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보재이상설선생.

수학자 이상설은 어디에 - 박성래

야촌(1) 2004. 8. 3. 19:40

[과학에세이] 수학자 이상설은 어디에 - 박성래

 

지난주에 중국 동북지역의 우리 역사 관련 유적답사를 다녀왔다. 내가 근무하는 사학과의 20주년을 기념하는 이 답사 행사는 자연히 고구려 유적에서 시작하여 백두산 그리고 독립운동 유적으로 이어졌다.

 

심양~집안~환인~통화로 이어지는 고구려 유적들은 이미 대규모로 정비되어 관광객을 맞고 있었다. 지난 7월초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는 자랑스런 현수막이 곳곳에 전시되어 있었다. 그리고 집안박물관 같은 곳에는 입구 설명에 아예 고구려 문화가 중국 지방민족의 문화라면서 고구려를 중국 변방 역사의 일부로 밝히고 있었다.

 

광개토대왕비와 장군총을 비롯한 수많은 고구려 무덤들, 그리고 여러 고구려 때의 산성을 돌아보면서 이들 모두를 묶어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받은 중국의 짓이 못마땅했다. 여행 자체는 잘 조직되고 집행되어서 대단히 만족스러웠지만, 우리 역사를 중국인들이 빼앗아 가려는 듯한 기분이 들어 씁쓸했던 것이다.

 

특히 과학사를 공부하는 나에게 더욱 유감스러운 일은 독립운동 유적 답사에서 눈에 띄었다. 동료 교수의 설명을 들으며 우리 일행을 태운 버스는 청산리 싸움터를 지나 우리 가곡으로 유명한 일송정에 올라 그 주위를 맴도는 해란강도 보고, 용정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우선 내 눈을 사로잡은 것은 이상설(李相卨·1870~1917)을 기념하는 몇 가지 유적이었다.

1907년 7월 을사보호조약의 무효임을 주장하러 네덜란드의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갔던 세 사람(이준, 이위종, 이상설) 중 정사인 그는 헤이그에 가기 직전인 1906년 봄 용정으로 망명하여 8월에 여기에 서전서숙(瑞甸書塾)을 세웠다. 1905년 보호조약으로 나라를 거의 잃고 만주로 망명하기 시작한 동포들의 교육을 위한 것이었다.

 

당연히 기념할 만한 일이고, 그래서 이 장소에는 이상설의 기념 정자까지 세워 '이상설 정자(李相卨亭)'란 현판을 붙여 놓기도 했다. 또 근처의 대성중학에도 그의 학교 설립을 기념하는 전시물 몇 가지가 2층에 있었다. 대성중학 2층은 역사전람관으로 사용되고 있는데, 여기 들어가면 한편에 이상설의 서전서숙 설립을 소개하는 전시물이 조금 있다.

 

그러나 어느 경우에도 이상설이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수학자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지는 않아 유감스러웠다.

 

그는 1900년 이미 '산술신서(算術新書)'라는 책을 지었다. 사실은 일본인이 지은 수학책을 번역한 것이었지만, 이 책을 통해 처음으로 근대 서양식 수학체계가 전해지기 시작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가 만주로 망명하여 서전서숙을 세웠을 때, 그 학교에서도 바로 이 책으로 수학을 교육했다.

 

역사학자 윤병석이 1984년에 내놓은 '이상설전'을 보면 그는 당시 조선에서는 수학의 제1인자로 꼽힐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던 이상설은 독립운동에 가담하면서 수학을 버리고 망명정부의 정치에 매달리게 되었다. 

 

결국 수학자 이상설의 모습은 오늘날 거의 완전히 잊히고 말았다. 그의 학교 설립을 기념하는 이 곳 기념 정자에도 학교 설립만 기록되어 있을 뿐이고, 대성중학의 역사전람관에도 수학자 이상설의 모습은 소개되어 있지 않다.

 

그 대신 여기서 크게 눈에 띄는 것은 시인 윤동주(1917~1945)의 기념비와 여러 가지 전시물이다.

요컨대 우리는 지나치게 독립운동이나 민족교육에는 후한 점수를 주면서도, 과학기술에는 거의 무관심하다는 사실을 다시 확인하게 된다. 물론 독립이나 민족이 중요하다.

 

하지만 현대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과학기술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하다지 않는가. 이상설의 경우도 그가 독립과 교육운동을 했다는 것만 기념할 것이 아니라 수학자였다는 사실을 더 강조해 보면 어떨까. 한국 과학기술의 발달에 도움되는 전통이 될 것이란 생각이 든다.

 

[2004/07/26 20:20]

한국외국어대 교수 사학과 parkstar@unite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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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성래 한국외국어대 명예교수는…

 

우리나라 전통의 과학사상을 탐구하고 그 가치를 대중에게 널리 알린 과학사학자로 손꼽힌다.

1939년 충남 공주에서 태어났다. 공주고 2학년 때 검정고시로 서울대 물리학과에 들어갔지만 과학을 배우지 못하고 신문기자가 되었다. 6년간의 과학부 기자생활 끝에 미국에 유학, 캔사스대에서 서양과학사로 석사를, 하와이대학에서 한국과학사상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77년부터 올 봄까지 외대 교수로 재직했다.

 

한국과학사학자 1세대인 전상운씨가 전통 과학 유물과 유적에 대해 소개하는 일에 앞장섰다면 박성래 교수는 전통의 과학적인 사고틀을 소개하고 그것이 오늘날에 갖는 의미를 풀어내는 작업에 열중했으며 널리 알려지지 않은 과학현상에 대한 옛기록이나 숨겨진 과학인물들을 발굴하는데도 힘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