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보재이상설선생.

서전서숙의 영향

야촌(1) 2009. 3. 5. 14:04

연변통보 l 향도의 등불 < 2 >

2009년 02월 06일(수요일)

 

서전서숙의 영향

 

반일‧항일운동가 가운데서 선구자로 불리었던 규암 김약연(1868~1942) 선생은 1899년 2월에 조선 종성읍과 회녕읍에서 4개 가문, 22가속, 141명(김약연 가속 31명, 김하규 가속 54명, 문병규 가속 49명, 남도천 가속 7명)을 동원하여 집단적으로 화룡현 명동촌에 이주, 정착하였다.

 

1901년에 규암 김약연 선생은 ‘규암재’라는 서당을 꾸렸고 소암 김하규 선생은 ‘소암재’라는 서당을, 남위언은 중영툰에 서재를 꾸렸다. 이런 서당들은 구식 유교구학서당으로 시대에 떨어지는 편이었다. 그러다 1906년 용정에 세워진 ‘서전서숙’의 영향을 크게 받았고 변화하는 시국과 근대 문화교육의 수요를 감안한 김약연, 정재면 선생 등은 1908년 4월 규암재, 소암재 등 서당들을 통합하여 명동서숙 즉, 명동학교를 세웠다. 

 

그들은 명동학교의 취지를 반일‧항일, 애국독립사상을 고취하고 민족 인재와 독립군을 양성하는 데 두었다.

이렇게 되니 명동학교는 점차적으로 학생이 증가하여 소학부로부터 중학부까지 증설하고 또 여학부까지 증설시켜 그 명성이 북간도는 물론 조선 함경북도와 러시아 연해주까지 알려져 그곳에서도 학생들이 몰려오게 되였다. 

 

그야말로 서전서숙을 북간도의 근대교육의 첫 요람이라고 말한다면 명동학교는 북간도의 조선인 근대 문화교육의 대본산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명동학교의 대표자인 김약연 선생은 그 당시 북간도의 저명한 교육자였을 뿐만 아니라 북간도 반일독립운동가의 선구자로 이르기에 손색이 없었다.

 

따라서 서전서숙의 맥을 직접 이은 명동학교와 명동학교가 자리 잡은 명동촌은 명실상부한 중국 조선족 근대 교육문화의 발상지로, 조선족의 반일‧항일운동의 책원지(策源地)로 되기에도 손색이 없었다.

 

그 당시 명동학교를 본보기로 그 인근의 개산툰에는 정동학교, 와룡동에는 창동학교, 소영자에는 광성학교, 왕청현 라자구에는 대전학교, 훈춘현 대황구에는 북일학교 등이 우후죽순마냥 일떠섰다. 이런 학교들은 모두가 근대 문화교육과 반일민족 인재 양성에 취지를 둔 사립학교였다.

 

당시 1916년에만 해도 북간도 일대에는 156개 소학교가 세워져 있었는데 이는 우리 민족이 얼마나 후대 양성에 열중했고, 또 얼마나 국권 회복, 민족 독립에 열중했는가를 보여주는 훌륭한 사례라 할 것이다.

 

그리고 1920년 2월 기독교 캐나다 선교부에서 용정의 ‘영국덕’에 은진중학교를 세웠고 그 이듬해에 또 은진학교 부근에 명신여자학교를 세웠다. 천도교파에서 용정 동흥촌에 동흥중학교를, 유교공교계에서 용정시내 북신구에 대성중학교를, 기독교파에서 용정 신안구에 영신(광명)남자중학교를, 용정 천도구에 광명여자학교 등 6개소의 중학교를 세웠다. 

 

이런 사립학교들은 서자마자부터 반일구국교육 방침으로 민족독립 인재 양성에 전력하였다. 그러나 위만주국이 세워지는 등 형세의 변천과 일제의 노화교육이 점점 극심해짐에 따라 이런 사립학교들은 위만주국 공립학교로 변신되면서 운영 내용과 형식에 부동한 색채가 나타났다. 허나 조선족 학생들의 민족정기와 민족정신은 고스란히 살아 있었던 것이다.

 

저명한 저항시인 윤동주와 청년 문사 송몽규, 조선 영화 창시자의 한 사람인 나운규 등은 모두 명동학교와 은진 학교의 출신이고, 조선 국가 부주석을 담당했던 이종옥은 동흥중학교 출신이며 유명한 소설 『순애보』의 작가 박계주도 광명중학교 출신이다. 

 

윤동주와 송몽규 두 사람은 일제의 모진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생명의 마지막 순간까지 싸웠다. 반일정신으로 배양된 각 학교의 열혈 청년들은 평소에 닦아 온 기량으로 일제와의 대결에서 용맹을 떨쳤었다.

 

1919년 3월 13일, 용정에서 일어난 반일시위운동 가운데서 명동학교와 정동학교의 학생들은 선두적 역할을 담당했다. 특히 명동학교 학생들은 ‘충혈대’를 조직했고 정동학교 학생들은 군악대를 조직하여 시위 대오의 제일 앞장에 서서 제일 용감하게 간도 일본 총영사관을 향해 돌진하였다. 

 

간악한 일제의 사촉 하에 맹부덕(孟富德)을 퇀장으로 한 중국지방부대의 무장탄압에 의해 시위 대오 중에서 10명이 당장에서 희생되고, 그때 부상으로 하여 후에 다시 7명이 사망하고, 숱한 사람들이 상하고 체포되는 일이 발생하였다.

 

그러나 조선민족들은 더 떨쳐나서서 선열들의 시체를 묻고, 피를 닦고서 반일항일운동과 항일무장투쟁에 뛰어들었다. 그 해 3월 13일부터 5월 중순까지 당시 북간도(연변) 지역에서만도 마흔여섯 차례의 반일집회와 시위가 있었는데 그 참가자 수는 86,670여 명이 되었고, 서북간도를 위주로 한 15개 현에서 일흔세 차례의 반일시위와 집회가 거행되었는데 그 참가자 수는 무려 105,850명이나 된다.

 

용정 3․13반일운동에서 피의 교훈을 얻은 북간도반일민족운동 지휘부 에서는 무장한 적은 반드시 무장으로 대적하여야 한다는 결의를 갖고 무장 투쟁에 궐기했다. 1920년 1월 4일 국민회 산하의 철혈광복단 6명 성원 (림국정, 윤준희, 한상호, 최봉설, 김준, 박웅세)들이 용정 부근 동량리어구에서 길회철도 부설금 일화 15만원을 탈취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리고 그 해 6월, 홍범도 장군이 지휘하는 항일 무장 대오가 왕청현 봉오동에서 일본군 정규군을 수백 명 살상하고 총을 비롯한 많은 군수품을 노획한 봉오동승첩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어 같은 해 10월 홍범도, 김좌진 장군 등이 지휘하는 항일 무장 대 오가 화룡현 청산리 지역에서 일본 정규군과 맞서 싸워 일군 1,200여 명이나 살상한 청산리대첩을 승리로 이끌었다.

 

그리고 1933년 7월 흑룡강성 수분하(綏芬河) 대전자령(大甸子嶺)에서 항일독립연합군이 일군과 싸워 승첩을 거두었다. 후세 사람들은 봉오동승첩, 청산리대첩과 대전자령전투를 반일․항일독립군의 3대첩이라고 부르고 있다. 

 

중국 관내에서는 조선의용군(의용대)을 조직하였으며 동북에서는 항일유격대와 항일연군을 조직하여 여러 민족 인민들과 함께 일제 침략자들과 간고하고도 처절한 무장투쟁을 벌렸다. 그리하여 나중엔 세계 반(Anti)파쇼전쟁의 승리와 더불어 일본 제국주의를 타도하고 8․15 광복을 맞기에 이른다.

 

숭모사업(기념사업)

 

보재 이상설 선생은 학식이 연박하였을 뿐만 아니라 또한 구국의 대의를 내세운 저명한 사회활동가이자 걸출한 정치외교활동가였다. 이렇게도 숭고한 선생의 업적에 대하여 우리 용정에선 80성상 되도록 아직 물어보는 사람조차 없었다. 그럴 만하기도 한 것은,

 

첫째로 광복 전에는 일제의 탄압으로 목숨마저 부지하기 어려운 살벌한 세월이라 우리 민족의 거룩한 역사를 새겨서 지킬 수 없었다.

 

둘째로 광복이 된 다음 중국에서 연속적으로 전개되는 정치운동과 계급투쟁 때문에 소용돌이 속에서 몸부림을 쳤기에 자기 민족 역사를 떠올릴 기회와 여유가 적었다.

 

셋째로 개혁개방 이후에도 이 눈치, 저 눈치를 봐야 하고 또 저절로 ‘민감하다는 모자’를 쓰고 역사 진실에 대한 무지로 하여 엇갈린 시비를 하거나 심지어 민족역사 재조명에 대해 잘 못 보는 현상도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여건에서 기념사업을 전개하였다 하더라도 중국 봉건사회의 ‘쪽발여인(小脚女人)’의 걸음을 방불케 하였을 것이다.

 

필자가 속해 있는 용정 3․13기념사업회에서 3․13반일운동 기념사업과 이상설 기념사업을 벌리게 된 것은 인하대학교 명예교수인 윤병석 선생과 연변대학 박창욱 교수님 등의 지도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1988년 윤병석 교수께서 용 정에 몸소 와서 용정 3․13반일운동 기념사업을 벌이는 데 대해 여러 가지를 지도해 주었고, 박창욱 교수 역시 여러 차례 용정에 와서 문헌자료를 제공해주고 3․13반일운동 기념사업과 이상설 기념사업을 전개할 정당성에 대해 강조하는 한편 그 구체적인 방법에 대하여 지도해 주었다.

 

그리하여 용정 3․13기념사업회에서는 3․13반일운동 기념사업을 하는 한편 이상설 업적 연구에도 진력하면서 이상설 선생이 세웠던 서전서숙의 옛터를 반복적으로 조사․고증하고 1995년 4월, 지금의 용정실험소학교 교정 내 동남편에 서전서숙 옛터 기념비를 세우고 이상설의 업적과 서전서숙에 대해 여러모로 홍보하였다.

 

용정실험소학교 전임 교장 정금석은 ‘서전서숙 옛터’라는 역사적 함의가 있는 비석이 세워지자 서전서숙을 용정실험소학교의 전신으로 인정하고, 서전서숙 옛터 기념비 부근에 이상설 정자도 세우고 교정 내 느릅나무 한 그루를 학교 대표나무로 정하였으며, 이상설을 용정실험소학교 첫 교장으로 모시면서 여러 가지 기념활동을 벌이는가 하면, 2001년 9월에는 서전서숙 개숙 95주년 및 용정실험소학교 건교 95주년 기념식을 용정영극원에서 거행하였다. 

 

그날 대회 때 나는 ‘서전서숙’ 옛터 기념비 건립자 3․13기념사업회 회장 신분으로 학교 초청을 받고 뜻있는 경축 행사에 동참하였다. 현재 용정실험소학교를 맡고 있는 허옥선 교장은 2006년 이른 봄부터 ‘서전서숙 개숙, 용정실험소학교 건교 100주년 기념대회’를 개최할 준비를 서둘렀고, 2006년 9월 20일엔 수천 명이 참석한 서전서숙 개숙 100주년 및 용정실험소학교 건교 100주년 기념활동을 성대히 벌였다. 

 

그날 서울의 이상설 기념사업회에서도 40여 명의 대표단을 파견, 대회에 참석하게 되었다. 용정 3․13기념사업회에서는 1997년 4월에 지정석 크기의 서전서숙 옛터 기념비를 세웠다가 2002년 5월 높이가 2미터, 무게가 몇 톤 되는 자연석을 두만강변에서 실어다 원래의 서전서숙 옛터 기념비 자리에 다시 웅장하고도 멋진 기념비를 교체하여 세웠다. 

 

그리고 용정실험소학교에서 이 기념비를 관리하고 학생들에게 그 뜻과 역사적 의미를 가르쳤다.

 용정 3․13기념사업회는 2006년 9월 5일 연변역사학회와 공동주최로 용정호텔 국제회의실에서 「중국 조선민족교육과 반일운동」이란 주제로 서전서숙 개숙 100주년 기념 학술회를 개최하였고 그 해 12월에 서전서숙 개숙 100주년 기념문집 『력사의 종소리』를 출판, 발행하였다. 용정실험소학교 박경자 부교장도 학술회에 논문을 발표했고 그의 논문도 기념문집에 함께 실렸다. 

 

이 기념문집에는 서전서숙과 이상설에 관한 논문 등 12편이 실렸고 용정과 연변의 반일, 항일투쟁을 반영한 문학작품과 관련 사진도 실려 이상설 선생과 서전서숙을 홍보하고 그 기념사업을 추진하는 데 커다란 도움이 되었다.

 

한 민족의 민족정기, 민족정신은 그 민족이 생존하고 발전할 수 있는 정신적 기둥이다. 우리 3․13기념사업회에서는 매년 9월을 이상설, 서전서숙 기념활동의 달로 정하고 용정실험소학교와 함께 기념행사를 추진할 계획이다.

 

2007년 6월은 이상설, 이준, 이위종 세 특사께서 헤이그만국평화회의 사행 100주년이 되는 달이고, 지난 2006년은 이상설 선생께서 세운 서전서숙을 효시로 하는 중국 조선족 근대교육 100주년이 되는 해였다. 그러므로 우리 용정 3․13기념사업회에서는 해당 기관, 단체와 긴밀히 협력하여 올해 안으로 용정실험소학교를 도와 용정실험소학교에 ‘서전서숙 개숙 100주년, 연변 교육 발전 100주년 기념 전시관’을 꾸리는 데 적극 힘쓰고자 한다. 이것이 곧 이상설 선생의 넋을 영원히 기리는 하나의 불씨가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

 

[글쓴이] 

최근갑(중국 용정 3.13기념사업회 회장)

1926년 중국 화룡(和龍)에서 독립운동가 최정남의 아들로 출생. 은진중학을 졸업하고 용정시 건설국장을 역임하였으며, 용정시 대외경제문화교류협회 회장과 용정3․13기념사업회 회장 등을 맡아 해내외 동포의 문화 교류 증진, 연변지역 항일독립운동 사적 발굴과 정화사업을 선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