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선현들의 묘.

허준선생 묘(許浚先生墓)/동의보감 저자

야촌(1) 2015. 8. 5. 11:45

↑민통선 안쪽에 위치한 허준선생 묘(좌측, 우측은 배위 안동김씨(安東金氏)이고 위쪽의 묘는 허준선생의

    생모 일직손씨(一直孫氏) 묘이다.(孫熙祖의 딸)

 

 ↑소재지 : 파주시 진동면 하포리 산129번지 손좌쌍분(巽坐雙墳)

 

↑허준선생묘의 후경

 

 

↑중건비 전자(前字)에 증 영의정(贈領議政)이라고 되어있는데, 조선왕조실록 등 어느자료를 찾아 보아도

    허준선생이 영의정에 추증했다는 기록은 없다. 본 기록은 오류(誤謬)로 여겨진다.

 

 

 

 

 

 

 

 

 

 

●안내판 기록은 오류투성이.......고쳤으면 좋겠다.

 

01. 허준선생의 아버지 이름이 허론(許論)으로 기록되어있으나 양천허씨족보에는 허론(許碖)이다.

 

02. 나이29세가 되던 1574년(선조 7) 의과(醫科)에 급제하여 내의원(內醫院)에 들어갔다고 하나 의과방목(醫科

       榜目)에 허준의 이름은 없다. 유희춘(柳希春,1513~1577)의 <미암일기>에 유희춘이 이조판서에게 추천하여

       의원이 된 것으로 되어있다.

 

03. 임진왜란시 선조를호종한 공으로 호종공신(扈從功臣)이 되었다고 기록되어있으나 호성공신(扈聖功臣)이라

      고 해야 맞다.

 

04. 최고의 명예인 당상의 부원군과 보국의 지위를 누렸다고 되어있는데, 당상(堂上)이란 정3품 통정대부 이상의

      품계를 일컫는 말이고, 부원군(府院君)은 임금의 장인이나 정일품 공신에게 주던 작호로 허준선생이 부원군

     (府院君)이 되었다는 기록은 실록에 나와 잊지 않다.

 

     또한 부원군을 받았던 안 받았던 증직된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는 정1품(正一品) 이므로 굳이 당상관

    (堂上官)이라는 용어는 쓸 필요가 없다. 괜 시리 군더더기 용어로 여겨진다.

 

05. 허준선생의 저서에 <언해두장집요>로 기록되있으나 <언해두창집요(諺解痘瘡集要)>이다.

 

06. 근래 묘역 앞에 세워진 중건비(重建碑)의 전자(前字)에 증 영의정(贈領議政)이라고 되어있는데, 이 또한 조선

      왕조실록 등 자료를 찾아보아도 허준선생이 영의정에 추증했다는 기록은 없다.

 

※의학발전에 공이 많아 의성(醫聖)이라고 까지 불리우는 훌륭한 인물을 제대로 고증(考證)도 않고 안내판을 제작

    하여 이렇게 알리면 허준선생을 욕보이는 일이 아닐까!? 관계자는 바로고쳤으면 좋겠다. 

 

 

 

 

인터넷

 

●허준(許浚) 

 

허준선생은 조선 중기의 의관으로 생졸년은 1539년(중종 32)~1615년(광해군 7)이다. 본관은 양천(陽川), 자(字)는 청원(淸源), 호는 구암(龜巖)으로 조부(祖父)는 무과출신 곤(琨)으로 경상도우수사(慶尙道右水使-正三品)를 지냈고, 아버지 또한 무과(武科) 출신으로 평안도(平安道) 용천부사(龍川府使-正三品)를 지낸 허론(許碖)의 서자(庶子)로 출생, 선조 초 전라도관찰사를 지낸 유희춘(柳希春, 1513~1577)이 이조판서에게 추천하여 1571년(선조 4)내의원(內醫院)에 출사했다.

 

"나이 29세가 되던 1574년(선조 7) 의과(醫科)에 급제하여 내의원(內醫院)에 들어갔다고 하나 의과방목(醫科榜目 )에 허준의 이름은 없다. 유희춘(柳希春)의 <미암일기>에 유희춘이 이조판서 홍담(洪曇)에게 추천하여 의원이 된 것으로 되어있다."

 

그 후 혜민서봉사(惠民署奉事-從八品)를 거쳐, 전의(典醫-왕실의 의관)가 되어 왕실의 진료에 많은 공적을 세웠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선조(宣祖)의 피난지인 의주(義州)까지 왕을 호종(扈從) 함으로 1604년(인조 18) 충근정량호성공신(忠勤貞亮扈聖功臣-從一品) 3등이 되었고, 1596년(선조 29)에는 왕의 명을 받아 《동의보감(東醫寶鑑)》편찬에 착수하였으나 1608년 선조가 승하하자 왕의치료를 소홀히 해서 승하했다는 죄로 파직되어 의주(義州)로 유배를 당했다가 광해군 1609(광해군 원년)에 다시 복직되었다. 그리고 당시 어지러운 나라사정으로 1610년(광해군 2)에 이르러 완성하였다.

 

그리고 허준선생의 출생지 또한 오늘날 서울시 강서구 가양동으로 주장하지만 허준의 선대 및 가족들의 세거지 연구 조사 내용들을 보면 허준은 경기도 장단군 대강면 우근리에 세거(世居)하던 양천 허씨 임이 분명하다.

 

허준은 사후(死後) 의인(醫人)으로서 최고의 영예인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正一品) 지위에 추증(追贈)되었다. 저서로는《동의보감(東醫寶鑑)》.《언해구급방(諺解救急方)》.《언해두창집요(諺解痘瘡集要)》등이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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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준선생 묘의 발굴 과정

 

경기도 기념물 제128호. 묘역은 경기도 파주시 진동면 하포리 산129번지에 있으며, 임진강(臨津江) 건너 비무장 지대의 해발 159m에 위치하고 있다. 이 묘는 한국전쟁이후 실전(失傳)되고 없었으나,1982년 재미 고문서연구가 이양재(李亮載) 등이 『양천허씨족보(陽川許氏族譜)』에 기록된 '진동면 하포리 광암동 손좌쌍분(巽坐雙墳)'의 내용을 바탕으로 군부대의 협조를 얻어 조사한 결과 1991년 9월 30일에 발견하였다.

 

발견 당시 쌍분으로 보이는 봉분은 이미 도굴되어 형태를 거의 알아볼 수 없었다. 다행히 허준의 묘임을 보여주는 묘비, 문인석 2기, 상석, 향로석 등이 주변에 흩어져 있는 등 종합적인 고찰을 통해 허준의 묘임을 파악할 수 있었다. 

 

묘역은 50여 평 규모로 좌측 묘는 허준, 우측 묘는 부인인 안동김씨(安東金氏) 묘이다. 쌍분 위에는 허준의 생모로 추정되는 묘 1기가 더 있다. 북서향인 이들 묘는 『양천허씨족보』의 기록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묘비는 두 쪽으로 잘려진 채 땅속에서 발견되었는데, 마모된 비문 가운데 ‘양평군(陽平君)’, ‘호성공신(扈聖功臣)’, ‘허준(許浚)’ 등의 글자가 음각된 점에서 허준의 묘로 단정할 수 있다. 묘비는 113×41×12㎝의 규모이다.

 

묘 주변에 쓰러져 있는 2개의 문인석은 높이 203㎝로 원형을 그대로 유지한 상태이다. 상석(床石)은 중앙에서 정북서 방향으로 놓여 있는데, 크기는 가로 152㎝와 세로 93㎝의 규모이다. 이 묘를 통하여 허준의 생애와 그의 사후에 대한 단서를 부분적으로나마 파악할 수 있다. 

 

 

↑《미암일기((眉巖日記)》 1569년(선조 2) 6월에 기록된 내용을 보면

 

허준의 나이 24세 때 부제학 유희춘의 부인의 설종병의 치료를 위해 서울로 초빙되었고, 다음해에는 유희춘의 질환도 허준이 치료해내자 그 명성이 서울 장안에 알려지기 시작했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이를 토대로 하면 허준의 출생연대는 1546년이라고 추정했었습니다. 그리고 양천허씨 야당공파족보에는 명종 2년(1547)에 출생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미암일기(眉巖日記) 

 

조선중기의 학자요문신인 유희춘(柳希春)의 친필일기이다. 조선시대 개인일기 중 가장 방대한 것으로, 1567년 10월부터 1577년 5월에 이르는 전후 10년간에 걸쳐, 개인의 일상적인 일에서부터 국정의 대요, 인물의 진퇴 등 당시의 정치 경제 사회 풍속 등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임진왜란으로 1592년(선조 25) 이전의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가 모두 불타 없어져《선조실록(宣祖實錄)》을 편찬할 때 《선조실록》 첫 10년간의 사료(史料)가 되었다. 

 

●허준(許浚)의 출사 

 

허준은 1574(선조 7)년, 의과에 급제하여 내의원에 근무하기 시작하였다고 주장 되어 왔었다. 그러나 허준의 이름이 조선시대 《의과방목》 어디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다.그런데, 1567년부터 쓰여 진 미암(眉巖) 유희춘「柳希春,1513(중종 8)∼1577(선조 10)」의 《미암일기》에는 허준이 1568년 1월 29일 미암 유희춘(柳希春)의 집을 찾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미암 유희춘은 양재역 벽서사건에 연루되어 1547년부터 20여 년간 제주도, 함경도 종성, 충청도 은진 등에 유배되어 있었다. 그는 선조가 즉위한 직후인 1567년 10월에 석방(釋放)되어, 도성으로 올라와 다시 벼슬살이를 했다.

 

따라서 허준(許浚)이 그를 처음 만난 곳은 호남지역이 아니라 도성에 있는 유희춘의 집에서였다. 그런데, 이《미암일기》를 보면 유희춘은 1569년 윤 6월 3일, 이조판서 홍담(洪曇)에게 허준을 내의원에 천거해 주도록 부탁한 것으로 보아 그는 빨라야 1569년에 내의원에 들어갔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미암은 허준의 적(嫡)3촌 외숙부 김시흡(金時洽)과도 교유하였는데, 이 때문에 허준이 미암을 만난 것은 그의 적3촌 외숙부 김시흡의 소개로 착각되기도 한다. 《미암일기》에는 허준의 이름이 총38회 거명되어 있다.

 

 

↑《미암일기》/소장 : 동아대박물관

 

《태평회맹도(太平會盟圖》 병풍의 그림에는, 임진왜란이 끝난 뒤인 1604년(선조 37년)의 것으로 국난 때 선조를 모시고 의주로 피난한 호성공신들의 계회 모임이 그려져 있습니다.  이 계회도옆에는 좌목(座目)이 수록되어 있었는데, 여기에 허준에 대한 설명도 들어있습니다. 

 

그 내용은 바로,‘충근정량호성공신숭정대부양평군 허준 자 청원 기해생 본 양천’(忠勤貞亮扈聖功臣崇政大夫陽平君許浚字淸源己亥生)이라고 기록하고 있음으로 여기서의 기해년(己亥年)은 중종 34년(1539)이었던 것입니다.  

 

계회도를 작성하던 1604년은 당시 허준이 어의로 활동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생존해 있던 당시에 생년을 잘못 기록했다고 보기 힘들므로,가장 공신력있는 결과라 보고 허준의 출생연도를 1546년이 아닌 1539년으로 보는 견해가 생긴 것입니다. 

 

그 후 1539~1612에 생존했던 조선 선조 때 학자인 ‘최립’이 저술한 간이집 휴가록에서 허준과 나는 동갑이다’ 라는 내용이 발견되면서, 허준이 1539년에 태어났다는 것이 많은 설득력을 얻고 있습니다. ※위의 사잔자료들은 인터냇에서 수집 편집한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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