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보재이상설선생.

이상설 특사의 불꽃같은 독립운동

야촌(1) 2015. 9. 19. 12:29

잃어버린 한국고대사 연구회

 

이상설 특사의 불꽃같은 독립운동| 역사이야기

홍순주 | 조회 249 |추천 0 | 2015.08.14. 12:31

 

이상설((李相卨, 1870~1917) 선생은 1870년 충청북도 진천군에서 태어나 7세 때인 1876년, 동부승지 이용우의 양자가 되어 서울로 올라오게 되었다. 선생은 한학뿐만 아니라 근대적 학문도 거의 독학으로 도달한 비범한 인물이었는데 1894년(고종 31년) 25세 때 조선조의 마지막 과거(갑오문과)에 급제하기에 이르렀다.

 

관계에 진출한 선생은 한림학사(翰林學士)에 제수되었고 그 후 1896년 1월에는 27세의 나이로 성균관 교수 겸 관장이 되었으나 관직생활은 오래 지속되지는 않았다. 따라서 선생은 전통 학문인 성리학을 바탕으로 하는 유학은 물론, 정치, 법률, 경제, 수학, 과학 등 모든 신학문 분야에까지 연구를 하였고 이 시기에 미국인 선교사로 육영공원 교사로 초빙된 헐버트(H. B. Hulbert)와 교분을 갖게 되었다.

 

이상설 선생은 독립협회의 민권사상이 널리 보급되던 무렵 시대적 변화에 따라 신학문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근대적 학문을 본격적으로 공부하였고 특히 개화와 국권수호를 위한 국제정치와 법률의 대가로 지칭되었다.

 

이 무렵 일제는 1904년 5월, 대한시설강령(對韓施設綱領)을 결정하였는데 이는 한국의 황무지 개척권을 갖고 일본의 식량과 원료의 공급지로 개편하고자 하였다. 이상설 선생이 고종 황제에게 올린 상소는 “일본의 요구를 물리치지 않으면 국권을 지킬 수 없으며 황무지의 개척을 자국민이 하지 않으면 국가재정이 파탄될 것이기 때문에 반드시 일본의 요구를 물리쳐야 한다”는 것이었다.

 

한편 일제는 러일전쟁이 자국에 유리하게 전개되어 가자 한국 병탄의 기본정책을 확정해 놓고 마침내 1905년 11월 17일 광무황제와 대신들을 위협하여 이른바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게 하였다.

 

1905년 1월부터 의정부 대신회의 실무를 총괄하는 참찬의 지위에 있던 선생은 상소를 올려 사직(社稷)을 위해 몸을 바칠 각오로 조약에 반대할 것을 촉구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선생은 이회영, 이동녕 등과 의논하여 1906년 4월 국외망명을 결정하였고 북간도 중에서 연길현 용정촌에 들어가 서전서숙(瑞甸書塾, 만주에 설립된 한국 최초의 신학문 민족 교육기관)을 설립하고 숙장을 맡아 직접 산술을 가르쳤다.

 

1906년 4월, 제정 러시아의 황제 니콜라이 2세가 발의한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리는 제 2차 만국 평화회의에 고종 황제도 비밀리에 초청장을 받은 상황에서 이상설 선생은 수석 특사로 참가하라는 황제의 명을 받고 용정을 떠나 연해주로 가게 되었다. 이 회의에 선생을 비롯하여 이준, 이위종 등 세 사람을 비밀리에 특사로 임명하였는데 이상설 선생이 정사(正使)였고 이준과 이위종이 부사(副使)였다.

 

이밖에 헐버트는 따로 광무황제의 친서를 휴대하고 헤이그 현지에서 별도로 활동하도록 하였다. 만국 평화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선생과 이준은 1907년 4월, 연해주의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합류하였고 그 해 6월 중순, 러시아의 수도 페테르부르크에 도착한 그들은 전 러시아주재공사 이범진의 아들 이위종을 만나 특사의 진용을 갖추었다.

 

그리하여 세 특사는 일제의 감시망을 피하고 1907년 6월 24~25일경 네덜란드 헤이그에 도착하는데 헤이그 시내 융 호텔(Hotel De Jong)에 숙소를 정하고 호텔에 당당히 태극기를 내걸고 한국의 사절로서 공개적으로 당당하게 활동하였다.

 

우선 그들은 만국평화회의에 한국 대표로서 공식으로 참석하기 위해 6월 29일, 회의의 의장인 넬리도프(Nelidof) 백작에게 의장 직권으로 회의참석을 요구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고 이 밖에도 특사들은 미국 대표를 비롯하여 프랑스, 중국, 독일 등 각국 위원에게도 회의 참석을 요구하는 협조를 구하였으나 일제의 방해로 실패하였다.

 

특사들이 비록 일제의 방해와 열국의 외교적 외면으로 회의 참석은 거부되었으나 구미 각국 신문기자단의 국제협회에서 한국문제를 정당하게 다루게 되었는데 선생은 7월 9일에 열린 기자단 모임에 이위종과 함께 귀빈으로 초청되었고 이 자리에서 이위종은 프랑스어로 ‘한국의 호소’(A Plea for Korea)라는 제목의 연설을 하면서 활약하던 중 7월 14일, 특사 가운데 한 사람인 이준이 순국하였다.

 

헤이그 특사는 실질적인 소득을 거두지 못한 채 오히려 일제의 한국침략을 촉진시키는 구실을 주고 말았는데 통감 이토 히로부미는 1907년 7월 18일, 고종 황제에게 헤이그 밀사의 책임을 추궁하며 강제로 퇴위시켰다.

 

이상설 선생은 구미 각국 순방외교를 마친 이후 1908년 2월, 미국으로 건너가서 있다가 콜로라도주 덴버에서 7월에 개최된 애국동지 대표회에 러시아령 시베리아 위임대표로 참석하였다.

 

이상설 선생은 1909년 4월, 다시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갔는데 이곳에 도착한 후 선생은 한민회 지도자들을 규합하여 독립 운동기지를 건설하기 위한 자금을 모금하였으며 연해주와 북간도 일대의 의병을 통합하기 위해 십삼도 의군을 1910년 6월에 편성하였고 외교통신원의 책임을 맡았지만 8월에 나라가 망하여 그 활동기간은 매우 짧았다.

 

이상설 선생을 비롯한 십삼도 의군의 중심인물들은 1910년 10월, 한일 강제병탄이 현실화되자 병탄조약 무효를 선언할 항일단체로 ‘성명회’를 조직하기로 결의하였다. 이 성명회에서 일본 정부에 국제공약의 배신을 규탄하는 성토문을 보내고 각국 정부에는 합병무효를 선언하는 전문과 성명회 선언서를 보내는 등 독립활동을 벌이게 되자 일제는 러시아 당국에 성명회 주요 인물들의 체포와 인도까지 요구하였다.

 

이로 인해 러시아 당국은 8월 30일, 선생을 비롯하여 성명회와 십삼도 의군의 주요인물 42명을 체포하였으며 이때 체포된 선생은 니콜리스크로 추방되었다가 1911년에 블라디보스토크로 겨우 귀환할 수 있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1911년 5월 권업회가 창립되었는데 형식상으로 상공업 등의 실업활동을 권장하고 민족교육과 한인사회의 정치적 경제적 지위향상을 도모하는 활동을 전개하였으나 실제로는 ‘독립전쟁론’을 구현하는 데 활동목표를 설정하여 이를 위해 비밀리에 광복군의 양성을 도모하였다.

 

권업회의 광복군 양성 활동은 선생에 의해 기획되고 주도되었는데 그 실상은 1913년 동북만주 나자구(羅子溝)에서 대전학교(大甸學校)라 부르는 사관학교를 운영하고 있었던 사실에서 잘 알 수 있다.

 

1914년에 권업회의 핵심인물들은 연해주를 비롯하여 북간도지역에서 활동하는 독립 운동자들로 규합된 대한광복군 정부를 건립하여 권업회가 양성한 광복군을 기반으로 하고 독립전쟁을 추진하려고 하였으나 러시아 당국의 탄압을 받게 되었다.

 

특히 1914년 7월, 제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일본과 동맹국으로 제휴한 러시아 당국은 연해주 일대에서 활동하고 있던 한인의 주요 지도자들을 체포하거나 추방하여 대한광복군 정부는 사실상 해체되고 말았다.

 

한편 독립운동에 열중한 나머지 건강을 돌보지 못한 선생은 1916년 초부터 하바로프스크에서 병석에 눕게 되어 기후가 온화한 니콜리스크(우수리스크)로 옮겨 요양을 하였으나 병세가 호전되지 않아 결국 선생은 1917년 3월 2일, 48세를 일기로 순국하고 말았다.

 

 출처>http://cafe.daum.net/mishi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