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선현들의 묘.

권근 삼대 묘(權近三代墓)

야촌(1) 2015. 9. 5. 07:29

●권근(權近)

 

1352(공민왕 1)∼1409(태종 9) 때인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이요· 대학자로, 본관은 안동(安東). 초명은 진(晉), 자는 가원(可遠)·사숙(思叔), 호는 양촌(陽村)·소오자(小烏子)이다. 그는 보(溥)의 증손이고, 조부는 검교시중(檢校侍中) 고(皐)이고, 아버지 검교정승 희(僖)의 넷째아들로 태어났다.

 

고려 말 충주로 유배되어와 양촌에 살았으므로 이를 호로 삼았다. 그는 이색(李穡)의 문인으로 1368년(공민왕 17) 성균시에 합격하고, 이듬해 문과에 급제해 춘추관검열·성균관직강·예문관응교 등을 역임했다.

 

공민왕이 죽자 정몽주(鄭夢周)·정도전(鄭道傳) 등과 함께 위험을 무릅쓰고 배원친명(排元親明 : 원나라를 배척하고 명나라와 화친함)을 주장했으며,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성균관대사성·지신사(知申事) 등을 거쳐, 1388년(창왕 1)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어 이은(李垠) 등을 뽑았다.

 

이듬해 첨서밀직사사(簽書密直司事)로서 문하평리(門下評理) 윤승순(尹承順)과 함께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러나 명나라 예부자문(禮部咨文)을 도당(都堂)에 올리기 전에 몰래 뜯어본 죄로 우봉(牛峯)에 유배되었다. 그 뒤 영해(寧海)·흥해(興海) 등을 전전하여 유배되던 중, 1390년(공양왕 2) 윤이(尹彝)·이초(李初)의 옥사에 연루되어 한때 청주 옥에 구금되기도 했다.

 

뒤에 다시 익주(益州)에 유배되었다가 석방되어 충주에 우거(寓居)하던 중 조선왕조의 개국을 맞았다. 1393년(태조 2) 왕의 특별한 부름을 받고 계룡산 행재소(行在所)에 달려가 새 왕조의 창업을 칭송하는 노래를 지어올리고, 왕명으로 정릉(定陵 : 태조의 아버지 桓祖의 능침)의 비문을 지어바쳤다.

 

그런데 이 글들은 모두 후세 사람들로부터 유문(諛文)·곡필(曲筆)이었다는 평을 면하지 못했다. 그 뒤 새 왕조에 출사(出仕)하여 예문관대학사(藝文館大學士)·중추원사 등을 지냈다. 1396년 이른바 표전문제(表箋問題 : 명나라에 보낸 외교문서 속에 표현된 내용으로 인한 문제가 발생함)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때 그는 외교적 사명을 완수하였을 뿐 아니라, 유삼오(劉三吾)·허관(許觀) 등 명나라 학자들과 교유하면서 경사(經史)를 강론했다. 그리고 명나라 태조의 명을 받아 응제시(應製詩) 24편을 지어 중국에까지 문명을 크게 떨쳤다.

 

귀국한 뒤 개국원종공신(開國原從功臣)으로 화산군(花山君)에 봉군되고, 정종 때는 정당문학(政堂文學)·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대사헌 등을 역임하면서 사병제도(私兵制度)의 혁파를 건의, 단행하게 했다. 1401년(태종 1) 좌명공신(佐命功臣) 4등으로 길창군(吉昌君)에 봉군되고 예문관 대제학이 되었고, 찬성사(贊成事)에 올랐다.

 

1402년에는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신효(申曉) 등을 뽑았고, 1407년에는 최초의 문과중시(文科重試)에 독권관(讀卷官)이 되어 변계량(卞季良) 등 10인을 뽑았다. 그는 당대의 우뚝한 학자로서 900수가 넘는 시를 지었으며, 금강산, 탐라 등 많은 기행시를 남겼다. 동문선에는 그의 시문이170편이나 실려 있다.

 

고려 말에서 조선 초기에 걸쳐 경학과 시문으로 한 시대를 만든 권근이 5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자 조선조선비들은 그가 절의를 굽혔다고 하여 서원(書院) 하나 짓지 않았고 향사(享祀)에도 모시지 않았다. 지금 묘소아래에 있는 추원재(追遠齋)는 1985년 후손들에 의해서 지어진 것이며, 추원재 입구 마당에 있는 《천상열차분야지도(天象列次分野地圖)》는 태조 4년에 권근이 만든 천문도로 국보 228호로 지정된 것의 모조품이다.

 

일화에 의하면 조선중종 때 이름 높은 송인수(宋麟壽), 김안국(金安國) 두 학자가 어느 집에서 권근의 초상을 보게 되었는데 송인수는 '절의를 꺾은 사람'이라 절을 하지 않았고, 김안국은 '이 나라도학에 크게 공헌한분'이라 절을 했다 한다. 저서로는 《입학도설(入學圖說)》. 《양촌집(陽村集)》. 《오경천견록(五經淺見錄)》. 《동현사략(東賢事略)》 등이 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권근 삼대 묘와 소류지(沼溜池)

 

↑소류지(沼溜池)와 삼대 신도비각전경

 

↑양촌권근삼대묘소전경(陽村權近三代墓所前景)

 

1500평이 넘는 산등성에 제일 위쪽이 양촌(陽村) 권근(權近)의 묘이고 그 아래는 그의 둘째 아들 지재(止齋)

권제(權嗇)의 묘이고 제일 아래쪽이 손자 권람(權擥)의 묘이다.

 

 

↑양촌(陽村) 권근(權近)선생 묘.

 

↑권근(權近)과 배위 숙경택주(淑敬宅主) 경주이씨(慶州李氏-李存吾 딸) 합폄(合窆) 묘.

 

↑권근선생 배위 숙경택주 경주이씨 묘표(충북유형문화재 제207호)

 

충청북도 음성군 생극면 방축리 산7번지에 위치하고 있는 권근선생 배위 숙경택주 경주이씨 묘표이다. 

묘표의 글씨는 가로세로 10㎝ 크기의 해서체로, 전면에 2줄 10자, 후면에 1줄 13자가 종서로 음각되어 있다. 

 

전면에는 '양촌선생권문충공부인 숙경택주경주이씨지묘(陽村先生權文忠公夫人 淑敬宅主慶州李氏之墓)', 

후면에는 '유명정통구년갑자삼월초십일(有明正統九年甲子三月初十日)'이라고 새겨져 있다.

 

 

↑양촌(陽村) 권근(權近) 묘의 문인석(文人石)

 

↑양촌(陽村) 권근(權近) 묘의 석등과 문인석(文人石) 전경.

 

↑양촌(陽村) 권근(權近) 묘의 뒤에서 바라본 앞산 전경

 

↑권근(權近)선생의 차자(次子) 지재(止齋)   권제「權踶,초명은 도(蹈)」의 묘

 

↑지재공(止齋公) 권제(權踶)의 묘 앞 석물.

 

●권제(權踶) 

 

1387(우왕 13)∼1445(세종 27) 때인 조선 전기의 문신· 학자. 초명은 도(蹈), 자는 중의(仲義)·중안(仲安), 호는 지재(止齋). 검교시중(檢校侍中) 고(皐)의 증손으로, 조부는 검교정승(檢校政丞) 희(僖)이고, 아버지는 찬성 근(近)이며, 어머니는 우정언 이존오(李存吾)의 딸 숙경택주(淑敬宅主) 경주이씨 이다.

 

배위는 판사(判事) 이휴(李携)의 딸이다. 태종 14년(1414) 알성문과(謁聖文科)에 급제한 뒤 세종 초에 집현전부제학. 대사헌. 한성부윤이 되고, 세종 11년(1429) 명(明)나라에 다녀와 경기도관찰사((觀察使-從二品)가 된 후 1435년 이조판서(吏曹判書-正二品)에 승진하였으며 이듬해 '동국연대(東國年代)'를 지어 임금에게 바쳤다.

 

고려사 편찬에도 참여했으며, 45년 우찬성(右贊成-從一品)이 되어 정인지(鄭麟趾). 안지(安止) 등과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를 지어 바쳤다. 오랜 동안 문형(文衡-대제학의 별칭)을 역임했으며, 저서로 '지재집(止齋集)' '역대세년가(歷代世年歌)' '영가연괴집(永嘉連魁集)'등이 있다. 시호는 문경(文景)이다.

 

 

↑양촌(陽村)의 손자 소한당(所閑堂) 권람(權擥) 묘.

 

●권람(權擥)

 

1416(태종 16)∼1465(세조 11) 때인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역사학자, 작가, 문인이다. 자(字)는 정경(正卿), 호는 소한당(所閑堂). 검교정승 희(僖)의 증손으로, 조부는 찬성사(贊成事) 근(近), 아버지는 우찬성 제(踶), 어머니는 판사재감사(判司宰監事) 이준(李儁)의 딸이다. 

 

남이(南怡)와 신승선(愼承善)은 권람(權擥)의 사위이다. 한명회(韓明澮)와 교유했으며, 그를 통해 신숙주(申叔舟) 등을 소개받고 수양대군의 측근이 되었다. 문종 즉위년(1450)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正六品)을 지냈으며, 그 이듬해에는 수양대군과 함께 '역대병요(歷代兵要)' 를 편찬하였다.

 

단종 1년(1453) 김종서(金宗瑞)를 몰아낼 때 앞장섰던 공으로 정난공신 1등관으로 녹훈되고, 승정원우부승지(承政院右副承旨-正三品)에 특진되었다. 1455년 세조 즉위 후, 수충위사협책정난동덕좌익공신(輸忠衛社協策靖難同德佐翼功臣) 1등관으로 이조참판(吏曹參判-從二品) 길창부원군(吉昌府院君)이 되었고, 1457년 2월 난신(亂臣)들의 노비를 하사받았고, 3월에는 김문기(金文起)·장귀남(張貴南)·성승(成勝) 등의 토지를 하사받았다.

 

8월에는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로 승진되었다. 1458년 5월 신숙주(申叔舟) 등과 《국조보감(國朝寶鑑)》을 편찬하고, 그해 12월 의정부우찬성에 승진했다. 1459년 좌찬성(左贊成-從一品)과 우의정(右議政)을 거쳐, 1462년 5월 좌의정(左議政-正一品)에 올랐으나, 이듬해 병을 핑계로 관직에서 물러나 부원군으로 진봉되었다.

 

1463년 9월 ≪동국통감≫ 편찬의 감수책임을 맡았다.세조4년(1458)에는 수찬관으로 신숙주 등과 함께 '국조보감(國朝寶鑑)'을 편찬하는데 참여하였다. 그는 활을 잘 쏘았을 뿐만 아니라 문장에도 뛰어났으나, 횡포가 심하고 많은 축재를 하여 여러 번 탄핵을 받기도 하였다 한다. 

 

저서로 시문집인 《소한당집(所閑堂集)》이 있고, 세조묘(世祖廟)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익평(翼平)이다.

 

 

↑소한당(所閑堂) 권람(權擥)의 묘표와 상석.

 

사진출처 : 박태선(초아)의 시와 산문의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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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촌 권근선생 묘지 이장(移葬) 이야기.

 

권근(權近) 선생이 58세로 운명하자 처음에는 경기도 광주 오포읍(五浦邑)에 안장하였다가 당시 한양에서 유명한 지관의 소개로 사후 31년 후인 1440년(세종 22년)에 지금의 장소로 이장하였다 한다.

 

이곳으로 이장할 당시 일화를 소개하면....이장 당시 상주는 좌찬성을 지낸 아들 권제와 좌의정을 지낸 손자 권람이었다. 

상주가 권세가들이고 보니 지방수령과 현감 등 벼슬아치를 비롯해서 권근 문하의 수많은 유생들이 이장행렬에 참가하여 인산인해를 이루었다고 한다.

 

지관의 지시에 따라 권근의 유골을 안장할 광중을 파자 사람들 사이를 뚫고 한 동자승이 손에 바가지를 들고 나타나 "지금 파는 땅에 물이 나오면 물 한바가지만 얻어 가자"고 하는 것이었다. 상주를 비롯해서 주변 사람들이 깜짝 놀라 "감히 어느 앞인데 광중에 물이 나온다고 물을 얻으러 왔느냐"고 호통을 쳤다.

 

그러자 동자 승은 태연하게 "저의 스승님께서 그러시는데 아마 조금 있으면 물이 펑펑 솟아 날 것이니 그 때 물을 얻어 오라는 분부가 있었습니다."라고 대답하면서 길 건너편 나무 밑에 앉아있는 노승을 가리켰다.

 

화가 난 상주와 유생들은 곧 노승을 붙들어 끌고 왔다. 상주인 좌찬성 권제가 서슬 퍼렇게 물었다.

"노승은 광중에 물이 난다고 요상스럽게 말을 하여 우리 자손들을 불효막급하게 하려하오!"

 

그러자 노승은 태연자약하게 대답하였다.

"길을 가다가 갈증이 심하던 차에 땅을 파는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산세와 혈맥을 보니 틀림없이 물이 나올 자리이므로 소승은 우물을 파는 줄 알고 물을 얻으러 보낸 것입니다."

주변 사람들은 기가 막힐 일이었다. 대 혈지에 물이 나온다니 아마도 실성한 중이라고 수군거렸다.

 

그런데 갑자기 광중에서 수맥이 터지면서 물이 펑펑 솟는 것이었다. 

모두들 대경실색을 하고 소란이 일어났다. 권제는 노승에게 정중히 사과하고 자문을 요청하였다.

 

"대사께서 광중에 수맥이 있음을 알고 있으면 그 대책도 아실 수 있을 것 아닙니까?

부디 불효를 면할 수 있도록 방법을 말씀해 주십시오."

 

노승은 앞에 있는 산을 가리키며 "이 자리의 혈은 저 앞에 있는 수리산에서 내려온 용맥으로 수맥 또한 같이 이어진 것이니 수리산 정상(頂上)에 우물을 파면 물길이 끊겨 물이 나오지 않을 것이요" 하면서 부적 하나를 써주며, "이 부적(符籍)을 먼저 묻고 장사(葬事)를 지내도록 하라“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곧 인부들을 수리산 정상(頂上)으로 보내 땅을 파자 물이 쏟아져 나왔고, 노승(老僧)의 말대로 광중(壙中)에는 물이 나오지 않았으며, 여기에 묻은 부적(符籍)이 정상(頂上)에서 나왔다고 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