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양반이란?
나라마다 이름은 다르지만 그 사회를 이끌었던 지배층이 있었다. 영국의 신사처럼 조선의 양반은 조선 사회를 이끌어간 지배층이었다.
오늘날 성실하고 반듯한 생활 태도를 가진 사람을 보면, "아! 그 사람 양반이지."라고 한다.
이 말에는 양반에 대한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이 함께 들어있는 것 같다. 부정적이라고 하면 아마도 고지식한 생활 태도를 가지고 있음을 넌지시 말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때에 따라서 이 말은 협잡꾼 같은 사람을 비꼬는 말로 쓰이기도 한다. 양반에 대한 이런 부정적인 평가는 조선 왕조가 망한 뒤 나타난 것은 아니다.
조선 후기 대표적인 북학파 실학자인 박지원은 <호질>, <양반전> 등에서 양반들이 가지고 있는 허위의식과 비리를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대체 하늘이 백성을 낳으실 때 넷으로 나누었다. 네 백성 가운데 가장 존귀한 자기 선비이다. 이를 양반이라 하니, 이보다 더 큰 이익이 없다.
이들은 농사와 장사를 하지 않는다. 글이나 역사를 대강 알면 크게는 문과에 급제하고 작게는 진사에 합격한다. 문과 홍패는 길이가 두 자도 못 되지만 모든 물건이 들어있으니 돈 자루나 다름없다.
진사에 오른 선비는 삼십에 처음 벼슬을 하더라도 좋은 관직에 오를 수 있고, 남쪽 큰 고을 원을 잘 섬기면 일산 바람에 귓바퀴가 희어지고 사령들이 '예'하는 소리에 배가 나오게 된다. 방에는 아리따운 기생이 있고 뜰에는 학이 노닐며 울고 있다.
시골에 사는 가난한 선비도 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마음대로 할 수 있다. 이웃집 소를 몰아다가 자기 밭을 먼저 갈고, 동네 농민을 동원하여 자기 농토부터 김맨다. 누가 감히 이 양반을 얕보랴. 코에 잿물을 붓고 상투를 휘여 잡고 수염을 뽑아도 감히 원망조차 못하리라.
증서가 반쯤 만들어졌는데 부자가 혀를 차면서 말했다. "그만두시오. 그만두시오. 참으로 맹랑합니다. 장차 나보고 도둑놈이 되라 하는 것입니까?".
-박지원, <양반전>-
하지만, 조선시대 양반은 박지원이 비꼬고 있는 것처럼 세금 한 푼 내지 않고, 상놈들을 울리던 파렴치한은 아니다. 어떻게 백성들에게 존경을 받지 못한 파렴치한들이 큰 반발 없이 500년씩이나 조선 사회를 이끌어 왔단 말인가?
우리는 조선 왕조 전 시대가 아닌 특정한 시기 특정 부류 양반들이 보인 행적을 전체 양반 모습으로 착각해서는 안 된다. 세계에서 가장 과학적이라는 한글을 만든 사람. 중국 주자학이 남겨 놓은 숙제를 해결한 성리학자들. 새로운 농법을 연구하여 농촌 생활을 안정시킨 사람들. 임진 병자 양난에서 의병을 일으켜 나라를 구한 사람들. 이른바 진경 시대를 이끌었던 실학자들. 이들은 모두 양반이었다.
양반이란?
양반이라는 원래 고려와 조선시대 문반과 무반을 맡은 관리들을 합쳐 부르던 말이다. 이 때 양은 문, 무 둘을 가리키고 반은 열을 뜻하는 말이다. 고려와 조선 시대 국왕은 중국 황제를 본 따 조회나 의식에서 남쪽을 보고 앉아 관료들을 맞았다. 이 때 국왕을 향해 오른쪽은 문관이, 왼쪽은 무관이 늘어섰다.
임금 쪽에서 보면 동쪽 열에는 문관이 서고 서쪽 열에는 무관이 서 있는 셈이다. 따라서 양반은 두 열 곧 문관이 늘어서는 동반과 무관이 늘어서는 서반을 합쳐 부른 말이었다. 이 때문에 문반을 동반, 무관은 서반이라고 하였다.
양반이라는 개념은 조선 초기를 지나면서 점차 신분을 가리키는 말로 바뀌었다. 점차 전 현직 관료뿐만 아니라 관품을 가진 자와 4조(증조, 조, 부, 외조)안에 문무 9품 이상 현직을 지냈으면 양반이라고 하게 되었다. 조선중기부터는 유교를 공부하는 사람들은 모두 양반이라고 하였다. 이에 따라 양반이란 개념은 갈수록 모호해질 수밖에 없었다.
조선 시대에 한 특권층으로 존재하였던 양반에 대하여 그 개념을 정확하게 규정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법제적인 절차를 통해서 제정된 계층이 아니라 사회관습을 통해서 형성된 계층이요, 따라서 양반과 비양반과의 한계기준이 매우 상대적이요. 주관적인 것이었다는 사실이다.
조선시대의 사회계층을 논함에 있어 가장 경계해야할 점의 하나는 그것을 저 중세 유럽이나 도쿠가와기의 일본에 존재하였던 계급 제도 비슷한 것으로 착각해서는 안된다는 점이다. 예컨대 도쿠가와 기의 일본 사회에 있었던 사농공상(士農工商)의 구별은 어디까지나 법제에 의한, 따라서 강제성을 띤 것이었지만 조선 시대의 사농공상은(공상의 경우는 예외가 되지만) 그러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양반과 비양반과의 한계 기준이 상대적이요 주관적이었다고 해서 그것이 애매모호한 것이었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잘못이다. 실제에 있어서는 지극히 명확한 기준이 있었다. 다만 그 기준은 성문화된, 그리고 언제 어디에서나 적용이 될 수 있는 객관적인 것이 아니라, 주어진 상황에 따라 변경 설정되는, 즉 어느 특정한 지역의 특정한 상황하에서 관련된 사람들의 의식구조상에 설정되는 주관적이고도 상대적인 기준이었다.
-송준호, <조선사회사 연구>, 일조각, 1987, 37쪽-
그렇다고 해도 서울이나 서울 가까운 곳에 살면서, 많은 과거 합격자를 배출하고 공신 책봉을 받으며 계속해서 고위 관직에 오른 집안들은 누가 보아도 양반으로 인정을 받을 수 있었다.
이들은 정쟁으로 중앙 관직에서 밀려나지 않는 한 결혼도 자기들끼리 하면서 특권 계급으로서 권세를 이어나갔다. 반면, 지방에 사는 양반들은 서울 권세가 양반에 비해 양반으로 인정받는 것이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미야지마 히로시는 지방에서 양반으로 인정받는 기준으로 네 가지 조건을 들고 있다.
(1)과거 합격자, 또는 과거에 합격하지는 않았지만 당대를 대표하는 저명한 학자를 조상으로 모시고 있을 것이며
그와 함께 그 조상으로부터의 계보 관계가 명확할 것.
(2) 여러 대에 걸쳐 동일한 집락에 집단적으로 거주하고 있을 것. 이런 대대의 거주지를 세거지(世居地)라고 하는
데, 세거지에서는 양반 가문이 동족 집락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 일반적이다.
(3) 양반의 생활 양식을 보존하고 있을 것. 양반의 생활 양식이란 조상 제사와 손님에 대한 접대를 정중히 행하는(奉
祭祀接賓客) 동시에 일상적으로는 학문에 힘쓰고 자기 수양을쌓는 것이다.
(4) 대대의 결혼 상대, 즉 혼족(婚族)도 (1)에서 (3)의 요건을 충족시키는 집단에서 고를 것.
-미야지마 히로시, <양반>, 강, 1996, 42 – 43쪽-
실력이 있어야 양반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
●과거
미야지마 히로시가 지적하고 있듯이 조선시대 양반으로 인정받기 위한 가장 확실한 길은 과거 합격이었다. 일반적으로 관리를 뽑는 기준은 크게 신분과 능력으로 나눌 수 있다. 신분이 기존지배층이 누리고 있는 특권을 보장해 주는 폐쇄적인 관리 선발 방법이라면, 능력은 실력이 있으면 누구나 관리가 될 수 있는 개방적인 관리 선발 방법이었다.
전통 사회에서 능력으로 관리를 뽑는 대표적인 예가 바로 과거이었다. 물론 과거는 실력만으로 관리를 뽑는 제도는 아니었다. 우리나라 과거제도는 단지 재주를 시험하는 것만이 아니고 족속을 분별하려는 것이다.
지금부터 생원시와 동당감시를 보려는 자는 각기 살고 있는 군현에서 신명색(품관으로 수령의 자문에 응하게 하 기 위하여 국가에서 임명함)에게 족속을 조사하게 합니다. 시험 보아도 될 만한 자는 이름을 적어 수령에게 올리고 수령은 감사에게 올립니다. 감사가 다시 조사하여 시험을 보도록 해야 합니다. <태종실록, 권 33, 태종 17년 2월 경진>
족속을 구분하기 위해 실시했다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과거 시험은 능력만 있다고 누구나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우선 양반이라도 범죄를 저질렀거나 윤리 도덕을 어긴 사람과 자손들은 과거를 볼 수 없었다. 서얼, 서리, 향리 등 중인들은 일정한 응시 제한을 받았다.
서얼 자손들은 아예 문과를 볼 수 없었고, 향리 아들이 생원·진사시에 합격하기 위해서는 양반 출신에 비해 추가 시험에 통과해야 했다. 반면, 평민은 별다른 과거 응시 자격 제한 규정이 없었다. 이는 평민이 중인보다 신분이 높다거나 우대를 받았다는 뜻이 아니다.
중인에 비해 평민은 양반들에게 도전할만한 지식과 경제력을 갖출 가능성이 낮았기 때문이었다. 과거 시험을 보려면 적어도 10여년 동안 준비를 해야했다. 이만한 경제력을 갖춘 평민은 드물었다. 노비를 비롯한 천인들은 아무리 실력이 뛰어나도 과거를 볼 수 없었다. 하지만, 이런 한계에도 불구하고 능력 본위 관리선발 방법으로서 과거가 갖고 있는 중요성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조선 시대에 관리가 되기 위해서는 문과나 무과 및 잡과-역과, 의과, 음양과, 율과- 에 합격해야 했다. 이 밖에 문음, 천거, 취재 등을 비롯하여 여러 방법이 있었다. 그 가운데 문과나 무과 합격자 못지 않게 많은 관리를 배출한 방법이 문음이었다.
문음은 시험이 아니라 집안 배경으로 관리가 될 수 있는 길이었다. 고려 시대에는 음서라 불린 이 방법은 고위 관리에 주는 특권이었다. 고려 시대에는 음서(문음) 출신자도 과거 출신자와 큰 차별을 받지 않고 고위 관직에 진출할 수 있었다.
그러나, 관료 체제가 정비된 조선 시대에 와서는 사정이 달라졌다. 먼저 문음 혜택을 받을 수 있는 범위가 5품 이상 관리에서 대략 2품 이상 관리로 줄었다. 더욱이 문음 출신자들은 고려 시대에 비해 고위 관리가 되기 훨씬 어려워졌다.
문과 급제자들은 50% 이상이 3품 이상 관직에 진출하였다. 게다가, 이들은 홍문관, 승문원, 예문관, 교서관, 춘추관, 의정부, 6조, 사헌부, 사간원 등 주요 중앙 관서에 배치되어 근무하였다.
반면, 문음 출신자들은 80.7%가 정3품 이하 관직에 머물렀다. 이 가운데 30% 가까이 참하관인 참봉이나 교관, 5위장이나 별자와 같은 힘없는 한직이나 현령, 현감, 도사 등 외관직을 받았다.
문과 급제자들은 70% 이상이 정품으로 관직을 물러났지만, 문음 출신자들은 94.5%가 종품으로 관직을 그만두었다. 조선시대 관직 제도에서 정품은 힘있고 좋은 관직에 주어졌고, 종품은 시원치 않은 관직이나 무관이 많았다. 기술직, 체아직 등 하급 관리 관직도 종품이 주어졌다.
따라서 조선 시대에 고위 관리로 출세하기 위한 가장 확실한 방법은 문과에 합격하는 것이었다. 문과에 합격하기 위해서는 4서 5경을 비롯한 유교 경전을 막힘없이 외우고 해석을 해야 되는 것은 물론 시와 문장을 짓고, 현실 문제에 대한 대책을 강구하는 논문 시험을 통과해야 했다.
우연히 자기가 알고 있는 부분이 나왔다거나 부정한 방법으로 합격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실력이 없으면 과거에 합격할 수 없었다. 집안이 좋으면 과거에 합격 순위에서 우대를 받거나 좋은 관직에 배정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런 특혜도 과거에 합격한 뒤에 얻을 수 있었다.
이는 집안이 아무리 좋아도 실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출세할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 문음으로 고위 관직에 진출했다고 해도 문과 출신자에게 냉대를 받고 있는 관료 사회 분위기가 이런 경향을 잘 보여준다.
글짓기와 술 마시는 모임[문주회(文酒會)]가 있으면 삼관(三館)의 관원들이 큰 술잔을 잡고 술을 가득히 따르며 '선생'이라 부른다. 고관에서 낮은 관직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렇게 했다. 이 모임에 참여한 자는 관직과 신분이 아무리 높다고 해도 홍지(과거합격증) 위에 이름을 올리지 못했으면 '선생'이라 부르지 않고 '대인'이라 불렀다.
이 풍습은 고려 때부터 시작되었다. 지금 홍지에 이름을 올리지 못한 사람들이 짐짓 문주회를 피하는 것은 대개 대인이란 소리를 듣기 싫어함이었다. <필원잡기 제2권>
좌의정 남지와 영의정 황수신은 수상이 되어 부귀와 공명이 당대에 비길 데가 없었다. 그러나 항상 말하였다. "남아로서 홍지에 이름을 올리지 못한다면 그 나머지는 볼 것이 없다."이것을 과거에 합격하지 못한 것을 한으로 여기는 말이다. <필원잡기 제2권>
이 때문에 조선 시대 양반들은 자식 공부에 온갖 정성을 다 쏟았다. 집안이 아무리 어려워도 재주 있는 자식이 있다면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공부를 시켰다. 때로는 문중이 나서서 과거를 볼 수 있게 도와주었다. 돈이 아무리 많다고 해도 과거 합격자가 없는 집안은 명문가문이 될 수 없었다.
양반은 일상생활에서 백성에게 모범을 보여야 한다. - 봉제사 접빈객
하지만, 단지 시험에 합격했다고 양반으로 인정을 받는 것은 아니었다. 양반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일상생활에서 도덕윤리를 지키고 백성들에게 모범을 보여야 했다. 만약 놀부처럼 집에 찾아오는 손님은 야박하게 대하거나 거지를 빈손으로 쫓는 양반은 손가락질을 받을 각오를 해야했다.
늘 닭이 울면 머리를 손질하고 의관을 바르게 한 뒤 안사람과 함께 손수 새벽 음식을 가지고 어버이가 주무시는 문밖으로 나아가 부드러운 소리로 춥지는 않았는지를 여주고 공격스럽게 바치고는 문밖에서 기다린다.
어버이가 반드시 맛을 본 뒤에야 물러나며, 물러나서는 또 아침진지를 올리는데 반드시 맛있는 것으로써 올리며, 한낮이 되면 또 그렇게 하고, 저녁이 되면 또 그렇게 하며, 날이 어두워지면 또 다시 그렇게 한다.
그 이부자리를 보아드리고 잠자리를 평안하게 한다. 여름이면 배개 벤 데를 부채질하여 시원하게 해드리고 겨울이면 이불에 미리 들어가서 따뜻하게 해드리며 마치 어린아이의 부드러운 낯빛을 저녁 따사롭게 하며 날마다 일상으로 여겨 조금도 게으르지 않았다.
-체몽현 찬, <정광천 행장>-
야비한 일을 딱 끊고 옛일을 본받고 뜻을 고상하게 할 것이며, 늘 오경만 되면 일어나 황에다 불을 당겨 등잔을 켜고서 눈은 가만히 코끝을 보고 발꿈치를 궁둥이에 모으고 앉아 동래박의를 얼음 위에서 박 밀듯 왼다.
주림을 참고 추위를 견뎌 입으로 제 스스로 가난한 처지를 말하지 아니하고 위아래 이빨을 딱딱 맞추고 가운데 손가락으로 뒤퉁 수를 가볍게 두드리며 입안에서 침을 가늘게 내뿜는다.
소맷자락으로 모자를 쓸어서 먼지를 털어 물결무늬가 생겨나게 하고, 세수할 때 주먹으로 비비지 말고, 양치질해서 입내를 내지 말고, 소리를 길게 뽑아서 여종을 부르며 걸음을 느릿느릿 옮겨 신발을 땅에 끈다.
그리고 고문진보를 깨알같이 베껴 쓰되 한 줄에 백자를 쓰며,
손에 돈을 만지지 말고,
쌀값을 묻지 말고,
더워도 버선을 벗지 말고,
밥을 먹을 때 맨상투로 밥상에 앉지 말고,
국을 먼저 훌쩍 떠먹지 말고,
무엇을 후루루 마시지 말고,
젓가락으로 방아를 찧지 말고,
생과를 먹지 말고,
막걸리를 들이 킨 다음 수염을 주 욱 빨지 말고,
담배를 피울 때 볼에 우물이 파이게 하지 말고,
화난다고 처를 두들기지 말고,
성내서 그릇을 내던지지 말고,
아이들에게 주먹질을 말고,
노복들을 야단쳐 죽이지 말고,
마소를 꾸짖되 그것들을 판 주인까지 욕하지 말고,
아파도 무당을 무르지 말고,
제사 지낼 때 중을 불러다 제를 드리지 말고,
추워도 화로에서 불을 쬐지 말고,
말할 때 이 사이로 침을 흘리지 말고,
소 잡는 일을 말고,
돈을 가지고 놀음을 말 것이다.
박지원, <양반전>
미야지마 히로시가 양반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3번째 기준으로 '봉제사 접빈객(奉祭祀 接賓客)' - 조상을 정성껏 받드는 일과 찾아오는 손님을 잘 대접하는 -을 든 것도 이 때문이다.
오희문(1539~1613)이 남긴 일기[쇄미록]을 보면, 임진왜란이라는 엄청난 전쟁 속에서도 1년에 28번이나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나온다. 먹고살기도 힘든 판에 허례의식으로 치부할 것이 아니다. 당시 양반들이 자신에 대해 얼마나 엄격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라 할 것이다.
양반들은 지방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약조를 만들어 하층민에 대한 무분별한 침학이나 공권력을 빙자한 침탈을 규제하였다. 또 앞장서서 유교적인 윤리 규범을 지키고 어려운 일이 생기면 서로 도왔다. 물론 이 약조는 하층민을 위해 만든 것은 아니었다.
양반계급이 결속하여 하층민과 차별성을 유지하여 촌락을 유효적절하게 통제하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일방적이고 강압적인 방법과 함께 철저한 자기 관리로 명분과 도덕에서 우위에 설 수 없었다면 존경받는 지배층으로 군림할 수 없었을 것이다.
아무리 집안이 좋아도 실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관리가 될 수 없고, 과거에 합격하지 못한 사람은 제대로 대우를 받지 못하는 사회 분위기. 누구보다도 자신을 갈고 닦으며 일상 생활에서 모법을 보인 생활 태도. 이것이야말로 조선 시대 양반들이 수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500년을 이끌어온 원동력이고, 지배층으로 대우를 받은 가장 큰 이유라 하겠다.
양반으로 품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경제적 기반이 있어야 한다.
과거에 합격하는 길은 험난하였다. 과거에 합격하기 위해서는 10여년을 공부에 매달려야 했다. 하루 하루 먹고살기도 힘든 사람들은 과거는 빛 좋은 개살구에 지나지 않았다. 과거 준비만 아니라 지배층으로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양반들은 적절한 경제적 기반을 갖추려고 노력하였다.
양반들이 경제적 기반을 갖추기 위해 흔히 사용한 방법은 개간이었다. 조선 정부도 세금 감면을 주면서 개간을 적극 장려하였다. 문제는 토지를 개간하기 위해서는 적지 않은 돈과 노동력이 필요한 것이었다.
돈과 노동력을 동원할 수 있는 사람은 양반층이었다. 특히, 집권 양반들은 조수간만 차이가 심한 서해안 일대에 입안 절수- 일정 지역 내 토지를 개간하는 조건으로 그 토지의 소유권을 관에 신청해 관에서 허가를 받는 방식-를 받아 농지를 만들었다.
이를 언전(堰田)이라 하였다. 집권 양반에 비해 상대적으로 경제력이 떨어지는 재지 양반층은 산간 평지를 개간하여 농지를 확대하였다. 16,7 세기 재지양반층은 약간 높은 산록으로 앞에는 평지가 트여 있는 곳에 거처를 정하고, 산에서 흘러나온 작은 하천에 보를 만들어 평지에 논을 개발하였다.
안동 부근에는 해발 500m 전후 산이 많다. 안동 지방 재지 양반층은 이런 산간 평지 지역에 진출하여 세거지를 정하고, 농지 개발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여 100여년 동안 경지 면적을 무려 1.5배나 늘렸다.
이계양(이황 5대조 할아버지)은 처음 현 동쪽 마을 부라촌에 살았다. 공은 봉화현에서 훈도를 지내고 있었기 때문에 날마다 온계를 지나 다녔다. 공은 온계 계곡이 아름다워 이 곳을 사랑하였다.......
마침내 공은 온계로 옮기기로 결정하였다. 이 때 온계에는 상류에 딱 한 집이 있을 뿐인 황무지였다. 계곡을 따라 농사를 지을만한 땅은 있었지만 나무가 빽빽이 들어차고 골짜기는 아주 깊었다. 계곡물은 맑고 달았으며 피라미가 많았다. 이 물을 끌어들여 논밭에 물을 댈 만 하였다. <퇴계 선생 문집 속집> 8
요즘 선비들의 풍습에 대해 사대부들 사이에 '부자가 된 뒤에야 착하게 된다'라는 논의가 있었다. 비록 이름난 선비일지라도 다 산업 경영을 계책으로 여기고 갈대밭, 간석지를 가리지 않음이 없고, 심지어 묵을 땅마저도 물길을 막고 둑을 쌓는 일에 사람을 동원하여 이를 하고 있다. <선조실록 선조 13년 5월 갑오>
양반들은 농지 개간만이 아니라 몸소 농사 계획도 세우고, 노비를 지휘하고 감독하였다. 물론 대토지를 소유한 양반이라면 직접 지휘 감독하지 않고 노비가 대신하였을 것이다. 이런 관심과 경험은 황무지 개간법에서 농기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내용을 담고 있는 농서에 그대로 반영이 되어 있다.
황무지는 칠팔월 사이에 흙을 갈아 덮어 풀을 없애고, 이듬해 얼음이 풀린 뒤 다시 갈아 파종한다. 황무지 개간은 대개 애벌갈이는 깊게, 두벌갈이는 얕게 해야 한다.(이렇게 하면 하층토가 일어날 우려가 없고, 흙을 부드러운 숙토로 만들 수 있다)
황무지가 좋은지 나쁜지를 가려내는 방법은 다음과 같다. 흙은 한 자 깊이로 파고 혀로 흙맛을 본다. 단맛이 나는 곳은 매우 좋은 땅이고, 달지도 짜지도 않는 것이 그 다음이고, 짠 맛이 나는 곳은 가장 나쁜 땅이다. <농사직설, 경지편>
양반들은 앞장서서 토지를 개간하고 농법 개량에 힘쓰는 등 지역 경제 발전을 위해 힘을 쏟지 않았다. 물론 이런 노력은 농민들을 자기들과 똑같은 신분으로 끌어올린다거나 자신과 같은 경제력을 갖출 수 있게 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최소한 경제 생활을 유지할 수 있게 하여 봉건 질서를 유지하고 지배층으로 군림하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들이 지배층으로 최소한 의무를 다했기 때문에 조선시대 양반들이 지주로서 양반으로서 사회적 지위와 권위를 인정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아무나 양반이 될 수 없다. 향안에 이름이 올라야 양반이다.
실력과 덕망, 돈이 있어도 지방에서 양반으로 행세하기 위해서는 향안에 이름을 올려야 했다. 지방마다 행세께나 한다는 양반들이 자신들의 지위를 확립하고 유지하기 위해 모임을 만들었다. 이 모임에는 좌수 1명과 별감 서너 명 등 임원을 두었다.
향안은 바로 이 모임 구성원의 명단을 적은 장부이다. 향안에 이름을 올리는 것을 입록(入錄)이라 한다. 향안 입록은 대단히 까다로워 중앙 고관이라고 해서 무조건 들어올 수 없었다. 물론 윤리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이나 다른 지방 사람들은 엄격한 심사를 거쳐야 했다. 특히, 서얼과 향리 출신은 그 지방 유력 양반 집안과 수 대에 걸쳐 혼인을 해야만 입록이 허락되었다.
지방 양반들은 향안 조직을 통해 지방 행정에 관여하였다. 조선시대 지방 통치 책임자는 중앙에서 파견된 수령이었다. 하지만, 수령은 친가나 외가 등 연고지에는 부임을 할 수 없었 고, 아무리 오래 있어도 한 곳에서 5년을 넘길 수 없었다.
이 조치는 중앙 집권 체제를 강화하고 부정을 막는 긍정적인 면과 함께 수령이 지방 행정 실무를 담당하고 있던 토착 향리층에 휘둘릴 가능성도 있었다. 이런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지방마다 지방 양반들로 조직된 향소(향청)를 설치하였다.
따라서 향안 구성원이 곧 향소 구성원이었고, 향소 임원은 바로 향안 임원이었다. 이 임원들이 일상적인 향소 운영을 맡았다. 결국 향안 조직이라는 것은 구체적으로 이 향소를 가리키는 것이다.
향소가 하는 일상 업무 가운데 제일 중요했던 것은 향리층을 감독하는 일이었다. 향리층은 지방 통치 실무 담당자로서 작청이라 불린 건물에서 근무하였다. 향리층에 대한 지휘권은 수령에게 있었지만, 향소가 수령을 보좌하여 향리를 감독하거나 때로는 향리를 직접 지휘하기도 했다.
앞서 밝혔듯이 수령이 지방 사정에 정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재지양반층은 단순한 지방 유지가 아니라 향소를 통해 지방통치 체제의 일익을 담당하였고 관리에 준하는 지위를 인정받고 있었다.
출처 : http://blog.daum.net/theka89
'■ 역사 > 한국의전통문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외줄타기-세계무형유산 (0) | 2016.05.02 |
---|---|
상복(喪服) (0) | 2015.10.29 |
종묘제기(宗廟祭器)의 종류 (0) | 2014.05.19 |
우리나라 최초의 태극기 (0) | 2014.02.07 |
성덕대왕신종(聖德大王神鍾) (0) | 2014.01.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