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애국가´는 언제, 누가 지었나?
국가(國歌)는 한 나라를 상징하는 국가적 차원의 공식적인 노래인데 비하여, 애국가는 공식·비공식 여부를 떠나 나라를 사랑하는 내용을 담은 노래라는 점에서 이 둘은 구분된다.
애국가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 중 국가로 제정된 애국가는 나라를 상징하는 의식음악의 구실을 하게 된다.
우리나라의 애국가는 여러 종류가 있다.
갑오경장 이후 각종 애국가가 널리 불리기 시작하여 1896년 무렵에 각 지방에서 불린 애국가만도 10여 종류에 이른다.
1876년 일본과 병자수호조약을 체결한 이후 1882년에는 미국, 1884년에는 영국·독일·이탈리아, 1889년에는 러시아와 프랑스, 1892년에는 오스트레일리아·덴마크, 1901년에는 벨기에 등과 조약을 맺게 되었다.
이와 같이 세계 열강국과 문호를 개방하고 새로운 문물에 접하게 됨에 따라 개화에 눈을 뜨게 되었고, 애국애족의 사상과 더불어 내용이 각각 다른 애국가가 도처에서 나오게 되었다.
이 시기에 나온 애국가를 살펴보면, 1896년 나필균 작 <애국가>, 제물포 전경택의 <애국가>, 한명원의 <애국가>, 유태성의 <애국가>, 달성 예수교인들의 <애국가>, 새문안교회의 <애국가>, 최병희의 <애국가>, 평양 김종섭의 <애국가>, 배재학당 문경호의 <애국가>, 이용우의 <애국가>, 배재학당의 <애국가> 등이 있다.
이 중에서 배재학당 학도들이 1896년 11월 21일 독립문 정초식(定礎式)에서 부른 <애국가>는 [악보 1]과 같다.
그러나 1898년 독립협회가 독립문에서 가진 개국 기원 506돌 경축식에서 무관학도(武官學徒)들이 부르고, 초10일 태황제(太皇帝) 탄신일에 곳곳에서 부른 애국가는 [악보 2] 에서 보는 바와 같이 또다른 내용으로 되어 있다.
무관학도들이 부른 <애국가>의 가사는 다음과 같다.
놉흐신 상쥬님 비론 상쥬님 궁휼 보쇼셔 이라 이땅을 지켜 주옵시고 오쥬여 이 보우 하쇼셔 우리의 단군쥬 폐하만세 만만세 만세로다 복되신 오늘 은혜를 리 만수무강케 야 주쇼서.
그런데 ≪증보문헌비고≫ 권103 악고(樂考)에 1900년 당시의 <대한애국가>가 소개되어 있다.
이 <대한애국가>는 에케르트(Eckert,F.)가 작곡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에케르트는 광무 5년, 즉 1901년 2월 19일에 서울에 도착하여 그 해 3월 19일에 고종황제를 폐현(陛見)하였고, 1902년 4월 5일에 우리정부와 용빙계약서(傭聘契約書)를 작성하였으므로 에케르트가 작곡한 곡이 아님이 분명하다.
다시 말하면 배재학당 학도들이 부른 <애국가>는 스코틀랜드 민요인 <Auld lang syne>의 곡조를 따서 부른 것이고, 1898년 무관학도들이 부른 <애국가>는 영국국가인 <신이여 황제를 보호하소서 God save the king>의 가사내용과 곡을 그대로 가져다 쓴 것이며, 《증보문헌비고》의 <대한애국가>도 무관학도들이 부른 <애국가>와 같은 것이다.
에케르트는 독일인으로 그의 한국에 관한 조사보고서 가운데에 이 <대한제국애국가>의 악보가 첨부되어 있다.
<대한제국애국가>는 1902년에 에케르트가 작곡한 것이지만, 그 가사는 [악보 2]의 <애국가> 가사와 같이 영국 국가 <God save the king>의 내용과 비슷하다.
또한 1904년 5월 13일자 ≪황성신문≫에 “학부(學部)에서 각 학교 애국가를 정리하기 위하여 각 학교에 신칙(申飭)하되 군악대(軍樂隊)에서 조음(調音)한 국가를 효방(效倣)하여 학도를 교수하라 하난대 그 국가는 여좌(如左)하니, ‘상제(上帝)난 우리/황제(皇帝)를 도으소서/성수무강(聖壽無疆)샤/해옥주(海屋籌)를 산(山)갓치 으소서/위권(威權)이 환영(寰瀛)에 치샤/오천만세(於千萬歲)에/복록(福祿)이 무궁(無窮)케 쇼셔/상제난 우리/황제를 도으소셔.’라는 기사가 있다.”
이와 같이 1902년 에케르트가 작곡한 <애국가>는 군악대에서 주로 연주되다가 1904년부터는 각급 학교에서 의무적으로 교수하도록 하였다. 그 뒤 에케르트가 작곡한 곡에 가사 내용을 달리한 <애국가>가 나왔는데 그 가사는 다음과 같다.
“샹뎨여 우리를 도으쇼셔/반만년의 역사 배달 민족·영영히 번영야/이 무궁하도록/셩디동방의 원류가 곤곤히/샹뎨여 우리를 도으쇼셔.”
이 노래는 국치(國恥)의 을사조약(1905)과 정미칠조약(1907) 이후에 1902년 에케르트에 의해 작곡된 <애국가>의 가사만 바꾼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이 무렵에도 4, 5종의 <애국가>가 전파되었는데, 그 중에서 현행 <애국가>의 가사와 같은 것은 배종섭 소장 ≪창가책≫과 강릉 이기재(李起載) 소장 ≪창가책≫ 사본에서 볼 수 있고,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대한 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의 후렴구는 이미 1896년 11월 21일 독립문 정초식 때 배재학당 학도들이 부른 <애국가>에서부터 등장한다.
현행 <애국가>의 가사는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윤치호(尹致昊)가 지었다는 설이 가장 신빙성이 있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정부수립 이전까지는 스코틀랜드 민요인 <Auld lang syne>에 이 가사를 붙여 불렀으나, 정부수립 이후부터는 안익태(安益泰)가 작곡한 <애국가>가 대한민국 국가로 준용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한편 최근 통합진보당 이석기(李石基, 1962년 2월 2일 ~) 의원이 ˝애국가는 더 이상의 국가가 아니다˝라고 해 비난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1948년 8월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부터 지금까지, 애국가는 명실공히 대한민국 국가임은 그 누구도 부정하지 않는다.
나라사랑은 입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몸소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국가 정체성을 부정하고, 사회적 혼란만 야기시킨 자가 버젓히 국회에 들어와 있어 국민 원성이 높다.
여느 국회보다 기대가 컸던 19대 국회, 기대만큼 실망 또한 크다. 역시나였다.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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