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보재이상설선생.

이상설의 봉밀산(蜂蜜山) 독립기지 개척

야촌(1) 2006. 5. 23. 01:49

이상설의 봉밀산(蜂蜜山, 펑미산) 기지 개척

독립운동기지의 이전 거주 전에 우수리강 및 흑룡강 양안 남북 일대로 옮길 것을 결정하고 중아(中俄)한 양국 정부에 양해와 지원을 얻어 교포들의 이주를 장려하여 일대 독립기지를 형성하여 놓았다. ....(중략)....

이리하여 항카호 연안의 이류가(伊柳街)와 그 대안 쾌상별백포자(快常別 白泡子)의 일대에 각각 수 백호를 이주시켰으며, 다시 흑룡강과 송화강이 합류되는 양강구(兩江口) 서북쪽 조운현(鳥雲縣) 전역에 亘(뻗칠 긍)하여 鳥拉까河를 중심으로 수백호를 정착시켜 개간케 하였으니....지리적 조건이 독립운동 기지로 적(適)한 곳이다.

(姜相遠 「李溥齋先生略史草案」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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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설이 1909년 4월 22일 미국 샌프란시스코를 떠나 블라디보스톡에 도착한 때는 그 해 7월 14일이었다.

중도 여정은 구체적으로 밝혀져 있지 않으나 거의 3개월이나 걸려 연해주에 도착한 것이다.

 

이상설은 망명 당시부터 독립운동기지 건설을 목표로 했다. 따라서 연해주에 도착한 이상설이 가장 먼저 착수한 독립운동 사업이 봉밀산(蜂蜜山) 독립운동기지 개척이었다. 북만주의 밀산부(蜜山府) 관내에 있는 봉밀산(蜂蜜山)은 러시아와 중국의 접경지대인 흥개호(興凱湖, 싱카이호) 부근에 위치해 있으며, 광활한 황무지가 펼쳐져 있던 곳이다.

 

당시 이주 한인은 그 일대에 흩어져 거류해 있었지만, 근거지가 없고 생활기반이 부족한 관계로 정착생활을 할 수 없는 상태였다. 이상설은 밀산(蜜山, 미산)의 토지를 사들이고 개척하는 사업을 이승희(儒林 寒洲學派 李震相의 외아들)와 함께 추진했다.

 

이상설은 1908년 5월에 블라디보스톡에 망명해 있던 이승희를 찾아가 자신의 포부를 토로하고 봉밀산 기지 개척 사업을 협의했다. 그러자 1909년 가을 이승희는 봉밀산 아래 백포자(白泡子) 지역 45方의 토지를 사들여 집단이민 100호를 정착시켰다. 마을 이름은 대한제국을 부흥한다는 뜻으로 ‘한흥동(韓興洞)이라 불렀다.


한흥동은 백포자(白泡子) 일대에 처음 세워진 조선인 동네로 ‘고려영’이라고도 불렀으며, 동시에 학교도 세웠는데 ‘한민학교’라 이름 지었다. 이승희는 약 4년 동안 한흥동에 거류하면서 <동국사략>을 저술하여 학생들에게 조선역사를 가르치고, <민약>을 제정해 한국인들의 단결을 도모하는 등 한흥동을 한국독립운동기지로 건설하기 위하여 심혈을 기울였다.  <끝>

 

글>이재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