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선조유적. 유물

이경선 충산정려문(李慶善忠臣旌閭門)

야촌(1) 2006. 6. 9. 18:32

■ 충신 이경선(李慶善/二十九世)

[생졸년] 1600년(선조 33) 5월 2일 ~1636년(인조 14) 12월 27일[병자호란 때, 검천(儉川) 전투에서 전사(戰死)]

[문과] 인조(仁祖) 11년(1633) 계유(癸酉) 식년시(式年試) 을과(乙科) 7위(10/33)/34歲

[진사시] 인조(仁祖) 2년(1624) 갑자(甲子) 증광시(增廣試) [진사] 3등(三等) 36위(36/100)/24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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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0(선조 33)-1636(인조 14),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경주(慶州) , 아명(兒名)은 경민(慶敏). 초명(初名)는 경징(慶徵). 자(字)는 군선(君善) , 호(號)는 남포(藍浦), 충익공 벽오 이시발(忠翼公 碧梧 李時發)의 아들이다.

 

1624년(인조 2),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진사(進士)가 되고, 음직으로 교서관정자(校書館正字-正九品)를 지내다. 1633년(인조 11) 계유식년방(癸酉式年謗) 을과에 문과급제(文科及弟)하여, 교서(敎書), 교리(校理-正.從五品), 예조좌랑(禮曹佐郞-正六品), 성균관전적(成均館 典籍-正六品)을 역임한 후, 1636년(인조 14) 1월에 남포현감(藍浦縣監-從六品)에 제수(除授)되었다.

 

그해 12월 병자호란(丙子胡亂)이 발발하자, 충청도 근왕병(勤王兵)의 참모관(參謀官)으로 출전, 경기도 광주(廣州 ) 검천 전투(儉川戰鬪/오늘날의 경부고속도로 죽전 휴게소 지역)에서 중국의 청나라 태종의 매부인 양굴리(揚古利) 장수의 12만 대군과 최후의 일각 까지 격렬히 싸우다 12월 27일 향년 36세로 장렬히 전사(戰死)했다.

 

이듬해인 1637년(인조 15) 5월에 통정대부 예조참의(通政大夫 禮曺參議)에 증직(贈職)되고, 1730년(영조 6) 9월에 왕명으로 충신정려(忠臣旌閭) 건립을 명하였다.

 

묘(墓)는 충북 진천군 진천읍 산척리 산22-18의 숭렬사 앞 신좌원(申坐園)에 있고,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이 찬한 묘표(墓表)가 1658년(효종 9) 7월에 세워 젔고, 죽산후인(竹山后人) 안형열(安亨烈)이 찬(撰)한 묘갈(墓碣)과 정려문(旌閭門)이 있다.

 

 

↑이경선 선생 묘역

 

↑이경선 선생 묘비

 

↑1730년(영조 6) 왕명으로 내려진 충신정려문 편액 편액 원판(扁額原版)

 

 

 

 

↑이경선 선생 충신정려 문

 

↑이경선 선생 묘역(약380평)/촬영 : 2022년 9월

↑이경선 선생 충신정려 문(1922년 9월 촬영)

 

선생은 신사임당의 외손자이고 조선조 5대 정승의 반열에 오른 추탄 오윤겸 선생의 사위이다. /진천  이상설선생

    생가 앞

 

1636년(인조 14) 1월 1일 남포 현감에 부임 재직 중, 그해 12월 9일 청나라 태종(2대) 홍타이지가 이끄는 14만의 대군이 압록강을 넘어 조선을 침략한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남포 현감 이경선은 충청도 관찰사 정세규가 이끄는 충청 근왕병의 참모관으로 참전, 경기도 광주 검천 전투(廣州 儉川 戰鬪)에서 적과 장렬히 싸우다 전사하였다.

 

이듬해인 1637년 5월 26일 예조참의(禮曹參議)에 증직(贈職)되고, 1730년(영조 6년) 11월에 왕명으로 후손들이 살던 오늘날의 용인시 기흥읍 공세리 마을 입구에 충신 정려문이 세워졌었다.

 

그 후 왜정시대 일본의 조선인의 정신문화 말살정책에 의거 현판만 수습하고 소실되고 없어졌던 것을 2005년 11월 진천군에서 공의 묘소 아래, 새로이 건립하고 현판은 12대손인 필자가 원판을 탁본해서 과거 진천중학교 교정에 서있던 천연기념 목인 후박나무로 주문 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