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라의 대표 ‘잉꼬 부부’
<화랑세기>에는 아주 흥미로운 부부 두 쌍의 이야기가 나온다.
우선 8대 풍월주(風月主=화랑의 우두머리)인 문노ㆍ윤궁 부부이다. 사실 문노[536(법흥왕 23)~606)]의 어머니는 가야왕의 딸(왜국왕의 공녀라는 말도 있다)인 문화공주였다. ‘망한 나라 공주의 아들’ 혹은 ‘왜국 공녀의 아들’이었으니 신분은 높지 않았다.
반면 윤궁은 이미 동륜태자(銅輪太子=진흥왕의 맏아들)와 결혼해서 딸을 낳았던 경력이 있다.
동륜태자가 죽은 뒤 과부가 됐다. 유명한 거칠부 장군(?~579)의 딸이었다.
신라조정을 좌지우지했던 미실궁주(美室宮主=신라 제 26 대 진평왕의 제5부인)와는 종형제였다.
골품제도가 확실한 신라사회에서 문노(文努)는 윤궁 보다 낮은 지위에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문노(文努)는 워낙 출중한 능력을 갖춘 남성이었다.
‘화랑정신의 표상’, ‘사기(士氣)의 종주(宗主)’로 추앙받았다.
훗날 김유신은 문노를 일컬어 ‘통일대업의 공이 문노공으로 부터 나왔다’고 했을 정도였다.
‘골(품)’이 낮은 신분이었던게 걸렸지만, 윤궁 측에서 욕심을 낼만 했다.
윤궁은 “어울리기는 한데 지위가 낮은게 흠”이라는 미실 궁주의 걱정에 이렇게 답한다.
“사람이 좋다면 어찌 위품을 논하겠습니까.”
윤궁은 또 ‘맞선자리’에서 문노를 보자 이렇게 말했다.
“내가 군(君=문노)을 그리워한지 오래되어 창자가 이미 끊어졌습니다.(腸已斷矣)”
급기야 문노는 ‘진지왕의 폐위(579)’에 참여한 공로로 풍월주(신라의 제8대)가 됐다.
관위도 아찬(신라 시대의 17관등 중의 6번째)으로 승격됐다. 비로소 골품을 얻은것이다.
사실혼 관계에 머물렀던 둘은 그때서야 진흥왕이 허락을 얻어 정식부부가 되었다.
둘이 혼인했을때 진평왕이 포석사에서 길례를 행했다.
●부인 잘둬 얻은 ‘대표화랑’ 칭호
윤궁은 5살 연하 남편을 지극정성으로 받들었다. 문노가 종양을 앓았을 때는 고름을 직접 입으로 빨아서 낫게 했
다.
문노도 ‘청교도적인 삶’을 살았다. 당시에는 유화(遊花=풍월주에게 색을 제공하는 여인들)를 건드리는 일이 없었
다. 술도 먹지 않았다. 늘 집에 있었고, 마음은 화락했으며, 마치 물수리 와 원앙 같았다.
부부는 풍월주 자리를 내놓고(582) 늘 수레를 함께 타고 야외에서 노닐다 돌아왔다.
지금으로 치면 은퇴부부가 손잡고 드라이브하며 즐긴 것이다. 윤궁은 한술 더 떴다.
“영웅은 주색을 좋아한다는데…. 낭군님은 술도, 색도 절제하니 오히려 제가 부끄럽습니다. ”(윤궁)
“하하. 색을 좋아하면 그대가 질투할 것 아닙니까? 또 술을 좋아하면 그대가 할 일이 많 아질것 아닙니까?”(문노)
“장부는 마땅히 좋아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 잠자리를 모시는 첩이 있으면 제 일을 대신하게 됩니다.
제겐 기쁜 일이지 투기할 일이 아닙니다. 침첩을 두시지요.”(윤궁)
아내의 강권에 문노는 술을 조금 마시고, 색(色)을 담당할 침첩도 하나 두었다. 하지만 난잡한 짓을 하지는 않았
다. 지금 같으면, 아니 보통의 아내라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남편에게 “둘째마누라를 두라”고 권하고 있으
니 말이다.
원래 문노의 성격은 칼 같았다. 시시비비를 가리는데 추상 같았다.
하지만 부인을 잘 둔 덕분에 화목을 더 좋아하는 사람으로 성격이 바뀌었다.
사람들은 “부인이 남자를 이렇게 변화시켰다(皆以爲婦人之化男子若是)”고 했다.
신라 사람들 모두가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지아비를 택할 때는 반드시 문노를, 부인을 얻을 때는 반드시 윤궁과 같아야 한다.”
●“공경은 무슨 얼어죽을 공경이냐”
신라의 대표 연상연하 커플이 있었으니 바로 ‘양도공ㆍ보량’ 부부였다.
양도공은 22대 풍월주(재임 637~640)였다.
부인 보량은 아버지는 다르지만 어머니[양명공주(良明公主=신라의 제 26대 진평왕과 보명궁주 사이에서 출생)]
가 같은 남매 사이였다. 원래 진평왕의 후궁이었던 보량은 임금의 총애를 받다가 승만후의 질투로 물러나야 했던
‘돌싱’이었다.
그때 보량의 눈에 든 남자가 양도공이었다. 그런데 보량이 5살 연상이었다.
더 큰 문제는 양도공이 남매 간에 혼인하는 풍습을 매우 싫어했다는 것이었다.
보량은 목석같은 남자 때문에 상사병이 날 정도였다.
그러자 양도공은 마지못해 말했다.
“제가 누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알겠습니다. 제가 중국의 예를 따르지 않고, 오랑캐의 습속(남매간의 혼인)을 따르겠습니다.”
남매의 혼인을 통해 귀한 혈통을 이어가고자 했던 어머니 양명공주가 아들을 끌어안았다.
“잘했다. 넌 내 아들이다. 신국(神國)에는 ‘신국의 도’(남매가 혼인하는 것)가 있다. 어찌 중국의 예로 하겠느냐?”
하지만 양도공은 누나를 아내로 대우하지 않고 깍듯이 섬겼다.
문제는 깍듯해도 너무 깍듯했다는 것이다.
남매간에 부부의 정이 있었을 리가 만무했으니까...,
참다참다 못한 보량이 폭발했다.
“넌 내가 나이가 많다고 사랑하지 않는 거냐? 너와 내가 같이 산 지가 어언 3년이나 됐는데...,
내가 널 잠시라도 사랑하지 않은 적이 없는데…. 넌 나를 누나로 섬기고 존경한다.
내가 쇠로 만든 여자도 아니고, 신상(神像)도 아닌데...,공경은 무슨(얼어죽을 놈의) 공경이냐?
넌 듣지 못했느냐. 백 말의 공경이 한 되의 사랑만 못하다는 것을...,(百斗敬不如一升愛)”
그야말로 폭포수 같았다. 보통의 남편들 같으면 당황해서 더듬었을 것이다.
하지만 양도공은 노련했다. 아내를 감싸고 한마디 날렸다.
“그대를 큰 누나로 생각한 것이 아닙니다.
‘큰 사랑은 신(神)처럼 공경하고, 작은 사랑은 옥(玉)과 같이 회롱한다’(大愛敬之如神 小愛弄之如玉)고 했습
니다. 전 큰 사랑으로 그대와 함께 살기를 원합니다.”
●다른 여자를 소개한 부인
그럴 듯 하다. 양도공의 진심이 묻어난 것 같다.
한데 듣기에 따라서는 그런 궤변도 어디 있는가.
아내를 사랑하는데 무슨 큰 사랑이며, 작은 사랑인가. 어쨌든 양도공의 솜사탕 같은 ‘세치 혀’가 통했다.
하늘 끝까지 쌓였던 보량의 원망은 남편의 이 한마디로 스스로 허물어졌다.
그 때부터 아내는 남편을 임금 섬기듯 했다.
어딜 가든 “나의 지아비는 천하의 휼륭한 사람”이며 “이런 사람 섬기다 죽으면 더 큰 영광이 없겠다”고 했다.
한겨울이든 한여름이든 반드시 음식을 직접 조리해서 남편의 입맛에 맞췄다.
심지어는 ‘작은 칼’을 지니고 다니면서 남편을 따라 죽을 뜻을 품었다.
보량은 남편이 풍월주가 되자(637) 슬쩍 운을 뗐다.
“제가 색(色)이 쇠하였습니다. 다른 여자를 화주(풍월주의 처)로 추천하고자 합니다.”
그러면서 보량 자신의 수발을 들던 여인 한사람을 추천했다.
이찌보면 남편을 시험한 것일 수도 있는 대목이다.
출세한 남편이 다른 마음을 먹고 있는지 한번 운을 떼본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남편은 단칼에 거절했다.
“그대, 보량이 아니면 어느 누가 풍월주의 아내가 되겠습니까.”
이때 양도공의 나이 28살, 보량의 나이 33살이었다.
만약 양도공이 ‘얼씨구나’ 하면서 다른 여자를 아내로 맞았다면 어찌 됐을까. 보량의 제안이 진심이었을 수도 있지
만..., 혹시 예전의 투기심이 되살아나 울고불고 하면서 죽니사니 했을 수도 있다.
●남편을 철퇴로 두들겨 팬 아내
이번에는 남편을 철기로 상습구타한 ‘무서운 연상녀’ 한 사람을 추가로 꼽아보자.
도두(都頭ㆍ낭두의 우두머리 계급)인 세기(世己)의 부인인 도리(道里)이다.
어려서부터 예쁘다는 소리를 들었던 도리는 17세 풍월주인 염장공의 두 아들을 낳은 뒤 세기의 아내가 됐다.
풍월주의 아들을 둘이나 낳았던 이력 때문에 낭두인 남편(세기)을 우습게 알았다.
게다가 남편보다 무려 12살이나 연상이었다. 더 큰 문제는 도리가 ‘무자비한 폭력아내’였다는 것이다.
남편을 마치 노비처럼 취급해서 자기 성질에 맞지 않으면 무지막지하게 두들겨 팼다.
남편 세기도 어지간헸다. 그렇게 핍박을 받으면서도 첩을 3명이나 두었으니 말이다.
만약 남편의 첩이 아들을 낳기만 하면, 그날은 제삿날이었다.
철기로 남편을 난타했다. 남편은 몸져 누워 출근을 할 수 없었다.
이때 풍월주인 양도공(22세)이 이 사실을 알고는 화가 머리 끝까지 났다.
도리를 잡아다가 볼기를 내려치려는 순간, 도리가 고함을 질렀다.
“저의 죄가 중하다고 하지만. 선종(仙種=염장공의 아들)을 낳은 여자가 볼기를 내놓고 매를 맞는다는 법도는 없
습니다.” 양도공은 고민 끝에 대안을 찾았다. 도리의 볼기를 치는 대신 아내를 통제하지 못한 남편을 파면시키
기로 한 것이다.
그때서야 도리는 “잘못했다”고 울며 빌었다.
남편이 파면되면 가정이 파탄날까봐 두려워 굴복한 것이다.
그러고보면 ‘부부’란 예로부터 알다가도 모를 사이인 것은 분명하다.
시대에 따라 사람에 따라, 상황에 따라 철천지 원수가 되고, 아니면 문노ㆍ윤궁 부부처럼 물수리와 원앙이 되
기도 하고..., 5월 가정의 달. 한번 곱씹어보자. 우리 부부는 어떠한가.
[참고자료]
<삼국사기>
<대역 화랑세기>, 김대문, 이종욱 역주해, 소나무, 2005
<화랑세기로 본 신라인 이야기>, 이종욱, 김영사, 2000
<강수와 그의 사상>, 이기백, ‘문화비평 1,3’, 아한학회, 19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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