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성씨별관향

이씨의 대표적인 관향

야촌(1) 2013. 8. 4. 02:36

이씨의 대표적인 관향

 

李氏의본관은 문헌에 451본 또는 546본이 전해지나 시조가 밝혀진 것은 120본 안팎이며, 100본 정도가 현존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 중에서 주요한 것은 경주(慶州)·전주(全州)·연안(延安)·전의(全義)·광주(廣州)·한산(韓山)·덕수(德水)·용인(龍仁)·여주(驪州)·성주(星州)·벽진(碧珍)·고성(固城)·우봉(牛峰)·진성(眞城)·함평(咸平)·영천(永川)·평창(平昌)·합천(陜川)·인천(仁川)·청해(靑海)·공주(公州)·양성(陽城)·부평(富平)·단양(丹陽)·수안(遂安)·광산(光山)·원주(原州)·재령(載寧)·우계(羽溪)·청주(淸州)·성산(星山)·함안(咸安)·안성(安城)·흥양(興陽)·홍주(洪州)·신평(新平)·덕산(德山)·고부(古阜)·청안(淸安)·수원(水原)·하빈(河濱)·안악(安岳)·진위(振威)·충주(忠州)·양산(陽山)·단성(丹城)·장수(長水)·사천(泗川)·진주(晉州)·봉산(鳳山)·가평(加平:朝宗)·상산(商山)·고령(高靈)·익흥(益興)·양산(梁山)·익산(益山)·태안(泰安)·정주(貞州)·아산(牙山)·평양(平壤)·영천(寧川)·순천(順天)·경산(京山)·창녕(昌寧)·개성(開城)·서림(西林)·금구(金溝)·영춘(永春)·담양(潭陽)·보은(報恩) 등이다.

 

조선에서 문과 급제자 총 1만 5547명 중 이씨가 3,190명으로 5분의 1 이상을 차지하며, 또 상신 총 370명 중 약 19 %인 68명, 대제학(문형)은 총 133명 중 23 %인 30명을 차지한다.

 

통계를 보면 이씨 가운데서도 각 본관별 우열이 드러나며, 100여 본이 되는 이씨 중에서 그 주류를 이루는 것은 30본 미만이다. 그 중에서 전주이씨(璿派)를 비롯하여 명 가문으로는 연안이씨의 월사(月沙)집을 들 수 있다.

 

월사 이정구(李廷龜)의 자손에서만 3대 대제학과 부자 대제학 등 6명의 대제학이 배출되었다. 그 밖에 덕수이씨·경주이씨·광주이씨·한산이씨·전의이씨·용인이씨 등 명가문들이 많다.

 

1960년도 국세조사에서는 64만 6209가구에 인구 371만 1,084명으로 성별순위는 258성 중 제2위였고, 85년도 조사에서는 가구수 141만 8945가구, 전국가구구성비 14.8 %로 274성 중 역시 제2위였다. 2000년도 통계청 인구조사에서는 2,113,007가구수에 6,794,637명으로 성별순위 2위로 나타나 있다.

 

[경주이씨]

시조는 초기 신라의 6촌 중 알천양산촌(閼川楊山村: 及梁部)의 촌장으로 전해지는 표암공(瓢岩公) 알평(謁平)이다. 표암공이라는 호칭은 알평이 애초에 경주 박바위에 강림했다는 전설에서 취해진 것이다.

 

경주이씨(慶州李氏)는 스스로 정통파 대종임을 내세우는데, 이씨 중에는 표암공에 연원을 두고 있는 본관이 많아 합천·가평·원주·아산·재령·우봉 이씨 등이 이에 속하며, 이 밖에도 우계이씨와 성주이씨의 일부도 알평에 연원을 두고 있다고 한다. 따라서 이들 분적종까지 합치면 경주이씨가 이씨의 대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경주이씨의 실질적인 시조라고 할 수 있는 중시조는 소판공(蘇判公) 이거명(李居明)이다. 거명은 신라 때의 인물로 진골(眞骨) 출신이다. 그는 시조 알평의 36세손이며 시조로부터 현재(熙字돌림)까지는 대략 75대(약 2,000년)가 된다.

 

경주이씨의 세계는 중시조 거명의 16대손(고려 말기)에서 크게 8파로 나뉘고 다시 아래로 내려오면서 대소 70여 파로 분파된다. 8대파는 평리공파(評理公派)·이암공파(怡庵公派)·익재공파(益齋公派)·호군공파(護軍公派)·국당공파(菊堂公派)·부정공파(副正公派)·상서공파(尙書公派)·사인공파(舍人公派) 등이다.

 

이 밖에 지손(支孫) 계통으로 판전공파(判典公派)·시랑공파(侍郞公派)·석탄공파(石灘公派) 등이 있다. 한편 경주이씨 분파도(分派圖)에는 전술한 10본의 분적종 중 성주이씨와 우계이씨는 거명의 윗대에서 분파되었으며 나머지는 그 아랫대에서 분파된 것으로 나타나 있다.

 

경주이씨는 고려 말에 크게 세력을 떨쳤고 조선에 들어와서도 문과 급제자 178명, 상신 8명, 대제학 3명을 비롯하여 10여 명의 공신과 많은 학자·명신을 배출하였다. 8대파 중 상서공파의 백사(白沙: 李恒福)집이 가장 많은 인물을 배출하였고, 익재공파의 세칭 8별(鼈) 집과 완(浣) 대장을 낳은 국당공파가 그에 버금간다.

 

경주이씨가 조선에 배출한 상신·문형 가운데 백사집에서 영의정 4명, 좌의정 2명, 대제학 2명이 나왔고, 8별집에서 좌의정과 대제학 각 1명, 국당공파 중의 정순공(靖順公:誠中) 후손에서 좌의정 1명이 나와 이들 3파가 사실상 경주이씨의 주축을 이루었다.

 

[전주이씨]

시조는 신라 때 사공(司空)을 지낸 이한(李翰)이다. 태조 이성계(李成桂)는 시조로부터 22세, 즉 한의 21대손이다. 그러나 성계의 고조부인 목조(穆祖) 안사(安社) 이전의 사적(事蹟)은 전혀 기록에 전해지지 않는다.

 

안사는 원래 전주 사람이었는데, 그곳 지주(知州: 지금의 知事)와 사이가 나빠 강원도 삼척(三陟)으로 옮겨갔다가 얼마 뒤 지주가 다시 그곳으로 부임해오자 가족을 데리고 간도(間島) 지방으로 가서 원(元)나라의 다루가치[達魯花赤:地方官]가 되었다.

 

그의 아들 익조(翼祖) 행리(行里: 성계의 증조부), 또 그 아들 도조(度祖) 춘(椿:성계의 조부)도 때때로 두만강 지방의 천호(千戶)로서 원나라에 벼슬했고, 춘의 아들 환조(桓祖) 자춘(子春)도 원나라의 총관부(摠管府)가 있던 쌍성(雙城:永興)의 천호를 지냈다.

 

자춘은 공민왕의 북강(北疆) 회수운동에 내응하여 쌍성 함락에 결정적인 공을 세워 이 지방의 만호(萬戶) 겸 병마사(兵馬使)로 임명되었다. 성계는 영흥 태생으로, 22세 때 처음으로 고려에 벼슬했으며, 아버지의 뒤를 이어 동북면의 병마사가 되어 원군(元軍)과 왜구 토벌에 공을 세워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에 이르러 이 때부터 고려 말 중앙정권의 중추에 등장하였다.

 

전주이씨의 분파는 122파로서 거의 왕자대군(王子大君:嫡)과 왕자군(王子君: 庶)을 파조로 하고 있으며, 시대 구분에 따라 세 갈래로 나눌 수 있다. 즉, 이태조의 고조부인 안사의 상계(上系)에서 갈라진 파, 안사 이후 이태조 이전에 갈라진 파, 이태조의 후손으로 왕자대군과 왕자군을 파조로 하는 파이다.

 

안사(18世) 이전의 분파로는 시조 한의 14대손인 단신(端信)을 파조로 하는 문하시중공파(門下侍中公派), 15대손 거()를 파조로 하는 평장사공파(平章事公派), 17대손 영습(英襲)을 파조로 하는 주부동정공파(主簿同正公派), 안사의 종손 윤경(允卿)을 파조로 하는 대호군공파(大護軍公派), 한의 21대손 귀을(歸乙)을 파조로 하는 문하평리공파(門下評理公派) 등이 있다.

 

안사 이후 이태조 이전의 분파로는 안사의 아들인 안천(安川)·안원(安原)·안풍(安豊)·안창(安昌)·안흥(安興)의 5대군파(五大君派), 행리의 아들인 함령(咸寧)·함창(咸昌)·함원(咸原)·함천(咸川)·함릉(咸陵)·함양(咸陽)·함성(咸城)의 7대군파(七大君派), 춘의 아들인 완창(完昌)·완원(完原)·완천(完川)·완성(完城)의 4대군파(四大君派), 자춘의 아들이며 태조의 서형제(庶兄弟)인 완풍군파(完豊君派)와 의안대군파(義安大君派) 등 18개의 파가 있다.

 

태조의 후손 분파(고종 이전까지)는 일반적으로 99파(25大君·74君)로 알려져 있지만 미취졸(未娶卒), 즉 미혼으로 죽었거나 무후(無後), 즉 후사(後嗣)가 없는 대군·군이 20명 정도가 되므로 실제로는 그 수가 줄어든다.

 

조선의 왕권은 전주이씨인 왕족(王親·宗親)을 주축으로 하고 왕대비·왕비·왕세자비의 동성친(同姓親:外戚)과 이성친(異姓親), 그리고 왕녀의 배우자와 그 근친 등 광범위한 혈연관계를 왕권의 일차적인 토대로 하여 발전·유지되어왔다. 따라서 왕위를 둘러싸고 벌어진 골육간의 다툼은 조선 500년을 통해 계속되었다.

 

역사적으로 전주이씨는 방대한 씨족기반 위에서 정치권력 또는 정치세력의 중추를 이루었다. 즉, 상신(相臣:三議政) 22명, 문형(文衡:大提學) 7명을 배출하여 타씨족을 압도했으며, 문과 급제자 873명을 내어 이씨의 문과 급제자 총 3,190명의 27 %를 차지하였다.

 

전주이씨의 100여 파 중에서 으뜸가는 명가는 밀성군파(密城君派:琛, 世宗의 아들)로서 6명의 정승과 3대 대제학을 배출했으며, 덕천군파(德泉君派:厚生, 정종의 아들)가 부자 대제학 등 3명의 대제학과 영의정 1명을 내어 밀성군파에 버금간다.

 

그 다음으로는 3명의 정승을 배출한 광평대군파(廣平大君派:璵, 세종의 다섯째 아들), 정승 2명을 배출한 선성군파(宣城君派:茂生, 정종의 아들), 정승 1명과 많은 문·무관을 배출한 효령대군파(孝寧大君派:補, 태종의 둘째 아들) 등이 뛰어나고, 무림군파(茂林君派:善生, 정종의 아들)와 덕흥대원군파(德興大院君派:, 선조의 生父)는 무관(武官)의 집으로 유명하다.

 

오늘날 전주이씨의 후예가 얼마나 되는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전주이씨 대동종약원(全州李氏大同宗約院) 측에서는 대략 200만으로 추산하고 있으며, 100여 파 가운데 후손이 가장 번창한 파는 효령대군파가 으뜸이고 광평대군파·덕천군파·밀성군파·양녕대군파 등이다.

 

[연안이씨]

시조는 당(唐)나라의 장군이었던 무(茂)이다. 그는 660년 소정방(蘇定方)이 신라의 동맹군으로 백제를 침공해왔을 때 중랑장(中郞將)으로 따라왔다가 신라에 귀화한 것으로 전해진다. 연안이씨에는 계통을 달리하는 세 집이 있는데, 습홍(襲洪:太子詹事)·현려(賢呂:判少府監事)·지(漬:通禮門使)를 각각 중시조로 하는 3파 등이다.

 

연안이씨는 조선에서 문과 급제자 250명, 상신 8명, 대제학 7명, 청백리 6명을 배출하였다. 연안이씨의 3대파 중에서도 판소부감사공파가 단연 뛰어나 상신 8명, 대제학 6명, 청백리 1명, 공신 10여 명을 배출하였고, 통례문사공파에서 대제학 1명, 청백리 2명, 태자첨사공파에서 청백리 2명이 나왔다.

 

[전의이씨]

시조는 고려 개국공신인 태사(太師) 도(棹)이며, 그 후손 문의공(文義公) 언충(彦沖)과 효정공(孝靖公) 정간(貞幹), 문장공(文莊公) 혼(混)의 후손에서 인물이 많이 나와 3대 인맥을 이루었다.

 

그 중혼은 시조 도의 7대손으로 고려 충선왕 때 첨의정승을 지냈는데, 그의 손자 익(翊)이 예안(禮安)으로 분적하여 예안이씨로 불렸으나 근래에 다시 전의이씨와 통합하였다. 언충은 고려 고종 때의 장군 천(仟)의 손자로서 충렬·충선·충숙·충혜왕의 4대에 걸쳐 벼슬한 명신이며 정당문학·예문관 대제학 등을 지냈다.

 

정간은 천의 현손이며 언충의 재종손으로 세종 때 강원도관찰사를 지내고 노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여 중추원사(中樞院使)에 임명되고 왕으로부터 사연(賜筵) 및 궤장(杖)을 하사받았다. 전의이씨는 조선에서 문과 급제자 178명, 상신 5명, 대제학 1명, 청백리 6명, 공신 6명을 배출하였다.

 

[광주이씨]

시조는 신라 내물왕(奈勿王) 때의 내사령(內史令) 자성(自成)이다. 광주이씨의 중흥의 조(祖)는 고려 말의 학자 둔촌(遁村) 집(集)이다. 그는 충목왕 때 문과에 급제, 정몽주(鄭夢周)·이색(李穡)·이숭인(李崇仁) 등과 깊이 사귀었는데 공민왕 때 국정을 전횡하던 신돈(辛旽)을 논박하고 영천(永川)으로 피신했다가 신돈이 살해된 후에 돌아왔다.

 

그의 아들 지직(之直)은 형조참의를 지냈는데 태종 때 청백리에 녹선되었고, 지강(之剛)은 좌참찬, 지유(之柔)는 사간을 지냈다. 지직의 아들 장손(長孫)은 사인(舍人)을 지냈고, 인손(仁孫)이 세조 때 우의정에 이르고, 예손(禮孫)은 황해도관찰사를 지냈다.

 

예손의 아들 극기(克基)는 참판을 지내고 성리학자이며, 현손 중경(重慶)은 이조판서를 지내고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후손으로는 선조 때 병조판서 윤우(潤雨), 효종 때 이조판서 원정(元禎), 숙종 때 이조참판 담명(聃命) 등이 있는데, 담명은 1690년(숙종 16) 영남 대흉년에 관찰사로 나가 치적을 올렸다.

 

광주이씨는 조선에서 문과 급제자 188명, 상신 5명, 문형(대제학) 2명, 청백리 5명, 공신 11명을 배출했는데, 상신·대제학·청백리 중 청백리 중경만이 예손의 후손이고, 나머지는 모두 인손의 후손이다.

 

[한산이씨]

시조는 고려의 호장(戶長) 윤경(允卿)이며, 중시조는 목은(牧隱) 색(穡)의 아버지 곡(穀)이다. 곡은 이제현(李齊賢)의 문인으로 당대의 대문장이며 경학(經學)의 대가이다. 그는 충숙왕 때 문과에 급제, 원(元)나라 제과(制科)에도 급제하여 정당문학을 거쳐 도첨의찬성사에 이르렀다.

 

그의 아들 색도 역시 이제현의 문인으로 고려 말의 석학이며 대유로서 원나라 제과에 급제, 공민왕 때 문하시중에 이르렀고, 그의 문하에서 권근(權近)·변계량(卞季良) 등의 학자와 명신을 배출하고 성리학의 주류를 이루었다.

 

이 밖에도 사육신(死六臣)의 한 사람인 개(塏), 당대의 대문장인 산해(山海) 등을 들 수 있다.

한산이씨는 조선에서 문과 급제자 195명, 상신 4명, 대제학 2명, 청백리 5명, 공신 12명을 배출하였다.

 

[덕수이씨]

시조는 고려 신호위중랑장(神虎衛中郞將) 돈수(敦守)이다. 덕수이씨는 조선에서 문과 급제자 105명, 상신 7명, 대제학 5명, 공신 4명, 청백리 2명을 배출했는데, 그 중에는 율곡(栗谷) 이(珥)와 충무공 순신(舜臣)장군 등 뛰어난 인물이 들어 있다.

 

상신·대제학·청백리에 오른 인물을 보면 중종 때의 대제학·좌의정 행(荇), 명종 때의 영의정 기(), 선조 때의 대제학 이(珥), 인조 때의 대제학 식(植), 숙종 때의 대제학·좌의정 단하(端夏), 대제학·영의정 여(), 영조 때의 좌의정 집(?·은(?, 정조 때의 영의정 병모(秉模), 선조 때의 대사헌·청백리 유중(有中), 인조 때의 예조판서·청백리 안눌(安訥) 등이며, 그 중 식과 단하는 부자 대제학이다.

 

덕수이씨는 중종∼영조대에 이르는 약 300년간 성세를 보였는데, 문인파계와 무인파계의 두 집안으로 갈라진 것이 특색이다.

 

[용인이씨]

시조는 고려 삼한벽상공신이며 태사(太師)인 길권(吉卷)이며, 조선에서 문과 급제자 83명, 상신 3명, 대제학 1명을 배출하였다. 역사상 대표적 인물은 세백(世白)이다. 용인이씨는 세백이 숙종 때 좌의정에 이름으로써 그 후 영조에서 정조대에 걸쳐 가장 성세를 보였다.

 

숙종 때 예조판서, 영조 때 양관대제학·우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오른 의현(宜顯)은 세백의 아들로서 부자 정승으로 유명하다.

 

이 밖에 주요인물로는 영조 때 이인좌(李麟佐)의 난을 토평하고 뒤에 호조판서를 지낸 보혁(普赫), 정조 때 좌의정을 지낸 재협(在協), 영조 때 예조판서·대제학 의철(宜哲), 정조 때 대사헌·형조판서 숭우(崇祐), 정조 때 형조·병조판서 재학(在學), 이조판서 재간(在簡), 철종 때 예조판서 삼현(參鉉), 고종 때 이조판서 원명(源命), 선조 때 성리학자 담(湛), 임진왜란 때 순변사(巡邊使)로서 공을 세운 일(鎰)장군, 순조 때 화가 재관(在寬) 등이 유명하다.

 

[여주이씨]

여주이씨는 고려의 인용교위(仁勇校尉) 인덕(仁德)을 시조로 하는 파, 중윤(中尹) 은백(殷伯)의 후손 일파, 진사 세정(世貞)의 후손 일파 등 3파가 있다. 조선에서 문과 급제자 107명을 배출했으며, 고려 시대의 문인 백운거사(白雲居士) 규보(奎報)를 비롯하여 조선 초의 대표적인 성리학자 언적(彦迪), 실학(實學)의 중조격인 학자 익(瀷), 종교운동에 헌신하다가 신유박해 때 승훈(承薰) 등과 함께 순교한 가환(家煥), 지리학의 선구자로서 한국의 지리서인 《택리지(擇里志)》, 일명 《팔역지(八域志)》를 저술한 중환(重煥) 등의 유명한 문신과 학자를 많이 배출하였다.

 

이 밖에도 공양왕 때 예문관 대제학을 거쳐 이조판서를 지낸 행(行), 세조 때 병조판서에 이른 몽가(蒙哥), 선조 때 형조·예조판서·우참찬을 지내고 청백리에 녹선된 우직(友直) 등이 있다.

 

[성주이씨]

시조는 신라 말의 명재상 순유(純由)이다. 고려 말에 성세를 보였는데 조선 개국에 참여하여 개국공신 2명을 냈고, 문과 급제자 107명, 상신 1명을 배출하였다. 순유는 뒤에 극신(克臣)으로 개명했는데, 신라에서 재상까지 올랐으나 신라가 망하자 고려에 벼슬하지 않고 절개를 지켰다.

 

그의 11세손 장경(長庚)의 아들 5형제, 즉 밀직사사 백년(百年), 참지정사 천년(千年), 낭장 만년(萬年), 참찬 억년(億年), 정당문학 조년(兆年)이 모두 문과에 급제, 현달함으로써 이때부터 자손이 번성, 많은 인물이 나왔는데, 그 가운데서도 조년의 후손이 가장 번창하였다.

 

[벽진이씨]

시조는 고려 태조 때의 벽진장군 총언(悤言, 858년 ~ 938)이다. 고려의 인물로는 시조의 10대손으로 충숙왕 때 대제학을 지내고 시명(詩名)이 높았던 견간(堅幹)이 있으며, 조선에서는 생육신(生六臣)의 한 사람인 맹전(孟專)과 조선 후기의 거유 항로(恒老)가 유명하다.

 

이 밖에 성종 때 대사성에 이른 철균(鐵均), 병자호란 때 강화섬에서 자결한 공조판서 상길(尙吉), 중종 때 대사헌·병조판서를 지낸 장곤(長坤) 등이 뛰어난 인물들이다.

 

[고성이씨]

시조는 한문제(漢文帝) 때 사람인 반(槃)의 24대손인 황(璜)으로 전한다. 고려 말 이후에 성세를 보였으며, 조선에서 문과 급제자 36명, 상신 1명을 배출하였다. 조선에서 대표적 인물은 원(原)이다.

 

그의 가계(家系)는 고려의 명문으로 고조부는 충렬왕 때의 세자원빈(世子元賓)·밀직사판사(密直司判事) 존비(尊庇), 증조부는 삼사판사(三司判事) 우(瑀), 조부는 공민왕 때 수문하시중을 지내고 서예에 뛰어난 행촌(杏村) 암(), 아버지는 권근(權近)의 장인으로 역시 공민왕 때 진현관 대제학에 이른 강(岡)이다.

 

원은 세종 때 좌의정에 이르렀고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청파극담(靑坡劇談)》으로 이름난 청파 육(陸)은 원의 손자이다. 또 인조 때 난을 일으켰던 괄(适)은 육의 현손이다.

 

[우봉이씨]

시조는 고려 명종 때 시중(侍中)을 지낸 공정(公靖)이다. 조선에서 문과 급제자 40명, 상신 1명, 문형 1명을 배출했는데, 대표적 인물로는 조선 중기의 성리학의 대가 재(縡)를 꼽을 수 있다.

 

그는 영조 때 노론의 한 사람으로 양관대제학을 두 차례 지냈는데, 특히 그의 저서 《사례편람(四禮便覽)》은 근세의 대표적 명저로서 오늘날에도 상사나 제례에 많은 참고가 된다.

 

그의 조부는 숙종 때 우의정을 지낸 숙(?이며, 재의 손자 채(采)는 순조 때 호조참판을 지냈는데 지례현감(知禮縣監)으로 있을 때 그 고장에 처음으로 둑을 쌓아 농사에 도움을 주어 그 둑을 ‘이공제(李公堤)’라 불렀다 한다.

 

[진성이씨]

시조는 고려의 추봉밀직사(追封密直使) 석(碩)이다. 조선에서 문과 급제자 58명을 배출하였고, 퇴계(退溪) 황(滉)이 나왔다. 퇴계는 한국의 성리학을 집대성한 대학자였다. 1534년(중종 29) 문과에 급제, 이후 30여 년 간 중종·명종·선조의 지극한 예우를 받으며 예조판서·대제학·우찬성 등을 거쳐 중추부판사를 지내고 벼슬에서 은퇴하였다.

 

그는 고향에 도산서당(陶山書堂)을 짓고 많은 후진을 양성하였다. 그의 숙부 우(%)는 중종 때 관찰사·안동부사 등을 지냈으며 형 해(瀣)는 인종 때 예조참판·대사헌을 역임하였다. 그의 손자 안도(安道)는 성리학의 대가이다.

 

[함평이씨]

시조는 고려 광종 때의 신호위대장군(神虎衛大將軍) 언(彦)이다. 조선에서 문과 급제자 70명을 배출했으며, 중시조는 시조의 10대손인 종생(從生)이다. 그는 세조 때의 무장으로서 1467년(세조 13)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토평한 공으로 적개공신 2등에 오르고 각도의 병마절도사를 역임했는데 함평이씨의 뛰어난 인물은 그의 후손이다.

 

문신으로는 선조 때 대사간 효원(效元), 인조 때 형조판서·반정공신 해(D), 선조 때 충청도관찰사 춘원(春元), 효종 때 대사헌·예조판서 지익(之翼), 인조 때 황해도관찰사 배원(培元) 등이 있다. 무장으로는 통제사·공신 원(沅), 영조 때 훈련대장·병조판서·분무공신(奮武功臣) 삼(森), 정조 때 어영대장·도총관 창운(昌運) 등이 있다.

 

[영천이씨]

시조는 고려의 평장사 문한(文漢)이며, 그의 후손인 신호위대장군 대영(大榮), 봉승랑(奉承郞) 겸 관농방어사(觀農防禦使) 중영(仲榮), 문하시중평장사 수춘(守椿)을 각각 중시조로 하는 파가 있다. 조선에서 문과 급제자 39명과 많은 명신·학자를 배출했으며, 역사상 대표적 인물로는 현보(賢輔)·종검(宗儉)·보흠(甫欽) 등이 있다.

 

현보는 연산군 때 문과에 급제, 부제학·호조참판·경상도관찰사를 역임하고 충추부지사에 이르러 청백리에 녹선되었고, 종검은 세종 때 문과에 급제, 한림·직제학·대사간을 역임하고 역시 청백리에 올랐으며, 보흠은 세종 때 문과에 급제, 집현전박사를 지내고 단종손위 후에는 순흥부사(順興府使)로 있으면서 단종 복위를 꾀하다가 발각되어 장류(杖流), 순절하였다. 이 밖에 응(膺)·순몽(順蒙)·승손(承孫) 등이 유명하다.

 

[평창이씨]

시조는 여러 문헌에 광(匡)으로 나타나 있으나 그는 경주이씨의 중시조 소판공(蘇判公) 거명(居明)의 증손으로 고려 태조 때의 광록대부 윤장(潤張)의 후손으로 전해진다. 평창이씨는 경주이씨의 분적종의 하나이다.

 

평창이씨의 중시조격 인물은 윤장의 14대손인 천기(天驥)로 그는 고려 말에 원나라 제과(制科)에 급제, 산기상시(散騎常侍)를 지냈는데, 그의 후손에서 많은 인물이 나왔다. 조선시대에 문과 급제자 25명을 배출했으며, 중추적 인물로는 천기의 증손인 영서(永瑞)를 꼽을 수 있다.

 

그는 세종 때 문과에 급제, 예조정랑을 지냈는데, 특히 서예로 이름이 높았다. 영서의 아들 계남(季男)·계동(季仝) 형제가 뛰어나 계남은 연산군 때 이조판서에 이르렀고 중종반정 공신에 올랐으며, 계동은 역시 연산군 때 병조판서를 거쳐 중추부영사에 이르렀다. 근세 인물로는 한국 가톨릭교사(史)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긴 승훈(承薰) 일가가 유명하다.

 

[합천이씨]

시조는 고려 강양군(江陽君: 江陽은 陜川의 古號) 호장(戶長) 개(開)로서 그는 신라 초기의 6촌 가운데 알천양산촌(閼川陽山村)의 수장이었던 알평(謁平)의 후손이다. 알평의 후손은 경주이씨를 비롯한 10여 본으로 분적되는데 합천이씨도 그 중의 하나이다.

 

합천이씨는 경주이씨 다음으로 인구가 많아 거의 1만 가구에 달하며 그 세계(世系)도 복잡하여 11과로 대별되는데, 그 중에서도 전서공파(典書公派:守全)가 가장 번창하며 그 밖에 목사공파(牧使公派:公柱)·참지공파(參知公派:良眞)·전객령공파(典客令公派:琳) 등이 절대다수를 차지한다.

 

조선에서 문과 급제자 13명을 배출했는데, 대표적 인물로는 전객령공파의 희민(希閔)·희증(希曾)·희안(希顔)의 3형제를 들 수 있다.

 

[인천이씨]

시조는 고려 현종 때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를 지낸 허겸(許謙)이다. 김해김씨의 시조인 가락국 수로왕(首露王)의 후예로 전하며, 수로왕의 장자(長子) 계통은 김해김씨이고, 차자(次子)는 어머니 허태후(許太后)의 성을 이어받아 허씨가 되었는데, 인천이씨는 허씨에서 갈린 분적종이다.

 

고려 중엽에 왕실과의 척연(戚緣)을 배경으로 크게 세력을 떨쳤는데, 그 중추적 인물은 허겸의 손자인 자연(子淵)이다. 그의 딸 셋이 모두 문종의 비가 됨으로써 세력을 장악하고 문하시중을 지냈다.

 

그의 맏딸 인예왕후(仁睿王后)의 소생들이 순종·선종·숙종 등 차례로 왕위에 올랐고, 또 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義天)도 인예왕후의 소생이다. 자연의 아들 호(顥)의 딸이 순종비가 되었고, 호의 아들 자겸(資謙)의 딸들이 예종과 인종의 비가 되는 등 왕실과 척연을 맺음으로써 그 가문의 세력은 절정에 달하였다.

 

그러나 자겸이 인종의 장인으로 권세를 전횡한 끝에 난을 일으켰다가 세 아들과 함께 숙청당함으로써 이들의 권세는 종지부를 찍었다. 대표적 인물은 고려의 학자 인로(仁老), 조선 초의 명신 문화(文和)를 들 수 있으며, 고려조에서의 성세와는 달리 조선에서는 문과 급제자 9명을 배출하는 데 그쳤다.

 

[청해이씨]

시조는 조선 개국공신 지란(之蘭)이다. 그의 본성명은 퉁두란[豆蘭]으로서 그의 아버지 아라부카[阿羅不花]는 여진(女眞)의 금패천호(金牌千戶)였다. 아버지에 이어 천호가 되었다가 원나라 말기 고려 공민왕 때 많은 부하를 이끌고 귀화, 북청(北靑)에 거주하면서 이성계 휘하에 들어가 이씨 성을 하사받았다.

 

이어 조선개국공신 1등에 올라 청해군(靑海君)에 봉해졌다. 청해는 북청의 별호이다. 지란의 아들 화영(和英)은 세종 초 우군부판사(右軍府判事)에 이르렀고, 6대손 인기(麟奇)는 선조∼인조대에 벼슬하여 중추부동지사에 이르렀다.

 

이밖에 인기의 아들 중로(重老), 중추부첨지사 핵()의 아들 유민(裕民), 삼도수군통제사를 지낸 수민(壽民) 등이 유명하다. 청해이씨는 조선에서 문과 급제자 7명을 배출하였다.

 

[공주이씨]

시조는 신라 때 사람 천일(天一)이다. 그는 한선제(漢宣帝) 감로(甘露) 원년(신라 박혁거세 5)에 문명이 뛰어나 한나라에 들어갔다가 대장군이 되어 흉노적(匈奴賊)을 정벌하고 요동백(遼東伯)에 봉해진 후 신라에 돌아와 공산군(公山君)에 봉해졌다고 한다.

 

공주이씨의 세계(世系)는 시조 천일의 35대손 우(%)의 두 증손, 즉 강원도관찰사를 지낸 엽(曄)과 의정부참지사를 지낸 서(曙)의 아들대에서 7파로 갈라졌다.

 

 

즉, 엽의 여섯 아들 경력공파(經歷公派:明善)·어사공파(御史公派:明誠)·공숙공파(恭肅公派:明德)·지평공파(持平公派:明保)·참의공파(參議公派:明尹)·현감공파(縣監公派:明義), 그리고 서의 아들 강양공파(剛襄公派:敷)의 7파인데, 그 중 종파인 경력공파에서 많은 인물이 나왔고, 후손도 가장 많다. 공주이씨는 조선에서 문과 급제자 16명을 배출하였다.

 

李在薰