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고전(古典)

자애는 행하지만 효행은 드물다.

야촌(1) 2014. 10. 13. 10:59

[번역문]

 

질문 : 하늘이 만백성을 낳을 적에 모든 이에게 법칙을 부여하였으니, 부모가 되어 자애하고 자식이 되어 효도하는 것은 모두 타고난 본성입니다. 그러나 성인의 가르침에 따르면 부모가 자애하지 않아도 자식은 효도해야 한다고 하였는데, 보통 사람들의 집안을 보면 자애하지 않은 사람은 없지만 효도하는 사람은 몹시 드뭅니다.

 

짐승 역시 자식은 사랑하지만 부모를 사랑하는 경우는 극히 드뭅니다. 효도와 자애는 모두 타고난 이치인데, 효도와 공경의 본성을 잃는 경우는 많고, 자애의 본성을 잃지 않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혹시 천지가 만물을 낳는 마음이 잠시도 멈추지 않기 때문에 효도는 간혹 잃더라도 자애는 잃지 않는 것입니까?

 

답변 : 인륜의 등급을 따지자면 효도가 무겁고 자애는 가볍다. 그러므로 성인이 부모 자식 간의 관계를 가르칠 적에 오로지 효도를 위주로 하였으며, 자애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았다. 하지만 천지가 만물을 낳는 이치의 완급과 분수를 따지자면, 자애가 효도에 비해 더욱 시급하다.

 

그러므로 자식에게 자애를 베푸는 마음은 사람이 배우지 않아도 능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치에 어두운 짐승이라도 이것만은 잘 안다. 하지만 효도로 말하자면 현명한 사람이건 어리석은 사람이건 직분을 다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그대가 보낸 편지 말미의 언급은 그럴듯하지만, 설명이 명쾌하지 못한 것이 흠이다.

 

[원문]

 

天生蒸民, 有物有則, 爲父慈爲子孝, 固莫非秉彜之性也. 然觀聖人設敎, 則父雖不慈, 子不可以不孝. 觀常人處家, 則人莫不慈, 而孝者甚鮮. 至於禽獸, 亦愛其子, 而愛其父則絶少. 盖孝慈俱是天理, 而孝弟多有失其天者, 慈之天未有失何也. 意者天地生物之心, 未甞少息, 故孝或失而慈不失歟. 論人倫等差, 則孝重而慈輕. 故聖人設父子之敎, 專主於孝而鮮及於慈. 論天地生物之理緩急分數, 則慈比孝爲尤急. 故慈子之情, 不惟人之所不學而能, 雖厚蔽如禽獸者, 於此一路, 未有不通者. 至於孝, 人無賢愚, 有不盡分處矣. 來諭末節云云, 庶幾近, 但欠說得有未暢爾.

 

- 유중교(柳重敎, 1832~1893), 「신덕선에게 답함[答申德善]」, 『성재집(省齋集)』 권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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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구한말의 학자 유중교가 제자 신석원(申錫元 자:덕선(德善))의 질문에 답한 내용이다. 신석원의 질문을 요약하면 이렇다. 성인의 가르침에 따르면, 효도와 자애는 모두 사람의 타고난 본성이다. 따라서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기 자식을 사랑한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부모에게 효도하는 사람은 드물다. 짐승도 마찬가지다. 모든 짐승이 자식을 사랑하지만 부모에게 효도하는 짐승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유중교는 이렇게 대답한다. 효도와 자애는 모두 사람의 본성이며 자연의 이치이다. 다만 사람의 입장에서는 효도가 자애보다 중요하고, 자연의 입장에서는 자애가 효도보다 중요하다. 자연의 이치가 자애를 중시하므로 자애의 본성은 쉽게 드러나는 반면, 효도의 본성은 좀처럼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유중교가 효도를 자애보다 중요하다고 말한 이유는 무엇일까? 유교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는 핵심 윤리가 효도이기 때문이다. 국가를 가정의 확장판으로 간주하는 유교적 관념에 따르면 부모에 대한 효도와 임금에 대한 충성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부모에 대한 효도를 강조하는 것은 곧 국가에 대한 충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것이 유교 사회가 효를 강조한 이유이다. 유교 사회의 위계질서는 효도의 기반 위에 구축된 것이다.

 

인간 사회를 지배하는 것이 효도의 원리라면, 자연을 지배하는 것은 자애의 본능이다. 만물을 낳고 기르는 것이 자연의 역할이기 때문이다. 자연의 모든 존재는 자애의 본능을 공유한다. 그러므로 사람은 배우지 않아도 자식을 사랑할 줄 알고, 어리석은 짐승도 새끼를 사랑할 줄 안다.

 

그런데 사람의 자애와 짐승의 자애는 다르다. 사람은 평생 자식에게 자애를 베풀지만, 짐승은 때가 되면 자애를 끊는다. 새끼를 낳고 한동안은 사람과 다름없이 무한한 애정을 쏟다가도, 새끼가 어느 정도 자라서 독립할 즈음이 되면 어미는 언제 그랬냐는 듯 매정하게 돌변한다.

 

어째서 그런가? 한 마디로 말하면 생존을 위해서이다. 짐승의 세계는 약육강식의 법칙이 지배하는 냉혹한 세계이다. 제 먹고살기도 버거운 짐승으로서는 다 큰 새끼를 먹여 살릴 여력이 없다. 짐승은 때가 되면 자애를 끊음으로써 자신의 생존을 도모한다. 짐승에게 효도가 없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성체(成體)가 된 짐승은 어미를 다시 찾지 않는다.

 

어쩌다 만나더라도 남 보듯한다. 이미 성장을 마친 짐승의 입장에서 늙은 어미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거추장스러운 존재일 뿐이기 때문이다. 짐승에게 효도가 없고, 때가 되면 자애마저 끊는 현상은 그들이 살아가는 세계에 적응한 결과이다.

 

전통사회는 짐승과 달리 평생 효도하고 평생 자애할 것을 강요해 왔다. 따라서 부모는 자식을 양육할 의무가 있고, 자식은 부모를 봉양할 의무가 있었다. 국가의 복지 혜택은 부양의무자를 잃은 ‘환과고독(鰥寡孤獨, 홀아비, 과부, 고아, 독거노인)’에게 집중되었다.

 

보편적 복지를 추구하는 지금도 부모 자식 간의 상호 부양 의무는 ‘부양의무제’라는 형해화(形骸化) 된 법률로 남아 있다. 다만 부양의무제가 여전히 존치(存置)하고 있는 이유는 효도와 자애가 넘치는 아름다운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필시 국가의 책임을 국민에게 전가하려는 속셈일 것이다.

 

효도와 자애로 넘치는 사회를 누군들 바라지 않겠는가. 하지만 현실은 그리 녹록지 않다. 자녀가 부모를 부양해야 한다는 관념은 점차 퇴색되고 있다. 부모를 봉양할 자녀가 여럿이었던 과거와 달리 지금은 자녀가 한둘뿐이다.

 

게다가 사회 진출 시기가 갈수록 늦어지면서 결혼과 출산도 덩달아 늦어지는 추세이다. 이대로라면 제대로 자리도 잡지 못한 채 부모 부양의 의무를 짊어지게 된다. 생존을 위해서는 효도를 끊어야 한다.

 

부모도 자녀에게 부양을 요구하지 않는다. 자녀에게 모든 것을 아낌없이 주었던 과거의 부모와 달리, 지금의 부모는 자식의 장래 만큼 자신의 노후를 걱정한다. 자녀를 위한 투자보다 노후 준비가 중요하다는 것은 지금의 부모 세대에게는 공공연한 상식이다. 생존을 위해서는 자애를 끊어야 한다.

 

애당초 효도할 생각이 없는 자녀, 그리고 때가 되면 자애를 끊는 부모의 모습은 짐승의 새끼와 어미를 연상케 한다. 사람이 짐승을 닮아가는 작금의 세태를 개탄하는 이들은 인성 교육의 부재를 탓하곤 하지만, 그것은 근본적인 원인이 아니다.

 

근본적인 원인은 자신의 생존 외에 다른 것을 돌아볼 겨를이 없는 ‘동물의 왕국’으로 변해 버린 우리사회에 있다.윤리 의식의 실종은 변화한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한 적응의 결과일 뿐이다. 실종된 윤리 의식에 대한 책임은 인성 교육의 부재에 전가할 것이 아니라 동물의 왕국으로 변해 버린 이 사회에 물어야 할 것이다.

 

글쓴이 : 장유승/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 선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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