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중국사(中國史)

왕희지의 상란첩과 난정서 임모

야촌(1) 2017. 10. 13. 01:55

■ 왕희지(王羲之)

 

[생몰년] 307~365 /향년 58세

[활동분야] 동진(東晋,317년~420년)의 서예가

 

왕희지(王羲之)는 서성(書聖)으로 존경받는 동진(東晋)의 서예가이다.
초서((草書),행서(行書), 해서(楷書)의 실용적 서체(書體)를 예술적인 경지로 완성시켰으며, 시집 《난정집서(蘭亭集序)/진본은 전하지 않는다.현재 모사품이 전해지고 있다 》의 서문인 〈난정아집시서(蘭亭雅集詩序)〉가 대표 걸작으로 꼽힌다.

 

그의 대표작으로 해서의 악의론(樂毅論)〉, 〈황정경(黃庭經)〉, 〈동방삭화찬(東方朔畵贊)〉, 행서의 〈난정서(蘭亭序)〉, 〈집자성교서(集字聖敎序)〉, 초서의 《십칠첩(十七帖)》, 《상란첩(喪亂帖》, 《공시중첩(孔侍中帖)》, 《순화각첩(淳化閣帖)》, 《유목첩(遊目帖)》, 《쾌설시청첩(快雪時晴帖)》 등의 필체가 전해진다.

 

왕희지는 자(字)가 일소(逸少)로, 산동성 낭야 임기(臨沂)의 명문가에서 태어났다.

그의 조상 왕상(王祥)은 서진의 고급 관료였고, 아버지 왕광(王曠)은 회남 태수를, 숙부 왕도는 동진의 재상을, 왕돈도 동진 조정의 관료를 지냈다.

 

왕희지는 일곱 살 때부터 서법(書法)을 익혀 열두 살에는 그 실력이 매우 뛰어났다.

그를 가르친 스승은 큰아버지 왕익과 이모 위부인 위삭(衛鑠)이었다.

위삭은 서진 시대 유명한 여류 화가이자 서예가로 이름이 높았다.

 

왕희지는 초서는 후한 장지(張芝)의 서법을 따랐고, 해서는 위나라 종요(鍾繇)의 서법을 따라 익혔다.

후에 그는 종요의 서체를 더 발전시켜 왕희지체를 완성했다. 그는 밥을 먹을 때, 길을 걸을 때, 휴식을 취할 때도 서법 연구를 게을리하지 않았으며 여러 종류의 글씨를 구하여 글자체와 필획의 구조 등을 연구했다.

 

왕희지는 열여섯 살에 치감(郗鑒)의 딸과 결혼했다. 당시 태위였던 치감이 승상 왕도에게 혼담을 넣자 왕도는 직접 사람을 보내 골라보라고 했다. 며칠 뒤 치감은 심부름꾼을 보내 왕 씨의 자제들을 살펴보게 했다.

 

치감의 사위가 되기를 원했던 왕희지의 형제와 사촌들은 치감에게 잘 보이고자 평소와 다르게 고상한 척 행동했다.

하지만 왕희지는 평소대로 평상에 배를 드러내고 누운 채 큰 떡을 먹으며 무심히 손가락으로 자신의 배 위에 뭔가를 열심히 쓰고 있었다.

 

필체를 가다듬는 연습 중이었지만 심부름꾼의 눈에는 그저 떡을 먹고 있는 소년일 뿐이었다.

심부름꾼이 돌아와 주인에게 소상히 알리자 치감은 망설이지 않고 왕희지를 사위로 선택했다. 이 일화에서 ‘배를 드러내고 동쪽 평상에 눕다’라는 ‘탄복동상(坦腹東床)’이라는 성어가 생겼고, 이상적인 사위라는 의미로 통용되었다.

 

왕희지가 벼슬길에 오를 나이가 되었을 때 숙부 왕돈이 반란을 일으켰다. 이 사건은 멸문지화를 당할 만큼 큰 사건이었으나 최고의 명문가였던 왕 씨 일가는 권세를 이용하여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왕돈의 반란이 진정된 후 왕희지는 비로소 관직에 오를 수 있었다. 왕희지는 비서랑으로 벼슬을 시작하여 정서장군의 참장, 장사를 거쳐 340년 영원장군 강주 자사로 승진했다.

 

351년 그는 우군장군, 회계내사에 임명되어 발령지인 절강성 소흥부로 갔으며 356년까지 4년 동안 관직 생활을 했다. 후에 그가 ‘왕우군(王右軍)’이라고 불리는 것은 이때의 직책으로 인해 생긴 것이다. 당시 한 도사가 많은 예물을 가지고 와 도가의 경서인 《황정경(黃庭經)》을 써 달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왕희지는 이를 거절했다.

 

당시 왕희지는 흰 거위를 매우 좋아했는데, 거위 목의 움직임을 관찰하여 서법을 연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이 소문을 들은 도사는 흰 거위와 글씨를 쓸 좋은 비단을 가지고 다시 찾아와 부탁했다. 이에 왕희지는 그가 가져온 비단 위에 《황정경》을 써 주었다고 한다.

 

 

↑서성(書聖) 왕희지(王羲之,307~365)

 

↑왕희지의 상란첩(王羲之의 喪亂帖)

 

 왕희지의 상란첩(王羲之의 喪亂帖)

 

羲之頓首 : 喪亂之極, 先墓再離荼毒, 追惟酷甚, 號慕摧絕, 痛貫心肝, 痛當奈何奈何! 雖即修復, 未獲奔馳, 哀毒益深, 奈何奈何! 臨紙感哽, 不知何言! 羲之頓首頓首.


불초 자손 희지는 머리 숙여 절하나이다. 전란으로 인하여 그 지극한 화를 피해 달아났음에, 조상의 무덤이 거듭 참화를 입었사오니, 돌이켜 생각하옵건대 그 망극함이 더욱 심하여, 그리움에 사무쳐 불러보아도 꺽 이고 부서진 마음에 고통이 가슴을 꿰뚫사옵니다.

 

이 가슴 아픈 마음 어찌 다하리까, 어찌 다하리까? 비록 이내 다시 고쳐 세웠다 하오나, 때맞춰 달려오지 못하였음에, 애통함만 더욱 깊어지니 어찌 하리까, 어찌 하리까! 종잇장 펼쳐놓고 흐느껴 울 뿐, 무슨 말씀 올려야 할지 모르오니, 불초 자손 희지는 거듭 머리 조아릴 따름이옵니다.​

 

중국 역사상 최고의 서예가 왕희지(303年~361年,一作 321年~379年)는 동진(東晉, 317~420) 때 사람이다. 그는 당시 중원 천지가 이민족에게 짓밟히자, 집을 떠나 남쪽지방으로 피난했다.

 

이민족의 침입, 그리고 호족(豪族)들 간에 영토분쟁이 그치지 않는 동안, 조상의 무덤이 전란의 불길에 거듭 처참하게 유린당한 사실을 알게 된 그는 <상란첩(喪亂帖))>에 그 안타깝고도 비통한 심정을 고스란히 표현했다.


위 서첩은 雙鉤摹本(쌍구모본 : 글씨의 윤곽을 가는 선으로 본뜬 뒤 남은 공간을 색칠하는 방식​.)으로 세상에 전해내린 모사본으로는 가장 정교한 작품이다. 현재 일본 황실에 소장되었다.

 

 

↑당(唐) 명필 저수량(褚遂良, 596년~658년)이 임서한 황견본 난정서(黃絹本 蘭亭序)/행서체(行書體)

 

[난정서 개요]

 

영화구년(永和九年, 353) 3월 3일은 서예사상 가장 기념적인 날이다. 그날은 날씨도 맑고 화창해 왕희지는 사안(謝安),사만(謝萬),손작(孫綽) 등 42명과 함께 소흥의 난정에서 계제사를 행했다.

 

우주와 만물을 쳐다보며 맑게 흐르는 물에 임하여 술을 마시고 준령을 보며 시를 지어 각자의 회포를 풀며 즐겁게 놀았다. 흥이 난 나머지 왕희지는 즉석에서 휘호를 하여 난정시집을 위한 서문을 썼으니 이것이 바로 고금에 가장 유명한 <난정서>였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당시 왕희지가 사용했던 것은 서수필(鼠鬚筆)과 잠견지(蠶繭紙)이며, 행필은 굳세고 아름다운 것이 절대로 다시는 나올 수 없다고 한다. 이후 왕희지가 이것을 다시 백여 번을 썼으나 처음만 못했다고 해서 이를 더욱 소중하게 여기면서 집안의 비보(秘寶)로 전했다.

 

왕희지의 행서는 이것으로 최고봉에 올라 세상에서 이를 ‘천하행서제일(天下行書第一)’이라 일컫는다. 이 원본은 일찍이 이세민이 얻어 조모(趙模), 한도정(韓道政), 제갈정(諸葛貞), 풍승소(馮承素) 등에게 임모하도록 하여 약간의 부본을 남겨두고는 진적은 그와 함께 소릉에 묻혔다. 그리하여 절대의 명작이 세상에 사라졌다.

 

세상에 전하는 몇 본의 임모본 중에서 가장 원작에 가까운 것은 풍승소의 구모본(鉤摹本)이다. 이 묵적을 보면 전문은 28행으로 324자이다.

 

 

↑난정서 임모

 

↑난정서 임모

 

[난정서 역문]

 

永和九年, 歲在癸丑, 暮春之初, 會于會稽山陰之蘭亭, 修 事也. 群賢畢至, 少長咸集.
(영화구년, 세재계축, 모춘지초, 회어회계산음지난정, 수계사야. 군현필지, 소장함집)

.

영화9년 계축년 3월초 회계군 산음현의 난정에 모여 "수계"행사를 열었다.

많은 선비들이 모두 이르고 젊은이와 어른들이 다 모였다.

此地有崇山峻嶺, 茂林修竹; 又有淸流激湍, 映帶左右.

(차지유숭산준령, 무림수죽; 우유청류격단, 영대좌우).

 

이곳은 높은 산과 고개가 있고 깊은 숲과 울창한 대나무

그리고 맑은 물이 흐르는 여울이 좌우로 띠를 이루었다.

引以爲流觴曲水, 列坐其次; 雖無絲竹管弦之盛, 一觴一詠, 亦足以暢敍幽情.

(인이위류상곡수, 열좌기차; 수무사죽관현지성, 일상일영, 역족이창서유정)

 

흐르는 물을 끌어 잔을 띄우는 물굽이를 만들고 순서대로 자리를 잡으니 비록

성대한 풍악은 없어도 술 한 잔에 시 한 수씩 읊으며 또한 그윽한 정회를 펼칠 만 하였다.

是日也, 天朗氣淸, 惠風和暢; 仰觀宇宙之大, 俯察品類之盛; 所以遊目騁懷, 足以極視聽之娛, 信可樂也.

(시일야, 천랑기청, 혜풍화창; 앙관우주지대, 부찰품류지성; 소이유목빙회, 족이극시지오, 신가락야).

 

이 날은 맑은 날씨에 따뜻한 바람이 불어오는데, 머리를 들어 세상의 넓음을 우러르고 고개를 숙여 사물의 흥성함을 살피니, 경치를 둘러보며 정회를 펼침은 족히 보고 듣는 즐거움을 다하기에 참으로 기쁘기 한이 없었다.

夫人之相與, 俯仰一世, 或取諸懷抱, 悟言一室之內; 或因寄所託, 放浪形骸之外.

(부인지상여, 부앙일세, 혹취제회포, 오언일실지내; 혹인기소탁, 방랑형해지외).

 

무릇 사람들이 서로 어울려서 한 평생을 살아가되, 어떤 사람은 벗을 마주하여

서로 회포를 나누고, 어떤 사람은 정회를 대자연에 맞기며 유람을 한다.

雖趣舍萬殊, 靜躁不同; 當其欣於所遇, 暫得於己, 快然自足, 不知老之將至.

(수취사만수, 정조부동; 당기흔어소우, 잠득어기, 쾌연자족, 부지노지장지).

 

비록 나아감과 머물음이 서로 다르고, 고요함과 시끄러움도 같지 않건만, 자신의 처지를

만족하며 잠시나마 득의 하면 기쁘고 흡족하여 장차 늙어 죽으리라는 것도 모르는 법이다.

及其所之旣倦, 情隨事遷, 感慨係之矣.

(급기소지기권, 정수사천, 감개계지의).

 

(그러나) 흥에 겨우면 다시 권태롭고, 감정이란 세상사에 따라 변하는 것이니, 감흥이란 단지 그에 따라 일어나는 것

다.

向之所欣, 傘仰之間, 以爲陳迹, 猶不能不以之興懷 況修短隨化, 終期於盡.

(향지소흔, 면앙지간, 이위진적, 유불능불이지흥회 황수단수화, 종기어진).

 

예전의 기쁨도 잠깐사이에 곧 시들해지니 더더욱 감회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하물며 사람 목숨의 길고 짧음이 비록 하늘에 달려있다 해도 결국에는 죽어야 할뿐임에랴.

古人云 "死生亦大矣" 豈不痛哉!

(고인운 "사생역대의" 개불통재)!

 

옛사람이 이르기를

"삶과 죽음은 역시 중대한 일이다"

라고 했으니 어찌 비통하지 않은가.

每攬昔人興感之由, 若合一契; 未嘗不臨文嗟悼, 不能諭之於懷.

(매람석인흥감지유, 약합일계; 미상불림문차도, 불능유지어회).

 

매번 옛사람들이 감흥을 일으켰던 까닭을 살펴보면 마치 부절이 들어맞듯 일치하여,

일찍이 그들의 문장을 보면 탄식을 하지 않은 적이 없었고 가슴에 와 닿지 않음이 없었다.

固知一死生爲虛誕, 齊彭觴爲妄作.

(고지일사생위허탄, 제팽상위망작).

 

그런즉 삶과 죽음이 하나라는 말이 얼마나 헛된 것이며

장수와 요절이 똑같다는 말이 거짓임을 알겠다.

後之視今, 亦由今之視昔, 悲夫!

(후지시금, 역유금지시석, 비부)!

 

후세 사람들이 오늘의 우리를 보는 것 또한

오늘의 우리가 옛사람을 보는 듯 하 리라. 슬프도다.

故列敍時人, 錄其所述, 雖世殊事異, 所以興懷, 其致一也. 後之攬者, 亦將有感於斯文.

(고열서시인, 록기소술, 수세수사이, 소이흥회, 기치일야. 후지람자, 역장유감어사문).

 

 오늘 모임을 가졌던 사람들이 모두 그 술회를 시로 적었으니 비록 후세에는 세상이 달라져도

정회가 일어나는 까닭은 한가지인즉 뒤엣 사람이 이 글을 보면 또한 느끼는 바가 있으리라.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