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물/조선시대 인물

이종준(李宗準)/경주이씨 월성군파

야촌(1) 2013. 8. 16. 00:45

■ 27世 이종준(李宗準)

 

[생졸년]  이종준李宗準, 1458(추정) ~ 1499(연산군 5)

[본관]  경주(慶州)

[자]  중균(仲均)

[호]  용재(慵齋)

[출생지]  안동(安東) 금계(金溪)

[생졸년]  1454년(세조 元年)∼1499년(연산군 5).

[분묘소재지]  안동(安東) 금계(金溪)

[과거]  1477년(성종 8) 진사시(進士試) 합격,

          문과> 성종(成宗) 16년 (1485) 을사(乙巳) 별시(別試) 일등(一等) 2위

[내관직]  홍문관교리(弘文館校理), 홍문관부수찬(弘文館副修撰), 의정부사인(議政府舍人)

[외관직]  북평사(北評事), 의성현령(義城縣令)

[증직 및 기타]  홍문관부제학(弘文館副提學)

---------------------------------------------------------------------------------------------------------------------------------------------------------------

[타고난 침착성]

 

그는 어려서부터 말을 빨리 하거나 안색이 갑자기 변하는 일이 없을 정도로 늘 침착한 태도를 취하였다.

다음의 일화는 그의 침착함을 잘 보여준다. 당시에 유자광, 이극돈 등이 권세를 부리면서 사화를 일으켰다.

이종준 역시 사화에 연루될 상황이었는데도 그는 태연자약하였다.

 

그리고 이주와 함께 바둑을 두고 있는데, 붉은 옷을 입은 이들이 동네 어귀로 들어서고 있다고 다급하게 전하는 이가 있었다. 그럼에도 이종준은 “아직 나를 잡아들이라는 명을 듣지 못했다.”면서 여유롭게 바둑을 두었다고 한다.

 

[빼어난 풍모]

 

그는 빼어난 풍모를 지니고 있었다. 그의 탁월한 풍모에 대해 그의 스승인 김종직은 “이종준은 속된 기운이 없이 청수한 풍모를 지녔다.”고 평하였다.

 

[장육거사라는 호의 유래]

신포(申誧)는 시화와 술을 즐겼는데, 스스로 장육이라고 호를 하였다.

이종준이 그 호를 좋아하여 술 한 병과 호를 바꿀 것을 청하여 허락을 받았다.

이리하여 이종준에게 장육거사라는 호가 생겼다.

 

[굳센 강직함]

 

그가 정언(正言)이었을 때, 왕의 장인인 신수근(愼守勤)이 청현직에 오르자 외척이 권력을 갖게 될 조짐이라 하여 강력히 반대하였다. 아울러 무오사화에 연루되어 모진 국문을 받았음에도 안색하나 흐트러지지 않으면서 아무말 없이 한일자를 땅바닥에 그었다.

 

그의 이런 성격에 감동 받았던지, 그가 부리던 종 중에서 글을 읽을 줄 알았던 귀성(貴成)이란 자도 함께 국문을 받으면서 아무말 없이 한일자를 그었다고 한다.

 

[시선(詩仙)]

 

그의 빼어난 문재는 권경유(權景裕)와의 첫 대면에서 잘 나타난다. 남효온과 이종준이 달밤에 꽃구경을 하다가 권경우의 집 근처에 이르렀다. 남효온이 권 경우에게 “회현방 살구 꽃 아래 이인(異人)이 시를 읊고 있기에 불러 함께 왔다.

 

그의 말과 시는 세속에 얽매어 있지 않으니 필시 신선인가 보다.”라고 하였다.

권경우는 신을 거꾸로 신고 나와서 이종준을 맞아 함께 달빛 아래 앉았다.

 

종준이 시를 지으니 시가 매우 격이 높고 고고하자 권경우가 탄복하고 무릎을 꿇으면서 “누추한 곳에 권경우는 신을 거꾸로 신고 나와서 이종준을 맞아 함께 달빛 아래 앉았다.

 

종준이 시를 지으니 시가 매우 격이 높고 고고하자 권경우가 탄복하고 무릎을 꿇으면서 “누추한 곳에 뜻밖의 수재(秀才)가 방문하니 이는 천행(天幸)이다.”라고 하고, 시와 이야기로 밤을 새웠다.

 

날이 밝자 그가 바로 이종준임을 알고 손바닥을 치며 웃으면서 평생지기가 되었다고 한다.

무풍 부정은 그를 “우리나라의 시선(詩仙)이다.”라고 하였다.

 

[무오사화에 연루]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 때 김종직의 문인으로 몰려서 함경도 부령으로 귀양 가는 도중에 단천군 마곡역을 지나가게 되었다. 그곳에 송나라 이사중(李師中)이 바른말 하다 귀양 가는 당개(唐介)를 송별하면서 지은 시 한 수를 써놓고 갔는데, 함경도관찰사 이승건(李承健)이 이는 나라를 비방하고 왕을 기롱(譏弄:헐뜯고 농간함)한 것이라고 조정에 고하였다.

 

마침내 연산군은 그가 원망하는 뜻을 가졌다 하여 서울로 압송, 국문 도중 죽었다.

홍귀달(洪貴達)이 그를 구하려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가족사항]

 

◇조부 : 이승직(李繩直)

◇생부 : 이시민(李時敏)

◇어머니 : 안동권씨(安東權氏) 권계경(權啓經)의 딸

◇형 : 이홍준(李弘準)

 

[수양(首陽)과 그의 집안]

 

이종준 집안이 안동에 내려오게 된 계기는 수양대군과 깊은 관련이 있었다.

즉 이종준의 큰아버지인 이명민(李命敏)이 계유정난(癸酉靖難)에 연루되어 수양대군(首陽大君) 일파에게 세 아들과 함께 살해되자 당시 진사였던 이시민은 벼슬을 포기하고 낙향했던 것이다.

 

이종준은 무오사화에 연루되어 모진 국문을 받은 끝에 죽었다. 그런데 그는 죽음에 임해서도 안색이 태연했으며, 소리를 가다듬어 “수양산이 먼데 내 묻힐 곳이 어디랴.”라고 탄식했다고 한다. 죽으면서 이종준은 수양대군과의 질긴 악연을 떠올렸던 것일까?

 

[집 앞에 은행나무를 심다]

 

이종준의 부친인 이시민이 대청 앞에 은행나무를 심고 말하기를, “살구나무는 공자가 강학(講學)하던 나무이다.

훗날 군자가 이 나무 아래에서 강학할 것이다.”고 하였다.

 

이종준이, “우리나라에도 성인이 있습니까?”하고 묻자, 이시민이, “성인의 도를 행하면 성인인 것이다.

하물며 우리나라는 기자의 유풍이 지금도 전하고 있는데 어찌 현인, 군자가 없겠느냐.”하였다.

 

[사지로 가는 아들을 태연히 보낸 어머니]

 

이종준이 무오사화에 연루되어 잡혀 가게 되자, 노모를 한 번 뵙게 해달라고 금부도사에게 청하여 허락을 받았다.

이종준이 어머니에게 인사하자, 그의 어머니는 중국 한나라 때 범방의 고사를 인용하면서 그에게 의롭게 죽으라고 말하였다.

 

즉 범방은 환관의 횡포에 저항하다 잡혀 가게 되자, 어머니에게 인사를 하였다.

그러자 그의 어머니는 “당대의 명사와 함께 죽는 것이 영광이고, 이미 의롭다는 명예를 얻었으니 구차하게 살려고 하지 말라.”고 하면서 태연히 아들을 보냈었다.

 

이종준의 어머니 “네가 죽어도 나는 슬퍼하지 않으련다.

너는 가서 의롭게 죽고, 나를 염려하지 말아라.” 하면서 태연히 보냈다.

 

[학문]

 

◇스승 : 김종직(金宗直)

◇향사 : 경광서원(鏡光書院), 백록리사(栢鹿里社)

◇학파 : 퇴계 학파

그의 학문은 성리학에 국한되지 않았다고 시는 이미 신선의 경지에 올랐다는 평가를 받았고, 서화 역시 일가를 이루었다. 이외에 의약, 복서(卜筮), 음률에도 조예가 깊었다.

 

[학문을 즐기다]

 

이종준에 대한 부친의 기대는 매우 컸다. 대대로 서울에서 벼슬하던 그의 집안이 이종준의 부친 대에 와서 몰락하자 이종준이 다시 벼슬길에 올라 집안을 일으켜 주길 바랐던 것이다.

 

그것은 그의 형과 동생, 모두 학문에 뜻과 재주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이종준에게는 주색을 멀리하고 행동을 조심할 뿐 아니라, 부랑아들과의 교제도 하지 않도록 엄하게 주의를 주었다.

 

이종준 역시 부친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학문을 연마하였다.

부친상을 당한 이후 어머니의 명으로 산에 들어가서 공부하게 되었는데, 같이 입산했던 배연(裵裀)은 가끔 책을 덮고 쉬기도 하는데 그는 쉼 없이 공부만 하였다.

 

몇 달이 지나도 여전하자 배연이 그의 체력에 감탄하였다.

그러자 그가 말하기를, “지극한 즐거움이 여기에 있는데, 피곤할 일이 어디에 있느냐?”고 하였다.

 

[저작]

 

◇공동저작 : 경상도지도

◇문집 : 『용재집(慵齋集)』

◇작품 : 「송학도(松鶴圖)」

서화(書畵) : 이종준은 서화에 능하였다. 허지만 현재 남아 있는 작품은 없고, 중앙박물관에 소장된 「송학도」가 그의 작품으로 유일하게 전해오고 있다. 그의 서화는 당대에도 유명하였다.

 

그가 일본 사신의 호송사에 임명되어 동래에 가자 일본 사신이 그의 서화를 원하였다.

그가 청을 받아들여 서화를 그려 주자, 일본 사신은 “비로소 천하의 중보(重寶)를 얻었다.”고 기뻐하였다.

 

또 서장관으로 중국에 갈 때 중국의 어느 역관에 있는 그림 병풍을 보고 붓과 병풍을 모두 뭉개버렸다.

그림이 변변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돌아오는 길에 중국 역관이 소병(素屛) 2개를 마련하여 글과 그림을 원하자, 한 폭에는 글씨를 한 폭에는 그림을 그려주었는데 보는 이마다 그 솜씨의 절묘함에 모두 탄성을 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