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유산체널>2010.8.14
경술국치(1910.08.29) 100년,
흑백사진 속 육조거리(上)
2010년은 경술국치 100년을 맞는 의미 깊은 해다. 광복절을 앞두고 10일 일본의 간 나오토 총리는 100년 만에 정식으로 한국에 대한 식민 지배를 사과했다. 아울러 ‘조선왕실의궤’를 ‘인도’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찜찜한 구석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 간 총리가 사용한 “통절한 반성과 마음으로부터의 사죄” 표현은 일본이 1995년부터 의례적으로 써왔던 구절이다. 또 간 총리가 이번 담화에서 사과와 사죄의 뜻을 포괄적으로 담아 사용한 ’오와비(おわび)’라는 일본어 표현도 문제다. ‘오와비’는 ’가볍게 미안하다’는 의미에서부터 ’깊이 사죄 한다’는 뜻까지 폭넓게 쓰이는 순수 일본어다.
일본은 일제시대 자행된 범죄에 대해 항상 ‘오와비’라고 말해 왔고 이는 일반적으로 사과나 사죄로 풀이됐다. 강탈 문화재를 돌려줌에 있어서도 ‘반환’이 아닌 ‘인도’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군대 위안부의 배상 책임을 회피하는 등 사과에 진정성을 보이지 않았다.
경술국치 100년을 맞아 한국의 얼굴 광화문이 제 모습으로, 제 자리로 돌아온다.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가는 풍경은 아름답다. 드디어 오랜 가림 막을 벗고 위용을 드러낼 광화문이 기대된다. 그러나 광복절 행사에 꿰어 맞추기 위해 공사를 서두른 것 아니냐는 일각의 지적처럼 걱정도 함께 뒤따른다.
1883년 개화기에 국내에 첫 사진관(촬영국)이 등장했다.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의 중건을 주도한 단종 25년(1888)보다 5년 앞선다. 처음 촬영국이 생겼을 때 실제와 똑같이 나오는 사진을 보고 사람들은 “사람을 삻아 넣어 만드는 것이 사진”이라며 두려워했다.
한양을 방문한 외국인들의 카메라를 보고 ‘영혼을 빼앗는 기계’라며 아이들이 도망다니는 풍경도 연출됐다. 그러나 장안을 호령하는 부자들과 고관대작들은 중요한 행사에 사진사를 불렀다. 사진촬영은 가장 고급스런 호사였다. 이들은 큰 웃돈을 쥐어가며 사진을 남겼다.
[광화문, 새로운 문을 활짝 열다] 기획을 준비하며 ‘경복궁’을 담은 흑백사진들을 찾아봤다. 서울시편찬위원회의 도움을 받았다. 국립고궁박물관과 경복궁 관리소의 도움도 받았다. 빛바래고 초점이 흐려진 사진속에는 광대한 육조거리를 보행하는 조선인들이 있었다. 해태 위에 굳이 기어 올라가 사진을 찍은 응석받이도 있었다.
썬글라스를 끼고 말을 탄 선비도 보였다. 그러나 허물어져가는 법궁은 왕조의 몰락을 말해줬다. 조선총독부는 광화문을 밀어내고 평화롭던 육조의 풍경을 살벌하게 뒤바꿔 놓았다. 경복궁은 탄압에 시달리다 기어이 헐리고 무너지다 마침내 해체되었다. 해체된 검은 땅에는 하염없이 잡초만 무성했다.
100년이 지났다. 6.25로 서울은 초토화됐고 국가는 빠르게 재건됐다. 군부는 시멘트에 단청 페인트를 바른 광화문을 짓고 “나무가 전혀 들어가지 않은 100% 콘크리트로 지어진 광화문”이라며 자랑스레 선전했다.
콘크리트는 국가 재건의 재료였다. 이번 광화문 복원사업을 감독한 대목장 신응수는 “복원공사를 시작할 당시 10%쯤 남아 있던 전각이 지금은 40% 정도 복원됐다. 아직 갈길이 멀다”고 말했다.
암흑의 터널을 지나 우리는 여기까지 왔다. 고전과 현대가 교차하는 중심에 광화문이 있다. 오랜 세월 잠들어 있던 광화문이 깨어난다. 가로막혀 있던 빗장이 한꺼번에 열린다. 광화문이 열리는 날 대한민국의 새 천년도 함께 박동치길 기원한다.
‘한양’에서 경성’으로
조선시대 서울의 공식 명칭은 한성부였다. 사람들은 한성부라는 딱딱한 행정용어보다 한양이라 즐겨 불렀다. "산의 남쪽, 물의 북쪽을 양이라 한다" 했으니, 한양은 북한산 남녘과 한강 북쪽 사이에 자리 잡은 양지바른 터전이란 뜻이다.
사람이 살 수 있는 좋은 땅을 양택이라 한다. "사람을 낳으면 한양으로 보내고, 말을 낳으면 제주도로 보낸다"라는 말처럼 너른 마당에 햇살을 받듯, 이 땅의 사람들을 두루 포용할 듯 한양은 왠지 포근하고 따듯한 이미지를 준다. 그러나 1910년 일제는 대한제국을 강제 병합하면서 경성(京城)이라고 이름을 고쳤다. 그렇다! 경성은 망국의 대가로 얻은 이름이었다.
당시 일본 사람들은 서울을 ’게이조’(京城의 일본식 발음)이라고 불렀다. 초대 조선 총독 데라우치는 훈시에서 이렇게 밝혔다. "이 땅 이 반도는 오늘부터 ’대한제국’이 아니라 ’조선’이라 부른다. ’한성’은 ’경성’이라 한다.
저들은 ’조선’보다 ’대한제국’에 미련이 남아 있고, 경성보다 한양에 연연하며, 일본제국의 신민이라기 보다 한민족이기를 원하지만 나를 믿고, 지시대로 봉공하라(초대 조선총독 데라우치의 훈시 중)“
↑1876년~1888년 경복궁 내전 화재 후 모습
고종 13년(1876) 11월 4일 화재로 인해 경복궁 내전 뿐만 아니라 외전의 일부가 소진되었다.
화재로 소진된 건물은 교태전 일곽, 강녕전, 연생전, 경성전, 자경전, 함원전, 흠경각, 사정전,
동서행각 등이다. 고종은 창덕궁으로 이어했다가 1885년 경복궁으로 다시 환어하고 고종
25년(1888) 강녕전과 교태전 등이 중건된다.
그러나 1917년 창덕궁 내전에 화재가 나면서 일본인은 이를 보수한다는 명목 아래 경복궁
내전의 자경전을 제외한 대부분의 건물들을 철거함으로써, 고종 44년(1867)에 조선의 법궁
으로 거듭난 경복궁은 반세기가 지나기도 전에 궁궐의 면모를 잃게 된다.
↑궁궐의 모습(1985년)
1985년은 명성황후가 일본인들에게 시해된 해다. 그 해 촬영한 사진으로 멀리 광화문이
보이고 동십자각, 서십자각이 보인다.
[사진으로 보는 조선시대(속) 생활과 풍속. 서문당]
↑북악산에서 바라본 경복궁(근경, 1930년대)
조선총독부 청사 뒤쪽으로 근정전, 사정전과 경회루가 보이며 뒤쪽으로 집옥재, 팔우정,
협길당이 북측 궁장에 가려서 지붕만 보인다.
[궁능관련 유리원판 도록, 문화재청]
2. 경복궁과 육조거리
경복궁 광화문 앞 거리는 육조거리라 불려졌다. 조선시대 육조와 중요한 관청이 밀집되어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개항 이후에도 물론 정부의 주요 관서는 이곳에 있었다. 당시 육조거리
는 매우 넓은 길이었다. 육조거리를 거니는 조선인들의 모습을 통해 당시의 생활상을 들여다 볼
수 있다.
↑경복궁과 육조거리(1930년대)
1927년 광화문이 건춘문 북쪽으로 이건된 후의 모습으로 서십자각은 철거되고 동십자각은
경복궁에서 떨어져나간 상태다.[일제 침략 아래서의 서울]
↑광화문과 해태상(1900년 경)
광화문 주변으로 전신주가 세워져 있고 월대에는 경사로가 만들어져 있다. 당시 해태상은
광화문과 상당히 떨어진 앞쪽에 위치했음을 알 수 있다.
↑광화문 앞 월대 난간(1890년 경)
광화문 앞에 난간석을 두른 월대가 보이고, 월대의 규모는 길이 52m, 폭 29.5m로 추정된다.
광화문 양 옆으로는 위소가 있다.
↑경복궁 광화문(1927년 경)
1927년 옮기기 직전의 광화문 전경. 내부에는 흥례문 행각이 보이고 외부에는 광화문 서쪽
협문 옆으로 일본식 초소가 보인다. 육조거리에는 왼쪽으로는 중추원(현 광화문청사 정문)
이 있었고 오른쪽 첫 건물에는 의정부가 있었다.
[사진으로 보는 조선시대, 생활과 풍속]
↑1896년 광화문과 육조거리
↑광화문과 동측 해태상(1900년 경)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광화문을 국제거리로 소개한 독일의 한 신문의 삽화(1886년)
경술국치 100년, 흑백사진 속 육조거리(下)
왕조의 몰락, 무너지는 경복궁
4. 경성을 감시하는 조선총독부
1900년부터 1910년대 서울에는 대형 건축 붐이 일었다. 이 시기 식민통치와 관련된 관공서 건립이 추진되었기 때문이다. 1910년에 기공, 준공된 신축청사 또는 증축청사만 하더라도 139동이었다.
조선 통치의 거점 확보와 식민지 통치기관의 건설을 두고 일제는 식민지의 문명개화라고 추켜 세웠다. 일본 본국의 관청양식을 따라 특히 조선인에게 위압감을 주기 위해 건물의 위세를 강조했다.
이 때문에 일본의 건축양식과 서양의 그것을 절충한 이른바 왜양절충식의 르네상스식 건축이 유행했다. 조선총독부와 경성부 청사를 중심으로 일제의 관공서가 모든 조선적인 것을 억누르고 서 있지 않은가. 조선총독부 청사 신축은 대역사였다.
공사에 투입된 철근을 이으면 그 길이가 총 1,320리로 서울에서 부산까지의 길이를 훨씬 넘는다. 사용된 시멘트 62,000통을 한 줄로 쌓아올리면 그 높이가 34.091m라고 하니 한라산 높이의 18배에 해당한다. 그러나 낮은 임금 지급으로 건축비는 일본에서보다 훨씬 적게 들었다.
↑광화문을 철거하는 광경(1926년)
1926년 7월 22일. 드디어 조선의 명운이 바닥에 떨어졌고, 지하세계에서 모든 선조들의 혼령이
일어나 통곡을 한다. 바로 광화문 철거작업이 시작됐다. 1927년 건춘문 북측(지금의 민속박물관
입구)으로 옮겨지게 된다.
↑지진제(1910년대 후반) 조선총독부 청사 건립을 위한 지진제를 근정문 앞에서 준비하는
모습
↑구 조선총독부 청사 콘크리트 거푸집 공사/1916~1926년 조선총독부청사 신축공사 모습
↑916년 6월 조선총독부 공사현장
↑중앙청과 경복궁
1926년 준공된 조선총독부 청사는 8.15 해방 이후 중앙청으로 사용되다가 1986년에는 국립
중앙박물관으로 사용됐다. 1995년 8.15 광복 50주년을 맞이하여 조선총독부는 철거되고 현
재는 원래 있던 흥례문 영역으로 복원되었다.
↑근정전(1930년 경)
조선총독부 옥상에서 내려다 본 근정전의 모습. 근정전 동측으로 동궁이 있던 자리에 조선
총독부 박물관이 들어섰다. 흐드러진 벚꽃이 대조적이다. 조선총독부 박물관은 1915년 조
선 물산공진회 당시 미술관으로 건립되었고 경복궁 동궁(자선당, 비현각) 권역 복원사업을
계기로 1998년 철거되었다.
↑광화문을 이전한 일제강점기 때의 광화문로와 조선총독부
건물 미니어처
↑조선총독부 청사 철거장면(1996. 11) [구 조선총독부 건물 실측 및 철거보고서, 1997]
5. 옮겨진 광화문과 중학천
조선 초기 경복궁을 창건할 때 세워졌던 광화문은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고, 그 후 흥선대원군에
의해 경복궁이 중건될 때(1865) 다시 지어졌다. 일제는 조선총독부 청사를 지으면서 1927년에
광화문을 건춘문 북쪽으로 옮겨 버렸다.
사진 속의 광화문은 건춘문 북쪽으로 옮겨진 이후의 모습이다. 이후 광화문은 6.25 전쟁으로
불에 타버렸으며, 현재의 광화문은 1968년에 중건한 것을 새로 복원한 것이다.
↑동십자각과 중학천(1920년 경, 국립박물관 소장)옮겨진 광화문 앞으로 흐르는 중학천에서
빨래하는 아낙들(1927년 경)
↑경복궁 건춘문과 사간동 일대(1900년대)
경복궁 동측의 건춘문과 동십자각 궁장 밖으로 중학천과 식교가 보이고, 개울 옆으로는 수목이
있다. 동십자각과 건춘문 사이에는 한옥 건물이 보이나 어떤 용도의 건물인지는 알 수 없다.
[사진으로 보는 조선시대(속), 서문당]
↑허물어져가는 경복궁의 북문, 신무문의 행색이 몰락해가는 조선의
운명을 닮아있다.
↑광화문 내부(1900년 경)
1900년대 홍예문으로 향하는 광화문 안쪽의 전경. 기울어가는 조선의 국운을 말해주듯
다듬지 않은 잡초가 무성하다.
↑1900년대 말 근정전 내부의 모습 /쓰러져가는 조선왕조 500년의 최후를 말없이 말한다.
↑문루가 소실된 광화문(1950년 경)
1950년 한국전쟁으로 피폭 후 상부의 문루는 소실되고 하부의 육축도 부분
적으로 파손되어 검게 그을려 있다.
↑육축만 남아있는 광화문 안쪽(1954년)
1950년 한국전쟁 때 문루는 소실되고 육축만 남았다. 육축 상부의 전벽과 육축의 불탄 흔적은
깨끗이 정리되어 있다.
2010.8.14 김보배 기자 bobi@heritagechannel.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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