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전통예절

도포(道袍 )

야촌(1) 2015. 5. 9. 10:38

작성일 : 2015. 05. 09(토)

 

■ 도포(道袍)

 

도포(道袍)는 조선시대에 남자들이 통상 예복으로 입던 웃옷으로 그 유래에 대하여는 여러 견해가 있는데, 이덕무(李德懋)와 이규경(李圭景) 등은 승복(僧服)이 기원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도포가 승복에서 유래되었다는 것은 이들의 형태가 곧은 깃이기 때문에 생긴 이론인 듯하고, 직령포(直領袍>무관이 입던 것옷의 하나)에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타당하다.

 

즉 고구려의 포가 고려의 백저포가 되었고, 백저포는 명나라 제도의 영향을 받아 조선의 직령포가 되었으며, 직령포는 다시 도포로 변하였다고 할 수 있다. 도포에 관한 첫 기록은 《선조실록(宣祖實錄)》에 1607년(선조 40) 4월 문신 이홍망(李弘望)이 초록색 겹 도포를 입었다는 기록이 있고, 또 《효종실록(孝宗實錄)》에는 이를 뒷받침하여 도포가 임진왜란 이후부터 있었다고 하였으며, 《대동야승(大東野乘)》 <속잡록(續雜錄)>에는 광해군(光海君) 때 도원수(都元帥) 강홍립(姜弘立)이 초록색 도포를 입었다는 기록이 있다.

 

한편, 《영조실록(英祖實錄)》에는 1736년(영조 12) 9월 세자의 돌을 맞아 청색 도포에 금사관(金絲冠)을 씌웠고, 영조가 승하하자 광직(廣織)과 공단 ·화화주(禾花紬)로 다홍색 도포 24벌을 지어 넣었다고 되어 있다.

 

이와 같이 도포는 위로 왕족에서부터 문 ·무신에 이르기까지 널리 유행되었음을 알 수 있으나, 근세에 이르러 도포가 천예층(賤隸層)에까지 퍼지자 정약용(丁若鏞)이 《목민심서(牧民心書)》에 이를 개탄하는 글을 쓴 것이 있다.

 

그러나 1884년 복제개혁 때 넓은 소매 옷이 금지되자, 도포도 사라졌지만, 민간에서는 최근까지도 제례(祭禮) 등에 착용한다. 도포는 깃이 곧아서 현대의 두루마기 깃과 같으며, 동정이 있다. 소매는 넓은 두리 소매이고, 섶과 무가 있으며 뒷길의 중심선이 진동선부터 틔어 있다.

 

그리고 뒷길에 한 폭의 전삼(展衫)을 덧붙여 뒷 트임을 덮는데, 전삼이 바람에 펄럭이는 모양은 도포의 멋과 특징이 되어 다른 많은 웃옷[袍]들과 구별되는 점이다. 옷감은 명주 ·비단 ·공단 ·모시 ·생모시 ·베 ·광목 등이 사용되고, 색상은 초록색 ·청색 ·다홍색 ·미색 ·백색 등으로 다양하였다.

 

조선 후기인 영조 때는 겹 도포도 있었지만 말기의 유물들은 모두 홑옷이다. 옛날에는 이것이 사대부와 유생의 상복(常服)인 한편 통상 예복도 되었다고 하나, 후에 다른 예복들이 모두 폐지되자 도포는 남자의 유일한 예장(禮裝)이 되었다. 이 옷은 원래 특권적인 복장이어서 서민들은 입지 못하였으나, 근세에 이 금기가 깨졌다.

 

●도포 띠

이조 후기에 기록된 『물명고(物名攷)』에는 요대(腰帶)·위요(圍繞)·전요(戰腰) 등으로 기록되어 있다. 남자의 쾌자·도포에는 동다회 양끝에 딸기술을 단 띠가 따르게 마련이었다. 길다란 쾌자띠를 가슴에 둘러 생동 심결로 매고 두 끝을 무릎아래까지 보기 좋게 늘어뜨렸다.

 

쾌자띠의 색상은 계급에 따라 당상관은 도홍띠(다홍·분홍·자주), 당하관은 회색을, 생원, 진사는 보라색, 선비는 세초대(초록색), 서민은 흑색, 상제(喪制)에는 누구나 흰색을 띠었다.

 

●쾌자띠(도포 끈)

동다회의 굵기 9㎜, 길이 380㎝ 정도. 그 양 끝에 금실가락지를 끼고 겹딸기술을 하나씩 혹은 작은 딸기술을 쌍으로 달았다.(창덕궁 인정정 서행각)

 

●대자띠(허리띠)

폭 2.5㎝, 길이 2m의 평직으로 짠 띠 양편 끝에 꼰 실로 전복 술 매듭을 다섯 단 맺고, 그 끝은 그대로 늘어뜨렸다. 연두·분홍·남·색동으로 된 것이 있다.(창덕궁 인정전 서행각)

 

■두루마기

조선시대 사람들이 가장 오랫동안 보편적으로 입어온 저고리와 바지 위에 걸치던 겉옷의 일종으로, 북방계 민족이 상고시대부터 입던 옷에서 비롯되었으며, 〈삼국지〉의 기록으로 보아 부족국가시대부터 입었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 벽화에는 소매가 넓고 긴 두루마기와 소매가 좁고 길이가 짧은 두루마기가 나타난다.

 

삼국시대에는 상하에 모두 두루마기를 착용하여 의례의 기능이 첨가된 것으로 보인다. 가 더 크게 작용한 듯하다. 조선시대까지 이어져 철릭·창의·도포·중치막·학창의·심의 등으로 다양하게 발전했다. 조선시대 후반에 둥그레깃이 되고 무와 옷고름이 첨가되어 오늘날과 같은 두루마기로 정착되었다.

 

여름에는 모시홑단두루마기, 봄과 가을에는 목면두루마기, 겨울에는 솜을 두어 만든 솜두루마기와 누비두루마기를 흔히 입었다. 두루마기는 매우 널리 입혀졌고,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는 하층민까지 보편화되었다.

 

 

↑남자용 두루마기/소장처>문경새재박물관

 

↑도포, 류정순, 2006대한민국명장박람회

 

 

↑도포>권오창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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