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고조선(古朝鮮)

기자조선(箕子朝鮮)의 세계(世系)

야촌(1) 2016. 8. 27. 19:32

청장관전서 제55권/이덕무(李德懋) 저

앙엽기 2(盎葉記二)

 

■ 기자조선(箕子朝鮮)의 세계(世系)

 

조사문(趙斯文) 연구(衍龜)이 일찍이 한 책을 보고는, 기자 이후의 시호와 휘(諱)와 재위 연대를 기록하여 나에게 한 통을 보내 주었다. 이는 비록 매우 황탄한 것이었으나, 우선 기록해서《죽서(竹書)》나《노사(路史)》같은 기문(奇聞)에 대비하려 한다.

 

즉 태조 문성왕 기자(太祖文聖王 箕子)가 40년,

장혜황 송(莊惠王 松)이 25년,

경효왕 순(敬孝王 詢)이 27년,

공정왕 백(恭貞王 伯)이 30년,

문무왕 춘(文武王 椿)이 28년,

 

태원왕 찰(太原王 札)이 44년,

경창왕 장(景昌王 莊)이 11년,

흥평왕 착(興平王 捉)이 14년,

철위왕 조(哲威王 調)가 18년,

선혜왕 색(宣惠王 索)이 59년, 본주(本注)에 “국가가 편안하여 아무 일이 없었다.” 하였다.

 

의양왕 사(誼襄王 師)가 53년,

문혜왕 염(文惠王 炎)이 50년,

성덕왕 월(盛德王 越)이 15년,

도회왕 직(悼懷王 職)이 25년,

문열왕 우(文烈王 優)가 15년,

 

창국왕 목(昌國王 睦)이 13년,

무성왕 평(武成王 平)이 26년,

정경왕 - 1자 원문 빠짐 - (貞敬王)이 19년,

낙성왕 회(樂成王 懷)가 28년,

효종왕 존(孝宗王 存)이 17년,

 

천로왕 효(天老王 孝)가 24년,

수도왕 양(修道王 襄)이 19년,

휘양왕 이(徽襄王 邇)가 21년,

봉일왕 삼(奉日王 參)이 16년,

덕창왕 근(德昌王 僅)이 18년,

 

수성왕 상(壽聖王 翔)이 42년,

영걸왕 여(英傑王 藜)가 16년,

일민왕 강(逸泯王 崗)이 17년,

제세왕 혼(濟世王 混)이 22년,

청국왕 벽(淸國王 璧)이 35년,

 

도국왕 징(導國王 澄)이 19년,

혁성왕 즐(赫聖王 騭)이 28년,

화라왕 습(和羅王 謵)이 16년,

열문왕 하(說文王 賀)가 8년,

경순왕 췌(慶順王 萃)가 19년,

 

가덕왕 후(佳德王 詡)가 27년,

삼로왕(三老王) 가 25년, 상고 하건대, 자는 욱(煜)인 듯하다.

현문왕 석(顯文王 釋)이 39년,

장평왕 윤(章平王 潤)이 28년, 종통왕 휼(宗統王 恤)이 12년, 애왕 준(哀王 準)이 28년, 본주(本注)에 “기자부터 애왕까지 41세로 도합 9백 27년이다.” 하였다.

 

동사(東史)를 상고하건대,

“기자의 40세손 부(否)가 진(秦)에 복속하고 아들 준(準)이 왕위에 올랐다가 위만(衛滿)에게 핍박을 당하여 남으로 달아나 마한(馬韓)을 세웠으며, 기자부터 준까지가 모두 41세로 도합 9백 29년이다.” 하였는데, 지금 여기에는 부(否)가 없고 또 연대도 조금 차이가 나니, 혹 베껴 내려오는 동안의 착오가 아닌지.......

 

《위략(魏略)》을 상고하건대 “기자 이후 40여 세가 되어 조선 후(朝鮮侯) 준이 왕을 참칭했다.” 했으니, 그렇다면 준부터 비로소 왕을 칭한 것이요, 이후에는 왕을 칭하지 않은 것인지, 아니면 모두 추존(追尊)한 것인지,《여지승람》에 이른바 조선 무강왕(武康王)은 곧 준인데, 지금 애왕이라 칭한 것은 무슨 까닭일까.

 

마한 강왕 탁(馬韓 康王 卓)이 3년,

본주에 “한 혜제(漢 惠帝) 2년 무신에 왕위에 올랐다.” 하였다. 동사를 상고하건대, “기준(箕準)이 한 혜제 원년 정미에 위만을 피해 금마저(金馬渚)에 이르러 도읍했다.” 하였으니, 기준은 마땅히 마한의 시조가 되어야 하는데, 이제 강왕으로 시조를 삼았고 연대 역시 틀린다.

 

안왕 감(安王 龕)이 32년,

혜왕 식(惠王 寔)이 13년,

명왕 무(明王 武)가 31년,

효왕 형(孝王 亨)이 40년,

양왕 섭(襄王 燮)이 15년,

원왕 훈(元王 勳)이 26년,

계왕(稽王) - 1자 원문 빠짐 - 이 16년이다.

 

본주에 “계묘년에 백제 온조왕에게 합병되었는데, 기자가 조선에 봉하여진 주무왕(周武王) 원년 기묘년부터 한 혜제 홍가(鴻嘉) 3년 계묘년까지가 모두 49세로 도합 1천 1백 68년이다.” 하였다.

 

동사를 상고하건대 “신망(新莽)이 처음 나라를 세운 원년 기사에 마한은 백제왕 온조에게 멸망되었으니, 기자부터 마한까지가 모두 1천 1백 30년이다.” 하였으니, 이와는 다르다.

 

근세에 기씨(奇氏)가 광주(光州)에서 도랑을 파다가 석비(石碑)를 발견했는데, 기자 이후의 기씨 세계가 퍽 자세하게 새겨져 있었다.

 

또 제주 고씨가 땅을 파다가 석각(石刻)을 발견했는데 고씨가 맨 처음 성주(星主)가 된 때부터의 세계가 자세히 새겨져 있었으니, 지금 기자의 세계 역시 이러한 종류가 아닌지. 도정(都正) 안정복(安鼎福)이 지은《동사강목(東史綱目)》에 기자의 세계가 실렸는데 후에 이를 산발(刪拔)하였고, 금화군수(金化郡守) 이만운(李萬運)이《기년아람(紀年兒覽)》을 편찬하였는데, 내가 기자의 세계를 보고 드디어 부록하여 의문(疑問)을 전하는 예로 삼았다.

 

ⓒ 한국고전번역원 ┃ 차주환 (역) ┃ 19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