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보재이상설선생.

보재 이상설선생의 독립정신

야촌(1) 2015. 6. 11. 20:31

보재 이상설선생의 독립정신

 

*글쓴이 : 손보기/연세대교수

*이 글은 1975년 9월 나라사랑 제20집, 보재 이상설선생 특집호에 수록된 글입니다.

 

그가 임종의 마당에서 볼 때, 가장 중요한 것이 조국광복이고, 조국광복을 위해서는 동지들이 ‘합세’하여야 한다는 것을 가르쳤다. 조국광복이라는 과업을 이룩하는 힘들고 크나큰 사명 앞에는 본인에 관한문제로 조국광복을 수행하는 동지나 민족에게 누를 끼칠 수 없다는 뜻이었다.

--------------------------------------------------------------------------------------------------------------------------------------

 

역사 사실을 말할 때, 우리는 흔히 어떠한 조건을 붙여서 “만일 이랬더러면 어찌되었을까?”하는 식의 의문을 가지고 역사의 수레바퀴를 다른 방향으로 돌렸을 수도 있었을 것을 생각해 본다. 역사를 연구하는 사람이 이렇게 해서는 안 되는 것으로 되어있다.

 

그러나 보재선생을 생각할 때, 우리는 오히려 그러한 생각을 하게만 된다. 왜냐하면 보재선생이 당시의 역사 현실을 보고, 미래를 내다보며, 제안한 것이 바로 그러한 가능성을 너무나 풍부히 지녔던 것으로 판단되기 때문에 그러하다.

 

밀어붙이는 침략세력에 항거하고 자주독립을 이어나가려는 보재선생의 생각이야말로 당시의 수레바퀴를 우리가 원하는 길로 굴릴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으리라고, 생각되는 까닭이다. 반드시 다가올 1910년의 강압하의 국권 약탈을 얘기한 보재는 다음과 같이 생각 하였었다.

 

보재선생은 앞을 보는 예리한 눈으로 1910년 7월 28일 의암(毅菴) 유인석(柳麟錫)선생과 더불어 고종 황제의 아령파천(俄領播遷)을 계획하고, 권고했다. 일본이 이른바 ‘고종황제와의 합의하에 이뤄진’ 것으로 세계에 거짓 선전한 것을 뒤엎고, 1905년의 약탈 조약으로부터 모든 것을 허위로 나타낼 수 있는 방법이란 보재선생이 생각했던 길밖에 없었으리라!

 

아령으로의 망명이 고종황제로서 할 수 있었던 유일한 방법이었을 것이다. 보재선생은 1907년 헤이그, 미국, 런던 등에서 그러한 노력을 하였지만, 큰 성과를 얻을 수는 없었다.

 

보재선생은 일찍이 1905년 11월 18일 새벽, 을사5조약이라 불리는 약탈조약의 죄악이 저질러졌던 날부터 19일, 22일, 24일과 12월 8일에 걸쳐 의정부참찬(議政府參贊)의 자리를 물러서겠다는 취지의 사직소(辭職疏)를 내었다. 

 

그 사직소의 내용은 보재선생을 물러서게 하거나 을사5조약(乙巳五條約)을 처단하거나 나의 결단을 고종에게 내리게 한 취지이었다. 이는 대한제국의 갈 바를 제시한 것으로 바로 당시 대한의 운명을 제대로 파악한 위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나아가서 약탈조약을 인준하던 안하던 나라는 망한다는 것으로 통찰하고 고종에게 차라리 국가민족에 대하여, 순직하라는 것이 핵심이었는데 이것은 신하로서 말할 수 없는 민족의 충언이었다. 

 

사실 고종은 그 후 일인에게 볼모가 되어 삶을 보내다가 그도 암살 당 한다는 식으로 목숨을 끝냈지만, 황제에게 간언할 것은 국가를 위하여 자결하는 길밖에 남은 도리는 없었다고 보재선생은 명확히 보았던 것이다. 

 

그 당시 고종이 자결을 하였던들 을사조약은 그같이 성립되지 않았을 것이고, 3.1운동과 같은 거족의 항거운동이 전개되었으리라. 또한 을사오적도 일인의 종으로 남아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보재선생은 그 같이 되지 않은 이후, 고종에게 끝으로 남아있는 길은 아령(俄領: 러시아)으로 망명하는 길뿐이라고 생각되었다. 

 

영일동맹(英日同盟)이나 태프트. 카쓰라 밀약이 있었던 제국주의 시대이었지만, 고종의 자결 또는 망명은 확실히 일본의 허위날조를 온 세계에 폭로할 수 있는 단 하나의 길이었다고 본 사람은 보재선생을 빼놓고 없었던 것 같다.

 

이같이 앞날을 볼 수 있고 방법을 알 수 있었던 것은 선생의 투철하고 냉철한 판단에서 비롯되었다 하겠다. 보재선생은 그 판단력이 그의 최선을 다하겠다는 심지에서 나왔다. 그의 목숨은 국가를 위해서 있다는 원칙에 서있었다. 그는 1917년 3월 2일에 니콜리스크(雙城子)의 황두진집에서(黃斗珍)에서 48세의 나이로 피를 품으며 세상을 떠났다. 운명할 때 보재선생은

 

“동지들은 합세하여 조국광복을 기필코 이룩하라.

나는 조국광복을 이루지 못하고 이 세상을 떠나니

어찌 고혼(孤魂)인들 조국에 돌아갈수 있으랴?

내몸과 유품은 모두 불태우고 그 재마저 바다에 날린 후

제사도 지내지 말라”는 마지막 말을 남겼다.

 

그가 임종의 마당에서 볼 때, 가장 중요한 것이 조국광복이고, 조국광복을 위해서는 동지들이 ‘함께’하여야 한다는 것을 가르쳤다. 조국광복이라는 과업을 이룩하는 힘들고 크나큰 사명 앞에는 본인에 관한 문제로 조국광복을 수행하는 동지나 민족에게 누를 끼칠 수 없다는 뜻이었다.

“내몸과 유품은 모두 불태우고 그 재마저 바다에 날린 후 제사도 지내지 말라.”

는 말은 조국광복을 위해서 모든 힘이 결집되어야 하고, 오직 정신과 힘이 집중되어야한다는 교훈을 남긴 것이다.

 

이준(李儁) 열사의 자결설이 국민에게 크게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그 모든 기획이나 방향의 설정에 있었으나 광복운동의 커다란 계획의 터전을 마련한 것은 보재선생의 힘이 더욱 컸음을 우리는 알수 있는 것이다.

 

보재선생의 의지와 판단력은 이미 청년 때부터 두드러져 그 통찰력이 뛰어났다. 보재선생은 24세 때, 학문이 성숙하였으며, 27세 때 이미 성균관 관장(成均館館長)이 되었다. 그가 26세 때에는 당시의 정치하는 사람들이 양 극단으로 흐르는 병폐를 다음과 같이 뚜렷하게 통찰하고 있었다.

 

“그 하나는 습속에 얽매인 사람들로서 세계정세가 돌아가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새로운 것으로 옮겨 가려는 노력이 없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개화를 급히 서두르는 사람들로서 자기의 근거인 전통을 무시하고 개화에 대한 자신 만을 가지고 독촉하고 남을 책망하는 허물을 저지르는 것이다.”

 

1880~1890년대의 정사를 담당하는 사람들의 경향을 이같이 명확히 분간한 것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따라서 그는 그때의 사상과 학문을 받아들여 유럽이나 미국의 정치, 경제, 문화를 연구하였고, 영어, 불어, 노어, 일어를 구사하였다. 국가 민족을 구하는 일이라면 그는 무엇이고 하려고 하였다.

 

당시 국제사회에 일본의 무도한 약탈과 강탈을 밝히려는 노력이 바로 바로 그의 노력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1907년 6월 15일부터 네덜란드의 수도 헤이그에서 제2회 만국평화회의(Second Hague Peace Conference)rk 열리게 되는데, 이 기회를 이용하여 일본의 약탈조약과 야만행동을 폭로하고 한국의 자유독립을 되찾는 노력에 국제여론의 지지를 받으려는 것을 생각한 것도 보재선생이었다. 그는 이러한 안을 내어 백지에 고종의 안을 받아냈다고 한다.

 

이 제2의 만국평화회의는 6월 15일부터 10월 18일까지 4개월이 넘는 기간 동안 회의가 진행되었으나, 이 회의에서 주된 노력은 영국의 군비축소 안이 지지를 받지 못하고, 독일의 해군군비축소를 겨냥한 것도 강제 되지 못하였으며, 제국주의로의 팽창도 막아내지 못했다.

 

이러한 마당에 평화조정의 기구를 넓히고 차관회수에 대한 규정, 전쟁에 대한 규정, 중립국의 권리와 의무를 결정하는데, 그쳤었다. 이 사이에도 일본은 7월 10일에 프랑스, 7월 30일에는 독일과 협약을 맺어 중국의 독립과 영토보장, 중국에서의 양국 간의 균등 대우 등을 약속하고 있던 중이었다.

 

이러한 가운데 한국에 있어서의 일본의 죄악을 폭로하는 연설은 많은 국가대표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이러한 국제회의에 주어진 타격은 일본으로서는 청천벽력이었다. 이윽고 일본 외무대신이 한국에 와서 고종황제에게 양위를 강요하였으며, 8월 1일에는 한국군대의 해산을 감행 하엿다.

 

의병이 일고 민족의분은 더욱 터졌다. 이러한 의병전쟁이나 항일운동을 이끌어 나가게 한 중요한 계기를 마련한 보재선생의 숨은 공도 결코 지나쳐 버려서는 안대는 것이다. 보재선생은 헤이그만국평화회의에서 한국민의 공고사(控告詞)를 제출하고 나서도 계속 그 운동을 꾸준히 밀고 나갔었다.

 

보재선생은 1907년 8월 1일에 뉴욕에 당도하여 미국 대통령에게 호소하려 하였으나 거절 당하였다. 미주에서 윤병구(尹炳球), 송헌주(宋憲柱)와 더불어 런던에 가서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기도 하였으며, 1908년 2월 27일에 다시 뉴욕으로 돌아왔다. 

 

일본은 자기들의 포악무도한 사실이 폭로되고 있음을 덮어버리려고 한국 외교고문으로 일이들이 끌어들었던 미국인 스티븐즈에게 후한 봉급 외에3만 달러(당시 돈으로 거액임)를 주고, 미국으로 가서 한국에 있어서의 일본의 ‘선정(善政)’을 선전하고, ‘반대는 일부 한국인의 짓’이라고 떠들게 하였다.

 

이것은 바로 보재선생이 뉴욕에 있을 때의 일이었다. 3월 21일에 스티븐즈가 이같은 망언을 한 다음, 샌프란시스코에서 오클랜드로 가는 건늘배(패리) 정거장에서 장인환(張仁煥)의사에게 저격당하자 세계의 여론은 다시 주목하게 되었다. 항일의 움직임은 장인환의사의변호를 위하여 커졌고, 재미 한인의 결속이 날로 굳어졌다. 미주에서의 이 같은 민족결합에도 보재선생은 뒤에서 큰 영향을 끼쳤다.

 

이윽고 1909년 2월 1일에 미주사회의 모든 한인회가 통합되어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가 이룩되었다. 이같이 통일된 대한인국민회는 당시의 당면문제로 외교에 의한 한국의 광복과 아울러 실제 무력투쟁의 기반을 만들 것을 고려하게 되었는데, 이에도 보재선생의 영향이 크게 미쳤었다.

 

대한인국민회의가 조직된 뒤 맨 처음의 사업으로 만주와 연해주에 있는 원동 동포와의 연결 및 무력투쟁을 계획하고, 보재선생과 정재관(鄭在寬) 미주 국민회총회장이 4월 22일에 블라디보스톡으로 떠났던 것이다. 이어 보재선생은 그곳에 기지를 만들고 무력투쟁을 통해 일제에 타격을 주려는 노력에 분망하였다.

 

보재선생은 1910년 8월 27일 일본의 국권약탈을 계기로 시베리아와 간도 등지에 거주하는 한족을 규합하여 성명회(聲明會)를 조직하고, 일제와의 독립전쟁을 선언하였다. 이는 우리 광복운동사에 가장 중요한 선언이라 할 수 있다. 이 성명회가 각국 정부에 보낸 선언서는 불, 노, 중국어의 3개국으로 만들어있고, 8,624명이 서명한 방대한 문서로 우리나라 상해 임시정부선언서보다 앞서는 최초의 것으로서 (1910년 10월 29일에 받은 미국 고문서보관소에 소장되어있다.) 이 문서는 각국에 보내졌다.

 

이러한 끊임없는 활동은 마침내 광복군 양성을 위해 1914년 대한광복군정부를 세우게 하였으니, 이도 상해 임시정부에 앞서는 최초의 망명정부이었다.

 

이러한 노력은 명실을 다같이 겸하는 정규의 정부로서 갖추어야 할 모든 일을 어려운 망명생활에서 실천하였던 것으로 보아야할 것이다. 의암 유인석선생이 국내에서 의병전쟁을 감행하고, 보재선생이 국제 외교로 우리의 독립에 대한 외국의 여론을 일으키려 하였고, 후배의 양성에 노력한 것이 후일 이동녕(李東寧), 이회영(李會榮), 이시영(李始榮), 이동휘(李東輝), 조성환(曺成煥), 백순(白純), 김좌진9金佐鎭) 등에 계승된 것으로서 1905년경부터 독립에 필요한 의지와 판단력과 통찰력을 가지고 백방으로 노력하고 고종 황제를 움직이며, 국내에서 커다란 영향을 주고, 한국민의민족정신을 이어 나가게 하는 원동력의 하나가된 것이다.

 

이제 보재선생이 항일민족교육의 바탕을 이룬 것을 생각해도 북간도 용정(龍井)에 1906년 8월 서전서숙(瑞甸書塾)을 이룩하여 1년 가까이 민족교육의 기초를 세웠었다. 이 서숙의 이념과 정신이 명동(明東) 학교와 신흥(新興)학교로 계승되고, 민족주의 교육이 확대되었다고 할 수 있다.

 

보재선생은 민족의 광복운동에 필요한 모든 기초를 몸소 닦고 계속되는 어려움을 겪으면서 솔선하여 민족운동의 규합에 앞장섰다. 그의 발길은 러시아. 유럽, 미국에 여러 번 미쳤으며, 한국문제의 국제여론화와 한국민족의 규합 및 독립 쟁취의 역량 축적에 전력을 다하였다.

 

보재선생의 상소문으로서 일인이 전국의 황무지개척권을 요구하여 왔을 때, 그의 반대를 말한 것이다. 그 속에 들어있는 여러 가지 기본개념은 오늘날에도 교훈이 되는 것이 많다.

 

“토지란 것은 국가의 근본이고, 토지가 없으면, 이 백성도 없을 것 입니다.”

가장 평범한 원리인 것 같지만 이러한 근본이 되는 원리를 잊고 당장 눈에 보이는 돈에 현혹되는 일은 오늘날에도 얼마든지 있다.

 

그는 끝까지 자주의 노력을 주장하였다. 당시에 자력이 넉넉지 못하고 기술도 정밀치 못하며, 기계도 정교하지 못하고, 영업도 진보가 안된다하더라도 모름지기 자기 소유의 물건을 삼가 지켜서 잃지 말 것을 말하고 있으며, 실력을 기르며 후일을 기다릴 것을 권하고 있다.

 

한국으로서 열강의 요구에 대응 할 수 없을 뿐 아니라, 그들은 한국이 없어져도 끊임없이 요구해 올 것을 논리 정연하게 논하였다. 마지막에는 “우리는 국가를 없애가면서 저들에게 순응해야 할 것입니까? 천하에 어찌 이런 이치가 있겠습니까?”

 

하며 당시에 양여되는 이권을 되찾고 앞으로 더 내주지 않도록 하라는 상소문은 국민의 역량을 기를 것을 충언하고 있는 것이다. 보재선생이 쓴 글은 얼마 남아있지 않지만, 글마다 원리와 원칙이 굳건히 서있고, 이론이 정연하고, 군소리가 없고, 명석하여 힘에 넘친다. 설득력이 강한 선생의 글은 바로 선생의 인격과 품성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보재선생의 정신과 실천력을 우러러 마지않으며, 이 글을 끝맺는다. 아울러 보재선생 전기 자료를 모으고 그 정신을 전하려고, 노력한 유족 고(故) 이관희(李觀熙)선생과 이완희(李完熙)선생의 정성에 감사를 드리고, 윤병석(尹炳奭)선생의 연구와 전기 집필에 대한 수고에 치하를 드린다.<끝>

옮긴이: 李在薰

--------------------------------------------------------------------------------------------------------------------------------------

 

●손보기(孫寶基)

 

  1922년 7월 7일 ~ 2010년 10월 31일, 대한민국의 사학자 및 고고학자이다. 1940년 휘문고보, 1943년 연희전문학교 문과를 졸업하였고, 서울대학교 문리대 사학과, 서울대학교 대학원 국사학과를 1회로 졸업하였다.

 

1964년에는 미국 캘리포니아대학교에서 국사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64년부터는 연세대학교 교수로 재직하였고, 박물관 관장, 문과대학장, 한불문화연구소 소장 등을 역임하고, 1987년 퇴임하였다.

 

퇴임 후 한국선사문화연구소를 설립하여 선사문화에 관심을 가졌고 1992년부터 단국대학교 초빙교수로 시작하여 석좌교수로 재직하면서 한국민속학연구소 소장 및 석주선기념박물관의 관장을 맡았다. 2010년 10월 31일 오후 7시, 88세의 나이에 노환으로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