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익재이제현선생

익재진 자찬(益齋眞自讚)

야촌(1) 2013. 9. 26. 11:53

 [참고용어]    

이모본(移模) : 서화(書畫)를 본떠서 그린 그림.   

범본(範本) :  본보기    

심의(深衣) :  예전에, 신분이 높은 선비들이 입던 웃옷. 대개 흰 베를 써서 두루마기 모양으로 만들었으며 소매

     를 넓하고 검은 비단으로 가를 둘렀다.

 

[해설]

이 글은 고려 말 익재 이제현선생이 자신의 초상화에 자신이 글을 남기었다. 즉 독학을 하여 견문이 적고 좁으니, 도를 들은 것도 당연히 늦었다고 말하고, 나의 불행이 자기로 부터 말미암으니 어찌 스스로를 돌이켜보지 않을 수 있겠느냐?

 

내가 무슨 덕이 있다고, 백성에 까지 미치어서 4번이나 국상이 되어 다행히 그 임무를 다 하였으나 다만 사람들의 비방만 받았구나. 잘 생기지 못한 외모는 또 그려서 무엇 하겠느냐 만, 너희 후손들에게 알리노니, 한 번 보고 3번 생각하여야 한다.

 

나의 불행을 경계하여 아침 저녁으로 힘써야 된다. 요행만을 구차히 바라지 않는다면 불행했던 나의 신세를 거의 면할 것이라고 기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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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재진 자찬(益齋眞自讚=나의 초상화를 그려두는 이유의 글)

 

독학(獨學)을 하여 견문(見聞)이 적고 좁으니, 도를 들은 것도 당연히 늦었단다. 나의 불행이 자기로 부터 말미암으니 어찌 스스로를 돌이켜 보지 않을 수 있겠느냐? 내가 무슨 덕(德)이 있다고, 백성에 까지 미치어서 4번이나 국상(國相)이 되어 다행히 그 임무를 다 하였으나, 다만 사람들의 비방만 받았구나.

 

잘 생기지 못한 외모(外貌)는 또 그려서 무엇 하겠느냐 만 너희 후손들에게 알리노니, 한 번 보고 3번 생각하여야한다.

나의 불행을 경계하여 아침저녁으로 힘써야 된다. 요행만을 구차히 바라지 않는 다면 불행(不幸)했던 나의 신세를 거의 면할 것이다.

 

[原文]

獨學而陋。聞道宜晚。不幸由己。何不自反。何德于民。四爲國相。幸而致之。祗速衆謗。不揚之貌。又何寫爲。告爾後嗣。一覩三思。誡其不幸。早夜以勉。毋苟其幸。庶幾知免。

 

益齋亂稿卷第九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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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재 화상]

[지정번호] 국보 제 110호                                 

[지정년월일] 1962년 12월 20일                                

[시대] 고려 충숙왕 6년(1319)                         

[규모양식] 세로 177.3cm   가로 93cm  종축                       

[재료] 비단                            

[소유자] 국유                        

[소재지] 140-026 서울특별시 용산구 서빙고로135  국립중앙박물관,

 

 

 

익재영정(益齋影幀)은 원(元)나라 화가 진감여(陳鑑如)가 그린 고려 말(高麗末)의 문신(文臣) 익재 이제현(1287~1367)의 전신(全身) 초상화이다. 화면 상단에 적혀 있는 화기에 의하면, 이제현(李齊賢)이 33세 되던 해인 1319년(충숙왕 6)에 충숙왕을 모시고 중국 절강성의 보타산(寶陀山) 사찰에 강향(降香)하기 위해 갔을 때, 왕명으로 항주(杭州) 최고의 명수인 진감여(陳鑑如)를 불러 그리게 하고, 당시 석학이었던 탕병룡(湯炳龍)에게 찬문(撰文)을 짓게 했다고 한다.

 

이 찬문은 화면 왼쪽 위에 적혀 있다. 이제현(李齊賢)은 귀국할 무렵 이 영정을 남에게 빌려주었다가  잃어버렸는데, 그 후 32년 만에 국서(國書)를 받들고 다시 연경(燕京)에 갔을 때, 자신의 영정을 찾게되어 그 연유와 감회를 글로 표현하고 이를 한운(韓雲)으로 하여금 적어 넣게 한 것이다.


익재영정의 작가에 대해 이제현의 문집인 ≪익재집≫에는 오수산(吳壽山)으로 기재되어 있어 혼란을 주고 있지만, 작품 자체에 적혀있는 기록이 더 정확하기 때문에 진감여(陳鑑如)가 제작한 것으로 인정되고 있다. 그러나 현존하는 얼굴과 탁상 일부분 만이 원작이고, 전신 초상화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신체와 옷ㆍ의자ㆍ족대 등은 조선 후기 무렵 다시 그려진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오랜 세월이 지나 영정이 낡게 되자 후손들이 얼굴과 한ㆍ두 군데를 제외하고 대부분 새롭게 보수를 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현재 전남 장성군의 가산서원(佳山書院)과 충북 청원군의 수락영당(水洛影堂), 전남 강진군의 구곡사(龜谷寺)에 수장되어 있는 이제현상의 범본이었을 것으로 생각되는 이 영정은 많은 부분이 보수 되기는 했지만, 원작의 형식을 거의 그대로 반영하고 있기 때문에 고려시대에 영향을 미친 원(元)나라 초상화법을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귀중한 작품이다.

 

심의(深衣)차림에 우안팔분면(右顔八分面)의 자세로 의자에 앉아 있는 전신교의좌상(全身交椅坐像)이며, 이러한 우안상은 고려 후기 초상화의 전통을 이루었던 것 같다. 그리고 두 손을 소매 속에 넣은 공수(拱手) 자세와 족대 위에 발을 올려놓는 형식 등은 조선시대 공신상으로 계승되었다.

 

그러나 배경에 서책과 청동기명ㆍ금(琴)이 놓여있는 검은색 칠기 탁상을 배치한 형식은 채용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후대에 보수되지 않은 얼굴 부분은 세밀한 철선(鐵線)으로 정교하게 묘사되어 있어 원대 항주의 일급 초상화가였던 진감여의 탁월한 기량을 엿볼 수 있다.

 

이에 비해 옷 주름의 필선은 치밀한 맛이 부족하고 형식적으로 구사된 느낌을 주며, 특히 윤곽선은 원형 보다 단순하게 처리되어 있어 가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인물의 안면과 복장을 선염(渲染) 없이 선묘 중심으로 묘사한 화법은 고려 후기와 조선 초기 초상화풍의 근간을 이루었던 것이다.

 

[참고용어]    

○ 이모본(移模) : 서화(書畫)를 본떠서 그린 그림.   

○ 범본(範本) :  본보기    

○ 심의(深衣) :  예전에, 신분이 높은 선비들이 입던 웃옷. 대개 흰 베를 써서 두루마기 모양으로 만들었으며 소매

     를 넓하고 검은 비단으로 가를 둘렀다.


이 영정은 시서화에 뛰어났던 문인서화가이며, 성리학의 고려 유입에 선구적 역할을 했던 고려 후기의 대표적인 문신 이제현의 젊은 모습을 구체적으로 담고 있을 뿐 아니라, 당시 한중 문화교류를 실제적으로 입증해 주는 자료로 중요하다. 그리고 원대 초상화 양식과 함께 고려와 조선시대 전신상 초상화의 원류 연구에도 귀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끝>

 

글 : 李在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