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물/근현대 인물

윤봉길(尹奉吉)

야촌(1) 2015. 4. 29. 22:37

윤봉길(尹奉吉)

 

▲ 민족문제연구소가 2009년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을 올린 월전 장우성 화백이 그린 윤 의사

      표준영정.

 

1908년-1932,12,19, 한국의 독립운동가, 본관은 파평(坡平). 본명은 우의(禹儀). 아호는 매헌(梅軒), 충남 예산(禮山) 출생이다. 부(父)는 황(璜)이고, 어머니는 김원상(金元祥)이다. 그의 집안은 몰락양반가로 전형적인 농가집안이다.

 

1913년부터 백부(伯父), 경(坰)에게 천자문을 배우다가 1918년 덕산공립 보통학교에 입학했다.

이듬해 3월 3일부터 4월 초순에 걸쳐 이 지방에서 일어난 3·1운동의 민족적 분노를 목격했다.

이 충격으로 일제의 '제국신민'(帝國臣民)으로서의 자질과 품성을 교육하는 식민지 노예교육을 거부하고 학교를 자퇴했다.

 

1920년경 〈동아일보〉·〈개벽〉 등을 통하여 새로운 문화에 접하면서, 동생 성의(聖儀)와 함께 최병대(崔秉大)에게 한학을 배웠다. 1921년부터는 성주록(成周錄)이 개설한 오치서숙(烏峙書塾)에서 사서삼경 등을 공부했으며, 뛰어난 시재를 보여 시문집을 쓰기도 했다.

 

1922년 배용순(裵用順)과 결혼하고. 1926년 서숙생활을 마친 뒤 독학으로 국사와 신학문을 공부하고 친구들과 교유하는 등 현실의 산 체험 속에서 농촌개혁에 눈을 떠갔다. 그 후 농촌계몽을 이끌던 윤봉길은 1930년 3월 6일 ‘장부출가 생불환(丈夫出家 生不還)’이라는 편지를 남긴 채 독립운동의 길을 떠났다.

 

1932년 한인애국단의 이봉창(李奉昌, 1900년 8월 10일-1932년 10월 10일)이 일왕 히로히토에게 폭탄을 투척했으나 실패했다는 소식을 접한 이후 임시정부의 김구를 찾아가 민족의 광복을 위해 신명을 바치겠다는 결의를 밝혔다.

 

그리고 그의 나이 25세 인해 1932년 4월 29일 상하이[上海] 홍커우 공원[虹口公園에서 개최된 일본천황의 생일 축하식이열리던 전승기념식에 물통과 도시락에 장착한 폭탄을 던져 상하이 파견군 시리카와[白川義則] 대장(大將), 상하이 일본거류민단장 가와바타[河端貞次] 등을 즉사시켰다.

 

제3함대 사령관 노무라, 제9사단장 우에다, 총영사 무라이 등에게는 중상을 입혔다. 거사 직후 체포, 12월 18일 가나자와 형무소로 옮겨져 19일 총살되었다. 1946년 6월 30일 해방 후 첫 국민장이 엄수되었고 효창공원에 안장되었다.

 

 

매헌 윤봉길의사 충의사기념관(尹奉吉義士記念館)/소재지 : 충남 예산군 덕산면 덕산온천로 18.

촬영 : 2015. 04. 24(금), 이재훈

 

▲ 박정희 전 대통령이 쓴 ‘충의사’ 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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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봉길 의사 상하이 홍구공원 의거 직전, 일본의 전승기념행사 단상모습

좌측1, 봉축문 낭독>시라카와 요시노리, 상하이 파견군사령관대장, 의거한달 뒤 사망좌측2,

민간인 양복차림>시게미쓰 마모루, 주중 일본공사, 의거로 한쪽다리절단. 좌측3, 군복차림>

노무라 기치사부로, 3함대사령관 중장, 의거로 왼쪽 눈 실명(1964, 05, 08, 87세로사망)

 

 

좌측1, 가와바타 사다쓰구, 상하이 일본거류민단장, 의거 다음날사망

좌측2, 시게미쓰 마모루, 주중 일본공사, 의거로 한쪽 다리절단

좌측3, 노무라 기치사부로, 3함대사령관 중장, 의거로 왼쪽 눈 실명

좌측4, 시라카와 요시노리, 상하이 파견군 사령관 대장, 의거 한달 뒤 사망

좌측5, 우에다 겐키치, 일본군 9사단장, 부상

 

노무라 기치사부로(野村吉三郞),

 

노무라 기치사부로(野村吉三郞)는 1877년 12월 16일 일본 와카야마현에서 태어났고, 일본 제국주의가 상하이 침략을 감행하던 당시 제3대 사령관을 지냈다. 이후 오진수부사령관과 요코스카 진수부사령관을 지낸 후 일본 외무대신과 주미대사 및 일본 참의원을 역임했다.

 

1932년 4월 29일 윤봉길의사의 상하이의거로 왼쪽 눈을 실명했으며, 1964년 87세로 죽었다.

일본 해군출신의 군인이요, 외교관이며 정치가였다,

 

태평양전쟁 당시, 주미일본대사 역임.

 

노무라 대사는 해군대장 출신으로 주미대사를 지냈으며 협상에 의한 원칙을 강하게 주장했지만, 군부에 의해 묵살되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1941년 태평양전쟁 개전이후 공직에서 쫓겨났지만 미국에 호의적인인물로 꼽혀 당시 수상이던 요시다 시게루에 의해 복권되어 미국의 원조, 해군자위대 창설, 자민당참의원의원으로 활동하며 일본 측에서는 일본의 재건사업에 일조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하지만, 1932년 당시 일본제국주의 군대의 3함대 사령관으로서 침략전쟁을 수행하였으며, 4월 29일 윤봉길 의사의 ‘상하이의거’로 왼쪽 눈을 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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