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선조유적. 유물

삼산사(三山祠)/오늘날엔 관산사(冠山祠)라고 칭함

야촌(1) 2014. 10. 14. 10:20

▲1903년(丙午) 경주이씨 개산공파 산서종중에서는 삼산사를 창건(創建)하고 1959년(己亥)

   중수하였다.

 

 

 

 

 

 

 

■ 삼산사(三山祠) 또는 관산사(冠山祠)라 칭함

    봉안五位을 모신 사당임

 

① 익재공 휘 제현(益齋公 諱 齊賢)

② 개산공 휘 주(介山公 諱 注)

③ 봉운공 휘 귀희(鳳雲公 諱 貴希)

④ 단암공 휘 관빈(壇巖公 諱 觀彬)

⑤ 수명당공 휘 동의(水明堂公 諱 東儀)

 

◇향사일(享祀日)

일시 : 매년 음력 9월 20일 오전 10시

장소 : 전남 장흥군 관산읍 삼산리 499【삼산사】

연락처 : 三山祠 介山公 門中 會長: 李東新(相) (010-9432-4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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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장흥군 관산읍 삼산리 산서마을 경주이씨 이야기

 

1.연혁(沿革)


산서마을은 장흥군 관산읍 소재지에서 남쪽으로 약 4km 지점에 위치한 평야지 마을이다.

마을 초입(初入)에 경주이씨 2세 충효문(忠孝門), 세장비(世庄碑), 후박나무 등 마을 유적

눈에 들어 온다. 마을 전체 90여호 중, 70호 이상이 경주이씨가 거주하고 있으며, 옆 산동

마을 20호 이상을 포함하여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구전(口傳)에 의하면 1595년(乙未)경 개산공(介山公) 이주(李注, 1564~1594)가 전란 때 이순신 휘하에서 왜적과 싸우다가 남해안에서 사망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부인이 남편의 시신이라도 수습하기 위하여 아들 국세(國世)를 데리고 남해안을 헤매다가 인근 부안곡(浮雁谷, 어은 마을 옆 골짜기)에 정착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 마을 앞으로 이주하여 터를 옮겼으나, 1600년경 다시 이곳 산연(山硯)으로 옮겨 오늘에 이른다.

 

 

삼산리(三山里)는 본래 고하면 지역인데 1914년(甲寅)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삼산리 1구 산서(山西), 삼산리 2구 산동(山東), 삼산리 3구 우산(牛山)을 병합하여 세(三) 마을에 산(山)자를 붙여 삼산리라 하여 고읍면에 편입시켰다.

 

1961년(辛丑) 관덕지구 간척사업의 개척민들의 집단 거주를 위한 촌락이 형성되었다. 1965년(乙巳) 간척지 완공과 함께 각자의 삶의 터전을 찾아 이거하여 그곳에 지역주민들이 입주하여 산서마을 1개 반으로 편입시켜 운영되어 오다가 1970년(庚戌) 행정구역 개편에 의하여 삼산리 4구 관덕마을 이라고 칭하고 산서마을에서 분구하였다. 이승량(1961년생) 변호사가 이곳 태생이다.

2.형국(形局)


인근 남쪽해변에는 1961년(辛丑)에 조성된 광활한 농경지가 펼쳐져 있다. 마을의 형국(形局)이 벼루에 물을 부운 것 같다 해서 산연(山硯)이라고 하며 또한 키(챙이)형국 이라고도 한다.

 

 

▲산연은 벼루 형국으로 3일간만 비가 안 오면 개밥을 안준다는 속설에 기인하며,

이는 천수답에 가뭄이 들어 흉년이 든다는 속설과 이 지역이 키(챙이/경상도에선

치라고 함) 형국이므로 키로 알곡만을 챙기니 밥은 굶지 않을 것이라는 속설에 의

한 것이다. 지금의 산서 마을은 광활한 관덕 농장이 조성되어 비교적 여유 있는

농촌마을이다.



3.마을 문화유적 등


◇삼산사(三山祠)는 관산읍 삼산리 499번지 산서마을 내 위치한다.

   1903년(丙午) 경주이씨 개산공파 산서종중에서는 삼산사를 창건(創建)하고

    1959년(己亥) 중수하였다.

 

 

▲삼산사 입구 표지석

 

 

 

 

17世 익재(益齋) 이재현(李齊賢,1287~1367)을 주벽으로 하고 25세 병조참의 이주(李注,1564~ 1594), 27세 붕운(鳳雲) 이귀희( ~ ?), 33세 단암(壇庵) 이관빈(1755~ 1822), 34세 수명당(水明堂) 이동의(1775~1834) 등 5位를 배향하여 매년 陰 9월 20일 제향(祭享)을 봉행(奉行)한다.

 

원래는 지역 유림들이 제향을 주관하는 향사우(鄕祠宇)였으나, 농촌사회의 고령화에 따른 제례문화 변화로 2017년(丁酉)부터 후손들이 주관하는 문사우(門祠宇)로 전환하였다.



◇관덕재(冠德齋)

관덕재(冠德齋)는 삼산사(三山祠)의 강당이며 서재(書齋)이다. 1903년(癸卯) 창건하였다. 1925년경부터 1960년 사이에 이상옥, 송포 정노수 선생 등이 강학하였다.

 

 

 

 

▲관덕재 상량

 

▲액호(額號=편액(扁額)에 쓰는, 전각이나 당우의 이름) 편액은 경북 성주 태생

  극암(克菴) 이기윤(李基允,성산人 1891~ 1971) 선생이 썼다.

 

▲관덕재 상량문

 

관덕재상량문(冠德齋上樑文)은 1944년(甲申) 9월 12일 관산읍 방촌리 태생 오헌(梧軒)

위계룡(魏啓龍,1870~1948) 선생이 근서(謹書)하다.

 

▲관덕재의 기(記)는 1950년(庚寅) 5월 관산읍 내학 태생 송포(松浦) 정노수

   (丁魯壽,압해人 1877~1965) 선생이 근지(謹識)하다.

 

관덕재 운

 


- 관덕재운(冠德齋韻)은 야은(野隱) 이종석, 이종호가 고(稿)하다.
- 관덕재운(冠德齋韻)은 후손 춘희(春熙)가 썼다.
- 관덕재차운(冠德齋次韻)은 후손 윤우(潤雨)가 썼다.
- 근차판상운(謹次板上韻)은 남애(南崖) 정선수 선생이 썼다.
- 제관덕재벽상(題冠德齋壁上)은 김영성(金永聲)이 남겼다.
- 향사 오선생 행적 원문은 2001년(辛巳) 후손 상순(相淳 1929년생)이

   근술서(謹述書)하다.

 

경주이씨 二世 忠孝門은 목조와가로 1879년(乙卯) 마을 입구에 건축하였다.

 

 

 

이관빈과 그의 아들 이동의의 충(忠)을 기리기 위해 고종(高宗)이 명(命)하여

건립한 정려(旌閭)물 이다. 이러한 부자의 충효정신을 나라에서도 높이 평가

하고 1879년(乙卯) 이조판서 김병학이 충효록에 기록하고 현판서(懸板書)를

증(贈)하여 충효문을 마을 초입에 세웠다고 한다.

 

 

경주이씨 세장비(世庄碑) /사진>장흥신문

경주이씨 세장비(世庄碑)의 근수(謹竪)는1982년(壬戌) 陰 9월

19일 경주이씨 개산공파 산서종중에서 하였다.

 

 

 

 

 

 

근찬(謹撰)의 전서(前書)는  술재(述齋) 정채균(丁采均, 나주人 1929 ~1983)이 하였다. 장성군 성산리 태생으로 서예에 조예가 깊고 문화에 관심이 많았다. 당동마을 태생 만취(晩翠) 위계도(魏啓道, 1926~1999) 선생의 문하생이다.

 

전남도청 총무과장을 거쳐 제 21대 강진군수를 1976년 1월~1979년 5월 3일까지 3년 4개월 역임하면서 다산유적지 성역화, 청자 재현, 김영랑 생가 복원, 마량 소재지 공유수면 매립, 강진읍 토지 구획 정리, 강진군청 청사 설립 등 큰 업적을 남겼다. 광주시부시장 재임 때 불의의 교통사고로 별세하였다.

 

후근서(後謹書)는 송파(松坡) 이규형(李圭珩,전주人 1937~ )이 했다. 화순군 동복면 태생으로 송곡(松谷) 안규동(安圭東, 1907~1987)의 문하생이다. 화순군 동복향교 전교를 역임하고 현재 광주광역시에서 삼락서예원장으로 활동중이다.

 

산서마을 태생 후손들 중, 현대의 대표적 인물은 1961년 간척사업 추진과 농경지 조성에 공헌한 이상덕을 비롯하여 이권호(서예가), 이채석(주택공사 충북지사장), 이재만(광주시 남구의원), 이삼전(서울시 성북구의회 의원), 이일호(영문학박사), 이광희(국방부 서기관), 이승량(변호사), 이재순(육군 중령), 이승현(물리학박사) 등이며, 인근 산동마을 출신으로는 이두식(법원 서기관), 이남근(문학박사 조선대학교 사범대 교수), 이홍필(영문학박사 전남대교수), 이선자(문예 작가) 등이 있다.

 

■ 후박(厚朴)나무는 관산읍 삼산리 326-7번지 산서마을 초입에 위치한다. 수령(樹齡)은 400여년 이상으로 2007년 8월

    9일 천연기념물 제481호로 지정되었다.

 

 

후박나무는 녹나무과에 속하는 상록활엽교목으로 울릉도, 제주도, 남해, 완도 등 도서지방에서 자생하고 있다. 중국 일본에도 분포하고 있으나 세계적으로 흔하지 않는 수종(樹種)으로 내한성은 약하지만 내조성이 강하여 해변에 잘 자라며 잎은 광택이 나고 수형(樹形)은 아름다우며 수피(樹皮)는 향기가 좋고"후박피"라 하여 위장약의 원료로 사용되고 있다.

 

마을 입구에 심어져 있는 이 나무는 1600년경 이국세(李國世)가 이곳에 입향(入鄕)하면서 마을 입구 동서남북 방향으로 네 곳에 심었다고 傳한다. 세 곳의 나무는 고사(枯死)되어 없어졌고 남쪽의 나무만 생존하여 오늘에 이른다고 한다.

 

 

 

 

출처>문화탐방/栢江 위성록 이야기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