬퍼하여 몸이 수척해졌고, 소식(素食)만 먹으면서 삼년상을 마쳤다. 12, 3세 때에는 이미 기백을 자부하고 의리를 좋아하여 재물을 아끼지 않고 남을 구제할 뜻이 있었다.

 

공이 일찍이 새 저고리[襦]를 입었을 때 다 해진 옷을 입은 이웃 아이가 그것을 보고 입고 싶어 하자, 공이 즉시 벗어서 그에게 주었고, 또 일찍이 자기가 신고 있던 신을 벗어서 맨발로 다니는 사람에게 주고 돌아왔다.

 

그러자 최 부인이 공의 뜻을 시험해 보기 위해 거짓 성을 내어 나무라니, 공이 대답하기를, “갖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으면 차마 주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하므로, 최 부인이 감탄하여 이르기를, “이것은 이상한 일이다.” 하였다.

 

겨우 15세가 되어서는 건장하고 용맹을 좋아하여 씨름이나 공차기 같은 소년(少年)들의 유희를 잘하였으므로, 최 부인이 그 말을 듣고 준절히 나무라자, 공이 통렬히 반성하여 지난날의 생각을 바로잡고 학문에 힘썼다.

 

16세 때에 최 부인이 별세하자, 공은 거상(居喪)하면서 너무 애통해하여 거의 죽을 뻔하였다. 삼년상을 마치고는 학궁(學宮)에 유학하여 학문이 더욱 성취되자 명성이 성대하였다.

 

25세에는 경진 년의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권지 승문원부정자(權知承文院副正字)가 되었다. 그 명년에는 예문관(藝文館)에 뽑혀 들어가 검열(檢閱)이 되었는데, 선조(宣祖)께서 장차 《통감강목(洞鑑綱目)》을 강(講)하려고 태학사(太學士)에게 명하여 고문(顧問)에 대비할 만한 재능 있는 신하들을 미리 선발하게 하자,

 

당시 태학사이던 율곡(栗谷) 이 문성공(李文成公)이 5인을 천거하여 올렸는바, 공이 실로 여기에 참여되었다. 그러자 선조께서 대내(大內)에 소장한 《통감강목》 한 질을 하사하고, 또 명하여 이문(吏文), 한어(漢語), 시사(試射) 등 여러 가지 번잡한 기예로 번거롭게 하지 말도록 하였다. 이윽고 오랫동안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고 옥당(玉堂)에 뽑혀 들어가서 정자(正字)가 되었다.

 

갑신년에는 저작(著作)으로 승진되어 붕당(朋黨)을 짓는 대사간(大司諫) 이발(李潑)을 당연히 체직해야 한다고 논했는데, 이 때문에 당로자(當路者)에게 크게 거슬리어 마침내 병을 핑계로 세 차례나 사직을 고하자, 선조께서 하교하기를, “이모(李某)는 옥당을 떠나서는 안 되니, 사직 장을 올리지 못하게 하라.” 하고, 이내 박사(博士)로 승진시켰다.

 

을유년 봄에는 예문관봉교(藝文館奉敎)에 옮겨 제수되었고, 차례에 따라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으로 승진되었다가 다시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이 되었다. 이어 천거에 의해 이조좌랑(吏曹佐郞), 지제교(知製敎)가 되었는데, 전랑(銓郞)을 세상에서 열관(熱官)이라 호칭하였으나, 공은 전랑의 생활이 마치 한사(寒士)처럼 쓸쓸하였다.

 

일찍이 관직(館職)에 있던 두 조사(朝士)가 은밀히 전조(銓曹)에 들어가기를 꾀하여 빈객(賓客)들이 그를 위해 많은 설득을 벌였으나, 공은 본래부터 그의 사람됨을 미워하여 전혀 듣지 않은 것처럼 하였다. 이윽고 수찬(修撰)으로 체직되었다.

 

병술 년에는 또 정언이 되었고, 정해 년에는 교리(校理)로 승진되었다가, 무자 년에는 다시 이조(吏曹)에 들어가서 정랑(正郞)이 되었다. 기축 년에는 체직되어 예조정랑(禮曹正郞)이 되었다.

 

이해에 정여립(鄭汝立)의 모반(謀反) 사건이 일어나서 상(上)이 친히 임어하여 죄수를 국문할 적에 공이 문사랑(問事郞)으로 입시(入侍)하였는데, 명민(明敏) 함이 상의 뜻에 들었으므로, 선조가 매양 이름으로 공을 불러 이르기를, “이모로 하여금 말을 전하게 하라.” 하니, 동료들은 공수(拱手)만 하고 있을 뿐 감히 공의 재능을 바라지 못하였다.

 

매양 대신(大臣)이 죄의 경중을 평의(評議)할 적에는 공이 그 사이에 주선하여 애써 평번(平反)을 따름으로써 온전히 살아난 사람이 매우 많았다.

 

경인년에는 응교(應敎)로 승진되었다가 의정부(議政府)의 검상(檢詳), 사인(舍人)을 거쳐 전한(典翰)으로 승진되었다. 일찍이 강연(講筵)에 입시했을 때 선조가 특별히 공을 앞으로 불러 놓고 문사랑으로 있을 때의 일을 이르면서 연거푸 고재(高才)라 칭찬하고, 이어 직제학(直提學)에 임명하였다.

 

그 후 얼마 안 되어 통정대부(通政大夫) 승정원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로 승진되었고, 문신정시(文臣庭試)에서 공이 장원하여 구마(廏馬)를 하사받았다.

 

신묘년 봄에는 호조 참의(戶曹參議)에 전임되어 재정(財政)을 정밀히 조사하고 계산하여 쓸데없는 비용을 절감하니, 겨우 한 달 남짓 만에 창고가 충만하여졌다. 그러자 호조판서(戶曹判書) 윤공 두수(尹公斗壽)가 공을 대단히 중하게 여겨 감탄하며 말하기를, “문필(文筆)에 종사하는 선비가 능란하게 전곡(錢穀)을 다스려 내니, 참으로 통달한 재주로다.” 하였다.

 

역적을 치죄한 공훈을 책록하여 공에게는 추충분의평난공신(推忠奮義平難功臣)의 호가 내려졌다. 때마침 사화(士禍)가 일어나서 상공(相公) 정철(鄭澈)이 화수(禍首)가 되었는데, 삼사(三司)가 죄를 꾸며 얽어서 장차 부도죄(不道罪) 이상으로 꾸미려고 하므로, 정공(鄭公)은 강가로 나가서 처벌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때 화기(禍機)가 매우 급박하여 정공의 문생(門生)이나 친구들도 두려워서 감히 그를 방문하지 못하였는데, 공만이 유독 방문하여 장시간 동안 조용히 담화를 나누었으므로, 남들이 모두 공을 위하여 위태롭게 여겼었다.

 

그 후 얼마 안 되어 공이 승지(承旨)가 되었는데, 대간(臺諫)이 정철의 죄안(罪案)을 조당(朝堂)에 써 붙여 게시하기를 청하고, 직무수행에 태만하다는 것으로 공을 탄핵하여 파직시켰다. 얼마 있다가 다시 승지가 되었다.

 

당시에는 명류(名流)로서 시의(時議)에 거슬린 사람들을 일체 당인(黨人)으로 지목하여 차례로 거의 다 폄적(貶謫)시키던 터라, 한 대관(臺官)이 전날의 유감을 가지고 장차 공을 찬출(竄黜)하는 가운데 끼워 넣으려고 하였는데, 대사헌(大司憲) 이공 원익(李公元翼)이 힘써 공을 구해(救解) 함으로써 공이 이를 힘입어 죄를 면하였다. 이어 차례에 따라 도승지(都承旨)가 되었다.

 

임진년 4월에는 왜노(倭奴)가 대대적으로 쳐들어와 신립(申砬)이 패했다는 보고가 이르자, 중외(中外)가 모두 두려워하고 놀랐다. 상(上)은 이미 서쪽으로 몽진할 계책을 정하고 좌상(左相) 유성룡(柳成龍)을 명하여 유도대장(留都大將)으로 삼자, 공이 동료에게 말하기를, “좌상이 여기에 머무르면 일을 할 수가 없다.

 

지금 장차 상국(上國)에 가서 하소연할 사명(辭命)이 반드시 그의 손에서 나와야 한다.” 하고, 유도대장을 고쳐 임명하기를 청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적보(賊報)가 날로 급박해지자, 공은 스스로 순국(殉國)하기를 결심하고, 매양 퇴청(退廳)하여서는 외사(外舍)에 거처하면서 안쪽으로 통하는 문을 걸어잠그고 집안 일로 자신을 관련시키지 못하도록 금지하여 손위의 누이와도 서로 결별하였고, 측실(側室)이 한 번만이라도 대면(對面)하기를 울면서 청했으나 또한 이루지 못하였다.

 

이달 그믐날 밤에 대가(大駕)가 장차 출발하려 하는데, 백관(百官)은 모이지 않고 비는 내리고 밤은 칠흑 같았다. 이때 중전(中殿)께서 홀로 시녀(侍女) 십 수인을 데리고 인화문(仁和門)으로 걸어 나가자, 공이 촛불을 잡고 앞에서 인도하였다. 거가(車駕)가 이날 밤에 임진(臨津)을 건넜다.

 

그 다음날 상이 수행한 여러 재신(宰臣)들을 불러 놓고 말채찍으로 땅을 두드리면서 묻기를,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무슨 계책을 써야겠는가?” 하자, 여러 재신들이 대답을 하지 못하므로, 공이 맨 먼저 말하기를, “우리나라의 병력(兵力)으로는 적(賊)을 방어하기에 부족하니, 오직 서쪽으로 천조(天朝)에 가서 구원병을 요청하는 일이 있을 뿐입니다.” 하니, 상이 좋은 계책이라 하였다.

 

송도(松都)에 이르러서는 공을 특별히 이조 참판(吏曹參判)으로 승진시키고 오성군(鰲城君)에 봉하고 명하여 두 왕자(王子)를 호위하고 먼저 평양(平壤)으로 가도록 하였다. 이윽고 어가(御駕) 또한 평양에 이르러 하교하기를, “이모는 오랫동안 근시(近侍)로 있으면서 생각이 바르고 신실하였으니, 의당 올려 발탁하여 중임(重任)을 위임해야 한다.” 하고, 얼마 안 가서 형조판서 겸 오위도총관(刑曹判書兼五衛都摠管)을 제수하였다.

 

얼마 후 대사헌(大司憲)에 임명되어서는 이공 덕형(李公德馨)과 함께 입대(入對)하여 속히 천조에 가서 구원병을 주청(奏請)할 것을 청하니, 대신(大臣)들이 처음에는 공과 의견을 달리했으나 공이 극력 논쟁하여 그 의논이 마침내 결정되었다.

 

또 삼도(三道)에 조도관(調度官)을 나누어 파견하여 군흥(軍興)을 관장하게 해서 끝내 재조(再造)의 공을 이루어 낸 것도 공의 계책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어 병조판서 겸 홍문관제학 지경연춘추관동지성균관사 세자좌부빈객(兵曹判書兼弘文館提學知經筵春秋館同知成均館事世子左副賓客)에 임명되었다.

 

임진(臨津)을 지키지 못함으로써 적들이 진격하여 대동강(大同江)을 핍박해 오자, 이공 덕형이 청하기를, “배를 타고 가서 적장(賊將) 현소(玄蘇)와 조신(調信)을 만나서 진격을 늦추도록 도모하되, 그들이 따르지 않으면 장차 두 적의 머리를 베어 오겠습니다.” 하니, 공이 말하기를, “두 적은 매우 하찮은 존재이므로, 그들을 죽여 보았자 적에게 손상을 입히기에는 부족하고 한갓 우리가 먼저 불의(不義)의 명칭을 부담하게 되니, 그것은 계책이 아닙니다.” 하여, 그 일이 마침내 중지되었다.

 

상이 여러 수행한 신하들을 모아놓고 행행(行幸)할 곳을 의논할 적에, 혹자가 말하기를, “함흥(咸興)은 한쪽으로 치우쳐 멀고 군량(軍糧)도 많아서 지킬 만합니다.” 하므로, 공이 이공 덕형과 함께 누차 쟁론하여 말하기를, “함흥은 상국(上國)과 거리가 너무 멀어서 행행할 수 없고, 의당 영변(寧邊)으로 행행해야 합니다.” 하니, 상이 그대로 따랐다.

 

또 공이 이공과 함께 각각 요동(遼東)에 가서 구원을 요청하겠다고 청하였으나 상이 결정을 내리지 못했는데, 본병(本兵)은 멀리 떠나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이가 있자, 상이 그 말을 옳게 여겨 이공에게 명하여 가도록 하였다.

 

그러자 공이 자기가 타던 말을 이공에게 풀어주고 눈물을 흘리면서 서로 작별하였다. 적병(賊兵)이 차츰 진격해 옴에 따라 관군(官軍)이 서로 잇달아 무너지자, 상이 밤중에 여러 신하들을 불러놓고 의논하기를, “일이 급하게 되었으니, 나는 의당 중국으로 귀부(歸附) 해야겠다. 다만 부자(父子)가 함께 압록강(鴨綠江)을 건너 버리면 나라에 주인이 없게 되니, 세자(世子)는 머물러서 묘주(廟主)와 사주(社主)를 받들 수 있게 하라.

 

여러 경들 가운데 누가 나를 따라서 서쪽으로 건너가려는고?” 하니, 뭇 신하들이 미처 대답하기 전에 공이 울면서 대답하기를, “신은 몸이 건강하고 부모도 없으니, 원컨대 죽기로써 전하(殿下)를 따르겠습니다.” 하였다.

 

어가가 박천(博川)에 머물렀을 때 급보(急報)가 이르자 상이 명하여 어가를 재촉해서 출발하였는데, 밤이 이미 2경이었다. 비는 내리고 길은 사나운데, 시위(侍衛)하는 사람은 수십 인도 채 되지 못하므로, 공이 관속(官屬)들에게 이르기를, “앞쪽의 시위가 매우 허술하니, 우리들이 어가 뒤에 있어서는 안 되겠다.” 하고, 마침내 말을 채찍질하여 앞에서 인도하였다.

 

어가가 의주(義州)에 당도하자, 성중(城中)의 주민들이 모두 놀라 흩어지므로, 공이 상께 청하여 해사(廨舍)를 수리해서 오래도록 머무를 뜻을 보이니, 이민(吏民)들이 과연 차차로 다시 모여들었다.

 

공이 또 건의하기를, “호서(湖西), 호남(湖南), 영남(嶺南) 삼로(三路)에서는 행재소(行在所)가 어딘지를 모를 것이니, 의당 급히 사신을 보내어 선유(宣諭)하여 군대를 일으켜 근왕(勤王)하도록 해야겠습니다.” 하니, 상이 그 말을 좇아서 윤승훈(尹承勳)을 보내어 해로(海路)를 따라 호남으로 가게 하였다.

 

이로부터 조명(朝命)이 비로소 제도(諸道)에 통하여 근왕하는 군사가 차차로 일어나게 되었다. 당시 순찰사(巡察使) 이원익(李元翼)이 금군(禁軍)의 단약(單弱)함을 염려하여 전사(戰士)를 나누어서 들어가 시위하게 하기를 청하자, 공이 그 제의를 물리쳐 말하기를, “전사는 적을 격파하는 데에 써야 하니, 별도로 민정(民丁)을 뽑아서 금위(禁衛)에 보충하기 바란다.”고 하였다.

 

이에 앞서 요좌(遼左)지방에 우리가 왜인(倭人)이 쳐들어오도록 인도했다는 와언(訛言)이 전파됨으로 인하여 병부상서(兵部尙書) 석성(石星)이 지휘(指揮) 황응양(黃應暘)을 보내 와서 사실을 정탐하게 하였으므로, 황응양이 처음에는 우리를 퍽 의심하여 왜서(倭書)를 보기를 청하였다.

 

그런데 공이 도성에 있을 때에 이미 여기에 생각이 미쳐 신묘 년에 왜추(倭酋)가 보낸 교만 방자한 내용의 서계(書契)를 손수 싸 가지고 와 있다가, 이때에 미쳐 황응양에게 보여 주자, 황응양의 의심이 크게 풀리어 심지어는 가슴을 치면서 대단히 애통해하기까지 하고 돌아가서 갖추 사실대로 보고함으로써 조선(朝鮮)에 구원병을 파견하자는 의논이 마침내 결정되었다.

 

그리하여 천장(天將) 조승훈(祖承訓)과 사유(史儒)가 7000의 병사를 거느리고 먼저 이르자, 공이 말하기를, “조 장군은 경조(輕躁)하고 꾀가 없으니, 그 군대는 반드시 패할 것이다.” 하였는데, 평양으로 진병(進兵)했다가 과연 크게 패하여 사유는 죽고, 조승훈은 겨우 죽음을 면하고 돌아가서 도리어 우리가 왜구(倭寇)를 돕고 있다고 무함하였다.

 

그러자 공이 상에게 청하여 대신을 광녕(廣寧)으로 보내어 변무(辨誣)하게 하고, 또 청하여 사신을 보내 상주(上奏)해서 대군(大軍)의 발견(發遣)을 재촉하도록 하였다.

 

이해 12월에 제독(提督) 이여송(李如松)이 5만의 병사를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너왔는데, 공이 이 제독의 행군(行軍)하는 데에 기율(紀律)이 있음을 보고 상께 아뢰기를, “이 군대는 반드시 공을 세우겠으나, 다만 막하(幕下)에서 정 동지(鄭同知)와 조 지현(趙知縣)두 사람이 용사(用事)를 하고 있으니, 후일에 큰 계책을 저지시킬 자는 필시 이 사람들일 것입니다.” 하였다.

 

그런데 계사년 정월에 제독이 평양의 적을 진격하여 승첩을 거두고 다시 적을 추격하여 벽제(碧蹄)에 이르러서는 패전하여 불리하게 되자, 제독의 기가 꺾이어 마침내 화의(和議)에 소신을 굽히고 말았는데, 정 동지와 조 지현이 실로 이 계책을 주관했었으니, 공의 말이 과연 꼭 들어맞았던 것이다. 경성(京城)의 적이 물러간 뒤에는 공이 환궁(還宮)하기를 강력히 청하였다.

 

10월에 거가가 경성으로 돌아왔다. 11월에는 행인(行人) 사헌(司憲)이 칙서(勅書)를 받들고 오므로, 공이 원접사(遠接使)가 되어 가서 그를 맞이하였다. 그런데 마침 황제의 칙서에서 왕세자(王世子)로 하여금 호관(戶官), 병관(兵官)을 대동하고 전라도, 경상도 지방으로 나가서 군사를 시찰하도록 하였으므로, 공이 바로 병조의 장관이었기 때문에 마침내 접반(接伴)의 직임을 해면하고 세자를 모시고 떠났다.

 

갑오년 봄에는 호서(湖西)의 반적 송유진(宋儒眞)이 분조(分朝)를 배반하므로, 여러 신하들이 세자를 받들고 환조(還朝)하여 적을 피하려고 하자, 공이 차자(箚子)를 올려 그것이 옳은 계책이 아님을 논박하니, 세자가 공의 의견을 따랐는데, 적 또한 얼마 안 가서 평정되었다.

 

세자가 홍주(洪州)에 있으면서 보령(保寧)의 수영(水營)으로 옮겨 머물고자 하여 공으로 하여금 가서 현지를 살펴보고 오게 하였는데, 공이 돌아와서는 머무를 수 없는 곳이라고 속여 대답하였다. 혹자가 그것을 의심하자, 공이 말하기를, “영보정(永保亭)의 좋은 경치는 호중(湖中)의 으뜸이니, 소주(少主)가 그 곳에 거처하는 것이 후일의 방탕한 마음을 인도하게 될까 염려해서이다.” 하니, 식견 있는 이들이 그 원대한 식견에 감복하였다.

 

을미년에는 이조 판서(吏曹判書)가 되어 홍문관 대제학(弘文館大提學), 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를 겸하였다. 병신년에는 황조(皇朝)에서 사신을 보내어 일본(日本)의 추장(酋長)을 책봉하였는데, 부사(副使)인 양방형(楊邦亨)이 공을 접반사로 삼아 주기를 청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공이 이미 사조(辭朝)하고는 이조 판서, 대제학의 해면을 요청하여 의정부 우참찬(議政府右參贊)에 임명되었다. 양 부사(楊副使)는 공을 매우 극진히 존경하고 중히 여겨 항상 말하기를, “동방(東方)에 이런 인물이 있는데, 어찌 외국(外國)이라 하여 가벼이 여길 수 있겠는가.” 하였다.

 

이미 왜영(倭營)에 들어간 뒤에는, 정사(正使) 이종성(李宗城)이 잘못 ‘적이 장차 무도한 행위를 가할 것’이라는 말을 듣고 밤중에 탈신 도주함으로써 원근(遠近) 사람들이 크게 놀란 사건이 일어났다. 그래서 양 부사가 급히 공으로 하여금 조정에 달려가서 그 사실을 아뢰게 하므로, 공이 이틀 밤낮을 급히 달려 경성에 이르니, 이 정사(李正使)는 이미 와 있었고 적은 또한 끝내 움직이지 않았다.

 

처음에 공이 이 정사를 보고서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부귀한 집의 자제로서 한갓 문묵(文墨)이나 일삼았을 뿐이니, 반드시 왕명(王命)을 욕되게 할 것이다.” 하였는데, 이윽고 과연 그렇게 되자, 사람들이 공을 일러 사람을 잘 알아본다고 하였다. 이해 겨울에 양 부사가 돌아가자, 공이 국경까지 배웅하였다.

 

정유년에는 다시 병조 판서가 되었다. 황조(皇朝)에서 재차 왜(倭)를 정벌하게 되어, 경리군무(經理軍務) 어사(御史) 양호(楊鎬)가 격문(檄文)으로 호조(戶曹), 병조(兵曹), 공조(工曹)의 장관(長官)을 불러 경상(境上)에 나와 기다리게 하였으므로, 공이 구련성(九連城)으로 가서 그를 맞이했는데, 응대(應對)한 것이 모두 기의(機宜)에 적중하였다.

 

그 후 병으로 체직되었다가 이윽고 다시 병조 판서가 되었다. 공은 임진년 이후로 모두 다섯 차례 병조 판서가 되었다. 대적(大賊)이 전국에 그득하고 천병(天兵)이 수륙(水陸)으로 모여드는 때를 만나서 모든 군려(軍旅)에 관계된 일은 병조에 귀속되지 않은 것이 없었는데, 공은 편의에 따라 조처하여 성대히 여유가 있었고, 항상 여분으로 베[布] 만 필을 비축해 놓아서 급할 때의 용도에 대비하였다.

 

그래서 양 경략(楊經略)이 공의 재능과 모유(謀猷)에 감복하여 매양 어려운 일을 만날 때마다 반드시 말하기를, “이 상서(李尙書), 이 상서를 기다려서 해야겠다.” 하였다.

 

무술년 가을에는 황조의 찬획사(贊畫使) 정응태(丁應泰)가 양 경략을 무핵(誣劾)하였으므로, 국가에서 양 경략을 위해 상주(上奏)하여 보류(保留)시켜 주기를 청했더니, 정응태가 이 때문에 우리 나라에 앙심을 품고 절치부심하여 주문(奏文)을 올려 우리 나라를 무함하였는데, 그 말이 몹시 참혹하였다.

 

그러자 선조(宣祖)가 대단히 놀라서 장차 대신을 보내 변명하게 하려 하면서 영상(領相) 유성룡(柳成龍)을 의중에 두었는데, 유공(柳公)이 제때에 가기를 청하지 않으므로, 선조가 유공에게 노하여 그가 탄핵받은 것을 인해서 파직시켰다.

 

그리고 마침내 공을 의정부 우의정(議政府右議政)에 임명하고 부원군(府院君)에 진작(進爵)시켜 진주사(陳奏使)로 삼았다. 그러자 공이 두 차례나 차자를 올려 강력히 사양하고 가함(假銜)으로 사신에 충원되기를 원하니, 상이 이르기를, “변무(辨誣)를 하려면서 먼저 임금을 속이면 되겠는가.” 하였다.

 

공이 마지못해 명을 받고는 날마다 이틀 길을 하루에 달려서 북경에 도착하여, 이미 주문(奏文)을 올리고 나서는 각부(閣部)에 두루 나아가 정문(呈文)을 올려 통렬히 변명하니, 각부의 제공(諸公)들이 이미 공의 의표(儀表)를 존경하던 터에 또 문사(文辭)가 분명하고 간절함을 보고는 더욱 감탄하며 칭찬하고, 서로 다투어 다주(茶酒)로써 공을 맞이하여 친절히 말하기를, “국가의 수치는 절로 씻어질 것이니, 걱정할 것 없습니다.” 하였다.

 

천자(天子)가 마침내 명하여 정응태를 파직시키고, 인하여 우리 나라에 칙서를 내려서 위유(慰諭)하였다.

그 명령(命令)에 공이 사명을 마치고 돌아오니, 선조가 크게 기뻐하여 공에게 전토(田土)와 동복(僮僕)을 특별히 하사하였다.

 

그 후 논하는 자들이 정응태의 일 때문에 정응태의 접반사였던 백유함(白惟咸)에게 죄를 돌려 하옥(下獄)시키고 삼성(三省)이 모여서 국문했는데, 이때에 공이 위관(委官)이 되어 평의(評議)를 올려서 그의 억울한 정상을 밝히니, 선조가 그를 용서해 주었다.

 

그 후 조정의 의논이 더욱 강력하게 유상(柳相)을 공격하였으니, 이는 갑오년에 화의(和議)를 주장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공 또한 소장(疏章)을 올려 ‘일찍이 화의를 찬성하였으니 감히 요행으로 면할 수 없다’고 자핵(自劾)하고 마침내 병을 핑계로 사면하였다. 오랜 뒤에 선조가 하교하기를, “남과 일을 함께 해 놓고 끝에 가서 반복(反覆)하는 자는 이모(李某)의 죄인이다.” 하였다.

 

경자년에는 도체찰사 겸 도원수(都體察使兼都元帥)에 임명되어 호남, 영남 등 제도(諸道)를 선무(宣撫)하면서 호남 지방의 부역(賦役)을 늦추어 주기를 청하고, 또 백성을 편케 하고 해상을 방어할 일[安民防海]에 관한 십육책(十六策)을 올렸는데, 상이 그 말을 많이 채용하니, 남방의 백성들이 순종하여 의뢰하였다. 이해 여름에는 영의정(領議政)에 임명되어 소환(召還)되었다.

 

의인왕후(懿仁王后)가 승하했을 적에는 공이 상여(喪輿)를 따라 산릉(山陵)에 갔는데, 궁인(宮人)이 실수로 불을 내서 불이 영악전(靈幄殿)에 옮겨 붙었다. 창졸간에 생긴 변이라 사람들이 모두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는데, 공이 조용하게 지휘하여 불을 다 끄고 나서는 예관(禮官)을 불러 위안제(慰安祭)를 속히 거행하게 하고, 마침내 재궁(梓宮)을 받들어 장사(葬事) 지내는 일을 의식대로 모두 거행하면서 또 치계(馳啓)하고 끝내 이날 반우제(反虞祭)까지 마치니, 그 사실을 들은 이들이 공이 변(變)에 잘 대처한 것을 탄복하였다.

 

그 후 누차 사직을 요청하였으나, 상이 윤허하지 않고 매우 간절히 돈유(敦諭)하므로, 공이 그제야 나가서 일을 보았다. 상이 명하여 학행(學行) 있는 선비를 천거하게 하자, 공이 김장생(金長生), 신응구(申應榘), 이기설(李基卨)을 천거하여 분부에 응하였다.

 

일찍이 입대(入對)하여 치도(治道)를 논하기를, “위에서 능히 성심(誠心)을 열고 공도(公道)를 펴면, 아래에서는 능히 붕당(朋黨)을 깨뜨리고 염치(廉恥)를 면려하는 것이니, 오늘날의 급선무는 여기에 벗어날 것이 없습니다.” 하니, 상이 좋은 말이라고 칭찬하였다.

 

건주위(建州衛)의 오랑캐 추장(酋長)이 글을 보내 와서 통호(通好)하기를 청하자, 공이 의논하기를, “이 추장은 천조(天朝)로부터 작(爵)을 받았으므로, 우리 나라로서는 의리상 사적으로 사귈 수 없고, 또 반드시 후일의 걱정거리가 될 것이니, 청컨대 그 사자(使者)를 사절하소서.” 하였다.

 

임인년 봄에 이르러서는 시사(時事)가 크게 변하여 삼사(三司)에서 우계(牛溪) 성혼(成渾)에게 장차 추가로 죄줄 것을 논하자, 공이 ‘성혼은 유림(儒林)의 중한 명망을 입고 있으니 죄주어서는 안 된다’는 내용으로 차자를 초하였는데, 마침 어떤 사람이 권신(權臣)의 지시를 받아 상소하여 공을 공격하면서 공을 정상 철(鄭相澈)의 당(黨)이라고 하였으므로, 공이 마침내 인책하여 사직하고 차자는 결국 올리지 않았다. 공은 끝내 이 일로 상직(相職)을 해면하였다.

 

공이 이미 한가한 데에 나아가서는 집에만 들어앉아 빈객을 사절하고 경전(經傳) 및 염락(濂洛)의 제서(諸書)를 두루 읽으면서 과정(課程)을 매우 엄격히 하였다. 공은 타고난 성품이 산수(山水)를 좋아하여 젊은 시절에 중흥동(重興洞) 골짜기에서 많이 노닐었었는데, 이 때에 이르러서는 매양 좋은 때를 만나면 반드시 한두 자질(子姪)을 데리고 필마(匹馬)로 가서 노닐며 읊조리다가 밤을 지새고 돌아왔다. 선조가 본디 공을 중히 여겼으므로, 공이 비록 자리를 떠났으나 은례(恩禮)는 줄지 않았다.

 

갑진년 원일(元日)에 흰 무지개가 해를 관통한[白虹貫日] 변이 있었으므로, 공이 구언(求言)의 분부에 응하여 차자를 올려 잘못된 일을 자세히 논했는데, 여기에서 말하기를, “성심(誠心)을 전하는 것은 의당 간언(諫言)을 받아들이는 데로부터 시작해야 하고, 공평(公平)을 기하는 것은 의당 인재를 등용하는 데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하였으므로, 사람들이 그 말이 아주 적절함을 탄복하였다.

 

그 후 호종공신(扈從功臣)을 책록할 때에는 공이 원훈(元勳)이 되어 충근정량갈성효절협책호성공신(忠勤貞亮竭誠效節協策扈聖功臣)의 호가 내려졌다. 도적이 재신(宰臣) 유희서(柳熙緖)를 살해했는데, 그 도적을 잡지 못하여 포도대장(捕盜大將) 변양걸(邊良傑)이 그 옥사(獄事)를 끝까지 캐내어 다스리다가 폄적(貶謫)되었고, 유희서의 아들 또한 장류(杖流)되었으므로, 수상(首相)인 이공 덕형(李公德馨)이 상소하여 이 일을 논했다가 선조의 뜻에 거슬리어 마침내 파직되고 공이 이공 대신으로 영상에 복직되자, 공이 누차 사양하면서 말하기를, “변양걸이 폄적된 일에 대해서는 신의 마음도 실로 가슴아프게 여겼으나, 다만 미처 말을 하지 못했을 뿐입니다.

 

그래서 이덕형은 곧 이미 말을 한 신(臣 이항복 자신을 가리킴)이요 신은 곧 미처 말하지 못한 이덕형일 뿐이니, 죄는 아무리 드러나지 않았더라도 어찌 차마 심정을 숨길 수 있겠습니까.” 하고, 사직장을 무려 여덟 번이나 올려서야 윤허하였다.

 

병오년에는 대마도(對馬島) 오랑캐 의지(義智)가 사자를 보내어 강화를 요청하였으므로, 유영경(柳永慶)이 영상으로서 건의하여 임진년에 우리 능(陵)을 침범했던 적을 잡아 보내게 하자, 의지가 거짓으로 두 사수(死囚)를 취하여 바쳐 왔는데, 모두 나이가 어려서 임진년 당시에는 7, 8세 아이에 불과했던 자들이었다.

 

그런데도 유영경은 자기의 공으로 삼고자 하여 장차 종묘(宗廟)에 헌첩(獻捷)하고 그들을 사면하려 하므로, 공이 그들을 경상(境上)에서 죽이어 왜사(倭使)에게 보이기를 청하였으나, 조정에서 끝내 유영경의 의논을 따랐다.

 

그리고 김계(金稽)란 자가 상소하여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을 추존(追尊)하기를 청하였는데, 대체로 유영경이 그를 유도한 것이었다. 상이 그 일을 하문(下問)하자, 빌붙기를 희망하는 무리들이 서로 다투어 그 일을 억지로 합리화시키었다.

 

그러자 공이 의논하기를, “이 일을 윗사람으로서 행한 사람은 한(漢) 나라의 애제(哀帝), 안제(安帝), 환제(桓帝), 영제(靈帝)이고, 아랫사람으로서 이 일을 그르게 여긴 사람은 송(宋) 나라의 주자(周子), 장자(張子), 정자(程子), 주자(朱子)였습니다.” 하니, 뭇 사람의 의논이 이에 정해져서 그 일이 중지되었다.

 

처음에 선조께 적사(適嗣)가 없어 광해(光海)가 세자(世子)로 있었는데, 오랜 동안에 실덕(失德)한 것이 많았다. 그런데 마침 선조가 오래도록 앓아누워 생명이 위독하게 되자, 남의 불행을 즐기는 자들이 거짓말을 선동 고취함으로써 정인홍(鄭仁弘)의 상소가 들어가니, 인심이 의혹하여 중외(中外)가 몹시 당황하였다.

 

그 후 얼마 안 되어 선조가 승하하자, 그 이튿날에 광해가 왕위(王位)를 승습하였다. 이때 임해군(臨海君)은 나이가 가장 많고 사는 집이 대궐과 가까웠으며, 본디 과실이 많은데다 집에는 무뢰한 병졸들을 모아 두고 있었으므로, 광해가 오랫동안 그를 의심하여 꺼려 온 나머지, 명하여 군대를 모아서 대궐을 호위하고 궁문(宮門)을 낮에도 열지 못하게 한 지가 한 달을 넘었다.

 

그러자 한 언관(言官)이 공에게 찾아와서 임해군의 일을 의논하므로, 공이 말하기를, “왕자(王子)가 상차(喪次)에 있어 배반한 정상이 드러나지 않았는데, 무슨 근거로 처벌을 한단 말인가.” 하였다.

 

그런데 수일 후에 삼사(三司)가 임해군이 모반(謀反)을 했다고 밀계(密啓)하여 그를 교동(喬桐)에 유찬(流竄)하므로, 공이 다른 일이 있을까 미리 걱정하여 동기간(同氣間)에 서로 온전히 편안하게 해야 하는 의리를 극력 진술하였는데, 수상(首相) 이공 원익(李公元翼)과 대사헌(大司憲) 정공 구(鄭公逑)의 논의도 공의 말과 합치하였다.

 

그러자 논자(論者)들이 역적을 비호한다고 시끄럽게 떠들어 댐으로써 마침내 조신(朝臣)들의 화(禍)의 계제가 되었다. 인산(因山)의 자리를 이미 정한 뒤에는 기자헌(奇自獻)이 그 자리에 대해서 좌도(左道)를 끼고 이의(異議)를 선동하자, 공이 차자를 올려 그의 망녕됨을 변론함으로써 마침내 처음에 잡은 자리를 그대로 쓰게 되었다.

 

그리고 창원 부사(昌原府使) 정경세(鄭經世)가 상소하여 외척(外戚)이 정권을 잡은 데 대한 잘못을 논하니, 광해가 말이 선조(先朝)에 관계된다 하여 그를 장차 하옥(下獄)시키려 하므로, 공이 재차 계(啓)를 올려 극력 구함으로써 정경세가 형벌을 면하고 관직만 삭탈되었다.

 

4월에는 좌의정 겸 도체찰사에 임명되어 총호사(摠護使)가 되었다. 목릉(穆陵)의 일을 마치고 나서는 삼사(三司)가 임해군을 처벌하기를 청하였으나, 공은 전일의 의논을 변치 않고 굳게 주장하니, 정인홍이 차자를 올려 동기간에 은의(恩義)를 온전히 할 것을 주장한 사람들을 공격하였다. 그러자 공이 두 차례 차자를 올려 사직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신해년 여름에는 정인홍이 차자를 올려 문원공(文元公) 이언적(李彦迪)과 문순공(文純公) 이황(李滉) 두 선정(先正)을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하기에 합당치 않다고 헐뜯었으므로, 태학(太學)의 제생(諸生)들이 글을 올려 시비를 변명하고 정인홍을 유적(儒籍)에서 삭제하였다.

 

지평(持平) 박여량(朴汝樑)은 정인홍의 무리였으므로, 그 사실을 고자질하여 아뢰자, 광해가 노하여 그 의논을 주창한 사람을 조사해서 금고(禁錮)시키게 하니, 제생들이 명을 듣고는 일제히 성균관(成均館)을 비우고 떠나 버렸다.

 

그러자 공이 두 차례나 차자를 올려 ‘정인홍이 사심을 품고 선현(先賢)을 헐뜯었으니, 다사(多士)들이 이를 다 같이 분개(憤慨)한 데 대해 죄를 주어서는 안 된다’는 뜻을 극력 말하니, 공을 이어서 또 말한 이가 더욱 많아졌으므로, 광해가 마지못해 그 말을 따랐다.

 

이에 앞서 거인(擧人) 임숙영(任叔英)이 대책문(對策文)에서 궁금(宮禁)을 기척(譏斥)하였던바, 고관(考官)이 이 글을 취하여 이미 방중(榜中)에 이름을 올렸는데, 광해가 명하여 그를 삭제하게 하므로, 공이 간하였으나 듣지 않았었다.

 

그런데 이때에 이르러 공이 입대하여 두 선정에 대해서는 이의할 만한 것이 없고 임숙영의 과방(科榜)은 삭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죽 진술하니, 광해의 뜻이 풀리어 다시 명하여 임숙영의 과방을 회복시키게 하였다.

 

공이 이미 정인홍에게 거슬림이 많아서 정인홍이 기필코 공을 중상하려 하여, 그의 무리로서 소장(疏章)을 올려 공을 헐뜯은 자가 전후로 수백 인이나 되었으므로, 공이 매우 강력하게 떠날 것을 요구하였다.

 

공이 체찰부(體察府)를 개설함으로부터 광해 또한 공의 덕망을 존중하여 자못 공을 믿고 위임해서 무릇 서북 지방에 차견(差遣)할 수령(守令)들을 모두 공에게 맡겼는데, 공은 매양 사양하였으나 윤허를 얻지 못했으므로, 군소배(群小輩)들이 이 때문에 공을 더욱 심하게 해코지하였다.

 

정인홍이 또 사람을 사주해서 상소하여 ‘체찰부의 병권(兵權)이 너무 중하니 혁파해야 한다’고 말하였으므로, 공이 또 매우 다급하고 절박한 말로 해면을 요청하였는데, 사직장을 무려 20차례나 올렸지만, 상이 그래도 윤허하지 않았다.

 

임자년에는 김직재(金直哉)의 옥사(獄事)가 일어나서 시인(詩人) 권필(權韠)이 시어(詩語)로 인해서 체포되어 고신(考訊)을 받게 되자, 공이 자리를 옮겨 엎드려 울면서 간하였으나 광해가 듣지 않아 권필이 끝내 장사(杖死)하였으므로, 공이 통한(痛恨)을 금치 못하였다.

 

그리고 술사(術士) 이의신(李懿信)이 요망한 말을 주창하여 교하(交河)로 천도(遷都)하기를 청하자, 광해가 그 말에 퍽 미혹되므로, 공이 그 말을 통렬히 배척하였다.

 

계축년에는 위성(衛聖), 익사(翼社), 형난(亨難)의 세 가지 공훈에 책록되었으나, 이는 공의 뜻이 아니었다. 그 후 얼마 안 되어 사수(死囚) 박응서(朴應犀)가 간인(奸人)의 지시를 받아 거짓 고변(告變)을 함으로써 연흥부원군(延興府院君) 김제남(金悌男)은 온 가족이 죽임을 당했는데, 공은 하찮은 누(累)로 인하여 성 밖에 나가 대죄(待罪)하다가 광해의 부름을 받고 국청(鞫廳)에 나아갔다.

 

이때 영창대군(永昌大君)은 나이 겨우 8세였는데, 삼사(三司)가 그를 역적의 괴수로 지목하여 서로 소장을 올려 죽이기를 청하였다. 그러나 정부(政府)만이 유독 정청(廷請)을 하려 하지 않으므로, 군소배들이 끝없이 기세를 부리어 화(禍)를 장차 예측할 수 없었다.

 

그런데 두 재신(宰臣)이 밤에 공을 찾아와서 화복(禍福)으로 공을 회유하고 협박하였으나, 공이 조금도 동요하지 않으므로, 자질(子姪)들이 눈물을 흘리면서 온 가족을 위해 달라고 애원하였다.

 

그러자 공이 의연하게 수염을 뽐내면서 이르기를, “나는 선조(先朝)의 두터운 은혜를 입어 재상의 지위에 이르렀고, 지금은 늙어서 곧 죽을 목숨인데, 어찌 차마 뜻을 굽히고 임금을 저버려서 스스로 명의(名義)를 무너뜨릴 수 있겠느냐. 나의 뜻은 이미 결정되었으니, 다시 말하지 말라.” 하였다.

 

양사(兩司)가 날로 상신(相臣)들을 침범하였는데, 공만이 유독 앞서의 의논을 굳게 주장하였다. 그런데 장령(掌令) 정조(鄭造), 윤인(尹訒) 등이 광해의 뜻에 영합하여 ‘대비(大妃)가 모도(母道)를 잃었으니, 의당 폐해야 한다’고 주창하자, 공이 이상 덕형(李相德馨)에게 이르기를, “우리들이 죽을 곳을 얻었네.

 

이 무리들이 사람을 씹을 적에 걸핏하면 역적을 토벌한다는 뜻으로 말을 하고, 또 《춘추(春秋)》를 속여 인용하여 상청(上聽)을 미혹시키고 있으니, 대체로 신하로서 임금의 어머니를 폐하는 것이 참으로 역적이 아니겠는가.

 

또 자식은 어머니를 원수로 삼을 수 없다는 것이 《춘추》의 대의(大義)가 아니던가. 내가 의당 경(經)을 인용하여 의리를 의거해서 사설(邪說)을 통렬히 깨뜨리겠네.” 하니, 이상이 기뻐하며 말하기를, “공이 시험 삼아 초고(草稿)를 작성해 보게.” 하였다.

 

이날 공은 집에 돌아와 조의(朝衣)도 벗지 않은 채 외당(外堂)에 앉아서 눈을 똑바로 뜨고 말없이 있으므로, 자제(子弟)들이 들어가서 그 까닭을 물으니, 공이 길게 한숨지으며 말하기를, “삼강(三綱)이 없어졌으니, 나라 꼴이 될 수 있겠느냐. 나는 의리상 이 상황을 차마 좌시(坐視)할 수 없으니, 의당 목숨을 걸고 할 말을 다하여 죽은 시체로 들것에 실려 돌아오기를 기할 뿐이다.” 하였다.

 

대사헌(大司憲) 최유원(崔有源)이 본디 공을 존경하였으므로, 공이 의리로써 그를 면려하자, 최유원이 공의 말을 듣고 마침내 정조, 윤인을 배척함으로써 정조, 윤인의 말이 행해지지 못했으니, 이는 공의 힘이었다.

 

공이 소장(疏章)을 초하여 이상에게 보이니, 이상이 좋다고 칭찬하였다. 그런데 마침 공이 정협(鄭浹)을 잘못 천거한 일로 탄핵을 받고 떠나게 되어 소장을 끝내 올리지 못하였다.

 

공은 탄핵을 당한 뒤에 한 동복(僮僕)에게 말고삐를 잡히고 동곽(東郭)을 나가서 강가에 우거(寓居)하였다. 가을에 이르러서는 노원(蘆原)의 촌사(村舍)로 옮겨 우거했는데, 오두막집에 쑥대로 문을 엮어 단데다 거친 밥도 넉넉지 못했으나, 아주 태연하게 지냈다.

 

그리고 오직 마음을 조용히 가라앉혀 글을 읽고, 한가할 때면 지팡이 짚고 짚신을 신은 채로 산계(山溪) 사이에 배회하면서 스스로 마음을 위로하였다. 한번은 공이 미복(微服) 차림으로 나귀를 타고 청평산(淸平山)에 가서 노닐었는데, 만난 사람들이 그가 공인 줄을 알지 못했다.

 

공의 장남 성남(星男)이 역적놈의 무함을 입어 옥에 갇히자, 가인(家人)이 뇌물을 주고 석방시키려 하므로, 공이 그리 하지 못하게 통렬히 금하였다. 그러자 정인홍이 더욱 몹시 공을 꺼리어 양사(兩司)를 충동질해서 삭출(削黜)을 청하도록 했는데, 광해가 그 소장(疏章)에 관한 일을 잠재워 버렸다.

 

병진년에는 망우리(忘憂里)에 조그마한 집을 짓고 노원에서 그곳으로 이사하여 살았다. 그 명년 겨울에 이르러서는 폐모(廢母)의 논의가 또 일어나서 이이첨(李爾瞻), 허균(許筠) 등이 무뢰배를 사주하여 상소를 하게 했던바, 자전(慈殿)의 죄상을 나열함에 있어 말이 대단히 패역(悖逆)스러웠는데, 광해가 그 소장을 내리어 백관(百官)으로 하여금 의논하게 하였다.

 

이때 공은 이미 중풍(中風)을 앓고 있었는데, 갑자기 천둥 소리가 크게 울리자, 공이 경악하여 이르기를, “하늘이 경계하여 고하는 것이다.” 하였다. 이윽고 추부랑(樞府郞)이 와서 수의(收議)를 청하므로, 공이 부축을 받으며 일어나서 붓을 휘둘러 의(議)를 초하였는데, 그 대략은 다음과 같다.

 

“누가 전하(殿下)를 위하여 이 계책을 냈는지 모르겠습니다. 우순(虞舜)은 불행하여 완악한 아비와 어리석은 어미가 항상 우순을 죽이기 위해 우물을 파게 하고 창고를 수리하게 하였으니, 위태롭기가 또한 극에 달하였습니다.

 

그러나 우순은 부르짖어 울고 원망하면서도 사모하여 부모의 옳지 못한 점을 보지 않았습니다. 참으로 아비는 비록 인자하지 않을지라도 자식은 효도하지 않아서는 안 되기 때문에 《춘추》의 의리가 ‘자식은 어머니를 원수로 삼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더구나 《예기(禮記)》에 의하면 “공급(孔伋)의 아내가 된 사람은 분명히 공백(孔白)의 어머니이다.”라고 하였으니, 성효(誠孝)가 중한 곳에 어찌 간격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이제 효(孝)로써 국가를 다스리는 때를 당하여 온 나라 안에 장차 점차로 교화될 희망이 있는데, 이런 말이 어찌하여 전하의 귀에 들어갔단 말입니까.

 

지금에 하실 도리로 말씀드리자면, 우순의 덕을 본받아서 능히 효로써 화해시키고 차차로 다스려서 노염을 돌려 인자함으로 변화시키시는 것이 어리석은 신의 바람입니다.” 이 의논이 이르자, 조야(朝野)에서 그 소식을 들은 이들이 공을 위하여 두려운 마음에 머리털이 곤두섰고, 혹은 눈물을 흘리는 이도 있었으며, 저리(邸吏)는 공의 의논을 기록할 적에 심지어 손이 떨려서 종이에 붓을 댈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마침내 삼사(三司)가 공을 먼 변방에 위리안치(圍籬安置)하기를 청하였는데, 오랜 뒤에 다만 먼 데로 유찬하라고 명하였다. 금부(禁府)가 배소(配所)를 정하면서 모두 여섯 번이나 지역을 바꾸다가 비로소 북청(北靑)으로 배소를 정하였다.

 

무오년 정월에 비로소 유배 길에 올랐는데, 공은 반드시 돌아오지 못할 줄을 스스로 헤아리고 가인(家人)에게 명하여 의금(衣衾)과 염구(斂具)를 다 챙기게 해서 스스로 휴대하였다. 또 여러 자식들에게 경계하여 이르기를, “나라를 잘못 섬겨 이런 죄벌을 얻었으니, 내가 죽거든 조의(朝衣)로 염(斂)을 하지 말고 심의(深衣)와 대대(大帶)만을 사용하라.” 하였다.

 

배소에 이르러서는 묵은 중풍이 다시 발작하여 증세가 더 중해졌다. 5월에 이르러 공이 꿈을 꾸니, 선조(宣祖)가 정전(正殿)에 나와 있고 유상 성룡(柳相成龍), 김상 명원(金相命元), 이상 덕형(李相德馨)이 함께 시좌(侍坐)했는데, 이상 덕형이 왕명으로 공을 부르기를 청하였다.

 

공은 그 꿈을 깨고 나서 탄식하며 이르기를, “내가 세상에 오래 있지 못하겠구나.” 하였는데, 며칠 후에 병이 마침내 위독해져서 이달 13일에 작고하니, 향년이 63세였다.

 

공이 작고하자, 부음을 듣고 와서 곡(哭)하는 인근 고을의 사민(士民)들의 숫자를 기억할 수 없을 정도였다. 함흥(咸興)의 전 정랑(正郞) 한인록(韓仁祿) 등, 정평(定平)의 사인(士人) 장응시(張應時) 등, 영흥(永興)의 사인 주사룡(朱士龍) 등, 안변(安邊)의 사인 장응정(張應井) 등이 각각 제문(祭文)을 가지고 치제(致祭)하였고, 영남(嶺南)의 사인 정심(鄭杺) 등은 천리 길에 사람을 보내어 치부(致賻)하였는데, 이들은 모두 공이 평소에 알지 못했던 사람들이다.

 

공의 여러 아들이 상여(喪輿)를 받들고 돌아와서 이해 8월 4일에 포천(抱川)의 선영(先塋)에 장사 지냈다. 북청 및 포천의 인사(人士)들이 심지어는 공을 위해 재목을 모아서 사당을 건립하기에 이르자, 국가에서 이를 금하였으나 막을 수가 없었으니, 인심(人心) 속에 있는 공의(公議)를 속일 수 있겠는가.

 

공은 타고난 자질이 매우 고상하고 탁 트여서 큰 도량이 있었다. 신장(身長)은 보통 사람을 넘지 못했으나, 의모(儀貌)가 걸출하고 풍채(風采)가 엄정하였다. 청백(淸白)하고 효우(孝友)함은 대체로 타고난 천성이었고, 화목을 도타이 하여 종족을 단결시키는 데는 고인(古人)의 가법(家法)이 있었다.

 

소싯적에는 성품이 호탕하여 일찍이 한 관기(官妓)를 좋아했는데, 갑자기 ‘정이 치우친 데가 있으면 반드시 신심(身心)에 해가 된다’는 것을 스스로 생각하여, 마침내 그를 통렬히 끊어 버리고 그 후로는 성색(聲色)을 전혀 가까이하지 않았다.

 

임진년의 변란 때에는 말고삐를 잡고 임금을 호종하여 노숙(露宿)을 해 가면서 이리저리 주선하고 앞뒤에서 보좌하여 지혜와 힘을 다하였으니, 중흥(中興)의 계책이 대체로 공에게서 나온 것이 대부분이었다.

 

공이 39년 동안 벼슬을 하는 가운데 이조 판서를 한 번, 병조 판서를 다섯 번, 의정을 네 번, 원수(元帥)를 한 번, 체찰사를 두 번 지냈는데, 출장 입상(出將入相)한 20여 년 동안에 규획(規畫)하고 건백(建白)한 일이 사람들의 이목(耳目)에 혁혁히 남아 있는 것들을 한두 가지로 헤아릴 수가 없다.

 

공훈은 사직(社稷)을 보존한 데에 있고, 은택은 생민(生民)에게 미쳤으며, 청백하기는 빙옥(氷玉)과 같았고, 존중되기는 교악(喬岳)과 같았으니, 국가(國家)의 주석(柱石)이요 사류(士流)의 관면(冠冕)이었다. 그리고 정사년의 한 상소(上疏)에 이르러서는 윤기(倫紀)를 부지하고 정기(正氣)를 수립한 것이 우뚝히 천지간에 드높아서, 비록 일월(日月)과 빛을 겨루더라도 될 것이다.

 

공이 처음 벼슬할 적에 일찍이 율곡(栗谷) 이 문성공(李文成公)을 찾아가 배알하니, 문성공이 공의 위인이 국기(國器)임을 알아보고 이르기를, “나는 돌아갈 뜻이 있으니, 자네는 석담(石潭)으로 나를 찾아오게나.” 하였다.

 

이때 문성공이 막 이조 판서가 되어 공을 등용하려고 했는데, 공이 형적(形迹)을 혐의롭게 여겨 문성공을 자주 찾아가 묻고 배울 수가 없었다. 그 후 얼마 안 되어 문성공이 작고하였으므로, 공은 종신토록 이를 한스럽게 여겼다.

 

공은 늦게서야 학문을 좋아하여 잗달게 장구(章句)의 규칙에 얽매이지 않고 홀로 본원(本原)을 터득하여 일찍이 함양명(涵養銘)을 저술했는데, 사의(詞意)가 뛰어나서 자득(自得)한 의취가 있었다. 또 치욕(恥辱), 서상(書床), 양야(養夜), 계주(戒晝), 경석(警夕) 등 다섯 편의 잠(箴)을 저술하여 스스로 성찰(省察)하였다.

 

문장(文章)을 짓는 데는 뛰어난 기운이 있어 호방 초탈하고 웅건 민첩하여 본래의 법식을 따르지 않았고, 필적(筆蹟)은 호탕하여 법이 있었으며, 화법(畵法)도 약간 알아서 묘치(妙致)가 있었으나 이윽고 그만두고 다시 하지 않았다.

 

공이 저술한 시문집(詩文集) 약간권(若干卷)이 있다. 조천창수록(朝天唱酬錄) 1권, 주의(奏議) 2권, 계사(啓辭) 2권, 예경(禮經)의 요어(要語)들을 분류 편찬한 《사례훈몽(四禮訓蒙)》이란 책 약간권, 좌씨 내외전(左氏內外傳)을 참합(參合)하여 편찬한 《노사영언(魯史零言)》이란 책 15권이 집에 소장되어 있다.

 

공이 작고하자 광해 또한 놀라고 애도하여 공의 관작을 명하여 복구시켰고, 금상(今上)이 즉위함에 미쳐서는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치제(致祭)하였다. 아, 하늘이 만일 공에게 수명을 더 연장해 주어 오늘날을 만나게 하였다면 중흥(中興)을 크게 보좌한 공렬(功烈)을 어찌 한량할 수 있겠는가.

 

공의 별호는 필운(弼雲)이고, 만년에는 백사(白沙)라 칭하였으며, 이미 견책을 입고 야외(野外)에 있을 때에는 또 동강(東岡)이라 칭하였다. 공의 배(配)는 정경부인(貞敬夫人) 권씨(權氏)이다. 아들 2인은 성남(星男), 정남(井男)이고, 측실(側室)에서 낳은 아들은 규남(奎男), 기남(箕男)이다.

 

그윽이 생각건대, 공의 훌륭한 덕업(德業)과 상세한 이력(履歷)은 국사(國史)에 기재되어 있고 수많은 사람들의 입에 전해지는 바이니, 헛된 말로 찬양할 바가 아니므로, 삼가 그 드러난 것만을 뽑아서 이상과 같이 논찬(論撰)하여 말을 아는 군자(君子)의 채택(採擇)을 기다리는 바이다.

 

분충찬모입기정사공신(奮忠贊謨立紀靖社功臣) 자헌대부(資憲大夫) 신풍군(新豊君) 겸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지성균관사 동지경연춘추관사 세자우부빈객(兼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知成均館事同知經筵春秋館事世子右副賓客) 장유(張維)는 삼가 행장을 쓴다.

 

[주D-001]평번(平反) : 원죄(寃罪)를 다시 조사하여 무죄(無罪)나 감형(減刑)으로 처리하는 것을 말한다.

 

임정기 (역) ┃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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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白沙集附錄]

 

推忠奮義平難忠勤貞亮竭誠效節協策扈聖功臣,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領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世子師,鰲城府院君李公行狀。/張維 撰

 

公諱某。字某。其先慶州人。遠祖文忠公齊賢。用文章德業。爲高麗名相。世稱益齋先生。考曰夢亮。事中,仁,明三宗。官至參贊。娶崔夫人。以嘉靖丙辰十月庚子生公。生而不乳者二日。不啼者三日。家人憂之。參贊公使瞽史筮之。賀曰。無憂也。是當貴極人爵。稍長。岐嶷俊偉。有識度逈異凡兒。參贊公奇之曰。此兒必大吾門。八歲。始授書。聰悟絶人。參贊公命以劍琴作駢句。公應聲曰。劍有丈夫氣。琴藏千古音。聞者知其將大成。九歲而孤。哀毁如成人。食素終三年。十二三時。已負氣好義。有疏財濟物之志。嘗著新襦。隣兒有衣弊者。見而欲之。公卽解以與之。又嘗脫所著屨。以與人跣而歸。崔夫人欲試其意。陽怒呵之。公對曰。人有欲者。不忍不與。崔夫人歎曰。此異事也。甫成童。雄健喜勇。善少年之戲。角抵蹴踘。崔夫人聞而切責。公痛折節力學。十六而崔夫人卒。居喪幾滅性。服除。遊學宫。學益成。聲譽藹蔚。二十五。擢庚辰文科。權知承文院副正字。明年。選入藝文館爲檢閱。宣祖將講通鑑綱目。命大學士預簡材臣可備顧問者。栗谷李文成公。擧五人以進。公實與焉。賜內藏綱目一帙。且命勿煩以吏文漢語試射等諸冗藝。尋賜長暇讀書。選入玉堂爲正字。甲申。陞著作。論大司諫李潑朋比當遞。以此大忤當路。遂引疾三吿。宣祖下敎曰。李某不可離玉堂。其令斷來章。尋陞博士。乙酉春。移授藝文館奉敎。序陞成均館典籍。拜司諫院正言。以薦拜吏曹佐郞,知製敎。銓郞。世號熱官。而公處之蕭然如寒士。有二朝士在館職。陰䂓入銓。賓客多爲游說。公素惡其爲人。邈然如不聞也者。尋遞爲修撰。丙戌。又拜正言。丁亥。陞校理。戊子。復入吏曹爲正郞。己丑。遞爲禮曹正郞。鄭汝立謀反事發。上親臨鞫囚。公以問事郞入侍。明敏稱旨。宣祖每名呼公曰。使李某傳說。同僚拱手不敢望。每大臣議讞。公周旋其間。務從平反。所全活甚多。庚寅。陞應敎。歷議政府檢詳,舍人。陞典翰。嘗侍講筵。宣祖特召公前。道問事時事。而亟稱高才高才。拜直提學。未幾。陞通政大夫承政院同副承旨。庭試文臣。公居魁。賜厩焉。辛卯春。遞爲户曹參議。精核要會。節縮冗費。纔閱月。庫藏充牣。判書尹公斗壽大器之。歎曰。文翰士乃能辦錢穀。眞通才也。策治逆勳。賜公推忠奮義平難功臣之號。會士禍起。鄭相公澈爲禍首。三司文致。奬詆以不道以上。鄭公俟譴江上。時禍機甚急。門生親奮。怵迫不敢問。公獨歷訪。從容移日。人皆爲公危之。未幾。公爲承旨。臺諫請以鄭澈罪案。榜示朝堂。劾公緩於奉行。罷職。尋復拜承旨。時名流之忤時議者。一切目以黨人。次第貶謫殆盡。有臺官挾前憾。將寘公竄黜中。大司憲李公元翼力救之。公賴以免。序進都承旨。壬辰四月。倭奴大擧入寇。申砬敗報至。中外震駭。上已定西狩。策命左相柳成龍爲留都大將。公謂同僚曰。左相留此無能爲。今將赴愬上國辭命。必須其手。請改命。上許之。賊報日急。公自斷殉國。每公退處外舍闔內門。禁無以家事關我。與兄姊相訣。側室泣請一面。亦不得。是月晦。大駕將發。百寮未集。天雨夜黑。中殿獨與女侍十數人。步出仁和門。公執燭前導。車駕夜渡臨津。明日。上召從行諸宰。以鞭叩地。問曰。事至此。策將安出。諸宰未對。公首言我國兵力。不足以禦賊。唯有西赴乞援天朝耳。上曰善。到松都。特陞吏曹參判鼇城君。命護二王子。先詣平壤。旣而。車駕亦至。下敎曰。李某久在近侍。志慮貞亮。宜陞擢委以重任。尋特授刑曹判書兼五衛都摠管。拜大司憲。與李公德馨入對。請亟奏請請援兵。大臣初與公異。公力爭。議乃定。分遣三調度管軍興。卒成再造功者。公之謀也。拜兵曹判書。兼弘文館提學,知經筵,春秋館,同知成均館事,世子左副賓客。臨津不守。賊進逼浿江。李公德馨請乗船邀見賊將。玄蘇,調信。以圖緩兵。卽不從。將取二賊頭。公謂二賊甚微。殺之不足以損賊。徒先負不義名。非計也。事遂已。上集諸從臣議所幸。或言咸興僻遠。多兵糧可守。公與李公德馨屢爭。以爲咸興隔遠上國。不可幸。宜幸寧邊。上從之。公與李公各請自赴遼東求救。上不能決。有言本兵不可遠去者。上然其言。命李公往。公解驂與之。洒涕而別。賊兵漸進。官軍相繼潰。上夜召諸臣議曰。事急矣。予當內附。第父子同渡鴨江。則國無主矣。世子可留奉廟社主。諸卿誰肯從予西渡者。群臣未及應。公泣對曰。臣身健。無父母。願以死從。殿下駕次博川。急報至。上命促駕發。夜已二鼓矣。天雨路澁。侍衛者不滿數十人。公謂官屬曰。前衞甚疏。吾屬不可在駕後。遂策馬先導。駕到義州。城中居民。皆驚散。公請修葺廨舍。以示久駐意。吏民果稍稍還集。公又建言湖嶺三路。不知行在所駐。宜急遣使宣諭。令起兵勤王。上從其言。遣尹承勳。由海路往湖南。自是朝命始通。諸道勤王之師。稍稍起矣。巡察使李元翼。慮禁旅單弱。請分戰士入衞。公却之曰。戰卒用以破賊。請別抄民丁補禁衞。先是。遼左訛言。謂我導倭入寇。兵部尙書石星。遣指揮黃應暘來覘。應暘初頗疑我。請見倭書。公在都日。已慮及此。自齎辛卯倭酋嫚書以來。及是以示應暘。應暘疑大釋。至拊膺大慟。歸具以實報。東援之議遂決。天將祖承訓,史儒將兵七千先至。公曰。祖將躁而無謀。軍必敗。進兵平壤。果大敗。儒死。承訓僅以身免歸。反誣我助倭寇。公請遣大臣。赴廣寧辨誣。又請遣使上奏。催發大兵。十二月。提督李如松率五萬兵東渡。公見行師有紀律。白上曰。師必有功。但幕下有鄭同知,趙知縣二人用事。異日沮大計者。必是夫也。癸巳正月。提督進擊平壤賊克之。追賊至碧蹄。遇覆不利。提督氣挫。遂爲和議所撓。鄭,趙實主其謀。公言果驗矣。京城賊旣退。公力請回鑾。十月。車駕還京。十一月。行人司憲奉勅來。公爲遠接使往迎之。會皇勅令王世子同戶兵官前往全,慶視師。以公長司馬。遂解儐任。陪世子以行。甲午春。湖西賊宋儒眞反分朝。諸臣欲奉世子還朝以避賊。公上箚駮其非計。世子從之。賊亦尋平。世子在洪州。欲移駐保寧之水營。使公往審之。公還詭對以爲不可駐。或疑之。公曰。永保亭勝槪冠湖中。恐少主居之。啓異日侈蕩心。識者服其遠識。乙未。拜吏曹判書。兼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知義禁府事。丙申皇朝遣使冊封日本酋。副使楊邦亨請得公爲接伴使。上許之。公旣辭朝。乞解東詮文衡。拜議政府右參贊。楊使敬重公甚至。常曰。東方有此人物。何可以外國輕之。旣入倭營。正使李宗誠謬聞賊將加無道。脫身夜跳。遠近大震。楊使急令公馳白于朝。公疾馳二晝夜。到京則李使已至。賊亦終不動焉。初公見李使。謂人曰。綺紈子。徒事文墨。必辱命。已而果然。人謂公知人。冬。楊使還。公送至境。丁酉。復判兵曹。皇朝再擧征倭。楊御史鎬經理軍務。檄召户,兵,工三曹官。來候境上。公往迓于九連城。應對悉中機宜。以病遞。尋復長西銓。公自壬辰來。凡五判兵曹。屬大賊充斥。天兵水陸輳集。凡事關軍旅者。靡不歸之本兵。公隨宜措處。沛然有餘地。恒蓄羨布萬匹。以備急時之用。楊經略服公才猷。每遇事之難者。必曰。須李尙書李尙書。戊戌秋。皇朝贊畫丁應泰誣劾楊經略。國家爲經略上奏保留。應泰因此嗛我國切齒。上本構誣。詞極憯深。宣祖震驚。將遣大臣陳辨。意在領相柳成龍。柳公不以時請行。宣祖怒。柳公以劾去。遂拜公議政府右議政。進爵府院君。爲陳奏使。公再上劄力辭。願假銜充使。上曰。欲求辨誣而先欺君可乎。公不得已拜命。兼程062_464b赴都。旣進奏。遍詣閣部。呈文痛辨。閣部諸公。旣敬公儀表。又見文辭明剴。益稱歎。競以茶酒延款曰。國恥自雪。無憂也。天子遂命革應泰職。因降勅慰諭。明年。公竣事還。宣祖大悅。特賜田僮。論者以應泰故歸罪接伴使白惟咸下獄。三省會鞫。公爲委官上讞。白其冤狀。宣祖原之。朝議攻柳相益力。以甲午主和故。公上章自劾。以爲曾贊和議。不敢倖免。遂引疾免。久之。宣祖敎曰。與人同事。終乃反覆者。李某之罪人也。庚子。拜都體察使兼都元帥。宣撫湖嶺諸路。請寬湖南力役。又上安民防海十六策。上多用其說。南土順賴。夏。拜領議政。召還。㦤仁王后上昇。公從喪詣山陵。宮人失火。延燒靈幄殿。變出倉卒。人皆惶惑失措。公從容指揮。救滅火已。招禮官使速行慰安祭。遂奉梓宮。襄事如儀。皆且行且馳啓。竟以是日反虞。聞者服公能處變也。屢乞釋負。上不許。敦諭甚切。公乃起視事。上命薦學行士。公以金長生,申應榘,李基卨。應旨。嘗入對論治道曰。上能開誠心布公道。下能破朋黨勵廉恥。今日急務。無出此者。上稱善。建州夷酋貽書請通好。公議曰。此酋受爵天朝。本國義無私交。且必爲後日憂。請謝絶其使。至壬寅春。時事大變。三司論成牛溪渾將追加之罪。公草劄以爲渾負儒林重名。不可罪。會有人承柄臣指。上疏擊公。謂公黨鄭相澈。公遂引吿。箚不果上。竟以是免相。旣就閑。杜門謝客。遍讀經傳及濂洛諸書。課程甚嚴。雅性喜山水。少日多遊中興洞壑。至是。每値佳辰。輒從一二子姪。匹馬往遊吟嘯。竟夕而還。宣祖素重公。雖去位。恩禮猶不衰。甲辰元日。白虹貫日。公應求言旨。上箚極論闕失。有曰推誠當自納諫始。秉公當自用人始。人服其剴切。策扈從功。公爲元勳。賜忠勤貞亮竭誠效節協策扈聖功臣之號。盜殺宰臣柳熙緒。賊不得。捕盜大將邊良傑。窮治其獄坐謫。熙緒子亦杖流。首相李公德馨疏論忤旨。遂罷相。公代李公復相。累辭有曰。良傑之貶。臣心實傷之。特未及言耳。德馨卽已言之臣。臣卽未言之德馨。罪雖未彰。何忍匿情。章八上乃許。丙午。對馬島夷義智遣使請和。柳永慶當國。建議使執送壬辰犯陵賊。義智詐取二死囚來獻。皆年稚。在壬辰未離髫齔者。永慶欲自功。將獻廟肆赦公。請戮之境上。以示倭使。朝廷竟用永慶議。有金稽者上疏。請追尊德興大院君。蓋永慶風之也。上下其事。希望之徒。爭相傅會。公議曰。此事在上行之者。哀,安,桓,靈。在下非之者。周,張,程,朱。群議乃定。事得寢。初宣祖無適嗣。光海在儲位。久多失德。會宣祖久寢疾傾危。樂禍者煽鼓躗言。而鄭仁弘之疏入矣。人心疑惑。中外遑遑。無何。宣祖昇遐。翌日。光海襲位。時臨海君年最長地逼。素多過失。家聚無賴蒼頭。光海積疑忌。命集兵衛闕。宮門晝不開者踰月。有言官詣公議。公曰。王子在喪次。反狀未著。何據置辟。居數日。三司密啓臨海謀不軌。流之喬桐。公預憂有他。力陳全安之義。首相李公元翼,都憲鄭公逑所論與公合。論者譁然。謂之護逆。遂爲縉神禍階。因山旣得卜。奇自獻挾左道鼓異議。公上箚辨其妄。遂從初卜。昌原府使鄭經世上疏。論外戚柄政之非。光海怒謂語涉先朝。將下之理。公再啓力救。經世得免。只削職。四月。拜左相兼都體察使。爲摠護使。穆陵旣畢。三司請誅臨海公。執前議不變。鄭仁弘上劄。攻主全恩者。公再上劄辭。不許。辛亥夏。仁弘上劄。詆文元,文純二先正不宜與文廟祀。大學諸生上書訟辨。削仁弘儒籍。持平朴汝樑。仁弘徒也。訐啓之。光海怒。令覈倡議者禁錮。諸生聞命。捲堂而去。公再上箚。極言仁弘挾私詆先賢。多士同憤不可罪。繼而言者益衆。光海強從之。先是。擧人任叔英對策。譏斥宮禁。考官取之。旣上名。光海命削之。公諫不從。至是入對。歷陳二先正無可議。任叔英不可削科。光海意解命復叔英科。公旣積忤仁弘。仁弘必欲中傷公。其徒投章毁公者。前後數十百人。公求去甚力。自公開體府。光海亦重公德望。頗委任公。凡西北差遣。悉以委公。公每辭不得命。群小用是惎公愈甚。仁弘又嗾人上疏。言體府兵權太重。宜罷。公又乞免。詞甚危迫。章凡二十。上猶不許。壬子。金直哉獄起。詩062_466a人權韠坐詩語逮繫。當考訊。公離席泣諫。光海不聽。韠竟杖死。公痛恨不已。術士李懿信倡妖說。請遷都交河。光海頗惑其說。公痛斥之。癸丑。策衞聖翼社亨難三勳。非公志也。無何。死囚朴應犀受奸人指上變。事延興府院君金悌男。闔門被誅。公以微累出郭待罪。光海宣召詣鞫廳。時永昌大君甫八歲。三司指爲逆魁。交章請誅之。政府獨不肯廷請。群小炰烋不已。禍且不測。有二宰臣夜造公。以禍福誘脅。公不爲動。子姪輩涕泣。言願爲百口地。公毅然奮髯曰。我受先朝厚恩。位台鼎。今老且死。豈忍撓志負君。自隳名義。吾志決矣。勿復言。兩司日侵相臣。公獨持前議。掌令鄭造,尹訒等希旨。倡言大妃失母道當廢。公謂李相德馨曰。吾屬得死所矣。此輩齮齕人。動以討逆爲辭。又誣引春秋。以惑上聽。夫臣而廢君之母。此非眞逆乎。子無讐母。非春秋大義乎。吾當引經據義。進一疏。痛破邪說。李相欣然曰。公試具草。是日。公歸第。不脫朝衣。坐外堂。瞠視不語。子弟入請。故公長吁曰。三綱滅矣。能爲國乎。我義不忍坐視。當捨死盡言。期舁尸歸耳。大司憲崔有源素敬公。公勖之以義。有源用公言。遂斥造,訒。造訒之說不得行。公之力也。公草疏示李相。李相稱善。會公以誤薦鄭浹遭劾去。疏不果上。公旣被劾。一僮控馬出東郭。僑居于江干。至秋移寓蘆原村舍。斗屋蓬戶。疏糲不給。處之晏如也。唯潛心讀書。暇則杖屨倘佯山溪間。以自遣。嘗微服跨驢。往遊淸平山。遇者不知其爲公也。長男星男。爲賊奴所誣繫獄。家人欲以賄免。公痛止之。仁弘忌公愈甚風。兩司請削黜。光海寢其章。丙辰。築小屋于忘憂里。自蘆原移居焉。至明年冬。廢母之議又起。爾瞻,筠等嗾無賴子投疏。罪狀慈殿。語絶悖逆。光海下其章。令百僚議。時公已感末疾。忽大雷震。公愕然曰。天其戒吿之矣。頃之。樞府郞來收議。公扶起奮筆草議。略曰。不審誰爲殿下畫此計者。虞舜不幸。頑父嚚母。常欲殺舜。浚井塗廪。危亦極矣。號泣怨慕。而不見其有不是處。誠以父雖不慈。子不可以不孝。故春秋之義。子無讎母之義。況爲伋也妻者。是爲白也母。誠孝之重。夫焉有間。今當以孝治國家。一邦之內。將有漸化之望。此言奚爲至於紸纊哉。爲今之道。體舜之德。克諧以孝。烝烝以乂。回怒爲慈。愚臣之望也。議至。朝野聞者。爲之髮竪。或有泣下者。邸吏錄公議。至手戰不能下筆。三司請絶邊圍籬安置。久之。只命遠竄。禁府議配所。凡六易地。始定配于北靑。戊午正月。始就途。公自料必不歸。命家人悉以衣衾斂具自隨。又戒諸子曰。事國無狀。獲此罪譴。我卽死。無以朝衣斂。只用深衣大帶。旣到配。奮風復發寢劇。至五月。公夢宣祖臨軒。柳相成龍,金相命元,李相德馨。竝侍李相。請宣召公。公旣寤。歎曰。吾其不久於世乎。居數日。疾遂革。是月十三日卒。得年六十三。隣邑士民聞訃會哭者。不記其數。咸興前正郞韓仁祿等。定平士人張應時等。永興士人朱士龍等。安邊士人張應井等。各操文致祭。嶺南士人鄭杺等。千里伻人致賻。皆公素未嘗識者也。諸孤奉喪歸。用是歲八月四日。窆公于抱川先兆。北靑及抱川人士。至爲公鳩材建祠。國家禁之而不能止。公議之在人心。其可誣哉。公天資甚高。軒豁有大度。身長不踰中人。而儀貌魁偉。風神凝遠。其淸白孝友。蓋得之天性。敦睦收族。有古人家法。少時豪爽。嘗悅一官妓。忽自念情有所偏。必害于身心。遂痛絶之。自後絶不近聲色。壬辰之變。執靮茇舍。周旋先後。竭知盡瘁。中興謀猷。大抵出於公者居多。立朝三十九年。爲冢宰者一。司馬者五。議政者四。元帥者一。體察者二。出入將相餘二十年。其規畫建白弈弈在人耳目者。不可一二數。功存社稷。澤及生民。淸如氷玉。重如喬岳。國家之柱石。士流之冠冕。至丁巳一疏。扶倫紀樹正氣。磊磊軒天地。雖與日月爭光可也。公始釋褐。嘗謁栗谷李文成公。文成公知其國器。謂曰。我有歸志。子其訪我於石潭。時文成公方秉銓嚮用公。嫌於形迹。不能數叩函丈。未幾。文成公下世。公終身以爲恨。晩而嗜學。不規規於章句度數。而獨契本原。嘗著涵養銘。詞意超詣。有自得之趣。又著恥辱,書床,養夜,戒晝,警夕五箴。以自省焉。爲文章。有奇氣。邁放俊捷。不蹈蹊逕。筆蹟豪宕有法。少解丹靑有妙致。旣而。輟不復爲。所著詩文集若干卷。朝天唱酬錄一卷。奏議二卷。啓辭二卷。類編禮經要語曰四禮訓蒙者若干卷。參合左氏內外傳曰魯史零言者十五卷。藏于家。公旣沒。光海亦爲驚悼。命復官爵。及今上卽阼。命有司致祭。嗚呼。天若假公以年。使得際遭今日。其光輔中興。功烈豈可量哉。公別號弼雲。晩稱白沙。旣譴居野外。又稱東岡。配曰貞敬夫人權氏。子男二人。曰星男,井男。側室子曰奎男,箕男。維竊念公德業之懿。履歷之詳。國史所載。萬口所傳。非可以虛辭揄揚也。謹撮其著者。論撰如右。以俟知言君子之採擇焉。

奮忠贊謨立紀靖社功臣,資憲大夫新豐君兼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知成均館事,同知經筵,春秋館事,世子右副賓客張維。謹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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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천 백사 이항복 선생 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