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權道의 말단」정치공작, 당쟁의 피바람 키웠다.
이덕일의 事思史>조선 왕을 말하다
[제127호 | 20090815 입력]
세상 모든 길에는 상도(常道)와 권도(權道)가 있다.
정도(正道)라고도 불리는 상도는 어떤 상황에서도 지켜야 하는 원칙이고, 권도는 상황에 따른 응용이다.
당쟁이 심해지면 권도의 말단인 정치공작의 유혹이 커져간다.
정치공작이 용납되는 세상은 그 자체로 개혁 대상이 된다.
권도는 정도를 실현하는 하나의 방법에 불과하지 그 자체가 목적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김석주(金錫冑,1634~ 1684) 묘,
경기도 광주시 남종면에 있다. 서인과 남인을 넘나든 최고의 실세였으나 남인 제거를 위한 정치공작을 주도하면서 명성이 급격히 퇴락했다. 무덤의 무성한 풀이 후세 사람들에게 권력무상을 경계하는 듯하다.
三宗의 혈맥 숙종
⑤서인의 분열
경신환국으로 서인이 재집권한 지 2년 6개월 후인 숙종 8년(1682) 10월 21일. 전 병사(兵使) 김환(金煥)과 출신(出身: 무과에 급제했으나 아직 벼슬에 나가지 못한 사람) 이회, 기패관(旗牌官: 군영의 장교) 한수만 등이 대궐에 나와서 상변(上變)했다. 남인 허새(許璽)·허영(許瑛) 등이 복평군을 왕으로 추대하고 대왕대비에게 수렴청정을 시키려 했다는 고변이었다.
즉각 국청이 설치되어 수사에 들어간 와중에 출신(出身) 김중하(金重夏)가 전 대사헌 민암(閔<9EEF>) 등이 사생계(死生契)를 조직했다면서 다시 역모를 고변했다. 같은 달 27일에는 어영대장 김익훈(金益勳)이 아방(兒房: 궐내 장신들의 휴게소 겸 숙소)에서 숙종에게 역모를 밀계했다.
이것이 숙종 8년(1682:임술년) 발생한 임술고변인데 그 내막은 대단히 복잡하지만 목적은 단 하나 남인들을 도륙하기 위한 것이었다.
↑윤증(尹拯,1629~1714) 초상과 고택 충남 논산시 노성면에 있다.
송시열에게 실망한 젊은 서인들에 의해 소론 영수로 추대됐다.
이 사건의 배후는 숙종의 외척이자 우의정인 김석주(金錫胄)였다.
송시열의 제자 권상하(權尙夏)의 『한수재집(寒水齋集)』『황강문답(黃江問答)』에는 “김환(金煥)은 본래 서인으로서 무예를 닦다가 오인(午人: 남인)의 손에 등과(登科)한 사람”이라면서 “김석주가 ‘명을 따르지 않으면 목을 베겠다’면서 허새·허영을 역모로 모는 구체적인 방법까지 가르쳐 주었다”고 전하고 있다.
“(김석주가 김환에게 말하기를) 지금 허새와 허영이 용산(龍山)에 살고 있으니, 네가 피접(避接: 요양)을 핑계로 그 이웃집으로 이사 가 깊이 사귄 후에 장기를 두도록 하라. 네가 이겼을 때 넌지시 ‘나라를 취하는 것도 이렇게 해야 한다’고 말하고 기색을 엿보라. 저들이 괴이하게 여기는 기색이 없거든 함께 동침하면서 모반에 대해 은밀히 의논하라.
그렇게 살피면 진위(眞僞)를 살필 수 있을 것이다.( 『황강문답』『한수재집』)” 김환이 “ 그들이 도리어 나를 고변하면 어떻게 하느냐”면서 거절하자 김석주는 “그것은 모두 내 손에 달린 일이니 걱정하지 말라”며 은전(銀錢)을 주었다.
박세채 초상 윤증과 함께 소론 영수였다.
그런데 공작이 마무리되기 전에 사신으로 가게 된 김석주는 심복 김익훈(金益勳)에게 임무를 맡겼다. 그사이 김환이 역모를 꾸민다는 소문이 돌자 김환이 먼저 고변한 것이다.
허새는 압슬형(壓膝刑)을 비롯해 혹독한 형신(刑訊)을 견디며 부인하다가 끝내 시인했고, 서종제(庶從弟) 허영 역시도 고문에 못 이겨 혐의를 시인했다.
그러나 “허새(許璽,미상~1682)가 죄를 승복한 뒤에도 모주(謀主)에 대한 한 항목만은 끝내 하나로 귀일되지 않아 연달아 일곱 차례의 형신을 받았다”는 『숙종실록』의 기록처럼 복평군을 끌어들이는 것은 끝내 거부했다.
한 차례의 형신은 30대를 뜻했고 곤장도 보통 범죄보다 크고 두꺼웠다. 허새가 물고(物故: 죽음)될 위험이 있자 서둘러 사형시키고 허영도 지정률(知情律: 불고지죄)로 처형했다. 이 사건은 많은 의혹을 낳았다.
김익훈은 남인 유명견(柳命堅)도 역모로 몰려다 여의치 않자 국청의 위관 김수항(金壽恒)에게 수사를 요청했다. 김수항은 “국청의 일은 어명으로 나온 것이나 죄인의 초사에 나온 것이 아니면 감히 거론할 수 없다”고 거절하는 등 같은 서인들끼리도 혼선이 생겼다.
김환·이회·한수만은 공신이 되었으나 유명견을 물고 들어갔던 전익대는 유배형에 처해지자 의혹이 증폭되었다. 정치공작이란 소문이 광범위하게 퍼졌다. 『당의통략(黨議通略)』은 “이때 사류(士類)들이 다투어 ‘김익훈이 남을 유인해 역모로 만들었으니 그 마음은 자신이 역적이 된 것보다 더 나쁘다’고 말했다”고 전한다.
조익(趙翼)의 손자 승지 조지겸(趙持謙)과 집의 한태동(韓泰東) 등 젊은 서인들이 강력하게 반발했다. 재수사 요구가 거세자 귀양 간 전익대를 불러 다시 심문했는데 김환이 사주했다고 고백했다.
김환을 국문할 경우 김석주와 김익훈의 사주가 드러날 것을 우려해 국문 없이 귀양 보냈고 전익대는 사형시켰다. 주범은 귀양 가고 종범만 사형 당하자 조지겸은 “협박을 당한 전익대는 죽었는데, 유혹하고 협박한 자(김환) 홀로 죄를 면하겠습니까?(『숙종실록』 9년 4월 16일)”라고 항의했으나 소용없었다.
『당의통략』은 “다 김석주와 김익훈이 사주한 것인데, 전익대만 후원자가 없었으므로 혼자 죽었다고 사람들이 일렀다”는 말처럼 물의가 들끓었다. 사헌부 집의 한태동(韓泰東)이 김익훈을 공격한 말이 젊은 서인들의 여론을 말해주고 있다.
“김익훈은 문벌(門閥)을 의지해 백도(白徒: 과거 미급제자)로서 떨쳐 일어나 기록할 만한 단편적인 선행(善行)은 없지만 악(惡)은 한 가지도 갖추지 않은 것이 없을 것입니다.
심지어 역적 집안의 재산에 침을 흘려 그 아내(婦: 허견의 부인)까지 차지했고…갑인년(현종 15년) 이후…유현(儒賢: 김장생)의 손자로서…욕된 짓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고, 역적 허적(許積)에게 붙어 노복보다 심하게 아첨했습니다.(『숙종실록』 8년 12월 22일)”
김익훈은 송시열의 스승 김장생의 손자였다. 그러나 남인정권 때는 허적에게 붙었다가 경신환국 후 허적의 재산과 그 며느리까지 빼앗았다는 것이다. 물의가 커져가자 숙종은 민정중(閔鼎重)의 건의를 받아 송시열·윤증(尹拯)·박세채(朴世采) 같은 유현(儒賢)을 출사시켜 조정 분위기를 일신하려 했다.
여러 차례 벼슬을 사양하던 이들은 송시열을 필두로 상경하게 되는데 숙종 8년(1682) 11월 22일 송시열이 여강(驪江: 여주)에 도착하자 숙종은 승지를 보내 예우했다. 그 승지가 조지겸이었는데 권상하는 『황강문답』에서 이때의 정경을 전하고 있다.
“승지 조지겸이 여러 날 동안 (송시열을) 모시고 묵으면서 광남(光南: 김익훈)이 반역으로 유도한 나쁜 마음씨를 자세히 말하니 우암이 듣고는 역시 무상(無狀)한 짓이라면서 비록 죽어도 애석하지 않다고 말했다.
그러자 젊은 무리(少輩)들이 ‘장자(長者)의 소견도 우리들과 같다’고 크게 기뻐했다.(권상하, 『황강문답』 『한수재선생문집』)” 그러나 송시열이 입경(入京)한 후 상황이 달라졌다. “우암이 서울에 들어오자 문곡(文谷: 김수항)·노봉(老峯: 민정중)·청성(淸城: 김석주)이 사건의 본말을 다 알렸으며, 또 광성(光城: 김익훈)의 가족이 찾아와 그 곡절을 호소했다.
우암이 비로소 사건의 전말을 알고 ‘일이 과연 이렇다면 김익훈은 죄가 없다’고 말했는데 젊은 무리들이 크게 분개하면서, ‘장자(長者)도 사사로이 편애하여 처음의 견해를 바꾸는가’라고 말했다. 이렇게 조지겸·한태동이 비로소 각립(角立)하게 되었는데 그들을 따르는 무리가 무수히 많았다.(『황강문답』)”
선조 8년(1575) 을해당론으로 사림이 동서로 분당된 후 일찍 남인과 북인으로 분당된 동인과는 달리 100년 이상 단일 정체성을 유지하던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진 것이었다. 송시열 연보는 그가 숙종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적고 있다. “신이 젊어서 김장생을 스승으로 섬겼는데 그 손자 익훈이 시론(時論)에 죄를 얻어 장차 죽게 되었습니다.
신은 조목(趙穆: 이황의 제자)이 이황의 자손을 규계(規戒)한 것처럼 하지 못한 것으로서 신은 조목에 대한 죄인입니다.(『송자대전』연보, 숭정(崇禎) 56년, 계해.)” 송시열이 김익훈을 변호하고 나서자 젊은 서인들은 분개했다. 젊은 서인들이 반대 당에 대한 정치공작에 반대하고 나선 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여야 사이에 공존(共存)의 정치를 복원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그러나 송시열은 김석주를 비롯한 서인 노장파의 견해를 듣고 김익훈을 변호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정치공작을 옹호했다. 이런 상황에서 과천까지 올라온 윤증(尹拯)은 정세를 관망하며 입경(入京)하지 않았다.
박세채가 과천까지 내려가 윤증을 만났는데, 『숙종실록(9년 5월 5일)』과 『당의통략』은 이때 윤증이 세 가지 출사 조건을 내걸었다고 밝히고 있다.
“서인과 남인의 원한을 풀 수가 없고, 삼척[三戚: 김만기·김우명(김석주)·민유중의 세 외척 가문]의 문호를 막을 수 없고, 지금의 세태는 자신의 뜻과 다른 자는 배척하고 순종하는 자만 같이합니다. 이런 풍조를 고치지 않으면 안 될 터인데, 공이 할 수 있겠소?(『당의통략』)”
박세채는 한참 침묵하다가 “모두 불가능합니다”라고 답했고, 윤증은 “세 가지를 고칠 수 없다면 나는 출사하지 않겠소”라면서 귀향했다. 송시열에게 실망한 젊은 서인들은 윤증을 새 영수로 삼았다.
세 가지 조건은 정치공작 기획자 처벌 하나로 귀결되는 것이었다. 그러면 서인과 남인 사이의 원한도 풀리고 외척(김석주)의 세력도 퇴조하면서 공존의 정치가 회복될 수 있었다.
숙종이 이 길을 걸었으면 분열의 정치는 통합의 정치로 전환되고, 증오는 사랑으로 승화될 수 있었지만 그는 정치권을 분열시켜 왕권을 강화하는 것을 최고의 목표로 삼았던 패도(覇道) 정객에 불과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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