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물/근현대 인물

차이석(車利錫) 회갑기념사진-독립운동가

야촌(1) 2015. 6. 27. 08:02

독립운동가 차이석(車利錫) 선생 회갑기념사진임 / 앞에서 3째줄 좌측으로부터 조성환. 이청천.박찬익.김구.

    차이석.이시영.조완구. 앞에서 4째줄 2번째 이범석장군

 

[제목] 1941년 차이석(車利錫) 회갑기념사진

[시기] 1941. 09. 18

[장소] 중국 충칭(중경 · 서경) 우리촌

[대상] 차이석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무위원 · 비서장 등을 역임했다.

[경과] 

1881.07.27 평안북도 선천에서 출생
1921.06~1922.02 독립신문편집국장· 독립신문기자· 대성학교교사역임
1932.11 대한민국임시정부국무위원· 한국독립당이사역임, 동명학원 설립
1933.03 대한민국임시정부 내무장 · 비서장 역임
1935.11 대한민국임시정부 비서장 역임
1939.05 한국독립당 집행위원· 한국국민당조직부장역임.사망할 무렵까지 흥사단 원동위원부이사· 대한민국임

                시 의정원 평안도의원역임
1945.09.09 사망
1962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소장] 독립기념관

[등록] 2015. 06. 27

 

 

●차이석(車利錫) - 독립운동가

 

일명 서입환(徐立煥). 호는 동암(東巖). 아버지는 재헌(在軒)이다. 1907년 평양 숭실중학교(崇實中學校)를 졸업했다. 졸업 후 신민회(新民會)에 가입하여 안창호(安昌浩)와 함께 대성학교(大成學校)를 경영하며 인재양성과 애국사상고취에 힘썼다. 1910년 12월의 105인사건으로 1911년 1월 체포되어 3년간 복역했다.

 

1919년 3·1운동 직후 중국 상하이[上海]로 망명하여 독립신문사에서 언론활동을 통해 항일독립사상을 고취했으며,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 의원으로 임시정부 육성·발전에 노력했다.

 

1928년 3월 이동녕(李東寧)·안창호·이시영(李始榮)·김구(金九) 등과 함께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을 조직하고 간부에 선임되어 기관지 〈한보 韓報〉·〈한성 韓聲〉을 발행하는 등 당의 기본강령 전파에 노력했다. 1930년 임시의정원 부의장이 되었으며 1933년에는 상하이에서 항저우[杭州]로 옮겨온 임시정부의 국무위원으로 선임되었다.

 

당시 의열단(義烈團)·신한독립당(新韓獨立黨)·조선혁명당(朝鮮革命黨)·한국독립당·미주대한인독립당(美洲大韓人獨立黨)의 통합에 의해 조선민족혁명당(朝鮮民族革命黨)이 조직되어 김원봉(金元鳳) 등 의열단계가 임시정부의 폐쇄를 주장하고, 국무위원 중에서 김규식(金奎植)·조소앙(趙素昻)·최동오(崔東旿)·양기탁(梁起鐸)·유동열(柳東說) 등 5명이 조선민족혁명당에 가담하는 등 임시정부가 위기에 처해 있었다.

 

그는 송병조(宋秉祚)와 함께 임시정부를 고수했으며, 임시정부의 재건을 위해 의정원비상회의를 개최하여 이동녕·조완구·김구를 국무위원에 보선하고, 임시정부 국무위원회를 개최, 주석에 이동녕을 선출하고 비서장(秘書長)이 되었다.

 

이후 국무위원·비서장으로 조국광복에 힘쓰다가 8·15해방을 맞아 임시정부 환국 준비에 몰두하던 중 병을 얻어 충칭[重慶]에서 죽었다. 1947년 김구의 주선으로 유해가 서울 효창공원에 이장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차이석 선생 묘-효창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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