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물/근현대 인물

변희용(卞熙瑢) - 독립운동가 및 교육자

야촌(1) 2016. 12. 24. 00:39

■ 변희용(卞熙瑢)

 

 

변희용(卞熙瑢)1894~1966) 일제강점기 고령 쌍림 출신의 독립운동가 및 교육자로, 호는 일파(一波), 본관은 초계(草溪)로, 부인은 최초 민주당 여성총재와 5선 국회의원을 지낸 정치가 박순천(朴順天) 여사이다.

 

그는 지금의 고령군 쌍림면 안림리에서 변창모의 3남으로 태어나 20세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분가한 뒤, 곧 일본에 유학하여 1917년 게이오대학[慶應大學] 이재과(理財科)에 입학하였다. 그곳에서 조선인유학생학우회 간부로 활동하며, 1919년 1월 결성된 조선독립청년단에 참여하였다.

 

1919년 2월 조선독립청년단이 2·8독립선언서와 민족대회소집청원서를 각국 공사관과 일본정부에 우송한 뒤 학생 600명이 회집한 가운데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결의문을 채택하였다.

이 사건으로 그는 체포되었다.

1919년 4월 일본 사회주의자 단체인 여명회(黎明會)에 가입하여 사회주의운동에 참여하였으며. 같은 해 10월 조선인유학생학우회 평의원에 뽑혔고, 11월 중국 상하이[上海] 대한민국 임시정부 외교차장 여운형「呂運亨, 1886(고종 23)~1947」이 도쿄에 왔을 때 백남훈[白南薰, 1885(고종 22)∼1967] 등과 환영회를 주최하기도 하였다.

 

1921년 봄, 게이오대학을 졸업한 뒤, 1922년 11월 흑도회(黑燾會/일본 동경에서 조직되었던 사회주의운동단체)가 사상 논쟁 끝에 분화되면서 박열(朴烈,1902∼1974) 등의 무정부주의자들이 흑우회(黑友會/1920년대 관서·관북지방에 조직되었던 무정부주의 운동단체)를 조직하자, 김약수(金若水,1892∼1964) 등 공산주의자들과 북성회(北星會/1923년 일본 동경에서 조직되었던 유학생 단체)를 조직하였다.


1923년 여름 북성회는 조선에 순회공연단을 파견하는 등, 큰 성과를 거두었다.

1924년 1월 『동아일보』 배척운동을 전개하였고, 1924년 3월 『시대일보(時代日報)』학예부장으로 활동하였으며, 4월 조선청년동맹 중앙집행위원 등을 역임하였다.

 

한 뒤 다시 일본으로 건너갔다. 이때 각종 잡지와 신문에 사회주의 이론 및 운동에 관한 글을 실었고, 1925년 1월에는 북성회를 해산하고 일월회(日月會)를 조직하여 사회주의 운동에서 중심적인 일을 하였다.

1926년 박순천(朴順天)과 혼인하고 그해 12월 부인과 고향인 고령으로 돌아왔다.

 

1927년 9월 신간회 고령지회 지회장, 1928년 1월 신간회 고령지회 간사회 대표로 본부대회 출석대표, 1928년 8월 신간회 고령지회 회계 및 재무부장, 1930년 11월 신간회 중앙집행위원회 중앙집행위원후보 등을 역임하며 사회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1930년대 전시 체제하에서 일제경찰의 끊임없는 감시와 압력에 시달리다가, 1938년 신사참배와 일본식 개명강요를 피해 서울로 이사하였다. 해방 후에는 『대공일보사(大公日報社)』 주필, 한국민주당 노동부원 등을 거쳐 1947년부터 성균관대학교(成均館大学校) 교수(로 재직하였다.

 

1960년 4·19혁명 중 재경교수단 구국선언과 4·25대학교수단 시위 등을 주도하였으며, 5월 16일 성균관대학교 총장으로 선출되었다. 일파유고(一波遺稿) 한권이 전하고 묘는 서울특별시 강북구 수유리 4·19 혁명유공자 묘역에 부인 박순천(朴順天)과 합장이다

 

집필 : 이재훈

 

[참고문헌]

一波卞熙瑢先生遺稿,/성균관대학출판부,(1977)

디지털고령문화대전

다음백과

現代史資料 29(姜德相·梶村秀樹 編, みすず書房, 1972)

한국사회주의운동인명사전(강만길·성대경 엮음, 창작과 비평사, 1996)

「1920년대 전반기 까엔당과 북풍회의 성립과 활동(전명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