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선조유적. 유물

삼성 이병철회장의 선영

야촌(1) 2015. 7. 26. 17:43

우리나라 풍수적 명당을 가장 중요시하는 가문이 삼성가로 보여 진다.

이병철회장의 자서전 서문에서 그는 가문의 뿌리와 출생지의 산맥을 설명하고 있다.

 

●호암자전 1페이지

 

백두산에서 뻗어내린 큰 산맥 줄기가 마지막으로 우뚝 솟았다고 하여 두류산이라고도 불리는 지리산, 금강산, 한라산과 함께 삼신산의 하나로 꼽히는 지리산은 삼도 오군에 걸쳐 있는 웅장한 명산이다.

 

그 지맥인 마두산 기슭에 자리 잡은 중교리는 예부터 숨어사는 고을로 알려졌다.

조부 이홍석공(호 문산 1838~1897)은 학문에 소양이 있어, 당시 영남의 거유로 일컬어지던 허성제의 문하생으로서 시, 문, 성리학 등에 능했다고 한다.

 

퇴계 이황의 존덕제를 건립하고 미수 허목의 경례유찬과 자신의 문산 문집 등을 간행한 것으로 미루어 조부의 학풍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조부 밑에서 선친이 한학공부를 강요당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개항 개국 등 외세의 침투로 나라가 흔들리던 청년기에는 상경하여 독립협회의 회원들과 행동을 함께 하기도 하였다. 기독청년회에도 출입하여 뒷날 대통령이 된 이승만 박사와 서로 알게 된 것도 그 즈음의 일이다. 선친과 이박사는 동갑이었다. 그러나 결국 중교리로 귀향하여 전원생활을 즐겼다.

 

 

↑故 삼성 이병철회장의 증조부 묘.

 

↑높은 산마루 근처의 급경사지이지만 용진처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급경사지로 축대를 쌓아 제절을 만들었습니다.

 

↑청룡작국의 좌수도우, 우선룡으로, 卯입수 甲坐庚向입니다.

 

↑입수에서 바라본 전경입니다.

 

↑조안산 전경입니다. 조 안산이 좋으나 안산이 가까이 높게 있어 시운에 따라 나를 억압하는

  일들도 가끔 있을 것입니다.

 

↑경상도에는 경사지에 쓴 묘들이 특히 많은데 경사지에도 혈이 된 자리도 많고, 이런 특이한

  괴혈은 발복도 빠르고 그 역량이 매우 큰가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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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이병철회장의 증조모 묘입니다.

소재지 : 경남 의령군 유곡면 마두리

 

↑故 삼성 이병철회장의 증조모 묘/부군묘의 50m 우측 상단에 소재한다.

 

↑입수에서 본 증조모 묘의 전경

 

기존(뒷부분)에 다른 묘가 있는 상태에서 그 앞에 증조모 묘를 조성한 듯 보입니다. 뒤의 묘는

입수 처에 용사가 되었고, 증조모 묘는 뒤쪽 묘를 그대로 두고 용사하느라 혈장 내에는 들었

으나 혈의 앞부분으로 약간 치우쳐 있습니다.

 

↑증조모 묘의 조 안산 전경입니다.

  안대로 보면 이자리의 모습이 부군 묘보다 훨씬 수려해 보입니다.

 

↑측면에서 본 모습입니다. 증조부 묘와 마찬가지로 산진처(용진처)의 급경사지에 결혈한 자리

  입니다. 사진출처 : 한국참풍수지리학회(2008. 04. 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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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병철회장 증조모인 진양강씨 묘(1810~1845)

   ◇소재지:경기도 양주시 별내면 별내동 산208-1

   ◇촬영일자: 2014년 1월 16일

 

↑이병철회장 증조모 진양강씨묘/좌향은 북동향이다.

 

↑전면의 두 봉우리 중 가운데로 향을 맞추었다.

 

↑증조모 묘비(유인 진양강씨지묘)

 

↑비문에 고인의 출생가문과 양력을 기록하고, 1977년 의령으로 부터 이곳으로 이장 하였

  다고 기록하고 있다.

 

↑비는 1982년에 건립하였다.

 

↑비는 1982년에 건립하였다.

 

■ 이병철(李秉喆) 회장의 가계도(家界圖)

 

36世  재봉(李載鳳)/圭자 항렬

         ㅣ

37世  홍석(洪錫)─창석(昌錫)─지석(祉錫)/鍾字 항렬

         ㅣ

38世  찬우(鑽雨)

         ㅣ

39世  병각─병철/相字 항렬

         ┌──

40世 동희─맹희─창희─건희

        ㅣ

41世 재(在)자 항렬의 5대손은 총12명이고, 아들 홍석(洪錫)과 손자 찬우(鑽雨)의 묘는 수원

지대 고개 옆에 있고. 비문에 고인의 묘는 7~8번의 이장끝에 여기에 모셨다고 기록하고

다.

 

 

↑묘의 입구에 자리하고 있는 한민족교회이다.

 

● 옮겨온 글

 풍수학자 “김두규교수의 경주 최부자댁과 호암 이병철”의 글중에서 발췌함.

 

세인들이 궁금하게 생각하는 문제들을 근본적으로 풀어보기 위해서 2008년 2월초에 처음으로 경남 의령군 정곡면 중교리에 있는 호암생가를 방문했고 2월 중순경에는 경남 의령군 유곡면 마두리에 있는 호암 증조부님(이재봉) 음택(陰宅) 까지 현지 답사를 해보고 나서야 한국의 국부(國富)가 인간의 노력이나 능력만으로 된 것이 아니라 천지운세(天地運勢)를 타고나야 한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깨달았기 때문에 지금부터는 호암의 전생(前生)과 양택(陽宅) 및 음택(陰宅)에 대하여 순차적으로 알아보기로 한다.

 

우리 인간이 타고나는 천지운세(天地運勢)를 크게 분류한다면 전생(前生)과 결부되는 천운(天運)과 나고 자란 양택(陽宅)과 조상들의 유골을 모신 음택(陰宅)과 결부되는 지운(地運)까지의 삼대운수(三大運數)를 가리킨 것이다.

 

다음으로 양택(陽宅)과 결부되는 지운(地運)으로서 호암께서 나고 자란 경남 의령군 정곡면 중교리 마을 전체의 地相은 사금(砂金)을 채취할 때 활용하는 삼태기 형국 즉 사금분채형(砂金採形)이요.

 

호암생가의 지상은 사금을 캐내는 삼태기의 손잡이에 해당되므로 중교리 마을의 전체적인 지상도(地相圖)를 참조하여 가면서 알아보기로 한다.

 

사금분채형(砂金畚採形)의 중교리 마을 지상(地相)

 

호암생가가 있는 중교리 마을의 전체적인 地相은 사금(砂金)을 채취하는 데 활용하는 삼태기 형국으로서 마을 앞 남쪽 좌편에 노적봉처럼 보이는 나지막한 산봉우리는 사금을 채취하기 전 자갈과 모래와 불순물과 금알갱이까지 한 데 긁어 모아놓은 무더기에 해당되고 마을에서 북쪽으로 산의 양능선 중앙에 둥글게 보이는 산봉우리는 삼태기로 불순물을 걸러내고 자갈과 금알갱이만 삼태기 안쪽에 모아진 무더기에 해당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사금(砂金)을 채취하는 삼태기 형국으로 창조된 중교리 마을 중에서 호암생가의 터가 명당(明堂)이 되는 것은 사금(砂金)을 채취하려면 삼태기를 잡아야 하는데, 호암생가와 접해 있는 산능선이 바로 삼태기를 손으로 잡고 있는 위치 즉 기분집병형(箕?執柄形)이기 때문으로서 호암(湖巖)께서 이러한 양택(陽宅)의 운세에 힘입어 사금(砂金)을 캐내서 하나하나 모으듯이 여러 가지의 사업을 통해 돈을 모아서 한국 제일의 국부(國富)가 된 것이다.

 

이렇게 사금분채형(砂金畚採形)의 지상운세(地相運勢)를 타고 일찍부터 사업을 시작하여 사금(砂金)을 캐내듯이 하나하나 모아진 황금(돈)을 쌓아둘 금고(金庫)가 있어야 하는데, 호암(이병철)의 증조부님을 모셔놓은 음택(陰宅)이 지상학적으로 본다면 황금축고형(黃金蓄庫形)으로서, 사금(砂金)을 캐다가 쌓아놓을 수 있는 창고가 지상학적으로 창조되어 있으니 경탄할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경남 의령군 유곡면 마두리의 마두산 깊숙한 산속의 황금축고형(黃金蓄庫形) 명당에 호암의 증조부님을 모시기까지는 하늘도 감복할 수밖에 없는 호암 조부님의 정성어린 사연이 지금까지도 생생하게 전해지고 있다.

 

●황금축고형 증조부묘소 - 국부(國富)가 나올 터

 

지상학적으로 보아 말처럼 보이는 마두산(馬頭山)이 바로 금고(金庫)에 황금(돈)을 실어나르는 당나귀로서 황금축고형(黃金蓄庫形)의 地相을 총괄하는 가브리엘 천사의 존재양상(存在樣相)을 드러낸 실체형상이기도 하다.

 

저희가 처음으로 묘소를 찾아올 때 환상체로 현현하여 길을 인도해주기도 했는데 당나귀 등에다 황금(돈)을 가득 실어다 금고(金庫)에 쌓아놓게 되는 마두산(馬頭山)의 地相까지 갖추고 있는 등 국부(國富)가 나올 수 있는 지상학적 여건이 이곳 저곳에 마련되어 있었다.

 

호암(湖巖)의 조부께서는 당시에 내놓으라 하는 지관(地官)으로서 아버지의 유골을 궤짝에다 짊어지고 좋은 산소자리를 찾기 위해 10년을 돌아다녔지만 끝내 명당을 찾지 못하고 포기할 수밖에 없었는데 우연히 동네 뒤의 절에 놀러가서 스님에게 구산(求山)을 하기 위해 10년 동안 돌아다닌 이야기를 했더니 그 정성에 감복한 스님께서 잡아준 산자리가 지금의 황금축고형(黃金蓄庫形) 명당으로서 10년 동안 산을 보러 다녔지만 결국 자기 집 뒤에 묘를 쓰게 되었다는 문장이 '십년구산(十年求山)에 가후장(家後葬)'이다.

 

경남 의령에는 예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금두꺼비가 엎드려 있는 금섬복지(金蟾伏地)에 묘를 쓰면 국부(國富)가 나온다는 말이 있었기에 10년 동안 금섬복지를 찾아다녔던 호암 조부님께서는 그 자리를 금섬복지로 보았기 때문에 호암이 어릴 적에 손을 붙잡고 호암 증조부님 산소를 데리고 다니면서 '너(이병철)는 앞으로 조선의 제일가는 갑부(甲富)가 될 것'이라고 일러주었다고 한다.

 

이병철회장 증조부 이재봉(李載鳳) 묘소 바로 밑에 석축처럼 떠받치고 있는 바위로 형성된 금고(金庫)인데 이 바위가 바로 전설적으로 내려오는 금섬복지(金蟾伏地)이기도 하다.

 

경남 의령군 유곡면 마두리 깊은 산속에는 이병철 회장님의 증조부님 음택(陰宅)이 있는데 산골짜기 길로 들어서기 전에 마두리 마을회관 앞에서 멀지 않게 바라다 보이는 산의 모습은 당나귀의 등에다가 짐을 가득 싣고 있는 듯하게 보이는데 마을 사람들에게 알아본즉 이 산이 바로 마두산(馬頭山)이라고 한다.

 

이병철 회장님의 증조부님 음택(陰宅)에 대하여 좀 더 구체적으로 알아본다면 산으로 둘러싸인 창고이기 때문에 산골짜기 좁은 길을 따라서 한참을 들어가다 보면 바윗돌로 형성된 황금축고형(黃金蓄庫形)의 바로 위에 호암의 증조부님 산소가 있으니 이는 금고(金庫) 위에 주인이 앉아 있는 격이며, 안산(案山)은 삼태안산(三台案山)으로서 풍만한 산봉우리 세 개가 너무도 잘 감싸주고 있을 뿐 아니라 황금축고형의 열쇠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부언한다면 황금축고형(黃金蓄庫形) 금고(金庫)의 열쇠이기도 한 삼태안산(三台案山)의 별 태(台) 자를 근거하여 삼성(三星)이라는 이름이 나오지 아니했을까로 추측하여 보기도 하는데, 지상학적으로 볼 때 양택(陽宅)은 사금분채형(砂金 採形)으로 사금(砂金)을 캐는 형국이요 음택(陰宅)은 황금축고형(黃金蓄庫形)으로서 사금(砂金)을 캐다가 쌓아놓을 수 있는 금고(金庫)까지 마련되어 있으니 국부(國富)가 나올 수밖에 없는 일로서 깊고 오묘한 하나님의 창조신비(創造神秘)에 경탄하고 감복할 따름이다.

 

출처 : 서경풍수지리학회 ㅣ글쓴이 : 兀山 김정인

 

 

↑잘 조성된 삼성가 이병철회장의 부모와 조부모 묘역입니다.

(맨 위가 이병철 회장의 조부모 묘, 중간이 부모님 묘, 맨 아래가 모친 황씨 묘) 

 

↑조부 이홍석(1838~1897/부인 순흥안씨와 합폄) 묘/1967년 이곳 수원시 이목동으로

  이장하였다, 좌향은 자좌 오향이다.

 

↑이병철회장 부친(이찬우) 묘/1967년 이장, 해좌사향.

 

↑부친묘의 후경

 

↑이병철회장의 어머니 회산황씨묘(檜山黃氏墓/회산은 창원의 옛지명)

  좌향은 임좌 병향이다.

 

↑어머니 회산황씨의 성경

 

↑어머니 묘의 전순에 심은 매화나무

 

↑故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 묘.

  묘역소재지 : 수원시 장안구 이목동 삼성선영

 

출처 : 인터넷

 

이 묘역은 삼성그룹의 창업자 고(故) 이병철 회장 께서 하남 장용득 선사의 도움을 받아 이장한 묘역 입니다. 

당초 이 산은 SK소유의 산이었으나 故 이회장이 매입하여 조부모와 부모님을 모셨다고 합니다.

 

故이병철회장님의 묘는 용인 애버랜드 경내에 있으며,이곳 묘역에는 조부모와 부모님의 묘가 있습니다.

이 사진은 2008. 02. 18. 담은것으로 지금은 답산이 허락되지 않는 묘역입니다.

 

출처 : 한국참풍수지리학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