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망명정부 – 대한광복군정부(大韓光復軍政府)
보재 이상설(溥齋 李相卨)은 무엇보다도 민족의식의 고양과 민족역량의 향상을 통하여 그 조직화된 역량을 거족적인 독립운동에 쏟아 넣으려는 의도를 가지고, 민족군대로서의 광복군을 본토 밖에서 양성하여 일제와의 전쟁을 치루는 한편, 본토에서는 그 전쟁을 뒷받침할 수 있기를 바랐다.
따라서 이상설은 우선 본토내외의 의병들을 규합해 나감과 동시에 한인학교에서는 인재들을 양성했다. 그리고 권업회(勸業會)의 조직을 통해서는 여러 지역에다가 비밀리에 광복군을 예비편성하고, 또한 광복군의 진지가 될 만한 비밀스러운 장소들을 물색하기도 했다.
이상설은 친분이 두터워진 곤닷지 총독과 교섭을 벌여서 그처럼 물색해 낸 장소들을 무상으로 빌어쓸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훈련교관과 막사 등까지도 러시아당국으로부터 제공받을 수 있었다.
러시아 극동총독 곤닷지는 이상설이 망명한 이후 그의 인품에 매료되어 각별한 호의를 보여주었으니, 이상설을 정치적 망명자로 대우하여 집도 마련해 주고, 매달 얼마간의 생활비까지도 계속 보조해 주었던 것이다.
그 대신 이상설은 곤닷지 총독의 출중한 고문이 되어 주었으니, 그의 해박한 지식과 예리한 판단력으로 열강의 극동정책과 일제의 팽창정책에 대하여 논하기도 하면서 대한국독립운동에 대한 지원을 요청하기도 했던 것이다.
그러나 실제훈련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소총(小銃)과 소구경포(小口徑砲)등 만은 러시아군 본부로부터의 감사(監査) 때문에 총독의 호의에도 불구하고 무상으로 제공받을 수는 없었으므로, 10만 루불어치 구입하는 형식을 취하여 갖추었다.
그처럼 이상설이 수년간 열성적으로 노력한 결과 사방 여러 곳에 광복군대병력이 예비편성 되었으며, 4246년(서기1913)부터는 광복군사관학교 대순학교(大甸學校)를 설치하기 위해서 이동휘(李東輝), 김 립(金立), 이종호(李鍾浩), 장기영, 김하석, 오영선등이 동북만주지방의 수분대전자(綏芬大甸子)에 위치한 나자구(羅子溝)에서 추진하였다.
광복군양성을 위한 이상설의 포부는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그와 함께 광복군 양성을 추진한 미국 등 해외 여러지역의 동지들에 의하여 무려 수십만 명에 달하는 광복군이 편성되어 가고 있었던 것이다.
특히 박용만(朴容萬)은 미주와 하와이에서 활발하게 광복군을 양성하였고, 4247년(서기1914)에는 하와이의 아호마후 농장에서 삼백여명의 강력한 국민군단이 편성되었다. 그리고 네브라스카주에는 소년병학교를 세웠고, 멕시코에는 숭무(崇武)학교를 세워 사관양성에 주력하였다.
이상설과 박용만의 구상은 미주 등의 해외에서는 주로 보다 근대적인 군사교육을 받은 사관들을 양성하고, 만주와 노령에서는 주로 광복군사병들을 훈련시켜 양성하는 것으로 기능분담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밀정들을 통하여 그와 같은 낌새를 눈치 챈 일제는 4247년(서1914) 6월경에 저들 나름대로 광복군의 동원능력 등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조사결과를 작성했다.
'1. 시베리아지역;29,365명, 창탄(槍彈) 13,000병(柄)
2. 길림지역;260,000여명, 창탄소지함
3. 무송현지방;5,300명, 강계포수및 해산군인 포함
4. 왕청현지방;19,507명, 산포수.해산병.학생등, 창탄소지함
5. 통화.회인.집안현지방;390,073명
6. 미주지역;855명, 학생과 교관 포함
(이상은 조선총독부 문서에 기록된 것임)
일제에 의해 파악된 이러한 막강한 예비 전력을 바탕으로, 이상설과 이동휘, 이동녕, 정재관등의 동지들은 대한국인들이 노령에 이민 온지 50주년째인 4247년(서1914)에 대한광복군정부(大韓光復軍政府)를 설립했다. 때마침 노령의 교포들은 큰 자축기념행사를 계획하고 있었으므로, 군정부에서는 때를 놓치지 않고 민족의식 고양과 광복군 군자금 조달을 도모하기로 하였다.
또한 노일전쟁 10년째를 맞는 시기였으므로 러시아내에서도 새로운 노일전쟁이 임박했다는 등의 풍문이 떠돌고 있었기 때문에, 대한국인들에게는 광복전쟁을 치루는 데 있어서 대단히 고무적인 분위기가 형성되어 가고 있기도 했다.
그리고 한시라도 지도자가 없을 수 없는 광복운동의 최고지도자인 '대한광복군정부 정통령(正統領)'에는 이상설이 추대되었다. 이상설 자신은 항상 제2인자로서의 내부적 규합 활동에 주력하고 만족해 왔으나, 모든 광복운동가들이 그의 혁혁한 활동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를 정통령으로 추대했던 것이며 그도 어쩔 수 없이 직책을 맡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원래 평생 동안 어떠한 관직에도 연연해 한 바 없는 이상설의 염원은, 오직 하루빨리 일제를 물리치고 광복을 이룩하여 광무황제(光武皇帝-고종)와 융희황제(隆熙皇帝-순종)를 필두로 하는 굳건한 자주독립 국가를 이룩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어찌 뜻했으랴? 4247년(서1914)에 발생한 세계대전은 광복군정부요원들의 뜻과는 달리 노일전쟁으로 비화되지 않았고, 오히려 제국주의적 실리에 밝은 러시아와 일제가 동맹을 맺음으로써 광복운동은 큰 난관에 봉착하고 말았다.
러시아는 자국 내에서의 모든 정치활동 등을 금지해 버리고 말았으며, 따라서 모처럼 결성된 광복군도 전혀 표면적으로는 활동할 수가 없게 되어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권업회의 수총재로 추대되었던 유인석(柳麟錫)은 복잡다단한 국제정세 하에서 러시아당국도 믿을 수 없다고 판단하여 이미 4245년(서1912) (음)9월에 만주로 이전할 것을 결심하고, 다음 해인 4246년(서1913) (음)2월에는 실행에 옮겼다.
그리하여 봉천(奉天), 흥경(興京), 관전((寬甸) 등을 전전하며 동지 및 제자들과 독립전쟁 방략을 논의하기도 하면서 주로 저술활동에 전념했다. 남만주 흥경(중국 랴오닝성 신빈현의 지명)에는 자식들과 친척등도 이미 4244년(서1911)에 망명해 와서 살고 있었으므로 그는 만년에 대체로 흥경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흥경에서 노환에 시달리며 그의 의병장으로서의 인생관을 총 정리한 '우주문답(宇宙問答)'등을 저술해 낸 그는, 1차 세계대전이 터진 후에 러시아와 일본이 재차 야합함으로써 권업회마저 해산당하는 비운에 처해지는 국제사회의 냉혹한 현실을 다시 한 번 목격하면서, 4248년(서1915) 3월 14일에 위대한 항일투쟁 유학자로서의 한 평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항일광복투쟁의 큰 별이 지고만 것이다.
일찍이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의 대통을 이어받은 대유학자이자 위정척사의 기수로서, 을미사변이후 줄곧 항일구국투쟁의 선봉에 섰던 유인석! 그는 광복투쟁의 이론과 실천 양면에 걸쳐서 커다란 족적을 남겼으며, 이상설과 이범윤(李範允)을 비롯한 많은 애국지사들은 그의 뜻을 올곧게 이어 더욱더 광복투쟁의 진용을 가다듬어 갔다.
<집필>안재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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