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혜공 북창 정렴 묘갈명(章惠公 北窓 鄭磏 墓碣銘)
[생졸년] 정렴『鄭?, 1506년(중종 1)~1549년(명종 4)』
부군(府君)은 이름이 렴(磏)이요, 자는 사결(士潔), 성은 정씨, 본관은 온양(溫陽), 호는 북창(北窓)이다.
시조는 이름이 보천(普天)인데 고려시대 벼슬이 호부상서(戶部尙書)을 지냈고 시호는 정희(貞僖)이다.
아조에 들어와서 득량(得良)이란분이 있어 판선공감사(判繕工監事)를 지냈고, 이 분이 포(袍)를 낳으니 고성군사(高城郡事)였다.
이분께서 충기(忠基)를 낳으니 교리(校理)였고, 또 이분이 탁(鐸)을 낳으니 헌납(獻納)이었고, 이 분이 순붕(順朋)을 낳으니 돌아가셨을 때의 벼슬이 우의정(右議政)이었다.
이분께서 완산이씨(完山李氏) 양녕대군(讓寧大君) 제(提)의 증손 봉양도정(鳳陽都正) 종남(終南)의 딸을 부인으로 맞이하여 정덕 병인년(중종 1, 1506년) 3월 갑신일에 부군을 출생하였다.
부군께서는 정유년(중종 32, 1537년)에 진사에 합격하고 가정 기유년(명종 4, 1549년) 7월 16일에 돌아가시니 양주 사정리(楊州砂井里) 의정공(議政公)의 묘소 아래에서 몇 보 떨어진 북쪽을 등진 언덕에 묘소를 정하였다.
부인은 진주유씨(晉州柳氏)로서 우찬성(右贊成)으로 증직된 문통(文通)의 손녀이며 학생 인걸(仁傑)의 딸인데 돌아가신 날은 7월 12일이라고 전한다.
『동국명신록(東國名臣錄)』에 보면 “공은 음율에 정통하였고, 더욱 천문과 의약에도 탁월하여 조정에서는 장악원주부(掌樂院主簿-從六品)로 추천하여 관상감(觀象監)과 혜민서교수(惠民署敎授)를 겸직하도록 하였다.
포천현감(抱川縣監-從六品)으로 나갔다가 오래지 않아 벼슬을 그만두고 양주(楊州)의 괘라리(掛蘿里-오늘날 남양주시 오남읍 팔현2리)에 돌아와서 병을 요양하였다”고 한다. 또 이르기를 “공은 허심탄회하고 고명(高明)하여 선천적으로 빼어난 재주를 타고난 듯하였다.
성학으로서 주장을 삼고 이를 마음의 근본으로 삼아 항상 이르기를 성인의 학문이라는 것은 인륜을 가장 중요시하기 때문에 그 밖의 오묘한 진리에 대하여는 말하지 않았다. 선교와 불교 또한 대동소이하다.”고 하였다.
계곡(谿谷)선생 장유(張維-1587(선조 20~1638(인조 16)가 선생의 시집에 서문을 썼는데 거기서 “학문과 덕행이 있으면서 숨어사는 선비로서 중청(中淸)과 중권(中權)에 비할수 있는 것은 바로 선생과 고옥(古玉)이로다.”하였다.
또 이르기를 “공(公)은 태어날 때부터 신령스럽고 특이하였으며 널리 유 · 불 · 선 3교에 널리 통하였는데, 이것을 서로 비슷한 도로 수습하여 그 이치를 깨우쳐 선을 터득하였으나 인륜 강상과 행동은 한결같이 우리 유도를 근본으로 폈다.”하고, 또 말하기를 “어렸을 때 아버지를 따라 중국에 갔는데 중국 사람들을 보고는 중국말로 응대하였으며 외국의 사신을 만나면 외국어로써 말하였다.
일찍이 산에 들어가 며칠 동안 마음을 가다듬고 수양한 후에 내려오면 산아래 100리 사이의 모든 일은 눈으로 보는것 같이 훤하게 알곤 하였다.”고 하였다.
또 해숭위(海嵩尉) 윤신지(尹新之: 선조의 사위로 貞惠翁主의 남편)가 쓴 서문에는“내가 어렸을 때 이미 동국에 진인 정북창(鄭北窓)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
정유(丁酉)의 난(難)에 고옥(古玉)선생을 돌아오는 길에서 만났는데, 때에 선생은 늙은 학의 형상으로 은빛머리를 휘날리고 있어 완연히 신선이었고, 사람의 마음속을 꿰뚫어보니 그 모양이 득도한 사람임에 분명하였다.
나는 자신도 모르게 탄식하며 일어서서 경의를 표하였다. 선생께서 말하기를 ‘그대는 나를 진인(眞人)으로 보았는가? 애석하도다. 그대는 나의 북창(北窓) 형을 보지 못하였구나!’ 하였다.
이날 나는 고옥선생으로부터 선생의 풍신(風神) · 의표(儀表) · 기험(奇驗) 등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내가 모르는 여러 가지 사실들을 들었다.
마침내 나는 선생이 신선과도 더불어 하고 부처와도 더불며 또 성인과도 더불어 하는 것을 알았다. 이런 분을 일러 가히 진인이라 할 수 있지 아니할까? 만약에 선생이 이러한 특이한 식견으로 끝까지 선교와 불교에 물들지 않고 오로지 우리 유도로서 본관을 삼아 유훈을 받들고 효제에 오로지 힘써『소학(小學)』과『근사록(近思錄)』으로써 초학을 삼아 순순히 유교의 가르침에만 열심히 하였다면 어찌 고금에 찾아볼 수 없는 탁절한 선경에 이를 수 있었겠는가” 하였다.
참판(參判) 성수익(成壽益)이 편찬한 『삼현주옥(三賢珠玉)』에서는 “북창 선생의 세상일에 관여하지 않음은 신인이다. 일찍이 중국에 갔을 때 유구(琉球)의 사신을 만났는데 사신 역시 특이한 사람이었다.
한 번 북창(北窓) 선생을 보고는 소스라치게 크게 놀라면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아래로 내려가 절을 올리고 그가 가지고 있는 조그마한 책자에 기록된 ‘모년 모월 모시에 중국에 들어가면서 진인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란 글을 보이면서 북창 선생에게 말하기를 ‘바로 진인이란 공이 아니고 누구겠는가?’ 하였다.
그 사람은 역학(易學)에 정통한 사람이었다. 북창 선생과 더불어 역을 논하는데 통역을 기다리지 않고 북창선생은 유창한 그 나라 말로 ‘노자(老子)가 말한 바 집밖으로 나가지 않고 천하의 일을 모두 알았다’는 것은 빈 말이 아니다”고 하였다.
허목(許穆)이 저술한『기언(記言)』이란 책에 청사전이 있는데 여기에서 그 내용은 부군(府君)과 고옥(古玉)의 사적을 대부분 기술한 것이다.
고옥은 즉 부군의 넷째 동생인 작(碏)의 호이다. 부군은 2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지복(之復) · 지임(之臨)이고 딸은 김윤신(金潤身)에게 출가하였다. 지임은 단지 1녀만 두었는데 권정기(權正己)에게 출가하였다.
김윤신(金潤身)은 후사가 없다. 지복(之復)은 종제인 총계당(叢桂堂) 지승(之升)의 아들 시(時)를 양자로 하여 후사로 이었는데, 벼슬이 찰방(察訪-從六品)이었다. 찰방도 자식이 없으니 좌랑(佐郎)을 지내고 참판으로 증직받은 맏형 회(晦)의 아들인 인경(麟卿)을 후사로 하였는데 벼슬이 승지(承旨-正三品 堂上官)에 이르렀다.
승지는 3남을 두었는 바 장자는 순양(純陽)이고 참판을 증직받았고, 차남은 정양(正陽)인데 현감(縣監-從六品)을 지내고 참의를 증직받았으며, 3남은 일양(一陽)으로 참의를 증직받았다.
순양(純陽)의 아들 수연(壽淵)은 현감으로 판서를 증직받았고 3남을 두었는데, 장남 광은(光殷)은 사서(司書-世子侍講院소속의正六品)를 지내고 참판을 증직받았고, 차남 광주(光周)는 군수(郡守-從四品)이며 3남 광한(光漢)은 판서(判書-正二品) 이다.
광은(光殷)의 아들 창성(昌聖)은 감사(監司-從二品)이며 창순(昌順)은 대사헌(大司憲-從二品)이요, 광한(光殷)의 아들 창노(昌老)는 참봉(參奉-從九品)이고 창기(昌耆)는 광주(光周)의 양자로 나갔다.
창성(昌聖)의 아들은 돈시(敦始) · 경시(敬始)이고 창순(昌順)은 경시를 취하여 양자로 하였고, 정양(正陽)의 아들 수곤(壽崑)은 찰방(察訪-從六品)을 지냈다.
수곤(壽崑)의 아들로서 광겸(光謙)은 군수(郡守-從四品)를 지내 참의(參議)를 증직받았고, 광익(光益)은 주서((注書-正七品)를 증직받았으며, 광충(光忠)은 대사헌((大司憲-從二品)을 지냈다.
광겸(光謙)의 아들로서 장남은 창언(昌言)이고 차남 창유(昌兪)는 군수(郡守-從四品)를 지내고 참판으로 증직되었으며, 3남 창사(昌師)는 참판을 증직받았다.
창유(昌兪)의 아들로서 원시(元始)는 감사(監司-從二品)를 지냈고, 민시(民始)는 참판(參判-從二品)을 지냈는데 창사의 후사로 나갔다.
원시(元始)의 아들은 상필(尙弼) · 상우(尙愚)이다. 수륜(壽崙)은 일양(一陽)의 양자로 나갔으나 자식이 없어 광충(光忠)을 취하여 후사를 이었는데, 그 소생으로 창조(昌朝)는 부솔(副率)이고 창기(昌期)는 좌랑(佐郞-正六品)인데 광익(光益)의 후사로 나갔다.
창조(昌朝)의 아들은 만시(萬始)이고 수강(壽崗)의 아들은 광언(光彥) · 광운(光運) · 광헌(光憲)인데 광헌은 봉사(奉事-從八品)를 지냈다.
광언(光彥)의 아들은 창원(昌遠)이고 광헌(光憲)의 아들 창후(昌後)는 진사(進士)를 지냈고, 광운의 양자로 나가 그 후사를 이었다.
오호라! 지금은 부군께서 돌아가신지 250여년이나 되었도다. 초동(樵童), 마졸(馬卒)들도 아직껏 정 북창 이름 세자를 알고 있는데, 선생의 행장(行狀)을 후대에 전하여 영원토록 함이 그 도리일 것이니 어찌 다시 구구하게 달리 때를 기다리겠는가?
돌을 깎아 공의 행장을 비석에 새기지 않는 다면 비록 평소 공을 경모하는 사람들일지라도 어찌 정확히 공의 행적을 알 수 있으리오, 무릇 의복과 신발을 소장하고 그 산에 제사 지내며 우러러본다고 해서 성의를 다하는 것인가?
소자가 이에 삼가 제현들이 기록한 내용 중에서 믿을 수 있고 논증 할 수 있는 것만을 골라 뽑아 이를 음기로 하는 바이다. 6대손 정헌대부 예조 판서 겸 지 경연사 광한이 삼가 글을 짓고,
8대손 가선대부 이조 참판 겸 규장각 직제학 민시가 삼가 글을 쓰다.
지금 임금 3년(정조 3, 1779년) 기해년 월 일에 세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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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進士北窓鄭公墓碣銘
府君諱磏字士潔姓鄭氏籍溫陽號北窓始祖諱普天高麗戶部尙書謚貞僖入我 朝有諱得良判繕工監事生諱袍高城郡事生諱忠基校理生諱鐸獻納生諱順朋卒官右議政娶完山李氏讓寧大君禔之曾孫鳳陽都正終南女以正德丙寅三月甲申生府君中丁酉進士歿以嘉靖己酉七月十六日墓在楊州砂井里議政公墓下數步子坐之原配晉州柳氏 贈右贊成文通之孫學生仁傑之女忌辰在七月十二日云東國名臣錄有曰公雅曉音律尤邃於天文醫藥 朝政薦除掌樂院主簿兼觀象監惠民署敎授出爲抱川縣監未久辭還養疾於楊州之掛蘿里又曰公冲虛高明有上智之姿而以聖學爲主心之本常曰聖人之學以人倫爲重故不言其要竗處仙佛則大同而少異張溪谷維序先生詩集以逸民之中淸中權比之先生與古玉有曰公生而靈異博通三敎其修攝似道悟解類禪而倫常行誼一本吾儒又曰少時隨親覲上國見華人便作華人語遇外國使便作外國語甞入山攝心數日盡知山下百里間事如目擊焉海嵩尉尹新之之序有曰兒時已聞東國有眞人鄭北窓丁酉之難逢古玉先生於逆旅時先生已老鶴形銀髩宛如神仙中人胸襟澄澈類有道者自不覺歎息起敬先生曰君乃以我爲眞人耶惜不令君見吾北窓兄也於是日聞所不聞其風神儀表靈異奇驗無不脩悉乃知先生可與爲仙可與爲佛可與爲聖人是之謂眞人者非耶以如是之奇識終不泥仙釋一以吾儒爲本觀其遺訓專務孝悌最以小學近思爲初學蹊逕諄諄戒餙則斯豈非古今仙眞卓絶罕覯者㢤成參判壽益所撰三賢珠玉有曰北窓先生物表神人也甞赴中國遇琉球使使亦異人一見北窓瞿然大驚不覺下拜搜其槖出小册子實記某年月日入中國遇眞人示北窓曰所謂眞人非公而誰耶其人精通易學北窓共處論易不待舌人能爲其國之語老子所謂不出戶而知天下者非虛語也許穆所著記言有淸士傳盛稱府君及古玉事蹟古玉即府君第四弟諱碏之號也府君有二子一女之復之臨女金潤身之臨只有一女權正己金潤身無後之復取從弟叢桂堂諱之升子諱時爲嗣官察訪又無子取伯氏佐郎 贈叅判諱晦子諱麟卿爲嗣官承旨有三子純陽 贈叅判正陽縣監 贈叅議一陽 贈叅議純陽子壽淵縣監 贈判書有三子光殷司書 贈叅判光周郡守光漢判書光殷子昌聖監司昌順大司憲光漢子昌老叅奉昌耆出爲光周後昌聖子敦始敬始昌順取敬始爲子正陽子壽崑郡守 贈承旨壽崙直長 贈參判庶子壽崗察訪壽崑子光謙郡守 贈參議光益 贈注書光忠大司憲光謙子昌言昌兪郡守 贈參判昌師 贈叅判昌兪子元始監司民始叅判出爲昌師後元始子尙弼尙愚壽崙出爲一陽後又無子取光忠爲嗣子昌朝副率昌期佐郎出爲光益後昌朝子萬始壽崗子光彥光運光憲奉事光彥子昌遠光憲子昌後進士出爲光運後嗚呼今去府君之世二百五十有餘年而樵童馬卒尙知鄭北窓三字則傳後悠遠之道願何待乎區區片石而苟無墓道之刻則雖平昔之景慕者亦何以辨夫衣履之藏而致其山仰之誠乎小子竊爲是惧謹就諸賢所錄中信而有微者撮爲陰記
六代孫正憲大夫禮曹判書兼知 經筵事 光漢 謹撰
八代孫嘉善大夫吏曹參判兼 奎章閣直提學 民始 謹書
上之三年己亥 月 日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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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窓 鄭磏이 44歲 되던 해 世上에 오래 있지 않을 뜻을 굳힌 듯 周圍에 미리 이승을 떠날 날짜를 말하고 스스
로 輓詞를 지어서, 自己 삶을 매우 간명하게 槪括했다. 그가 조용히 坐化한 날 隣近에 住民들이 구름을 타고
昇天하는 모습을 目擊했다는 白日飛昇의 說話가 後日譚처럼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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