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선현들의 묘.

김좌근(金左根)/新安東人

야촌(1) 2010. 2. 17. 01:36

■김좌근(金左根)

    [문과] 헌종(憲宗) 4년(1838) 무술(戊戌) 정시(庭試) 병과(丙科) 6위(9/11)/합격연령 42歲

    [생원시] 순조(純祖) 19년(1819) 기묘(己卯) 식년시(式年試) [생원] 3등(三等) 3위(33/100)/합격연령 23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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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7(정조 21)∼1869(고종 6).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신안동(新安東). 자는 경은(景隱), 호는 하옥(荷屋). 영의정 김창집(金昌集)의 5대손으로, 할아버지는 김이중(金履仲)이고, 아버지는 영안부원군(永安府院君) 김조순(金祖淳), 어머니는 심건지(沈健之)의 딸 청송심씨(靑松沈氏)이다. 순조비 순원왕후(純元王后)는 그의 누이다.

 

1819년(순조 19)에 생원이 되고 부수(副率)·상의원첨정(尙衣院僉正)을 거쳐 1838년(헌종 4) 판관으로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부교리(副校理)·직각(直閣)·대사성·이조참의·공조판서·이조판서·한성부판윤·대사헌·병조판서·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 등 요직을 역임하였다.

 

1850년(철종 1)에는 우참찬·제학 겸 지실록사를 거쳐 총위영(總衛營)을 총융청(總戎廳)으로 개편, 총융사(總戎使)를 맡고 이어 금위대장 등 무직(武職)의 수뇌부를 관장하여 당시 혼란한 사회를 무력으로 진압하려 하였다.

 

그 뒤 예조판서·형조판서·훈련대장·공조판서·호조판서를 거쳐 영의정에 세 번씩이나 보직되어 안동김씨 세도정치의 중심인물이 되었다.

 

1862년 삼정문란(三政紊亂)으로 발생한 각지의 민란을 진정해보려는 의도에서 설립된 이정청(釐整廳)의 총재관(總裁官)을 맡기도 하였으나, 1864년 고종이 즉위하고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이 실권을 장악하자 실직에서 물러나 실록총재관으로 『철종실록』 편찬에 참여한 뒤 영돈녕부사로 1866년 기로사에 들어갔다.

 

인품은 정량(貞亮: 곧으면서 맑음)하고 공평하였으나, 안동김씨세도정치시기의 핵심인물이었다는 점에서 조선 말기 역사에 끼친 영향이 컸다. 시호는 충익(忠翼)이다.

 

 

[가족사항]

[부]

성명 : 김조순(金祖淳)

관직 : 영돈(領敦)

 

[조부 - 조부1:부의 부]

성명 : 김이중(金履中)

관직 : 부사(府使)

 

[증조부 - 증조부1:조부1의 부]

성명 : 김달행(金達行)

기타 : 견흥근(見興根)

 

[외조부]

성명 : 심건지(沈健之)

관직 : 정랑(正郞)

 

[처부]

성명 : 윤치승(尹致升) 

 

 ▲김좌근선생 유필

 

 ▲김좌근선생 묘/경기도 이천시 백사면 내촌리 222-14번지  선생의 고가 뒤 문중 묘역에 있다.

 

당대 권력가의 묘답게 넓은 면적에 조성되어 있으며 부인 정경부인(貞敬夫人) 해평 윤씨(海平尹氏)와 합장묘이다. 넓은 묘역에 비해 석물은 간결하게 배치되어 있다.

원형의 봉분 앞에 상석이 놓여 있고 봉분 왼쪽과 오른쪽에 망주석이 각각 1기씩 있다. 봉분 오른쪽에 있는 묘비는 1869년(고종 6)에 건립한 것으로 사각형의 받침돌과 팔작지붕의 옥개석을 갖추었으며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1820~1898)이 비문 전면의 글씨를 썼다. 봉분 주변에 장명등, 혼유석이 배치되어 있다.

 

선생의 묘는 사손(嗣孫)인 현손(玄孫) 김광한씨가 1997년 별세한 뒤 2006년경 후손들이 김좌근선생과 그의 양자 김병기선생 두 분의 묘를 파묘하여, 화장∙산골한 뒤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고 마을사람들이 전한다

 

그 후 2009년 김좌근의 6대 손녀(김광한 딸) 김은희씨가 그의 어머니 전은기씨와 고택과 묘의 석물들을 비롯한 주변 땅 10만 1500㎡(약3만 700평)를 서울대학교에 기부하였다고 한다.

 

일대의 땅은 당시 공시지가로만 따져도 약60억 원의 가치라고 한다. 아뭍은 일가가 미국으로 이민을 가므로 더 이상 묘지를 관리할 수 없다는 이유이지만, 영의정까지 지내신 분이신데 선생의 무덤을 없어진 것에 대한 필자의 아쉬움이 남는다.

 

외냐면 선생의 묘는 이미 문화재급의 묘지이고 묘를 보존 한체 기증하드래도 기증받은 단체에서는 관리하는 것이 당연한 일인데, 후손으로써 잘못 판단을 하시지 않았나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