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독일 제국과의 동맹
1915년 3월, 이상설은 상해 영국 조계내의 배달학원에서 박은식·신규식·조성환·유동열·이춘일 등 독립운동가 들과 회합했다. 이들은 이 모임에서 당시 유럽에서 승승장구하고 있던 독일이 승리할 것으로 예상하고, 그에 따른 광복운동의 방략을 논의했다.
그 결론은 국내와 국외를 효과적으로 연결하면서 독립전쟁을 주도할 신한혁명당(新韓革命黨)을 조직하자는 것으로 모아졌다. 외교 분야를 담당키로 한 성낙형의 주장은 이러했다.
"이번 전쟁에서는 독일이 승리할 것이고, 일제의 지나친 요구에 시달리고 있는 중국인들도 독일과 결탁해서 일제와 결전할 것이고, 러시아와 영국과 미국도 합세하면 일본이 고립될 것이므로, 이를 독립회복의 적기로 삼아야 한다.
그리하여 해외에 있는 사람들은 외세를 이용하고, 국내에 있는 사람들은 실력으로 응하여, 비밀정부를 조직하고 군비조달을 확보하고, 각국의 원조를 획득하기 위한 외교적 수단으로 중국과 중한의방조약(中韓誼邦條約)을 체결하되, 그 내용은 '대한국에 혁명전쟁이 일어날 때, 중국이 군수물자와 병기 등을 공급하며 독일이 이를 보증하고 혁명이 성공한 후에는 내정간섭은 배제하고, 실패할 경우에는 주도자를 보존해준다'는 것으로 해야 한다."
즉 독일이 유럽전선에서 승리할 경우 일제와도 전쟁에 돌입할 것이며, 그럴 경우 중국도 반드시 독일과 연맹해서 일제와 전쟁을 벌일 것으로 예상되므로, 그러한 시기에 맞추어 광복전쟁을 선언하고 일제와 싸우자는 의도였다.
광복전쟁은 대한광복군정부의 군대조직과 라자구의 사관학교 출신자들을 동원해 국내로 진공한 후, 일제의 요새지를 공격하고 신의주·안동·봉천 등지의 철도를 장악해 일본을 물리치자는 것이었다. 주1)
이 같은 취지의 목표를 정한 신한혁명당은 본부를 북경에 두고 이상설을 본부장에 선임했다. 각 지부로 만주에는 봉천·장춘·안동·연길, 중국 본토에는 상해·한구, 국내는 서울·원산·평양·회령·나남 등에 두었으며 지부장들도 선임했다.
외교부장에는 성낙형, 교통부장에는 유동열, 재무부장에는 이춘일, 감독에는 박은식, 상해지부장에는 신규식, 장춘지부장에는 이동휘, 연길지부장에는 이동춘, 회령지부장에는 박정래, 나남지부장에는 강재후가 각각 선임되었으며, 박은식이 취지서와 규칙 등을 작성했고, 군자금 모금의 방법은 중국혁명당의 방법을 따라 국내외에서 모든 방법들을 동원하기로 했다.
신한혁명당의 당수로는 강제 퇴위당한 광무황제가 추대되었다. 그 이유는 독립전쟁을 성공리에 수행하기 위해서는 국내외 모든 대한인 들이 일체단합해서, 민족역사정통성의 상징이며 여전히 대한국인들의 지지도가 가장 높은 광무황제를 구심점으로 하는 공고한 망명정부를 건설해야 한다는 데 의견이 모아졌기 때문이다.
또 중국에서도 대총통 원세개가 황제 즉위를 시도하고 있었으며, 독일도 제정(帝政)이었기 때문에 그 나라들의 후원을 얻으려면 공화정보다는 제정이 일단 유리할 것이라는 판단에서 나온 것이다.
이렇게 독일이 승리하기를 바라는 광무황제와 신한혁명당의 의도는, 1차 대전이후 러시아가 국익우선방침에 따라 일제와 동맹을 맺고 대한인들의 광복운동을 엄격히 규제한 데서 비롯되었다. 즉 러시아가 일본과 함께 연합국의 일원이 되어 더 이상 러시아를 믿고 의지할 수 없었고, 영국이나 미국도 여전히 일본을 옹호하는 정책을 취하며 같은 연합군에 속해 있었기 때문이다.
신한혁명당원들이 독일의 승리를 지나치게 낙관적으로 평가했지만, 병탄 후 처음 찾아 온 기회를 맞아 대한의 독립이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바라는 애국지사들에게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러한 국제 정세를 파악했던 광무황제는 이미 1914년 12월에 밀사를 통해 북경주재 독일공사 힌체(Hintze)에게 친서를 보냈다.
광무황제의 친서를 접수한 힌체 공사는 이를 번역했고, 1915년 6월 2일에는 독일외무성에 보고된 문건에 첨부되었다. 이 친서에서 광무황제는 일제가 황제의 고유 권한이어야 할 옥새와 국새모두를 탈취해버린 사실을 밝혔고, 일제의 불법행위를 통렬히 비판하면서 독일과의 연합을 시사했다. 주2)
이처럼 광무황제와 애국지사들의 뜻이 일치하면서 신한혁명당의 활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주1) 1915년 5월 대한광복군정부 정도령 이동휘의 명의로 노령을 제외한 훈춘, 북간도, 서간도의 각 군구사령관과 각
급 군직을 임명했다. 즉 대한광복군정부 조직과 라자구의 사관학교는 권업회 해산이후에도 1915-6년까지 존속했
음을 알 수 있다.
☀주2) 독일 황제에 보낸 광무황제의 친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우리의 선의의 동지, 존귀하신 대독일제국의 위대한 황제 각하께
각하께서 폭력을 앞세우는 세 나라의적들을 제압하는데, 올바른 노여움을 행사하신 후에, 한편으로는 우호국들이 이루 말할 수 없는 기쁨으로 각하를 우러러보는 동안, 전 세계는 각하의 승리의 깃발을 두려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지금 저는 귀국과 우리나라사이에 벌써부터 맺고 있는 우호관계와 우리국가가 귀국에게 가지고 있는 특별한 우정에 대해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하나의 방해물이 이런 우리의 우호관계 사이에 끼어들어 저를 수심에 잠기게 하고 있습니다......
저는 유별나게 악질적이고 교활한 강대국인 이웃일본이 선동적인 내 나라의 반역자들의 도움을 받아 군대를 데리고 와서 나를 위협해서 그러한 속박상태에 처하게 만들고, 포기해야만 하는 운명이 되게 했습니다.
저의 지위와 계급을 빼앗고, 군주인 저의 옥새(Herrscher -Insignien)를 빼앗고, 저의 황후를 시해했으며, 지금까지도 같은 방법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나는 줄곧 앉아서 모욕을 당해야 합니다. 나의백성들은 밤낮으로 이를 갈며 기회를 보고 있습니다.
부자유보다는 죽음을 택하려는 것이며 이러한 생각은 전국에 만연되어 있습니다. 각하의 힘만이 나를 도울 수 있으며 나는 새로운 삶을 바라볼 수 있게 됩니다. 독일제국의 도움은 나에게만 축복을 주는 것이 아니라 각하의 제국에도 새로운 영광을 가져다 줄 것입니다......
전에는 제가 사용할 의무가 있었던 국새(Reichssiegel)가 이제는 적의 수중에 들어가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서신의 증명을 위해서 단지 제가 일상적으로 쓰는 인장을 쓰고 있습니다... 저의 나라가 세워진 후 523년째 되는 해, 12월 22일......번역 : Krebs
2. 한중의방조약(韓中誼邦條約)
대한광복군정부 수뇌들과 상해의 동제사(同濟社) 세력의 지혜가 총동원된 신한혁명당은 곧 실행에 들어갔다. 주1)
본부장이상설과 교통부장유동열은 북경에 가서, 김 순이라는 동포의집에 본부를 차렸고, 조성환은 만주지방의 조직 강화를 위하여 서간도로 출발했고, 외교부장성낙형은 광무황제와의 연락을 취하며 광무황제로부터 중국정부와의 한중의방조약(韓中誼邦條約)의 체결에 필수적인 신임장을 받아 오기위해 국내에 잠입했다.
한중의방조약은 '독일정부의 보증 하에 중국정부와 신한혁명당이 대한국망명정부사이에 사전 군사동맹을 체결해 독립전쟁에 대비한다. 한민족이 독립전쟁을 감행하면 중국정부는 즉시 군대와 무기를 후원하며, 중일전쟁이 일어날 경우 대한국독립군은 중국을 도와서 일제의 안봉철도(안동에서 봉천까지의 남만주철도)를 파괴하고 한중공동의 항일전선을 구축 한다'는 매우 구체적인 내용으로 작성되었다.
그 외에도 수십 개 조에 달하는 조약안에는 대한국을 광복한 후, 대한국은 30년간 중국의 원조에 대한 배상을 실시할 것이며, 중국이 배상을 구실로 대한국의 내정에 간섭하지 못한다는 사후적문제까지도 주도면밀하게 명기해 놓았으며, 독립전쟁기간에 중국 측에서 군관을 파견해주는 문제등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조약의 체결은 중국원수와 대한국망명정부 원수 및 독일황제의 인준까지 거쳐서 하도록 하고, 대한국이 광복될 때까지는 서로가 비밀을 지킬 것을 명시하기도 했다. 계획에 따라서 국내에 잠입한 혁명당간부들은 많은 동지들을 규합할 수 있었다.
그리고 1915년 7월 26일에는 내관 염덕인을 통해서 신한혁명당의 계획이 담긴 서찰과 관계서류 등을 광무황제에게 전했으며, 광무황제는 외교부장성낙형을 직접만나기 위한 알현까지 내렸다. 한편 중국에서는 이상설 등 간부들이 원세개 총통 및 조병균·장훈·장작림·단지귀·전능훈·양사기 등 중국의 중요한 정객들과 교섭을 벌이고 있었다.
하지만 성낙형은 고종의 밀명을 받기위해 활동하던 중 일제와 밀정들의 감시망을 피하지 못하고 일본경찰에 붙잡힘으로써 신한혁명당의 작전은 실패로 돌아갔다. 즉 광무황제는 물론 의친왕 이강과도 연락하면서 열성적으로 활동하던 성낙형과 의친왕의 장인 김사준 등 대부분의 관련자들이체포된 것이다. 이 사건이 1915년 일제에 의해 비밀리에 붙여진 소위 '보안법위반사건'이었다.
☀주1) 동제사는 1912년 7월 경 중국에서 신규식 등이 상해에 망명한 독립운동가와 일본에서 건너온 한국인유학생들을
규합해 조직했는데, 표면적으로는 상해 거류한인의 상조기관처럼 활동했으나 실제목적은 독립운동이었다.
상해에서 조직된 최초의 한국인독립운동 단체로서, 1919년 상해임시정부가 수립되기 전까지 상해 한국인의 중심
조직으로 그 역할을 다했다.
동제사는 1917년 8월에 당시 스톡홀름에서 국제사회주의자대회가 열린다는 소식이 있자, 이 대회에서 한국이 독립할 수 있도록 국제적인 지원을 요청할 목적으로 잠시 조선사회당으로 이름을 바꾸기도 했고, 1918년 8월에는 파리강화회의에 파견하기 위해 동제사의 청년들 중심으로 신한청년단을 조직하기도 했다.
3.이상설의 순국
제 1차 세계대전은 이상설의 염원과 달리 독일이 승리하지 못했고, 중국도 막판에는 연합국 측에 가담했다. 따라서 신한혁명당의 활동은 기대했던 만큼의 좋은 결과를 얻을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신한혁명당의 활동은 방만하게 흩어졌던 광복투쟁전선을 단일화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하지만 이상설은 고종을 국외로 탈출시켜 망명정부를 만들고 그것을 기점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하려는 보황주의(保皇主義)를 극복하지 못했다. 따라서 신한혁명당의 독립운동 전략은 결과론적으로 실패했다.
☀주1)또 독립운동에 열중한 나머지 건강을돌보지 못한 이상설은 1916년 초부터 하바로브스크에서 투병생활에 들어갔
다. 차도가 없자 기후가 온화한 니콜리스크로 옮겨 요양을 하였으나 병세가 호전되지 않아, 결국 이상설은 1917년
3월 2일 47세를 일기로 순국하고 말았다.
이상설은 시대에 비해 매우 생각이 깨이고 서구에 대한 풍부한 지식을 가지고 있고 국제정세에도 밝은 편이었다. 1907년 헤이그 밀사이후로는 거의 매년, 가는 곳마다 조직을 만들 정도로 민족운동을 위한 단체나 조직의 창립에 늘 중요한 역할을 하거나 배후에서 활동했다.
하지만 이상설은 고단한 망명생활, 부단한 해외독립운동으로 누적된 과로, 독립운동 과정에서 겪은 열강들의 담합, 지역주의로 인한 좌절 등으로 깊은 상처가 건강을 해쳐, 한창 활동할 나이에 세상을 떠난 것이다.
선생은 임종을 지킨 동지들에게 “동지들은 합세하여 조국광복을 기필코 이룩하라. 나는 조국광복을 이루지 못하고 이 세상을 떠나니 어찌 고혼인들 조국에 돌아갈 수 있으랴. 내 몸과 유품은 모두 불태우고 그 재도 바다에 날린 후 제사도 지내지 말라”는 서릿발 같은 유언을 남겼다.
임종을 지킨 이동녕과 백순, 조완구, 이민복 등은 선생의 유언을 따라 아무르 강가에 장작을 쌓아놓고 화장하여 그 재를 북해바다에 날렸다. 이때 동지들의 안전을 고려해 유언대로 선생의 문고(文藁)와 유품도 거두어 불살랐다.
안중근은 거사 뒤 여순감옥에서 일제의 심문을 받을 때 “이상설의 포부는 대단히 크다. 세계대세에 통하고 동양의 시국을 간파하고 있다”고 말하고 “여러 차례 만나서 그의 인물을 보니 기량이 크고 사리에 통한 대인물로서 대신의 그릇됨을 잃지 않는다”라고 높게 평했다.
또 권오돈은 “석오 이동녕과 우당 이회영선생도 의지로나 지모로나 당당한 지도자이지만 그 두 분은 처음부터 합심(合心) 되지 못했다. 그 두 분은 오직 보재 이상설선생이 생존해 계시어야만 그 두 팔과 같은 활동을 할 수 있던 것이다.
만일 보재 선생이라는 뇌두(腦頭0가 없다면 그 두 팔은 제대로 움직이지 못할 것이다......”라면서 이상설의 사후 선생의 뛰어난 지도력의 부재(不在)를 아쉬워했다.
이상설을 뛰어넘어, 대동단결선언으로
독립운동의 지도적 구실을 담당했던 이상설의순국과 함께 한시대도 저물어갔다.
1917년 때마침 러시아에서는 제정이 무너지고 혁명이 일어났다. 노동자와 농민이 중심이 되어 황제를 권좌에서 끌어내렸다. 또 핀란드와 폴란드가 독립을 선언하며 임시정부를 수립하면서 같은 처지에 있던 약소민족들이 고무되었다.
그리고 제1차 세계대전에 미국이 참전함에 따라 연합국이 전세를 만회하면서 독일의 패전이 완연했다. 중국도 이미 전통질서를 부정한 신해혁명으로 뿌리 체 흔들리고 있었다. 이제 한인들의 독립운동의 조직과 전략도 근본적으로 전환되어야 했다.
따라서 이러한 안팎의 요구에 따라 신해혁명에 참가하거나 영향을 받은 독립운동가들이 중심이 되어 1917년 7월 <대동단결선언문>을 발표한다. 즉 이들은 망명정부 수립계획을 전환하면서 국민주권설에 입각해 임시정부수립을 향한 새 물꼬를 틀었다.
또 이상설을 따르던 신한혁명당의 독립운동가 들도 선생의 타계이후 보황주의를 청산하고 공화주의, 아나키스트, 사회주의 등 다양한 독립운동의 노선을 걸으면서 이상설이 못 다 이룬 조국 독립을 위해 더욱 매진했다. 주2)
☀주1) 신한혁명당(新韓革命黨)이란 당명의 ‘신한(新韓)’에서 볼 수 있듯이, 신한혁명당에는 신해혁명의 영향을 받아 공
화주의를 수용한 동제사의 신규식, 박은식, 신채호 등과 입헌군주론에 입각한 보황주의자들이 뒤섞여 있다.
하지만 동제사 회원들은 급박한 정세 변화 속에서 전략적으로 망명정부수립을 통한 입헌군주정수립에도 기대를
갖고 신한혁명당에 참여했을 것이다. 또 신규식보다 8살 위인 지도자 이상설의 광복전선통합운동에 공감을 하면
서 동제사의 확장을 위해 일시적으로 연합했을 가능성도 있다.
따라서 신규식 등 동제사의핵심 인물들이 이후 대동단결선언문의 공화주의 제창, 파리강화회의의 외교적 노력을 위한 신한청년단 조직, 상해임시정부 수립에 기여한 점을 높이 평가하다보니 동제사가 보황적인 신한혁명당에 참여한 것을 의도적으로 무시하거나 간과하고 있다.
◇주2) 김상구의 <범재 김규흥과 3.1혁명>에서도 ‘신한혁명당’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고, 또 범재 김규흥의 역할도 눈에 띄지 않는다. 즉 김규흥은 이 시기에 중국국민당 또는 원세개 내각에 관여하고 있었으며, 동제사를 배후에서 지휘했을 것으로만 추정할 뿐이다.
그리고 초기 동제사 요원들의 원래 성향이 준비론과 외교론에 치우친 신민회 출신이고, 파리회담 후 김규흥이 무장투쟁론으로 급선회하자 동제사도 이 노선을 따르는 자와 거부하는 그룹으로 분열되었고, 이것이 임정 노선 갈등의 한 원인이 되었다 보고 있다.(205-207쪽)
하지만 초기 동제사 회원들은 신민회의 주류로 볼 수 없고, 신민회의 노선도 준비론, 외교론으로 단정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즉 비밀조직 신민회 주류 내부에는 실력양성론 뿐만 아니라 무장항쟁을 강조하는 독립운동기지론 등 다양한 노선이 공존하고 있었다.
출처 : 우성 박용만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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