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회영과 상동교회(李會榮과 尙洞敎會)
오늘날 한국교회는 왜 사회적 비난을 받는가? 그것은 상동교회와 같은 현실에 적극 참여하는 민족
교회가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항일광복운동과 민주화 통일운동을 했던 문익환. 장준하 같은 한신
계열의 민족적 기독교인들이 배출하게 된 배경에는 상동교회와 같은 민족정신을 가진 기독교 때문
이였다.
오늘날 한국기독교는 자본주의 바알종교가 다 되어 빛과 소금을 역할을 못하고 있다.
종교라는 것은 민족과 민중이 처한 현실을 변혁시키지 못하고, 현실에 순응할 때 더 이상 존재의미가 없게 된다.
민족과 민중이 처한 현실에 고통을 느끼며 동참하는 종교들이 교리들은 다를지라도 참 종교이며 참 종교인들이다.
이회영,상동교회에서 신흥무관학교설립을 결의하다
당시 우당 선생을 이해하려면 '상놈의 교회'라고 할 수 있는 남대문 상동교회를 알아야 한다.
이종찬(이회영 선생의 손자. 김대중정부 당시 국정원장) "우당은 우리가계에서 좀 이단아였죠. 고종이 벼슬을 준다고 했는데 거부했어요.
그리고 남대문상동교회(尙洞敎會)에 다녔습니다. 그곳의 첫 안수목사는 전덕기(全德基,1875년~1914년) 목사였는데 남대문시장의 숯장수 아들이었어요. 우당은 그와 가장 친한 동지였습니다.
그 당시 연동교회(蓮洞敎會)에선 상놈이 먼저 장로가 됐는데 양반이 다 나와서 묘동교회(妙洞敎會)를 세울 정도로 반상(班常)차별이 심했습니다.
그런 시대에 우당은 전덕기 목사와 동지가 되고 독립운동을 시작했습니다.
우당선생은 교회에서 재혼을 했는데 한국최초의 신식결혼이었습니다."
김삼웅(金三雄,1943년 3월 3일생, 전독립기념관장) "그야말로 삼한갑족(三韓甲族)의 대 가문 자제로 태어나서 시서화와 전각에 일가견을 가졌습니다. 동생은 17살 때 과거 급제했는데 형은 과거를 팽개치고 상동교회의 학감(學監)이 됐습니다.
그리고 구국투쟁을 벌였습니다. 그 철학적 배경이 양명학(陽明學=儒學)입니다. 지행합일(知行合一)이 양명학의 핵심이지요. 우당 선생은 상동교회를 다니면서 재야지식인들과 어울려서 제도권을 이탈한 것입니다."
우당선생은 학감으로 취임한 뒤 을사늑약(乙巳勒約)이 체결되자 전덕기 목사와 함께 교회 내 청년조직을 동원해 무효투쟁운동을 벌였다. 그리고 이곳에서 비밀결사인 신민회(新民會)를 조직했다.
그는 또 1907년 조남승(趙南升)·남익(南益) 형제와 함께 고종황제에게 접근해서, 밀지를 받아낸 뒤에 만국평화회의 때 이상설과 이준을 헤이그 특사로 파견했다. 이상설(李相卨)선생을 정사로 추천한 인물이 바로 우당 선생이었다.
김삼웅 "상동교회는 근대민족운동의 요람입니다. 헤이그특사가 좌절됐는데 그 당시에 우당선생이 신민회를 결성했습니다. 새로운 백성이라는 뜻인데 근대 봉건시대의 임금과 신하의 관계와는 전혀 다른 개념이었어요.
신민회는 도산 안창호선생이 만든 것으로 알려졌는데, 사실 우당 선생이 그 핵심이었습니다."
출처 : 100년 전, 압록강 건넌 '한국판 체 게바라'를 아는가 - 오마이뉴
[보도자료]이회영은 명문 사대부가에서 태어났지만 일찍부터 봉건적 질서에서 벗어나 급진적인 자유사상을 추구했다. 이동녕(李東寧), 이동휘(李東輝), 신채호(申采浩) 김구(金九)등 우국지사들과 함께 상동교회와 신민회를 중심으로 구국운동을 펼쳤다.
경술국치를 계기로 망명을 결심한 이회영은, 1910년 형제일가 60여명을 이끌고 만주로 건너가 신흥무관학교 설립을 주도했다. 이회영일가는 전 재산을 처분한 40만원, 현재 가치로는 600억원에 이르는 거금을 여기에 쏟아 부었다.
혹독한 추위와 배고픔, 일제의 감시 속에서 10년 동안 유지된 신흥무관학교는 항일 무장투쟁의 구심점이 됐다. 올해는 이 신흥무관학교가 설립된 지 꼭 100년이 되는 해다.
▲전덕기(全德基) 목사 존영,
전덕기(全德基,1875~1914) 목사는 독립운동과 기독교운동에 헌신했다. 독립협회에 가입(1896)했고, 감리교회의 전도사가 되어 상동교회에서 근무하였다. 상동교회에 상동청년학원을 개설해 민족운동의 중심지로 끌어갔다.
이회영도 이때부터 활동하게 된다. 상동교회는 을사늑약 무효투쟁(1905)의 중심이 되었다.
1907년은 바빴다. 전도사에서 목사 안수를 받아 상동교회를 담임하기 시작했다. 헤이그밀사 파견의 중심역할을 했다.
신민회를 조직하고 상동청년학원을 신민회교육기관으로 조직했다. 이후 7년 동안 상동교회의 목사로 시무하면서 너무 많은 일을 했다. 1912년 105인사건(신민회사건)이 터졌다. 끌려가 심한 고문을 받았다. 옥중에서 발병해 병보석을 받았지만 회복하지 못하고 죽었다. 그의 나이 마흔이었다.
▲독립운동관련자료
▲옛 상동교회에 걸렸던 종.
▲전덕기 목사 기념비
7층의 벽에 1901년 간행된 한성부 지도가 걸려 있다. 상동교회의 이름은 한성부
회현방의 상동에 터를 잡았기 때문에 붙인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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