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학성이씨(鶴城李氏)
[시조(始祖)]
이예(李藝)
[본관연혁]
학성(鶴城)은 경상남도 동해안에 위치한 울산(蔚山)의 옛 이름으로 본래는 진한(辰韓)의 땅이었으며, 삼국시대에는 신라의 굴아화촌(屈阿火村)으로 파사왕(婆娑王) 때에 지변현(知邊縣: 戒邊城‧神鶴城‧火城郡)을 설치하였다.
757년(신라 경덕왕 16)에 하곡현(河曲縣)으로 고쳐 임관군(臨關郡)의 영현을 삼았다. 고려 태조 때 이 고장 사람인 박윤웅이 태조를 도운 공으로 우풍현(虞風縣)과 동진현(東津縣)을 병합해 흥려부(興麗府)로 승격되었다가, 991년(성종 10)에 공화현(恭化縣)으로 강등되었다.
1018년(현종 9)에 울주군(蔚州郡)이 되어 속현으로 동래현(東萊縣)과 헌양현(陽縣)을 관할하였다가 방어사로 고쳤다. 1397년(태조 6)에 진(鎭)을 두었으며 1413년(태종 13)에 진을 혁파하고 울산군으로 고쳤다.
1418년에는 염포(鹽浦)를 개항해 일본에 대한 문호를 열었으나, 1510년(중종 5) 삼포왜란으로 왜관이 폐지되었다. 임진왜란중인 1598년(선조 31)에 울산도호부(蔚山都護府)로 승격되어 병마절도사가 부사를 겸하게 되었다가 1616년(광해군 8)에 다시 별도로 부사를 파견하였다.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동래부 울산군이 되었고, 1896년에 경상남도 울산군이 되었다. 고려 성종 때, 울산의 별칭을 학성(鶴城)이라고 하였다. 1906년에는 월경지 정리에 의해 두입지(斗入地)인 외남면‧웅상면이 양산군으로 이관된 대신 경주의 두입지인 외남면이 편입되었다.
1914년 군면 폐합으로 울산군의 21개 면이 14개 면으로 통합되었고, 언양군은 폐지되어 언양군의 6개 면이 5개 면으로 폐합, 울산군에 편입되었다. 1962년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의해 울산읍을 시로 승격하였다. 1995년에 울산시와 울산군을 통합하고, 1997년 울산광역시로 출범하였다.
[시조 및 성씨의 역사]
학성이씨(鶴城李氏)는 조선 세종 때 대마도(對馬島) 정벌에 공을 세워 절충장군용양위사 상호군(折衝將軍龍驤衛司上護軍)에 올라 자헌대부(資憲大夫)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와 세자좌빈객(世子左賓客)을 역임한 이예(李藝)를 시조로 한다.
이예의 자는 중유(仲游), 호는 학파(鶴坡), 시호는 충숙(忠肅)으로 일본과의 외교관계에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여 세종의 신임을 받았다. 또한 이예는 화통완구(火㷁碗口) 등 병기 제작에도 공적이 컸는데 1443년(세종 25) 대마도주와 삼포조약(三浦條約: 癸亥條約)을 체결한 공으로 공패(功牌)을 받았다.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피로인(被虜人)은 물론 명나라의 피로인의 쇄환(刷還)에 힘써 명에서도 공패를 받았다. 저서로『학파실기(鶴坡實紀)』가 있다.
이예(李藝)의 선대는 고려조의 명문으로 조선이 건국되자 충절을 지켜 울산(蔚山)으로 낙향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문헌이 실전되어 자세한 세계를 알 수 없으므로 이예(李藝)를 시조(始祖)로 받들고 있다. 학성(鶴城)은 울산의 별칭이므로 학성이씨라 칭하였다.
[분적종 및 분파]
◇곡강파(曲江派)
◇농소파(農所派)
◇봉사공파(奉事公派)
◇월진파(越津派)
◇현령공파(縣令公派)
[주요 세거지]
◇경상북도 영일군 청하면 덕성리
◇경상남도 울주군 농소면 신천리
◇경상남도 울산시 울산군 일원
[인구분포]
2000년 통계청이 발표한 결과에 의하면 학성이씨는 6,615가구 총 20,964명이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참고문헌]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帝系考〉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尹昌鉉, 보명사, 1929)
◇韓國人의 姓譜》(삼안문화사, 1986)
◇姓氏의 고향》(중앙일보사, 2002)
◇한국지명연혁고(韓國地名沿革考)》(權相老, 동국문화사, 19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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