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 우리들의 자화상!
누더기 옷에 헐벗고 굶주림에 살았지만, 따뜻한 온정이 흐르던 시절이었습니다.
▲추운겨울 냉기가 감도는 방에서 나와 따듯한 햇볕에서 늘 언몸을 녹이곤 했지요.
헤진 옷을 입고 살아도 다들 그렇게 사니 부끄러움이 뭔지도 모르고 자랐다.
▲세상에서 제일 좋은 어머니~ 추운겨울 양말이 없어 발이 시려도 어머니 등에 업히
면 엄마 품의 따듯하고 포금함은 지금도 잊을 수 가 없습니다.
*투방집=나무로 얼기설기 쌓아서 흙으로 빈 공간을 막아서 지은 집입니다.
▲소 외양간에 창을 만들어 소 여물을 먹이는 모습이 정겹습니다.
소가 재산목록 1호였으니 사람은 굶어도 소는 늘 따뜻하게 쇠 죽을 끓여서 주곤
했지요. 물론 소 없는 집이대다수였습니다.
▲두메산골에서 추운 겨울을 나기위해 월동 준비를 해놓은 장작더미 앞의 세모자
입니다. 초라한 모습과 천진 난만한 표정이 가슴을 찡하게 만듭니다.
▲굴피나무 껍질로 지붕을 덮어놓은 "너와집"입니다.
▲겨우살이를 위해 준비해둔 옥수수와 산골의 가정의 풍경입니다.
옥수수 죽이나 감자 등으로 연명하며 겨울나기를 했지요.
▲아이를 등어 업고 밭에 김메는 당시 우리들의 어머니십니다.
▲먼동이 트기전의 이른 새벽에 신문배달이나 또는 '신문팔이"를 하면서 부모님 살
림살이를 돕거나 학비를 충당하며 공부를 했습니다.추수가 끝난 동구 밖의 들판은
아이들의 놀이터로서 최고였지요.
▲어촌 아이들이 부모님 일손을 돕기 위해 어포말리는 일을 하는 모습입니다.
▲생활은 어려워도 꿈과 희망이 넘쳤던 시절이었습니다. 텃밭의 짚더미는 추위도
녹여 주고 놀이터로 활용되곤 했지요.
▲학교를 다녀오면 의 례 부모님 일손을 돕고서 밤이 돼야 숙제를 할 수 있었다.
가물가물한 호롱불 밑에서 꾸벅꾸벅 졸면서 숙제하다 머리카락 많이들 태웠었지!.
연필심 마저도 품질이 나빠 침을 발라 두어자 쓰고 또 침 바르고, 그래도 그때가 좋
았습니다.
▲암 닭이 알을 놓기가 바쁘게 책보자기를 허리에 메고 계란의 따듯한 온기를 느끼며,
학교로 내달렸지요. 학교 옆 문방구에 가서 계란으로 공책이나 연필 등 학용품으로
물물 교환했습니다. 뛰어가다 엎어져 계란은 깨지고 눈물 콧물 울기도 많이 했었지
요, 금방 낳은 계란에 손에 들고 기쁨을 감추지 못하는 표정이내요.
▲학교 다녀와서는 어김없이 지게지고 밭으로 나가 일을 돕거나, 산으로 땔감을 구
하러가곤 했지요.
▲가축도 기르고, 한겨울에 고무신 발이 꽁꽁 얼어서 동상 안 걸린 아이들이 없었지
요.
▲식후 설거지를 하 기 위해 솥 가마 속에 빈 그릇을 담아 안고 동네 우물가로 가는
모습입니다. 가마솥 뚜껑을 머리에 쓰고 가는 모습이 설거지를 많이 해본 솜씨 같
습니다.ㅎ
▲여아들은 나무를 묶어서 머리에 이고 산에서 내려오다 구르고 넘어지고....
▲당시엔 먹고 살기위해 학교 다녀오면 길거리로 구두딱이, 껌팔이, 신문팔이 등 무
엇이든 해야 했습니다.
▲구두를 닦는 아이의 표정이 무척이나 고달파 보입니다.
▲어머니의 바쁜 일손을 돕고 모습입니다. 요즘 머리에 물건이고 다닐 수 있는 어린
이 들은 아마 없겠지요.
▲당시 부모님들은 공사장이나 들에 나가고 어린아이들은 학교 다녀와서 동네의
공동 잔일들은 다 했습니다.
▲당시의 아이들은 곡괭이나 삽질도 참 잘 했습니다.
▲6.25 전쟁 이후 정부에서 어렵 살이 학교 교실 하나 지어주면 나머지 모든 공사는
학생들 몱이었습니다. 돌을 이고 지고 학교 축대 쌓는 작업을 하고 있는 어린학생
들 모습입니다.
▲어촌에 사는 아이들은 배타고 나가 부모님 일손도 돕습니다.
▲아이들이 산과 들에 소도 먹이러 가고, 비록 고달프게 잘았지만 국경일이면, 산
골마을 독가에서도 태극기 게양만은 꼭꼭 잊지 않는 나라사랑하는 마음이 있었
지요.
▲초가집 앞 텃밭에서 부모님 농사일을 돕고 있네요.
▲한겨울 강아지를 안고 따사로운 햇볕을 쬐고 있는 모습입니다.
강아지를 안으면 온몸이 따듯했지요. 돌아가면서 강아지 안기 순서를 기다리는
두 어린이 표정이 참 아름답습니다.
▲물을 따듯하게 데워서 엄마가 세수시켜 줄 때면, 제일 먼저 코풀어! 하시고, 어린
자식들을 돌아가며, 세수를 시키셨지요.
▲아파도 병원이 없거나, 너무 멀어서, 늘 집에는 머큐롬 같은 소독 상비 약을 비치
해두고 살았지요. 자식의 아픈 고통을 대신하듯 어머니의 표정이 너무도 안타깝
게 보이네요.
▲이발관이 없어서, 돈이 없어서 동네 한 두 곳 이발 기계 있는 집에 가서 머리를 깎
곤 했지요. 부실한 기계로 머리털 뽑혀서 눈물을 흘린 일도 많았지요.
▲어쩌다 사회 구호단체에서 학교를 찾아와 사탕이나 과자 등 먹을 것을 나누어 주
기도 했지요.
▲아이를 등에 업고 갯벌에서 하루 종일 일하시곤 밤이면 아이고 허리야!
고통으로 잠 못 이루시던 우리 어머님들의 고달픈 삶이 아련합니다.
▲충북 수안보에 있었던 어느 산골마을 학교 모습입니다.
▲부모님들 일손이 모자라 등교길 이린이들은 스스로 조그만 나룻배를 타고 도강
하는 모습입니다. 해서 때론 안전사고도 많았지요.
▲학교의 교실에서 수업하는 초등학생 모습입니다.
▲책상 걸상 무척 정겹습니다. 특별 활동시간 주산부(수판) 어린이들 모습 입니다.
▲당시의 모든 선생님들은 누구나 풍금을 다룰 수 있어야 했지요.
음악시간이 되면 어린이들은 사무실에 있는 풍금을 교실로 옮기곤 했지요.
▲가난해서 양말도 신지 않고 맨발로 학교엘 다녔지만 수업하는 어린이의 모습이
무척 진지해 보입니다.
▲비가 조금만 와도 중간에 수업을 포기하곤 잽싸게 개울을 건너 집으로 귀가해야
했지요. 물이 불으면 개울물을 건널 수 없기 때문이고, 빨리 집에 가서 집안 비설
거지도 도아야 하니깐요.
▲여자는 코고무신 남자는 검정 고무신을 신고 다녔는데, , 한겨울 양말이 없어,
발이시린 아이들은 신발에 짚을 넣고 신었답니다.
▲휴교 날이면 어린이 애향단(동호회)이 골목도 쓸고 마을 어귀에 꽃길도 만들고
자기 마을 가꾸기도 했답니다.
▲빗자루는 싸리나무로 만든 빗자루 입니다. 요즘은 볼수가 없지요.
▲학교주변 수목원도 만들고, 참으로 꿈과 희망이 많았던 시절이었습니다.
▲널뛰기하는 여자 아이들 모습입니다. 가운데 한 아이가 올라가 앉아 중심을 잡고
누가 높이 뛰어 상대를 넘어뜨리나 껑충 껑충 높이 뛰었지요.
요즘은 보기 힘듭니다.
▲운동회가 열리는 가을날이면 온 면민이 모이는 잔치였습니다.
부모님들과 함께 청군 백군을 누뉘어 줄 당기기를 했지요.
▲뛰어가면서 장애물 사다리 통과하기입니다. 무릎이 벗겨 저서 피가 나기도 하고..
▲힘 겨루기 기마전입니다.
▲학교 운동회 넓이 뛰기 장면입니다. 누가 누가 멀리 뛰나요.ㅎ
▲청군 이겨라! 백군 이겨라! 목청것 소리치고 나면 다음날은 모두가 목이 쉬어 ㅎㅎ
지금의 운동회는 점심시간 지나면 끝나지만 당시는 하루 종일 온 면민 잔치로 해가
질 때 까지 했습니다.
▲학교마다 보통 공 두 개정도(배구공, 축구공)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구기운동의 전부였습니다. 눈을 감고 블로킹하는 배구하는 어린이 모습이..
▲이렇게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차범근, 이회택과 같은 세계적인 축구스타들이 탄생
하였습니다.
▲한창 태권도 붐이 일어 학교마다 가르키는 모습입니다...
태극1장 기마자세인가 봅니다.
▲특별활동 시간에 무용연습 하는 여자 아이들입니다. 이시간이면 언제나 책 걸상은
뒤로 밀어 붙여놓고선....
▲길거리 포장마차 비슷한 곳에서 아이들 간식 많이 팔았지요.
불량 식품이 많아 늘 배앓이도 자주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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