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보재이상설선생.

박용만과 그의시대(책 내용중에 평한 이상설)

야촌(1) 2015. 10. 11. 14:22

'박용만과 그의 시대'

-칼을 어루만지며 길게 노래하며

 

(25) 애국동지 대표회 연해주대표 이상설 (2)

 

이상설은 원래가 조용한사람이었다. 아무 때나 나서는 사람이 아니었다.

 

"동지들은 합심하여 조국광복을 기필코 이룩하라. 나는 광복을 못 보고 세상을 떠나니 어찌 고혼인들 고국에 돌아갈 수 있으랴. 내 몸과 유품을 남김없이 불태우고, 그 재도 바다에 버리고 내 제사도 지내지 말라." 이상설이 남긴 유언이었다. 자괴의 흔적을 깡그리 지워버리고 싶은 게 그의 심정이었다.

 

 

▲서전평야(瑞甸平野)에 설립된 ‘서전서숙’은 만주에 독립지사가 세운 최초의 신식 교육기관이었다.

 

1917년 그가 우수리스크에서 병으로 죽자 동지들은 화장한 재를 강물에 뿌렸다. 공중으로 흩어지고 강물에 흘러간 그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2001년 우수리스크의 수이푼 강가에 유허비가 세워졌다. 연해주에 있는 우수리스크는 1870년 이래 한인들이 이주해서 개척한 곳으로 이상설, 안중근, 이동녕, 이동휘, 박은식, 신채호 등 우국지사들이 자주 드나들었다.

 

이상설은 27세 때 성균관 관장에 올랐다. 오늘날로 치면 국립대학 총장이 된 셈이다. 영어, 불어, 노어, 일어를 공부하고 국제정치와 법률을 연구했다.그처럼 실력이 탄탄했기에 고종의 특명을 받지 않았을까. 그는 '산술신서(算術新書)'라는 한국 최초의 수학책도 펴냈다. 일본의 우에노 기요시가 저술한 '근세산술(近世算術)을 번역 편집한 것이었다.

 

그가 의정부 참찬으로 있을 때 을사5조약이 체결됐다. 체결을 막기 위해 회의장으로 들어가려다 저지를 받았다. 그는 막아서는 헌병지휘관의 어깨를 지팡이로 후려쳤다. "(전략) 대저 그 조약이란 인준해도 나라는 망하고 아니해도 나라는 또한 망합니다. 

 

이래도 망하고 저래도 망할 바에야 나라를 위해 순사(殉死)할 것을 결의하시어 단연코 거부하시옵소서. 원하옵건대 성상께옵서 일본과의 조약체결에 참여한 제 대신들을 모두 징계하시어 국권을 바로잡으시고 조약인준을 엄히 거절하시어 천하 만세에 성심이 있는 바를 바로 알게 함이 옳을 것입니다."

 

이것은 을사5적이 1905년 11월17일 늑약을 체결한 이틀 후 이상설이 고종께 올린 상소문의 일부다. 이듬해 봄 그는 망명길에 올랐다. ‘서전서숙(瑞甸書塾)'은 간도 일대에 독립지사가 세운 최초의 교육기관이었다. 이상설이 5천 원, 이동녕이 3천 원, 정순만이 500원을 내 용정에 설립했다. 인근의 한인 청소년 22명으로 시작된 학교는 나중 70명으로 늘어났다.

 

이상설은 자기가 펴낸 '산술신서'를 가지고 산술을 가르쳤다. 그 외 역사, 지리, 국제공법, 헌법 등의 과목들을 가지고 근대교육을 실시했다. 학생들은 수업료를 내지 않았고 침식도 무상이었다. 교원들의 봉급과 학교의 운영자금은 이상설이 지급했다.

 

이듬해인 1907년 5월 그가 헤이그 밀사가 돼 떠나자 '서전서숙'은 10개월 만에 폐교됐다. 그러나 그 이후 이곳저곳에서 유사한 학교들이 세워져 민족의식이 들불처럼 번져갔다. 이상설이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간 건 1909년 4월. 국민회는 농지를 개간하고 독립운동 기지를 만들기 위해 그 전 해 가을 블라디보스토크에 '아시아실업주식회사'를 설립했다. 

 

이 사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북미지방총회장 정재관이 해삼위로 가게 됐고 이상설도 동행했다. 가망을 찾아 수륙만리의 유랑도 마다하지 않은 지사들의 치열한 삶. 오늘날 어찌 그 유례를 찾을 수 있으랴.

 

이상설은 블라디보스토크에 가서 항카호 남쪽 봉밀산에 토지를 구입 한인 100여 가구를 이주케 했다. 최초의 독립운동 기지라고 할 수 있는 한흥동이 건설된 것이다. 그리고 노령과 만주에서 북미국민회 인사들의 노력으로 13곳의 새로운 국민회 지회들이 탄생했다.

 

글 이상묵(토론토)

발행일 : 2010.11.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