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길>>
마석으로 가는 길
13년 전 네팔에서 돈을 벌기 위하여 마석이라는 낯선 땅에 왔던 한 청년이 며칠 전 한국생활을 청산하고 자기나라로 돌아갔다. 당초 15일간만 있겠다고 받았던 비자 기한을 훌쩍 넘겨 지금까지 불법체류를 하는 동안 혹독한 고생을 했던 이 청년은 마침내 수술도 받을 수 없을 만큼 온 몸에 퍼진 담낭암이라는 선고를 받고 한국의 꿈을 접은 것이다.
그가 견딜 수 없이 아팠던 것은 온몸의 고통보다는 아마도 이 땅에서 받은 온갖 수모의 추억이었을는지도 모른다. 그는 떠나기 전날 마석의 성생교회에서 모세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으며 참석자 모두는 환송을 하면서 하염없는 눈물을 흘렸다. 이렇게 인생을 마감 할지도 모른다는 것이 너무나 억울하고 안타까웠기 때문이다.
우리 집에서 마석을 가려면 잠실대교를 건너 강변북로를 따라 구리 쪽으로 가야한다. 아름다운 한강을 오른편으로 끼고 달려가면 이내 구리와 맞닿는 삼거리에 이른다. 이제는 한강을 끼고 돌아가는 강변북로와 올림픽대로변의 스카이라인이 강변의 다양한 고수부지의 변화와 함께 강물과 잘 어울리며 서울의 또 다른 멋을 만들어 낸다.
구리 삼거리에서 우회전을 하면 바로 춘천으로 잇닿는 삼거리에 다다르고 여기서 달리다 보면 어릴 적 소풍으로 정들었던 금곡이 나오고, 신도시로 장엄한 아파트 군을 이루고 있는 평내와 호평을 지나 마치터널을 지나면 필자가 가려는 녹촌리 마석이 오른쪽으로 열린다.
돌이켜 보니 내가 이곳을 본격적으로 다니기 시작한지도 벌써 10년이 훌쩍 지나 버린 것 같다.
1990년 초, 이곳에 듬성듬성 가구공장이 들어서기 시작하면서 낯선 외국인 근로자들이 일자리를 찾아 하나 둘씩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이곳은 음성 한센병 환우들의 가난하지만 평화로웠던 “성생원”이란 마을이었지만 그 이후로 차츰 새로운 모습으로 변하게 되었다.
가구공장은 날로 번성하였고 그만큼 외국인 근로자들도 대책 없이 늘어나게 되었다. 그 가운데서도 필리핀에서 온 외국인들이 단연 우세하였고 아프리카의 나이지리아나 아시아의 방글라데시 등에서 온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나를 비롯하여 몇몇 사람들이 이들을 위하여 무엇을 할 수 있는 가를 고민하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무엇보다 이들이 겪고 있던 어려움은 언어문제와 문화갈등이었다. 필리핀에서 건너 온 사람들은 대체로 학력이 높고 경력도 상당하였는데 일자리를 찾아 그야 말로 ‘코리안 드림’을 안고 무슨 일이라도 해서 돈을 벌겠다는 각오가 대단하였다.
그러나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어린 한국인 근로자들로부터 말로는 다 못할 수모를 당하였으며 사장이 임금을 체불하거나 마구잡이로 노예 다루듯이 하는 것은 다반사였다. 그리고 더더욱 어려운 것은 아무런 보장이 없는 이들이 몸이 아플 때 대책이 서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보험도, 돈도 없고 더 나아가 불법 체류자가 되어버린 외국인 근로자들에게 질병은 정말 무서운 위협이었다. 이들에게 주일날 예배를 함께 드리면서 기도를 하고, 설교를 하고, 위로의 말을 하는 것만으로는 문제의 해결이 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에서 새로운 공동체에 몸을 맡기고 기도를 하며 새로운 희망을 찾는 것은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이었다. 이런 과정에서 내 경험으로 알게 된 것은 바로 외국인 근로자에 대한 구조적 문제점이었다.
가장 심각한 일은 온갖 방법을 강구하여 낮은 임금과 열악한 노동 조건에도 불구하고 “산업연수생”이라는 이름으로 이 땅에 들어오는 근로자들이었다. 이들은 상당한 비용을 들여서 마침내 산업연수생으로 입국하게 되는데, 연수생으로 살면서 이 “비용”을 벌어들인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결국 이들은 입국을 위한 “비용”을 벌기 위해 그 고달프고 험난한 불법체류자의 길을 걷게 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제16대 국회에 등원하면서 처음부터 이 문제를 제기하였다. 산업연수생 제도는 무늬만 멋진 것이지 실제로는 외국의 가난하고 힘없는 근로자들을 저임금으로 희생시키면서 불법의 나락으로 몰아넣는 틀이었다. 그래서 당시에 “외국인근로자 고용허가제 및 인권보호에 관한 법률”을 입법 발의하는 한편 산업연수생제도의 폐지를 적극적으로 요구하였다.
그러나 결국, 그나마 외국인 고용허가제는 인권보호라든가 또는 불법 체류자에 대한 해결에 관한 조항은 무시당한 채 통과되었고, 산업연수생제도는 지금도 버젓이 살아서 여전히 비인권적인 노동의 요구와 불법체류로 이어지는 악순환의 역할을 하고 있다.
그동안 우리는 수없는 외국인 근로자들의 안타까운 사연들을 들어 왔다. 공장에서 일하다가 양손을 잃고 평생 불구가 되어 버린 예는 허다하였고 밀린 임금을 받으러 갔다가 사장이 내려찍은 칼날에 머리를 맞은 사람, 불시에 검문을 들이 닥친 경찰을 피하다가 2층에서 떨어져 척추를 다친 채 휠체어에 앉아 살아야만 하는 청년, 한국 애인을 두고 갈등을 빚다가 한국청년에게 목숨을 빼앗긴 필리핀 청년 등, 여기에는 일일이 열거할 수 없는 한 서린 이야기들이 많다.
고용허가제가 시행된 지 일 년이 되었지만 불법 체류자는 더 늘어났으며 외국인 근로자들의 한숨도 더 높아지고 있다. 이런 결과를 빚은 이유는 너무나 분명하다. 우선 구조적으로 불법 체류자를 만들어내는 과정인 산업연수생제도가 아직도 시퍼렇게 살아 있고, 그동안 체류허가를 받아서 살다가 이제 돌아가야 할 사람들이 재입국에 대한 불확실한 미래 때문에 제대로 나갈 엄두를 못 내고 있으며, 또한 여전히 과거 부터 오랫동안 불법으로 체류하고 있던 사람들이 20만 명에 가깝고, 이렇게 숙련된 불법 체류자들을 사실상 영세 중소기업체들이 필요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문제를 제도적으로 풀기 전에는 이제 20만 명이 훨씬 넘는 불법 체류자들을 해결하기란 정말로 불가능한 일이다. 이들을 경찰을 풀어 잡아갈 것인가 아니면 군대를 동원하여 소탕을 할 것인가. 가령 그렇게 한다고 치자. 그 후에 가뜩이나 어려운 상황의 중소기업체의 인력을 어디에서 구할 것인가. 나는 지금도 지난 국회에서 고용허가제를 제대로 만들어 내지 못한 ‘원죄’를 가슴 아파하고 있다. 그것은 타협을 해서는 안 될 일이었다.
불법이라는 이 엄청난 족쇄 앞에 이들에게는 자유도 인권도 더 나아가 인간의 존엄성도 없다. 이들은 때때로 이렇게 말한다. “우리도 사람입니다.” 그들의 아픔은 지금도 이 땅의 곳곳에서 메아리치고 있다. 언제 들이닥칠지도 모를 일제 검속을 걱정하면서 내일에 대한 확증도 없이 오늘을 고통스럽게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와 비교해 보면 우리도 한때 얼마나 이런 어려운 일을 많이 경험해 왔는가. 미국에서의 쫓기면서 살아온 고통스런 불법체류, 독일로 갔던 광부와 간호원, 캐나다에 그린카드를 들고 봉제공으로 갔던 여공 아닌 여공들, 일본에서 한 많은 차별 속에 긴 삶을 이어 오고 있는 재일 동포들, 러시아의 시베리아 벌판에 버려졌던 고려인들, 중국 만주 벌판에 연명하기 위하여 국경을 넘어갔던 우리의 같은 핏줄들… 헤아릴 수가 없다.
지금 우리는 우리들 가운데서 고난을 무릅쓰고 살아가고 있는 외국인 근로자들의 모습 속에서 과거의 우리의 역사와 삶의 전기를 본다. 인간의 존엄성이나 인간의 기본권을 과연 우리는 어떻게 이들에게 찾아 줄 것인가. 그렇지 못하면 우리는 모두 범죄자가 되고 말 것이다. 불법 체류자가 우리의 실정법을 어긴 범법자라면 우리는 인류의 보편적인 진리를 지켜 내지 못한 역사의 범죄자가 되는 것이다.
지난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마석을 넘나들면서 때로는 성직자로, 때로는 신학을 하는 학자로서, 때로는 정치인으로, 때로는 공직자로서 외국인 근로자들의 아픔을 함께 하려고 노력해 왔다. 고용허가제 입법을 할 때 의원회관으로 찾아왔던 태국대사의 그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
고용허가제에 관하여 헌정기념관에서 공청회를 할 때 자리를 함께 했던 동남아시아의 여러 대사들과 외교관들의 진지한 자세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올해는 우리가 광복 60주년을 맞이하는 해이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뼈저린 과거의 치욕을 되살려 보면서 지금 우리가 아시아에서 우리의 이웃들에게 무엇을 주고 있으며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것인지 냉정하게 돌이켜 보아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광복 60년은 과거의 역사를 기념하는 단순한 과정이 아니라 그 때의 아픔으로 오늘의 비극을 씻어내는 새로운 변화와 변신을 요구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다음 주일도 또 그 다음 주일도 마석을 갈 것이다. 비록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이들에게 성찬을 베풀고 설교를 하고 기도를 하면서 위로를 할 수밖에 없을지라도 이를 계속할 것이다. 외국인 근로자들이 이 땅에서 사람다운 사람으로, 또한 이 사회의 경제에 기여하는 한 부문으로 인정을 받을 때까지 이 일을 계속할 것이다.
이러한 일이 결국은 아시아의 평화를 가져 올 것이며, 60년 전의 광복의 기쁨과 영광을 이어갈 수 있을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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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이재정 / 신부, 현재 남양주 외국인노동자 ‘샬롬의 집’에서 외국인 사목을 맡고 있으며,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수석부의장으로 일하고 있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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