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서(書).간찰(簡札)

李承熙 先生의 簡札.

야촌(1) 2013. 9. 26. 16:28

↑크기(가로 x 세로) : 22㎝ x 28㎝

 

 

 

■ 이승희(李承熙)

 

본관은 성산(星山)으로 1847년(헌종 13) 경북 성주에서 영남 주리론의 대통을 이은 한주(寒洲) 이진상(李震相)의 아들로 태어났다. 대유학자인 부친의 영향으로 어려서 부터 성리학을 수학하여 영남 주리론의 대통을 계승하면서 위정척사론을 정립하고, 위정척사운동에 앞장섰다.

 

개항시기에는 척사상소를 올려 무분별한 개국에 반대하고 성리학적 전통 질서를 옹호하였다.

나아가 1895년 명성황후 민씨가 일본 낭인들에 의해 시해되는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곽종석 등 문인들과 함께 포고문을 각국 공사관에 보내 일제의 침략만행을 규탄하고 열강의 각성을 촉구하기도 하였다.

 

1908년 조국의 운명이 풍전등화와 같이 되자 일본의 노예가 될 수 없다고 판단하여 김창숙 등, 문인들을 불러 뒷일을 부탁하고 노령 블라디보스톡으로 망명하였다. 여기서 이상설·유인석·안중근 등과 함께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제자를 국내로 보내 독립운동자금을 널리 모금하는 한편, 그 자금으로 독립운동 기지 건설에 나섰던 것이다. 만주와 노령의 국경지대인 밀산현 봉밀산에 황무지를 구입하고 100여 가구의 한인동포를 이주시켜 독립운동 기지를 개척하여 한흥동이라 하였다. 그리고 한민학교를 세워 민족교육을 실시하며 독립군 양성의 기반을 닦았다.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광복되기 전에는 결코 귀국하지 않을 것을 다짐하면서 독립운동에 매진하였다.

중국의 동지들과 유대를 강화하기 위해 한인공교회를 창립하고, 상해의 박은식 등과 연락하여 언론기관의 설립과 국사교육을 논의하며 독립운동을 모색하여 갔던 것이다.

 

그러다가 1916년 2월 27일, 70세를 일기로 봉천성 북문 밖에서 광복의 날을 보지 못한 채 망국의 한을 품고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77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