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고려사(高麗史)

고려말의 고승들 국정개혁 힘쓰다.

야촌(1) 2014. 10. 15. 15:59

여말선초 고승들, 내부 자정…국정개혁 힘썼다. - 황인규교수

 

사극 ‘정도전’으로 본 여말선초 불교(上) 격동기 불교계의 동향

 

여말선초 격동기 불교계는 자정능력을 상실하고 퇴락해 자연히 불교에서 유교로 교체된 줄 알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전국의 주요 스님들은 자정과 혁신을 위해 온 몸을 바쳤을 뿐 아니라 정도전, 권근 등 신왕조 창업 핵심인물과 교류하며 조선왕조 창업에도 참여했다.

 

최근 사극 ‘정도전’의 인기가 고조되고 있는 가운데, 본지는 당시 불교계의 전반적인 상황과 정치인들과의 관계, 고승들의 자정 노력 등을 주제로 세 차례에 걸쳐 싣는다.

 

 

↑고려에서 조선의 왕조 교체기에 불교의 자리를 유교가 차지하게 된 것을 자연스러운 역사흐름으로 이해하는

     시각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불교계는 자정과 혁신을 주장하고 대응했으며, 이는 성리학의 본격적인 수용을 늦추는 역할을 했다. 사진은 보물 제228호로 지정된 여주 신륵사의 보제존자 석종. 이 부도는 고려 우왕5년(1379)에 건립된 나옹대사의 사리탑이다.

 

여말선초 신진사대부는 성리학을 사상적인 무기로 당시 사회를 개혁하고자 하였으며, 결국 이성계 등 신흥 무장 세력과 제휴하여, 조선왕조를 탄생시켰다. 여기에는 신진사대부 뿐만 아니라 불교계의 일부 선각자들도 참여하였다.

 

흔히 고려후기 불교계는 보수화되어 자정능력을 잃고 퇴락의 길을 걷게 되어 불교의 자리를 유교로 넘기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고려시대의 정사류인 <고려사>는 유교사관에 의해 편찬되어 불교에 관한 많은 사실이 누락되거나 잘못 서술되어 있다.

 

예컨대 고려 초의 궁예, 고려 중기의 묘청, 고려 말의 신돈은 불교사뿐만 아니라 우리 역사에서 가장 왜곡 서술된 경우이다. 이는 현재도 크게 달라진 바 없으며, 학계는 물론 사극이나 역사소설에서도 그대로 반영된 경우가 허다하다.

 

유생들의 숭유억불 운동에 대하여 불교계가 아무런 대응이나 조처를 하지 않고 무기력하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일부 불교계 고승들이 자정과 혁신적 대응을 하였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즉, 고려말 불교계 일각에서는 새로운 사상을 수용하여 새로운 조류가 일기 시작하였다.

 

‘여말삼사’라고 불리는 태고보우와 나옹혜근, 백운경한이 그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 가운데 나옹과 그의 제자 무학이 가장 앞장섰다. 이미 원(元)나라 간섭기 후반이후 고려시대의 대표적인 4대 종파인 화엄종, 유가종(법상종), 천태종, 조계종이 부상하고 있었다. 각 종파의 고승들은 여말선초 왕조교체기에 다음과 같이 불교계가 전개되고 있었다.

 

알려진 바와 같이 고려후기 불교계는 조계종계와 천태종계가 주도하였지만 원 간섭기에 접어들면서 유가종과 화엄종도 부상하기 시작하였다. 화엄종은 신라의 의상이 개창하여 고려전기에 융성하였으나 무신 집권기이후 침체를 면치 못하였다.

 

이후 원 간섭 기 후반에 이르러 해인사를 중심으로 활동하였던 고승 체원의 영향을 받은 신돈이 불교계와 국정을 개혁하고자 하였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여말선초 화엄종의 선각자는 화엄종 마지막 국사로 책봉된 설산천희와 그의 제자 경남, 조선 초 제생군 우운과 그의 제자인 월창의침과 설오 등이다.

 

조선왕조 탄생하기까지 신진사대부 뿐 아니라

전국 고승들 참여…태고보우 나옹스님 대표적

조계종 화엄종 유가종 천태종 4대 종파 중심으로

정권 개혁 등 주요현안 관여 위화도 회군 핵심참모도

 

이들은 대문인 익재 이제현의 친형인 체원의 영향을 받았으며, 중국에 가서 유학한 고승이다. 천희는 체원이 주석했던 반용사에서 출가하였으며, 신돈의 추천을 받아 국사로 책봉되어 조계종의 나옹혜근이 주관한 공부선에 증명법사로 참여하였다.

 

우운은 중국에 유력하고 돌아와 선재보살이라 칭송받았으며, 천희가 주석했던 대구 부인사 주지로 있으면서 네 아들 중 둘을 승려로 출가시켰다. 정도전, 권근 등 신왕조 창업 핵심인물과 교류하였다.

 

특히 천희의 제자인 경남은 전국의 불교계 대표들이 참여한 신륵사의 대장각 건립에 화엄종을 대표하여 참여하였다. 이 모임은 전국의 불교계 고승들이 주요 현안을 논의한 자리였다고 생각된다.

 

경남은 당시 해인사 주지로 재임해 있었는데 조선건국 직후에 태조 이성계가 해인사 고탑을 중수하게 하였으며, 고려대장경판을 해인사 장경각에 보관토록 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후술하듯이 조계종과 천태종 뿐만 아니라 화엄종도 조선왕조 창업에 참여하였음을 말해준다. 의침도 화엄종을 대표하여 조선 건국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하였으며, 설오는 조계종의 무학과 더불어 이성계와 친밀했다.

 

특히 설오는 무학이 이성계에게 혁명을 종용하였던 곳인 석왕사의 주지를 맡고 태상왕 이성계가 희사하여 창건한 흥덕사의 주지로 재임하였다. 당시 왕실의 주요 현안이었던 이성계를 환궁시키는 일(이를 일명 함흥차사라고 한다) 등 국가와 왕실의 중요한 일에 참여하였다.

 

유가종은 화엄종과 더불어 신라하대에 융성하였으며, 고려 건국 후 화엄종과 함께 불교계를 주도하였으나 무신집권기이후 침체하였다. 유가종은 원 간섭기 이후 한 때 불교계 전면에 부상하였는데 그 대표적인 고승이 원 간섭기의 자정국존 미수와 고려말 종림과 그의 제자 혜겸이다.

 

미수는 충숙왕의 개혁정치와 맞물려 유가종을 중심으로 참회부를 설치하여 6년간 불교계에 대한 개혁을 추진하였다. 마치 공민왕대 보우의 원융부 설치와 신돈의 6년간 개혁을 연상케 한다. 고려말 고승 종림과 그의 제자 혜겸은 근기지방인 안양사에 주석하면서 사리신앙 등 실천적 신앙을 전개하였다.

 

그들은 구 무장 세력을 대표하는 최영 장군, 조선 건국의 온건개혁파로 불리는 이곡과 그의 아들 이색, 이숭인, 정몽주 등과 함께 사회를 개혁하고자 하였다. 천태종은 숙종대 대각국사 의천에 의해 창종 되었으나 의천의 입적 후 침체되었다. 천태종은 무인집권기초 전라도 강진에서 백련결사운동을 전개하면서 조계종과 함께 고려후기 불교계를 주도하였다.

 

원나라 간섭기에 이르러 개경에 진출하면서 보수화되었으나 원 간섭기 후반 부암운묵과, 삼장법사 의선의 문도인 희암과 나암원공이 등장하여 개경뿐만 아니라 수원 등 근기지방을 중심으로 불교를 흥성시키고자 하였다. 그 가운데 신조는 이성계의 조선왕조 창업의 결정적인 계기가 되는 ‘위화도 회군’에 핵심 참모로 참여하였다.

 

유생들 숭유억불 운동에

무기력하게 있었던 것 아냐

자정과 혁신적 대응 이어가

고려사는 유교사관에 의해 편찬

불교관련 기록은 잘못 서술

 

조계종은 천태종과 더불어 결사운동을 전개하게 되면서 고려후기 불교계를 주도하였다. 원 간섭기 이후 조계종은 원나라에 가서 당시 유행하고 있던 임제선풍이나 인도승 지공의 선풍을 수용하였다.

 

그 대표적인 고승이 바로 여말삼사라고 알려진 태고보우와 나옹혜근, 백운경한이다. 태고보우는 공민왕대 초반에 왕사로 책봉되어 원융부에서 9산문을 통합하고자 하였고 백장청규를 통해 불교계를 정화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부원세력의 제거, 한양전도 등 정치문제에도 관여하였다. 신돈의 축출이후 나옹은 왕사로 책봉되어 전국의 불교계가 참여한 공부선을 주관하고 인도승 지공의 유지를 받들어 회암사를 중창하고자 하였다.

 

나옹의 공부선 주관은 신돈, 태고보우의 개혁에 이은 불교계의 가장 큰 쇄신 모임이었으며, 특히 양주 회암사 중창은 고려말 불교계의 본산 건설이었다. 하지만 중창 공사의 절반도 하지 못한 채 유생들에 의해 추방되어 밀양 영원사로 가다가 신륵사에서 입적(순교)하였다.

 

그 후 나옹의 문도인 무학을 비롯한 일부 개혁 지향적 승려들은 회암사의 중창을 나옹의 문도 익륜과 일승 등에게 맡기고 지공과 나옹의 추모불사에 전념하면서 개혁에 대한 새로운 모색을 꾀하였다. 무학은 1383년 무렵 과천(지금의 의왕) 청계사 주지를 하면서 안변 석왕사에서 이성계에게 왕조창업을 종용하였다.

 

이렇듯 신왕조 창업은 신진사대부의 대표적인 인물인 정도전 등 신진사대부 뿐만 아니라 불교계를 주도하였던 조계종의 무학과 천태종의 신조 등도 동참하였던 것이다. 조선 건국 직후 조계종과 천태종을 대표하여 무학과 조구가 각기 왕사와 국사로 책봉되었다. 그러나 조구가 국사로 책봉된 이듬해에 입적함으로써 태조대의 불교계는 무학이 주도하였다.

 

즉, 무학은 고려말 신진사대부의 억불운동의 도화선이 되었던 연복사 탑 건립의 낙성식을 주관하면서 불교계를 주도하였으며, 회암사를 중심으로 삼아 불교계를 재편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제1, 2차 왕자의 난을 계기로 신진사대부를 대표하였던 정도전은 제거되었지만, 태조가 왕위에서 물러나자 무학도 근기지방에 위치한 용문사와 회암사에 머물렀다. 왕위에 즉위한 태종은 불교계에 대한 개혁과 탄압을 가속화시키고 있었다. 이에 대응하여 무학은 회암사에 머물면서 비보사찰을 지정케 하는 등 불교계 수호에 노력을 기울였다.

 

때문에 불교계에 대한 전면적인 개혁은 무학의 입적 후로 유보될 수밖에 없었다. 태종대 이후 세종대에 걸쳐 승려들의 간통과 음주 비행을 적발 조치하고 불교계에 대한 대 탄압을 단행하였는데, 이는 개혁이란 미명하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이에 불교계 나름대로의 저항은 계속되었으며, 중국의 도움으로 문제를 해결하고자하는 움직임도 있었다.

 

그 후 무학의 문도인 진산과 함허기화, 그들의 문도로 추정되는 세조의 삼화상인 혜각존자 신미와 그의 문도 학조와 학열 등이 조선 전기의 불교계를 이끌어 나갔다.

 

●황인규 교수

동국대 대학원 사학과를 수료하고 현재 동국대 역사교육과 교수로 있으며 동국대 역사교과서연구소장을 맡고 있다. 저서로 <고려시대 불교계와 불교문화>, <조선시대 불교계 고승과 비구니>,

 

<고려말ㆍ조선전기 불교계와 고승연구> 등이 있다.

[불교신문3007호(봉축특집호)/2014년 5월 3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