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선조유적. 유물

광림대(光臨臺)

야촌(1) 2014. 5. 23. 20:57

 

 

↑석혈비의 시조 알평공의 가로막을 알(閼)자를 뵐 알자의 알평공(謁平公)으로 바로 잡아야 합니다.

 

↑광임대(光臨臺)

 광임대(光臨臺) 비각은 시조의 초강지(初降地)를 보호하기 위하여 1985년 나라에서 세웠다.

 

 

 

↑광임대 석혈(光臨臺 石穴) /시조 께서 탄강히시어 목욕 한 곳이라고 전한다.

  소재지 : 경북 경주시 동천동 507-7

 

삼국유사의 기록에 의하면 어느 날 경주 하늘에 한 줄기 서운이 감돌더니 빛을 타고 신인 한 분이 홀연히 인간세상으로 내려오셨다.

용모가 비범하고 덕과 위엄이 가득했다는 그 선인이 바로 경주이씨 시조 알평공이시다.

 

 경주 표암봉, 이른바 밝바위에 하강하시니 광임대는 시조께서 첫발을 디디셨던 장소라고 전해진다.

당시 경주를 다스리던 진한은 여섯 부락의 연맹체로서 나라에는 질서가 없고 백성은 우매하였다.

이에 알평공께서 알천양산촌장으로 추대되시어 각종 문물제도를 정비하셨다.

 

특히 국사를 결정할 때 한 사람 이라도 이의를 제기하면 안건으로 채택치 않는 만장일치제도를 확립하셨는데 이는 후일의 신라 화백제

도로 계승되어 삼국통일의 원동력이 되었다. 다른 촌장들과 백성들의 존경의 대상으로 사실상 왕이나 다름없었으나 시조께서는 13세의 박혁거세를 왕으로 추대하고 40여년간 섭정함으로써 신라건국의 기반 마련에 온 힘을 쏟으셨다.

 

건국 후에는 아찬의 벼슬에 올라 국가의 근본이 되는 경제와 국방을 안정시키셨다. 3대 유리왕은 건국원훈인 알평공에게 이씨성을 사성하니 이로써 이천년 경주이씨의 도도한 역사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알평공 이후의 기록이 실전되어 천여년의 세계는 밝혀지지 않고 있으며 현재는 알평공을 시조로 소판공 거명을 중시조로 선대의 세계를 정립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