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중국사(中國史)

시진핑(習近平)-중국 국가주석

야촌(1) 2015. 9. 19. 22:34

●시진핑(習近平)/습근평/Xi Jinping)

    중국의 국가주석(정치인)

 

[출생] 1953년 6월 1일생

[배우자] 펑리위안(彭麗媛)/팽려원-Peng Liyuan, 1987년에 재혼한 부인임

[아버지] 시중쉰(習仲勳)/습중훈.1913~2002).

[동생] 시위안핑(習遠平)/습원평)

[외동딸] 시밍쩌[습명택(習明澤)]/1992년생/미국 하버대학 졸업

 

[학력] 청화대학대학원 법학박사(清华大学校大學院法學博士)

[수상] 2012년 미국타임지 세계에서 가장영향력 있는 100인의 한사람.

 

제17기 중국공산당중앙정치국상무위원, 중국공산당중앙서기처 제1서기, 중국공산당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 중국공산당중앙당학교교장으로 2007년 17기1중 전회에서 권력서열 6위로 올랐으며, 2008년 3월부터 중화인민공화국의부주석이 되었다.

 

2012년 11월 후진타오로부터 중앙위원회총서기직을 물려받았다.

2013년 3월 14일, 임기 10년의 중화인민공화국의 주석에 선출되었다.

 

   

 

 

 

 

↑중국 시진핑 주석의 아버지 시중쉰(習仲勳).

 

↑1913년 10월 15일(중국) ~ 2002년 5월 24일(壽 88세)

 

 

 

 

 

 

 

↑시주석의 부모님 사진

 

 ↑부모님 사진

 

 

 

↑가족사진(우측이 시진핑 주석)

 

↑시주석의 외동딸  시밍쩌(習明澤)씨 학창시절 모습

 

 

 

↑시주석의 외동딸 시밍쩌(習明澤)씨의 최근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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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진핑(習近平)/중국의 국가주석

    임기 : 2013년부터~2023년 까지

 

1953년 6월 1일 중국 산시성(陝西省) 푸핑(富平)에서 태어난 시 주석은 혁명원로인 시중쉰(習仲勛, 1913∼2002) 전 부총리의 차남으로, 태자당 출신이다.

 

시진핑은 180㎝의 키와 100㎏이 넘는 당당한 체구에 겉모습은 온화한 편이나 절대로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사려는 깊지만, 조용한 카리스마로 치열한 경쟁을 이겨낸 인물로 평가받는다. 

 

매스컴을 통해 완전무결한 존재로 자신을 부각시키는 것보다 인민과 단결의 중요성을 알고 실행에 옮기는 것을 정치철학으로 삼고 있다.

 

아버지 시중쉰은 13세에 공산혁명에 참여한 혁명투사다. 시진핑이 태어났을 때에는 당 중앙 선전부장을 맡은 간부당원이었다. 이후 국무원비서장, 부총리로 승진해 저우언라이 총리의 심복으로 활약했다.

 

시진핑이 아홉 살이 되던 1962년 가을, 부총리였던 아버지는 권력투쟁에 밀려 몰락한다. 일명 '류즈단 사건'으로 불리는 중국공산당 내분사건에 휘말려 1976년부터 14년의 대부분을 옥중에서 보내야 했다.

 

1969년 문화대혁명와중에 시중쉰이 한국전쟁시절 상관이었던 펑더화이를 지지하다가 숙청당하는 바람에 시진핑의 가족은 뿔뿔이 흩어질 수밖에 없었다.

 

시진핑은 지식인청년이 육체노동을 통해 농민의 노고를 이해한다는 취지를 내건 '하방(下放)'을 선택했다. 아버지가 당 간부로 활약했던 산시성(山西省) 옌안(延安)의 교외지역인 옌촨현(延川縣) 량자허(梁家河)로 내려간다.

 

그러나 '부르주아 부패분자 시중쉰의 아들'이란 낙인은 시골마을까지 따라왔다. 농촌 삶의 비참함을 견디지 못한 그는 3개월 만에 마을을 탈출해 베이징(北京)으로 돌아왔지만, '민중에 의지하라'는 백부의 권유로 다시 산시성으로 돌아간다.

 

이곳의 농업공동체에서 7년 동안 고된 노동을 하며 청소년시절을 보냈다. 이 시기에 뛰어난 리더쉽으로 노동자들을 단결시키고 지도하여 최고의 생산량을 올렸다. 그로 인해 중국공산당에서 명문가 출신의 시진핑은 큰 신뢰를 얻게 되었다.

 

1972년 여덟 번째 신청 끝에 공청단 입단을 허가받았으며 2년 뒤 20세 나이로 공산당 입당에 성공, 옌안(延安) 량자허(兩家河) 생산대대지부(生産大隊) 서기(書記)가 된다.

 

시진핑은 1975년 10월 7년의 하방생활(下放生活-토굴생활)을 마치고 22세의 나이로 칭화대에 입학해 화학공학을 전공, 법학박사 학위까지 수료했다. 

 

문화대혁명(文化大革命-1966년부터 1976년까지 10년간 중국의 최고지도자 마오쩌둥[毛澤東]에 의해 주도된 극좌 사회주의운동)이 끝나고 마오쩌둥이 사망한 후 1979년 시중쉰이 덩샤오핑에 의해 복권되자 베이징으로 돌아왔고, 칭화대학 졸업 후 중앙군사위원회 판공청에 배치된다. 

 

당시 중앙군사위 비서장을 겸직하고 있던 겅뱌오[경표(耿彪)] 국무원부총리의 비서직이다.

시진핑은 이듬해 '새장 속에 갇힌 새로 살기 싫다'며 비서직에서 물러난다. "말단조직인 기층부터 다시시작하고 싶다"며 베이징에서 300㎞ 떨어진 허베이성[하북성(河北省)]·정딩현(正定縣)의 당위원회 부서기로 부임한다.

 

이후 25년간 푸젠성[복건성(福建省)] 샤먼시[하문시(厦门市)]. 닝더지구(宁德地区), 푸저우시(福州市), 저장성[절강성(浙江省)], 상하이직할시(上海直轄市)등 지방 간부를 지냈다.

 

특히 푸젠성[복건성(福建省)]에서는 18년간 근무해 정치적 기반을 다졌다. 그는 "만일 내가 그 시절에 중앙에 남아 있었다면 오늘의 나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1989년 톈안먼사건[天安門事件] 당시 정부의 대응에 대해 공개적으로 비판을 한 적이 있다. 시 부주석은 2007년 상하이시 당 서기였던 천량위(陳良宇)가 비리사건으로 낙마한 이후부터 정치적인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상하이 당 서기에 취임한 뒤, 이 사건을 무난히 수습, 공청단파(共靑團派-중국 공산당청년단 세력)와 상하이방[상해방(上海幫)].양쪽에서 정치력 있는 지도자라는 평가를 받았다.

 

곧바로 2007년 10월 열린 당 17차 전국대표자대회에서 리커창(李克强) 당시 상무부 총리를 제치고 정치국상무위원으로 선출되면서 차기 지도부로 떠올랐다.

 

2008년 3월 부주석취임 후 평양을 방문해 북한지도부와 상견례를 하고, 2009년 12월에 한국을 방문하는 등. 남북한 문제에도 밝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2009년 신장 위구르 자치구에서 위구르족의 대규모 독립요구시위가 발생했을 때, 총 책임자가 되어 이를 수습하고 2010년 당 중앙군사위부주석 직에 오르고 후진타오를 이을 차기 지도자로 공인되었다.

 

영국 주재대사의 딸이었던 첫 아내와는 성격차이로 이혼했고, 1987년 중국의 국민가수인 펑리위안(彭麗媛)-팽려원)과 재혼했으며 슬하에 하버드대학을 유학한 외동딸 시밍쩌[습명택(習明澤)/1992년생]을 두고 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