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욕보다 기득권」 사대부들 安民 내세워 양병론을 꺾다.
이덕일의 事思史>조선 왕을 말하다
[제116호 | 20090530 입력]
인조반정은 조선을 사대부의 나라로 만들었다. 국왕은 사대부 가운데 제1 사대부에 불과할 뿐 초월적 존재가 아니었다. 국왕이 아니라 사대부가 나라의 구석구석을 지배했다. 효종은 북벌을 가능한 목표로 여겼으나 사대부는 불가능한 꿈으로 여겼다.
사대부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북벌이 아니라 기득권 수호였다.
북벌 추진으로 위협받던 사대부의 기득권은 효종의 급서로 계속 유지되었다.
↑요동벌판 : 효종은 심양에서 인질 생활을 하던 경험을 통해 북벌을 가능한 목표라고 여겼으나 사대부들은 불가능
한 꿈으로 여기고 반대했다. <사진가 권태균>
국란을 겪은 임금들 효종
⑤스러진 ‘북벌의 꿈’
윤휴(尹휴)의 일대기인 『백호(白湖)행장』에 따르면 우암 송시열(宋時烈)과 윤휴는 병자호란 직후 속리산 복천사(福泉寺)에서 서로 손을 잡고 통곡하면서 “좋은 때를 만나 벼슬을 하더라도 오늘의 치욕을 잊지 말자”고 약속했다고 전한다.
치욕을 북벌로 갚자는 북벌설치(北伐雪恥)의 뜻이었다. 하지만 문신들은 효종이 막상 군비를 증강하려고 하면 “백성의 생활이 피폐해진다”며 반대했다. 효종이 재위 7년(1656) 만일에 대비해 산성 수축을 지시하자 전라감사는 상소를 올려 “험한 곳에 성을 쌓는 것은 국가를 튼튼히 하고자 하는 것인데 백성이 먼저 피폐해진다면 국가가 튼튼해질 수 없으니 산성이 국가에 무슨 이익이 되겠습니까?”(『효종실록』7년 11월 26일)라고 반대했다.
군사를 기르는 양병(養兵)보다 백성 생활을 안정시키는 양민(養民)과 안민(安民)이 더 중요하다는 논리였다.
이때 가장 강하게 북벌을 주창한 세력이 숭명(崇明) 의리를 당론으로 삼던 산림(山林), 즉 산당(山黨)이었다.
그러나 이들 역시 효종의 군비 증강 계획에 안민을 내세워 반대했다.
효종 즉위년 우의정 김육(金堉)이 양호(兩湖:전라·충청)에 대동법 확대 실시를 주장했을 때 산당 영수 이조판서 김집(金集)과 송시열·송준길 등 양송(兩宋)이 일제히 반대했다. 대동법은 토지 소유의 많고 적음에 따라 세금을 내자는 안민책인데 양반 지주의 입장에 서서 반대한 것이었다.
이때 효종은 “대동법을 시행하면 대호(大戶:부자)가 원망하고 시행하지 않으면 소민(小民:가난뱅이)이 원망한다는데 그 원망의 대소(大小)가 어떠한가?”(『효종실록』즉위년 11월 5일)라고 물었다. “소민의 원망이 더 큽니다”고 대답하자 효종은 “그 대소를 참작해 시행하라”고 사실상 실시 명령을 내렸다.
그럼에도 양반 사대부의 반발 때문에 효종 2년(1651)에야 겨우 충청도만 확대 실시될 수 있었다.
안민은 결국 일부 사대부의 북벌 반대 명분이자 기득권 수호 논리에 불과했다.
↑충북 괴산군에 있는 만동묘비. 명나라 신종과 마지막 의종을 제사 지내기 위한 사당.
문신들은 명 황제의 복수를 외쳤으나 정작 북벌에는 반대했다.
그래도 효종이 북벌 준비에 박차를 가하자 재위 8년(1657) 무렵부터는 사대부의 집단 저항이 노골화되었다.
전 헌납(獻納) 윤겸(윤겸)은 “재변에 대비하는 것은 국가가 마땅히 먼저 해야 하는 것이니 군사를 기르지 않을 수 없겠습니다만 영장(營將)을 설치하는 것은 그 폐단이 만 가지나 됩니다”(『효종실록』8년 2월 8일)고 무장 양성책을 비판했다.
사간(司諫) 이정기(李廷夔)는 “군사를 기르고 무기를 수선하는 것은 군국(軍國)의 일로서 하지 않을 수 없으나 여러 신하는 전하께서 무예를 좋아하신다고 의심하고 있습니다”(『효종실록』8년 8월 23일)라고 효종의 상무(尙武)정책을 비판했다.
같은 해 송시열은 밀봉 상소인 ‘봉사(封事)’를 올려 효종에게 전면전을 선포했다. “전하께서 재위에 계신 8년 동안 세월만 지나갔을 뿐 한 자 한 치의 실효도 없었습니다. 위로는 명나라 황제에게 보답하고 아래로는 여러 신하와 백성의 바람에 답하지 못함이 어찌 오늘에 이를 수 있습니까?
그래도 효종이 북벌 준비에 박차를 가하자 재위 8년(1657) 무렵부터는 사대부의 집단 저항이 노골화되었다. 전 헌납(獻納) 윤겸(윤겸)은 “재변에 대비하는 것은 국가가 마땅히 먼저 해야 하는 것이니 군사를 기르지 않을 수 없겠습니다만 영장(營將)을 설치하는 것은 그 폐단이 만 가지나 됩니다”(『효종실록』8년 2월 8일)고 무장 양성책을 비판했다.
사간(司諫) 이정기(李廷夔)는 “군사를 기르고 무기를 수선하는 것은 군국(軍國)의 일로서 하지 않을 수 없으나 여러 신하는 전하께서 무예를 좋아하신다고 의심하고 있습니다”(『효종실록』8년 8월 23일)라고 효종의 상무(尙武)정책을 비판했다. 같은 해 송시열은 밀봉 상소인 ‘봉사(封事)’를 올려 효종에게 전면전을 선포했다.
“전하께서 재위에 계신 8년 동안 세월만 지나갔을 뿐 한 자 한 치의 실효도 없었습니다.
위로는 명나라 황제에게 보답하고 아래로는 여러 신하와 백성의 바람에 답하지 못함이 어찌 오늘에 이를 수 있습니까?
백성이 원망하고 하늘이 노해 안에서 떠들고 밖에서 공갈하여 망할 위기가 조석(朝夕)에 다다랐습니다.
”(‘정유봉사(丁酉封事)’) ‘정유봉사’는 효종의 통치 행위에 대한 전면적인 부정이었다.
19개조에 달하는 ‘정유봉사’의 핵심 역시 양병보다 양민에 힘쓰라는 것과 사대부를 우대하는 왕도(王道)를 기르라는 것이었다. 19번째 항목에서 송시열은 “주자가 처음에는 효종(남송의 효종)에게 금나라를 쳐 북벌하는 의리에 대해 극진히 말하였으나 20년 뒤에는 다시 북벌에 관해 말하지 않고…”라면서 주희(朱熹)의 사례를 들어 북벌에 반대하는 속내를 보였다.
국왕에게 중요한 것은 북벌이 아니라 ‘수신(修身)’이라는 것이다.
효종은 “오늘날 씻기 어려운 치욕을 당했는데, 모두가 이런 생각을 하지 않고 매번 내게는 수신만 권하고 있으니 이런 치욕을 씻지 않고 수신만 하면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효종실록』9년 9월 1일)”고 반발했으나 산당의 협조 없이 북벌 추진이 불가능하다는 현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효종은 산당과 대연정을 구성하기로 결심했다.
효종 9년(1658) 9월 효종은 송시열을 이조판서로, 송준길을 대사헌으로 삼았다.
인사권과 탄핵권을 쥐었으니 사실상 정권을 장악한 셈이었다. 효종 10년 1월에는 인조의 시호에 ‘조(祖)’자를 쓰는 데 반대하고 ‘종(宗)’자 사용을 주장하다가 파직되었던 유계(兪棨)가 복귀하고 이유태(李惟泰)도 사헌부 지평에 제수되는 등 산당이 대거 조정에 들어왔다.
반면 원두표·이완 등 북벌 인사들은 정권에서 소외되었다. 효종의 정치적 양보에는 조건이 있었다.
산당이 책임지고 북벌을 추진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송시열은 실제 북벌 추진에 그리 적극적이지 않았다.
그래서 효종은 재위 10년(1659) 3월 11일 송시열과 담판을 지었다.
이른바 기해독대(己亥獨對)였다.
이 날짜 『효종실록』은 효종이 승지와 사관(史官)에게도 물러가라고 분부한 다음 “송시열 혼자 입시했는데, 바깥에 있는 신하들은 송시열이 어떤 일을 진달했는지 알 수 없었다”고 쓰고 있다.
사관이 배석하지 않고 내관도 내보냈으나 독대 내용을 송시열이 ‘악대설화(幄對說話)’란 기록으로 남겼고, ‘독대설화(獨對說話)’라는 필사본도 전해져 그 내용을 알 수 있다.
효종은 “오늘 이 자리를 마련한 이유는 현재의 대사(大事)를 논의하기 위함이다”고 말했는데 현재의 대사란 물론 북벌이었다. 효종의 계획은 이런 것이었다. “오랑캐의 일은 내가 잘 알고 있다.
정예화된 포병(砲兵) 10만을 길러 자식처럼 사랑하고 위무하여 모두 결사적으로 싸우는 용감한 병사로 만든 다음 기회를 봐서 오랑캐들이 예기치 못했을 때 곧장 관(關)으로 쳐들어갈 계획이다.
그러면 중원의 의사(義士)와 호걸 중에 어찌 호응하는 자가 없겠는가.”(‘악대설화’)
효종은 자신의 볼모 생활에 대해 “나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하늘이 나에게 이러한 시련을 겪게 한 뜻이 우연이 아니라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다”고 회상했다. 효종은 또 “대사를 위해 내전(內殿:왕비의 침실)에도 잘 들어가지 않는다.
주색을 끊은 결과 정신과 몸이 좋아져 앞으로 10년은 보장할 수 있을 것”이라고도 말할 정도로 북벌에 집착했다. 그러나 송시열의 생각은 달랐다. 효종은 “신하가 모두 눈앞의 부귀만을 도모하면서 북벌을 하면 나라가 망하게 되는 듯이 두려워하고 있기 때문에 이 일을 말하면 모두 간담이 서늘해서 놀라니 나 혼자 부질없이 탄식할 뿐이다”고 한탄했다.
그러자 송시열은 “자고로 제왕은 반드시 먼저 자신의 몸을 닦고 집안을 다스린(修己刑家) 뒤에야 법도와 기강을 세웠습니다. 여러 신하가 제 집안 살찌우는 데만 힘쓰는 것도 전하를 보고 배운 것이 아니라고 어찌 말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면전에서 비판했다. 효종의 북벌 주장에 대한 송시열의 대안은 오직 ‘자신의 몸을 닦고 집안을 다스린다’는 ‘수기형가’였다.
군왕의 수신(修身)이 북벌의 전제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도 효종은 송시열을 버릴 수가 없었다.
효종은 “조만간 경에게 큰 임무를 맡기고 양전(兩銓:이조판서와 병조판서)을 겸직하게 하려 한다”고 말했다.
송시열의 ‘악대설화’는 “내가 밖으로 물러나오자 임금께서 직접 중관(中官)을 다시 오라고 불렀다”는 내용으로 끝난다. 이날의 독대는 송시열에게 ‘더 큰 권력을 주겠지만 적극적으로 북벌을 추진해야 한다’는 단서가 붙어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산당에게 준 정권을 회수할 것이라는 최후통첩이기도 했다.
송시열이 입장 정리를 위해 상황을 모색하는 동안 급변이 발생했다.
‘앞으로 10년은 보장한다’던 효종이 독대한 지 두 달이 채 못 된 재위 10년 5월 4일 급서하고 만 것이다.
효종의 병은 귀 밑에 난 종기였는데 송시열이 5월 15일 정안숙(鄭晏叔)에게 보낸 편지에서 ‘침의(鍼醫) 신가귀(申可貴)가 침을 놓자 처음에는 고름이 조금 나오다가 이어서 피가 두어 말이나 나왔다’면서 ‘아침에 침을 놓았는데 사시(巳時:오전 9~11시)에 승하했다’고 쓴 것처럼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급서였다.
북벌 군주의 급서에 민심이 흉흉해진 것은 이런 의외성 때문이었다.
살아서 이루지 못한 북벌의 꿈 때문인지 효종은 승하 후에도 이 세상을 떠나지 못했다.
시신에 부기가 있었으며, 관이 시신보다 짧아서 널판을 덧대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다.
그리고 드디어 현종 즉위 직후 자의대비 조씨가 상복을 얼마 동안 입어야 하는지를 둘러싸고 예송논쟁이 발생했다. (효종 끝. 다음은 삼종의 혈맥 1-현종)
[출처] [이덕일의 事思史: 조선 왕을 말하다]‘설욕보다 기득권’ 사대부들 安民 내세워 양병론을 꺾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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