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열사 사인(李儁烈士死因)에 또 파문(波紋)
동아일보 1956. 07. 09 기사(뉴스)
이준열사 사인(李儁烈士死因)에 또 파문(波紋)
교과서(敎科書)엔 “자연사(自然死)로 명기(明記)
반세기(半世期) 동안의 열사(烈士)는 어디로
민족의 열사로서 근 반세기 동안을 온 겨레의 “존경의적”이 되고 있던 이준(李儁) 열사!
지금으로부터 사십팔년(四十八年) 전인 1907년 7월 14일 “홀렌드”의 수도 “헤이그”에서 “민족혼의 이슬”로 진 이(李)열사의 사인(死因)에 대하여 한동안 학자들에 의하여 구구한 설이 떠돌던차 최근에 이르러서는 일부 역사서적과 학교 교과서에 까지 이(李)열사는 병사하였다는 것을 밝히게 됨으로서 근 오십년(五十年) 동안 전 민족에게 전해지던 사실(史實)이 뒤집어 질듯이 보여지고 있다.
문제의 초점은 종래 우리나라의 역사 서적에는 당시의 기록을 “사십칠개국대표(四十七個國代表) 앞에서 할복(割腹)하여 천혈(氵+賤血)로서 회장(會場)을 물들이고, 대한독립만세(大韓獨立萬世)를 우렁차게 불러 만방(萬邦)을 경동(驚動-뜻밖의 일에 놀라서 들썩거림)케 하였다고 「동국혈사(東國血史)」에 기록하고 있음에 반하여 최근 발간된 이병도(李丙燾,1896∼1989) 서울대학원장(大學院長)씨 저서(著書) 《국사대관(國史大觀)》의 당시 기록에는 “일이 모두 도로(徒勞)에 돌아가매 밀사(密使)의 일인(一人)인 이준(李儁)은 울분(鬱憤)란 나머지 그곳에서 죽고 말았다.”고 기술되어 그가 병사하였음을 은연중에 밝히었으며. 또한 금년도에 중등학교 교과서로 채택된 김상기(金庠基) 서울대문리대학장(文理大學長)씨 저서 “우리나라역사”에도 당시의 기록을 “~~~이준은 울분한 끝에 마침내 그곳에서 죽고 말았다.”고 기술됨으로서 권위 있는 사가인 그들이 병사임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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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계(史界)에 일대충격(一大衝擊)
1956.07.10 경향신문 3면 사회기사(뉴스)
이준열사사인(李儁烈士死因)에 이설(異說)
문교부(文敎部)와 사가(史家)는 병사(病死)로 인정(認定)?
지금으로부터 사십팔(四十八)년 전인 사이사공년(四二四0年/一九0七) 7월 14일 민족의 울분을 세계만방에 호소하고자 화란(和蘭)의 수도 「헤이그(海牙)」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하여, 할복(割腹) 자살 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던, 이준열사는 그의 사인(死因)이 자살이 아니고, 병사(病死)라는 것이 최근 사가(史家) 들에 의해서 확인되고 있어, 학계(學界)와 교육계(敎育界)에 커다란 “센세이션(sensation)”을 일어 키고 있다.
이와 같은 사실은 최근 일부 역사 서적과 심지어는 교과서에 까지 그가 병사한 것임을 밝히게 되어, 근 50년 동안에 걸쳐, 민족에게 전해지던 사실(史實)이 뒤집어지고 있음에 비추어, 이 사실을 발견한 내무부 당국에서는 최근 이의 사실 여부를 문교부와 학계에 조회함으로서, 이에 대한 학계의 지대한 관심을 끌게 된 것이다.
이 문제의 초점은 종래 우리나라 역사서적에는 당시의 기록을 “사십칠개국대표(四十七個國代表) 앞에서 할복(割腹)하여 천혈(氵+賤血)로서 회장(會場)을 물들이고, 대한독립만세(大韓獨立萬世)를 우렁차게 불러 만방(萬邦)을 경동(驚動)케 하였다.
동국혈사(東國血史)에 기록하고 있음에 반하여, 최근 발간된 이병도(李丙燾, 1896∼1989) 서울대학원장(大學院長)씨 저서(著書) 《국사대관(國史大觀)》의 당시 기록에는 “일이 모두 도로(徒勞)에 돌아가매 밀사(密使)의 일인(一人)인 이준(李儁)은 울분(鬱憤)란 나머지 그곳에서 죽고 말았다.”고 기술되어 그가 병사하였음을 은연중에 밝히었다.
이에 대한 사실을 밝힘에 있어서 우리나라 역사연구의 유일한 기관인 “국사편찬위원회” 전문가들은 이준열사가 병사하였다는 사적(史的) 증거로
(一). 당시 한국통감부(統監府)의 일본 공사가 동 사실을 본국정부에 극비리에 보고한 전문(電文) 가운데서, “이
준”은헤이그의 모 여관(旅館)에서 단독(丹毒)에 걸려 사망하였다.”고 한 사실.
(二.) 동 사건이 발생된 직후 중국 상해에서 풍성(豊城) 조완구(趙琬九, 1981-1954)씨가 밀사중의 일이(一人)인
이상설(李相卨)의 전기(傳記)를 기술한 가운데서, 「이준인분성병이사(李儁因憤成病而死)」.「한국사
료총서(韓國史料叢書)」. 「기려수필(騎驢隨筆)」라고 한 사실.
(三).지난 팔삼(八三)년 화란(和蘭) 정부로부터, 당시 이준열사가 병사한 자세한 내용의 공한(公翰)이 우리 정부에
보내왔다는 사실(當時一部新聞)에 게재(揭載) 등을 들고 있다.
이와 같이 사실(史實)이 할복(割腹) 자살로 오전된 이유를 전문가들은 “당시 우리민족의 일본 침략에 대한 증오심과 애국심을 고무하는 마음에서 일부 사가(史家)가 일부러 이를 국내에 오전하게 되어, 국내 후진사가들이 사실을 알면서도 일본의 침략하에 있었으므로 민족의식에서 계속 사실을 묵살해 왔던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으며, “주권이 확립된 현재 우리나라 입장으로서는 이를 사실대로 밝혀 왜곡된 역사를 바로 잡을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어 앞으로는 동 사실이 국사(國史)에 정확히 기재되는 한편 우리나라 역사교육도 전면적으로 사실에 입각하여 개편될 것이 확실시되고 있다.
한편 행정관으로서의 고광만(高光萬) 문교부차관은 이 문제에 대하여 “학자의 양심에 비추어 사실은 사실대로 밝혀야한다. 그러나 이 사실이 하루 아침사이에 바뀌어질 경우 국민교육에 미칠 영향을 고려해서 앞으로 학계의 여론에 따라 교육내용을 일제히 개편하도록 하겠다.”고 말하였다.
◇도로(徒勞) : 아무 보람이 없는 수고로움.
◇경동(驚動) : 뜻밖의 일에 놀라서 들썩거림.
◇통감부(統監府)
1905년부터 1910년까지 일제가 식민 지배를 준비하기 위한 목적으로 서울에 두었던 기관)
◇단독(丹毒) : 피부나 점막 따위의 헌데나 다친 곳으로 연쇄상 구균과 같은 세균이 들어가서 생기는 급성 전염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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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사(自然死)? 자결(自決)?
동아일보 1956. 07. 13(텍스트)
자연사(自然死)? 자결(自決)?
이준열사사인(李儁烈士死因)을 이렇게 본다.
사가(史家) 들의 관측(觀測)
특집(特輯)
만국평화회의(萬國平和會議)에서 할복자결(할복(割腹自決)하여 회장(會場)을 선혈(鮮血)로 물들임으로서 민족혼(民族魂)을 만방(萬邦)에 선양(宣揚) 하였다는 것으로 알리어져온 이준열사(李儁烈士)의 사인(死因)이 사실(事實) 인적 병(病)으로 인(因)한 자연사(自然死)였다는 설(設)이 유력(有力)하여져서 근간(近間) 학술원(學術院)의 이름으로 확인(確認)을 얻기로 되어있다.
자연사(自然死)였다고 해서 열사(烈士) 일수 없는 것이 아닐진대, 문제(問題)는 사가(史家)의 손에 의(依)하여 정확(正確)하게 밝혀져야 할 것으로 생각되는 바에 대하여 이병도(李丙燾). 최남선(崔南善). 김상기(金庠基) 등 제씨(諸氏)의 의견(意見)을 들으면 다음과 같다.
자연사(自然死)임은 이미 확정시(確定視) 이병도담(이병도(李丙燾談)
이준열사(李儁烈士) 사인(死因)에 대한 가장 정확(正確)한 보도(報道)는 당시(當時) 화란(和蘭). 불(佛). 영(英)의 신문(新聞)에 발표(發表)된 것이라 믿고 싶은데 그곳에 병사(病死)라고 보도9報道)되어 잇다.
그 기사(記事)가 게재(揭載) 되어있는 불란서신문(佛蘭西新聞)이 현재(現在) 문교부내(文敎部內) 국사편찬위원회(國史編纂委員會) 에 보관(保管) 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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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열사(李儁烈士) 사인死因) 분사(憤死)로 결정
경향신문 1956. 08. 03 기사(뉴스)
이준열사(李儁烈士) 사인(死因) 분사(憤死)로 결정
이준(李儁) 열사 사인에 대한 조사위원회에서는 삼십일(三十日) 문교부 당국에 대하여 자살이 아니고 분사(憤死)라는 종합된 의견을 통고 하였다. 동 조사위원회 보고에 의하면 앞으로 명년도 신학기를 기해 각종 교과서에 이준열사의 기록을 분사로 밝힐 것을 건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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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사편찬위(國史編纂委)서 심의(審議) 이준열사 사인(李儁烈士死因)
동아일보 l 1962. 10. 27기사(뉴스)
국사편찬위(國史編纂委)서 심의(審議)
이준열사사인(李儁烈士死因)
27일 하오 2시 문교부 회의실에서는 국사편찬위원회 주최로 고 이준(李儁)선생 사인 심의 회의가 열려, 활복 자살이냐? 병사이냐?에 대하여 사학자를 비롯한 관계자들 二(이)십 여명으로부터, 의견을 들었다.
이 회의는 李열사기념사업회인 일성회(一醒會)에서 열사의 사인을 규명해 달라는 진정을 접수하였기 때문에, 관계 권위자들을 소집, 의견을 듣게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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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열사(李儁烈士)의 순국(殉國) 결정이 내려지기 까지
경향신문 l 1962년 11. 05 기사(뉴스)
이준열사(李儁烈士)의 「순국(殉國)」결정이 내려지기 까지
「헤이그」의 기록들이 뒷받침.
전문(傳聞)으로 할복인정(割腹認定) 못한다고
지난 276일 국사편찬위원회(國史編纂委員會) 에서는 이준열사(李儁烈士)에 대한 사인심의회(死因審議會)를 열고, 지금 까지의 분사(憤死)를 순국(殉國)이란 말로 쓰도록 결의했다.
따라서 앞으로의 모든 국정(國定) 교과서에서는 이준(李儁)열사의 죽음이 순국(殉國)으로 통일될 것인데, 이같은 결정은 특히 이(李)열사를 떠받드는 「일성회(一醒會)」의 공박을 받으면서 적지 않게 물의를 일으키고 있다.
이열사(李烈士)는 1907年 당시 일제(日帝)의 침략상을 만국에 폭로하기위하여 고종(高宗)의 밀서(密書)를 품고 「헤이그」의 만국평화회의(萬國平和會議)에 참가. 뜻이 관철되지 못함을 분히 여겨 여러 나라의 대표들 앞에서 분연히 할복(割腹) 자살한 위대한 애국(愛國) 열사로 믿어져 왔었다.
그러나 이(李)열사의 사인(死因)이 할복(割腹)이 아니라는 결론이 내려진 것은 벌써 5~6년 전부터다.
많은 사학자(史學者)들의 건의로 1957년부터의 모든 국정교과서(國定敎科書)에는 분사(憤死)란 말로 되어 있는 것이다.
그전까지는 물론 할복(割腹)으로 되어있었다. 그러던 것이 「일성회(一醒會)」의 강경한 항의에 부딪혀 다시 심의회(審議會)를 갖고, 되고친 것이 이번 재결정의 「순국(殉國)」이란 용어다.
그럼 이(李)열사는 과연 어떻게 최후를 마쳤는가?
국사편찬위원회(國史編纂委員會)가 마련하고 있는 이준열사 사인 조사자료(李儁烈士死因調査資料)를 중심으로 「순국(殉國)」이란 말로 고쳐진 경위를 풀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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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어풀이]
◇도로(徒勞) : 아무 보람이 없는 수고로움.
◇경동(驚動) : 뜻밖의 일에 놀라서 들썩거림.
◇통감부(統監府)
1905년부터 1910년까지 일제가 식민 지배를 준비하기 위한 목적으로 서울에 두었던 기관)
◇단독(丹毒) : 피부나 점막 따위의 헌데나 다친 곳으로 연쇄상 구균과 같은 세균이 들어가서 생기는 급성 전염병.
◇선혈(鮮血) : 갓 흘러나온 붉고 신선한 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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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참고 문헌]
1956년 국사편찬위원회의 이준열사 사인 조사 자료 중에 분사설(憤死說)에 관한 기록 7 가지의 일부분이 실려 있다.
전체 사인에 대한 분석은 「할복자살설」과 「분사설」로 나뉘고, 그것을 뒷받침하는 문헌기록과 증언을 나열하였다. 여기에 수록되어 있는 분사설에 대한 기록은 『평화회의시보』, 『일본공사관기록』,『인데펜텐트』,『위암문고』,『기려수필(騎驢隨筆)』,『한국통사』,『이조오백년사(청류남저)』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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