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보재이상설선생.

세계를 독립운동기지로-이상설

야촌(1) 2015. 9. 23. 07:34

세계를 독립운동기지로 - 이상설

 

이상설선생 존영

 

“이 분의 포부는 매우 크며, 세계 대세에 밝고 동양 시국을 간파하고 있다. 이범윤 같은 인물 만인을 모아도 이상설 한 분에 못 미칠 것이다....수차 만나서 그 인물을 보니 기량이 크고 사리에 통하는 대인물로서 대신(大臣)의 그릇됨이 부족함이 없더라....

세계 대세에 통하고 애국심이 강하며, 교육 발달을 기도하고 국가 백년대계를 세우는 사람은 이 분일 것이다. 
또한 동양 평화주의를 갖는 점에 있어서 이 분과 같이 초절한 마음과 뜻을 가진 사람은 참으로 희귀한 것이다.”

 
이 글은 안중근 의사가 뤼순[旅順] 감옥에서 처형에 즈음하여 쓴 이상설에 대한 인물평이다.

 

 

●이상설의 역사적 배경 

 

   이상설(李相卨, 1870~1917)은 1870년에 이행우(李行雨)와 벽진이씨(碧珍 李氏) 사이에서 출생하였고, 1876년 7세 때에 동부승지(同副承旨) 이용우(李龍雨)의 양아들이 되어 한성부 남부 장동 장박골로 갔다.

 

1894년 문과에 급제한 뒤 성균관 교수, 한성사범학교(漢城師範學校) 교관 등을 역임하였고, 외국어(영어, 불어, 러시아어, 중국어)와  수리(數理)에 뛰어났다.

 

1904년에는 대한협동회를 조직하여 민족운동을 하였으며, 탁지부 재무관 법부협판을 거쳐 1905년에는 의정부 참찬에 발탁되었으나 을사늑약으로 나라가 위태로워지자 1906년 4월에 국권회복운동에 앞장설 것을 결심하고 이동녕, 정순만과 같이 망명길에 올라 상하이[上海]를 거쳐 북간도 룽징[龍井]으로 가서 서전서숙을 건립하고 항일민족교육을 하였다.

 

1907년 6~7월 헤이그에서 개최되는 만국평화회의에 고종의 위임장을 받고 이준, 이위종과 함께 참석하여 일제침략의 부당성과 잔혹상을 국제여론에 호소하려다 실패했으며 이준은 현지에서 순사하였다.

 

이상설은 귀국하지 않고 영국·프랑스·독일·미국 등지를 다니면서 일본의 침략을 폭로하고 한국의 독립이 동양평화의 열쇠라고 주장하였다. 1910년 국권피탈 후 러시아 연해주로 이주하여 한흥동에 한인마을을 건설하고 민족교육을 실시하였다.

 

1914년 연해주 한인 이주 50주년을 맞이하여 대한광복군정부를 수립하고 항일 무장투쟁을 계획하다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 무산되었다. 1915년에는 신한혁명단을 조직, 고종의 중국 망명을 추진하고 독일과 손잡고 일본과 싸울 것을 계획하던 중 탄로나 실패했다. 

 

이에 병을 얻어 1917년 3월 48세 때 니콜리스크에서 사망하였다. 1916부터 피를 토하는 중병을 얻어 투병하면서 마지막에는 ‘조국 광복을 보지 못하는 내 몸을 화장하여 그 재를 바다에 뿌리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의 임종을 지킨 이동녕, 백순, 조용철, 김완수, 이민복 등은 그의 유언에 따라 문고, 유품과 함께 아무르 강가에서 화장하여 재로 뿌렸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